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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 Istanbul
터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는 터키 최대의 도시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골든혼(Golden Horn)·마르마라해(海)에 의하여 베욜루·이스탄불(파티프)·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대와는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고고학박물관·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식품가공·농기구·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이스탄불 역사지구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Bosphorus) 반도의 전략적 위치에 있는 이스탄불은 2,000년 넘게 정치·종교·예술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대 전차 경기장, 6세기에 건축된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16세기에 건축된 쉴레이마니예(Süleymaniye) 모스크가 있다. 이런 유적들 전부가 과도한 인구 집중, 산업공해, 통제되지 않는 도시화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
이스탄불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보스포루스 반도에서 전략적 위치에 있다.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으며, 2,000년 넘게 정치·종교·예술·역사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여러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이 도시는 북쪽으로는 자연 항구인 골든 혼(Golden Horn/Haliç),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으로는 마르마라(Marmara) 해에 둘러싸인 반도에 있다.
이전에는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이 발전했던 역사적 반도(Historic Peninsula) 지역인 이곳은 5세기 초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최초로 건설한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스탄불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수세기 동안 유럽과 아시아가 교류한 사실을 반영하는 건축물의 독특한 통합에 있으며,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창의적인 천재 건축가들이 창조해낸 비교할 수 없는 스카이라인에 있다.
이스탄불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스카이라인은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감싸는 거대한 돔은 6세기 건축과 장식 분야의 전문 지식을 반영한 것이다. 15세기의 파티흐(Fatih) 복합 단지와 19세기까지 계속 확장된 토프카프(Topkapi) 궁, 수석 건축가 시난(Sinan)의 작품인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복합단지와 셰자데(Sehzade) 모스크 복합 단지는 16세기 오스만 건축의 절정을 보여준다. 17세기 술탄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와 항구 근처에 있는 예니 모스크(뉴 모스크)의 가느다란 첨탑은 1664년에 완성되었다.
유산이 있는 네 지역은 고고학 공원으로 역사적인 반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이 네 지역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복합단지와 함께 쉴레이마니예 쿼터(숙소), 바자(시장)와 바자 주변의 거주민의 주택 양식, 제이레크 모스크(Zeyrek Mosque, 옛 판토크라토르의 교회) 주변에 있는 제이레크 지역, 그리고 예전에 블라헤르나이(Blachernae) 궁 유적을 포함하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양쪽을 따라 펼쳐진 지역 등이다.
이 지역들은 또한 17세기 블루 모스크,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Sokollu Mehmet Pasha) 모스크, 16세기 셰흐자데 모스크 복합단지, 15세기 토프카프 궁, 콘스탄티누스 전차경기장, 발렌스(Valens) 의 수도교, 성 소피아 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 교회, 성 이레네(St. Irene) 성당, 퀴큐축 아야소피아(Küçük Ayasofya) 모스크(옛 성 세르기우수와 바쿠스 교회), 콤니너스(Comnene) 왕조의 요한 2세 하에 이레네(Irene) 여제가 지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14세기와 15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회화를 간직하고 있는 옛 코라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 그리고 목욕탕, 저수조, 무덤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의 독보적인 사례들을 포함해 제국이 융성하던 시기의 건축적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스탄불 역사지구는 19세기, 20세기 들어 급격한 변화와 쇠락을 겪는 도시 지역에서 벗어난 구역에 있으며, 이스탄불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이미 국가에서 법률을 제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쉴레이마니예와 제이레크 지역에 있는 목재로 건축된 일반 주택은 법률 기록에 따르면 취약지구로서 인식되었다. 그 후로 변화의 압력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적 안에서 목조 구조를 강화하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지역 사회 구조의 변화는 이들 건축물 이용에 영향을 주었다.
도시 구조는 변화 압력과 유지 노력 부족으로 위협을 받았다. 시 당국은 낙후 지역을 되살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쉴레이마니예와 제이레크 지역 살리기는 청결 유지와 보존·복원 사업으로, 세심한 과정이 필요한 장기 사업이다. 쉴레이마니예 복합지구는 상업 목적의 건물로 생긴 작은 변화를 제외하고는 건축과 구조의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는 판토크라토르 교회였던 제이레크 모스크는 여러 차례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4개의 역사지구 안에 있는 주요 기념물과 고고 유적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대부분 완전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관리 계획이 부족하여 취약하다. 권위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과정을 통한 관리 계획으로, 단계적으로 이 지역의 모든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환경과 도시의 뛰어난 스카이라인은 발전에 취약하다
이스탄불은 비잔틴과 오스만 문명의 독특한 증거를 담고 있다. 역사를 통해, 도시 중앙의 기념물들은 건축의 발달, 기념 미술과 공간 구성에서 유럽과 아시아 양쪽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47년에 탄생한 제2의 방어벽을 가진 6,650m의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상 벽은 성 소피아 성당 이전에 벌써 군사 건축의 선도적 표준 중 하나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은 모든 가족 교회, 후에는 모스크, 그 전에는 동양과 서양 기독교 예술 양쪽에 모두 영향을 끼친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와 왕궁들의 모자이크의 모델이 되었다.
이스탄불은 두 대륙이 교차하는 지점에 건설되어 연이어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까지도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종교·예술에서 주요 사건과 끊이지 않고 연관되어 왔다. 동시에 이스탄불은 인구가 3,000,000명이 넘는 거대도시이다. 이 역사적 도시는 지난 30년 동안 인구가 증가해 왔는데, 이 때문에 유산의 보존 상태에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화와 급속하고 통제 불가능한 도시화로 인해 생기는 공해는 이 고도(古都)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유산 유적은 네 지구로 나뉘는데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들은 도시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 1953년과 1956년에 지정된 반도의 끝에 있는 고고학 공원
• 1980년과 1981년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쉴레이마니예 지역
• 1979년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제이레크 지역
• 1981년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성벽 지역
이 고대 도시이자 동로마제국의 수도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대표된다. 고고학 공원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전차 경기장(324년), 쉴레이마니예 지역에 있는 발렌스 수도교(378년), 그리고 4개 지구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413년에 짓기 시작한 성벽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여러 개의 주요 기념물로 대표된다. 고고학 공원 안에는 성 소피아 성당과 성 이레네 성당의 교회들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527~565)가 다스리던 지역에 건설되었다. 제이레크 지역에는 고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이 있는데 콤니너스 왕조의 요한 2세(1118~43) 시기에 이레네 여제가 건설했다. 성벽 지구는 초라(지금의 카리예 카미이)의 성 사비우르의 오래된 교회가 있다. 이곳에는 경탄을 자아내는 모자이크와 회화가 있으며 이것은 14세기와 15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벽 배치는 7세기와 12세기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서 거주 지구와 블라헤르나이 궁을 포함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들로 대표된다. 고고학 지구에 있는 토프가프 궁과 블루 모스크, 쉴레이마니예 지역에 있는 세흐자데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쉴레이만 대제(1520~1566) 통치기에 건설되었다. 이 유산은 모두 건축가인 코차 시난의 주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토착민 거주지가 있으며 거주지에는 525개의 목조 주택이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Bosporus Str.
터키의 서부,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협.
길이는 30km, 너비는 550∼3,000m, 수심 60∼125m이며,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과의 경계를 이룬다. 고대부터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인 데다가 마르마라해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1453년 이래 터키가 장악하게 되자 방위를 목적으로 양안(兩岸)을 요새화(要塞化)하였다.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으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航行權)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지형적으로는 일종의 익곡(溺谷)으로 양안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1973년에 완성된 해협 횡단의 유라시아 대교(大橋:일명 보스포루스교)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보스포러스 대교
이스탄불은 특별하다―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는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이 도시를 경험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다. 강을 지그재그로 정신없이 오가는 출퇴근 페리에 뛰어오르거나 수많은 관광 여객선에 끼어 타는 대신, 인파에서 벗어나 개인용 보트에 오르자. 에미노누의 페리 터미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곧 호객꾼이 나타나 자기 보트를 타라고 손짓을 해 올 것이다. 그러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가서 얼마나 있을 것인지, 언제 멈출 것인지만 결정하면 된다.
금각만에 걸쳐 있는 갈라타 다리 아래를 지나는 도중 400년 된 예니 모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보트들이 용케도 충돌하지 않고 분주히 오간다. 물가에 어지러이 늘어선 건축물들이 황홀하리만치 매력적이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돌마바흐체 궁전과 같은 술탄의 왕궁부터 옛 오토만 제국 귀족들의 여름 별장(yalis), 단아한 바로크 풍의 메지디예 모스크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함은 끝이 없다.
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길이 약 30km, 폭이 가장 좁은 지점은 약 600m에 불과한 작은 바다이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 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 좋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도 인기 있다.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밖에 에미노뉴에서 흑해 입구로 향하는 크루즈, 오르타쾨이에서 출발하는 왕복 크루즈 등이 있다.
에미노뉴 선착장을 이용할 경우, 항구의 별미인 고등어 케밥(발륵 에크멕)을 꼭 맛보자. 보스포루스 크루즈선이 드나드는 선착장 주변에 작은 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만들어 내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가 건설을 시작해 1467년 메흐메드 2세 때 완공되었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평지에 위치한다. 톱카프는 ‘대포 문’을 뜻하는데 과거 해협 쪽에 대포가 놓여 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오스만제국 때 세워진 톱카프 궁전은 단순한 왕족의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 정치를 논하던 장소였다. 당시 궁전에 거주하는 시종과 군사, 관료의 수만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정원 4개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증·개축으로 오스만 건축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제1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각 정원에는 회의실, 알현실, 교회,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고 술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도 갖추어져 있다. 볼거리가 많아 전부 천천히 둘러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야소피아 성당의 북동쪽에 자리한 황제의 문으로 입장하면 제1정원이 나온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성 이레네 성당’은 아야소피아 성당이 건설되기 전 세워졌으나 ‘니카의 난’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문을 지나 제2정원에 자리한 하렘(Harem)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하렘 입장권은 별도이며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제2정원 내 오른쪽에 위치한 굴뚝이 늘어선 건물은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이다.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된다. 전시된 도자기 수가 무려 1만 2천여 점이나 된다. 제3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제4정원은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골든 혼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지하 저수조(지하궁전)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 시절의 저수조. 수많은 석제 기둥들과 아치를 세워 만든 곳으로, 당시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신전 등의 기둥을 징발해서 세웠다고 한다.
약 100km 밖에 있는 수원에서 높은 수로로 물을 끌어와, 이 지하 시설에 저장했던 것. 덕분에 당시의 콘스탄티노플은 적에게 포위당하거나 가뭄이 들어도 3개월 정도는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여담으로 기둥들 중 일부는 메두사의 머리가 받침돌 등에 새겨져 있는데 대다수가 모두 옆으로 뉘워있거나 뒤집어 놓은 형상이다. 왜 하필 메두사 조형을 이렇게 했는지는 미스테리다.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은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이다. 그 위대한 예술적 가치는 모자이크, 대리석 기둥, 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유스티니아누스 1세,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3-565, 재위 527-565)의 명령으로 세워진 유명한 돔은 비잔틴 건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1520년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Seville Cathedral)이 완성되기 전까지 약 1000년 동안 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또한 그리스 정교회 창설의 중심지이었으며 비잔틴 제국 황제의 의식이 치러지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무슬림 등의 건축물과 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성한 지혜(Holy Wisdom)’를 의미한다. 라틴족의 지배를 받았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를 제외하고 360년에서 1453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대성당(cathedral of Constantinople)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 까지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2월 1일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교회당은 360년,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시기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첫 번째 건물은 궁전 근처에 위치했으나 404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으로 두 번째 교회가 축성되었으나 이 건물도 532년경의 화재로 인해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사라졌다. 몇몇의 대리석 조각들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 건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황제는 이전 건물과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웅장한 바실리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그리스 물리학자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Isidore of Miletus)와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Anthemius of Tralles)를 고용했다.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각 지역에서 재료가 조달되었으며 고용된 인부들은 10000여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주교 와 함께는 537년 12월 27일 거대한 행사와 함께 새로운 바실리카를 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는 후대(565–578)에야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53년에서 557년의 지진으로 건물의 메인 돔과 동쪽의 돔이 피해를 입었으며 558년 5월 7일에는 추가적인 지진으로 메인 돔이 붕괴되었다.
황제는 즉시 복원할 것을 명하며 밀레투스의 조카 이시도르스(Isidorus)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돔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는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에 쌓아 올리는 구면 삼각형의 부분과 함께 늑골이 있는 돔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건물과 내부의 인테리어는 지속적인 시련을 겪었다. 726년경에는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사라졌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유럽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종, 제단 등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였으며 이슬람적인 상징물들이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추가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 중에 있다
성 소피아 성당
예전에는 기독교 바실리카와 무슬림 모스크였던 아름다운 비잔틴 건물
훌륭한 돔 지붕이 달린 거대한 바실리카 하기아 소피아('신성한 지혜')는 비잔틴 건축이 정점에 달한 영광스러운 건물 중 하나이다. 그 외관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동의 긴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 건물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동방 정교회 교회가 되었으며, 이 지역을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1453년에는 중요한 모스크가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1930년대에 박물관이 되었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이 자리에는 이미 두 채의 커다란 교회가 서 있다가 사라졌으며,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세 번째 교회의 건축을 감독했다. 바로 이 교회가 현재 건물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는 그의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걸맞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돔이 한 차례 이상 무너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 다양한 수준의 재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건들 중 일부가 기초적인 설계 오류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그 무엇도 이 건물이 지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비전, 대담함, 그 규모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높이가 55m 이상이며 직경이 30m가 넘는 육중한 중앙 돔은, 마치 네이브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하다는 찬탄을 받는다. 이러한 효과는 부분적으로 돔의 아랫부분에 수많은 작은 창문들을 내어 내부를 마법과 같은 빛으로 가득 채우게 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또한 우산처럼 여러 개의 살로 이루어진 돔의 디자인과, 돔이 전형적인 직사각형 모양이 아닌 돌로 만든 거대한 네 개의 삼각형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도 떠 있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는 데에 일조한다. 돔의 무게는 육중한 돌기둥으로 전달되기 전에 먼저 이 삼각형 구조물에 실리게 된다.
오늘날의 방문객은 기독교 시대에 남겨진 채색된 대리석과 호화로운 모자이크와 더불어 이슬람의 미나레트와 비문도 볼 수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보수 작업은 상당히 까다로운데, 이슬람교도들이 '우상 숭배적인' 모자이크를 뒤덮어 버렸으며 이를 도로 벗겨 내려면 그 위에 남겨진 작품이 손상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혹은 '지혜의 대성당')는 본래는 교회였으나 1453년 모스크로, 1935년에는 다시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이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면서 건립되었으며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를 설계한 두 사람은 건축가라기보다는 과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영(射影) 기하학의 대가로 알려진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구적법과 물리학 강사였던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이론적 접근이, 결국은 다소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구조상의 표준을 깬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거대한 중앙부 돔은 지름이 32.6미터에 이르며, 네이브에서부터의 높이는 50미터에 달한다. 중앙 돔은 다시 맞물린 돔, 세미돔, 앱스 공간으로 압축된다. 그 아래로 40개의 채광창은 쏟아져 들어온 빛이 흩어져 마치 돔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돔의 커브와 그 아래 벽의 수직 각도가 만나는 부분을 해결해 준 건축적 장치인 펜던티브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그 덕분에 돔의 하중이 분산되지만, 이후 수차례 돔이 무너지기도 했다. 외부에서 본다면 무엇보다도 온갖 기하학적 형태가 한데 모인 난해함이 눈에 띈다. 디자인 자체의 명확한 파사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말이다. 16세기,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는 과정에서 추가된 미나렛으로 인해 보다 프레임이 알아보기 쉬워지기는 했다. 한때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기독교 교회였던 하기아 소피아는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서 성소로 여겨지고 있다.
블루 모스크 Blue Mosque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에 있는 모스크.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블루 모스크
이스탄불에 있는 모스크. 〈블루 모스크〉는 영어 통칭으로, 정확하게는 〈아흐메트 1세의 모스크〉. 모스크 내벽을 장식하는 장식 타일의 기조가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시난 다음 가는 훌륭한 건축가로서 알려진 궁정건축가 세데흐칼 메흐메트 아가에 의해서 건조되었다. 1609년 착공해서 17년에 완성. 오스만 투르크의 고전기 건축을 대표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고대 경기장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그 장대한 돔과 미너렛을 바라볼 수가 있다. 모스크는 아흐메트 1세의 묘, 마드라사, 무료급식소, 구호소와 함께 오스만 투르크시대의 독특한 왕립시설 퀄리에(kulliye)를 구성하며 규모도 전체의 구성도 시난에 의해서 세워진 세흐자데 쟈미(이스탄불, 1543~48)를 기준으로 하고, 균형을 이룬 구성을 취하는 규모가 장대한 중앙회당식의 예배당과 넓은 중정으로 되어 있다. 직경 23.5m에 이른 큰 돔은 4개의 거대한 대리석제의 원주로 지지되어서 광대한 공간을 창출하고, 다수 회중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대 돔의 사방에는 반돔을 두었다. 내벽은 2만1000장을 넘는 청, 록, 흑, 홍 등의 화려한 이즈니크산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꽃나무나 과일을 표현한 갤러리의 타일이 가장 아름답다. 예배당의 네 구석과 중정 양 구석에 설치된 오스만 제국 건축의 독특한 가늘고 앞이 뾰족한 6기의 미너렛은 메카의 성 모스크의 7기의 미너렛 다음가는 훌륭한 것이다. 넓은 중정에는 소규모이지만 목욕용 우물이 갖추어져 있다.
푸른 모스크
오스만 제국의 건축학적 능력을 보여 주는 뛰어난 실례
푸른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이 세운 가장 장려한 건축물 중 하나이며, 여섯 개의 미나레트와 여러 개의 돔과 세미돔(반원형 돔)은 아직도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하늘을 당당히 지배하고 있다. 이 건물은 내부의 색채 때문에 푸른 모스크라고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정식 이름은 '술탄 아메드 모스크'이다. 이는 건축을 명한 술탄 아메드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푸른 모스크는 오스만인들이 1453년 비잔틴으로부터 빼앗은 이스탄불의 예전 중심지에 1609년에서 1616년까지 세워졌다. 이 모스크는 예전에는 정교 교회였다가 모스크가 되어 버린 웅장한 하기아 소피아에서 정확하게 맞은편에 있다. 아메드 1세는 일부러 이런 장소를 선정한 것이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과 건축 장인들이 기독교의 선임자들과 필적할 만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바랐던 것이다. 결국 푸른 모스크의 돔은 하기아 소피아의 돔만큼 크지는 않게 되었지만, 푸른 모스크의 건축가 세데프하르 메흐메트 아가는 건물의 구조의 완벽한 균형미로써 그러한 점을 벌충하려 했다.
조각된 대리석 민바르(설교단)는 모스크 안 어느 곳에 있어도 이맘(이슬람교도 공동체의 우두머리, 혹은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모스크의 중앙 돔은 직경 33m이며, 높이는 43m이다. 내부에는 꽃, 나무, 추상적인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즈니크에서 가져온 2만 개가 넘는 수공예 도자기 타일들이 늘어서 있다. 200개 이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일광이 내부로 넘쳐든다. 아메드 1세는 모스크가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으며, 모스크 벽 바로 외부에 있는 마우솔레움에 묻혔다.
푸른 모스크에서는 1만 명 이상이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수백 명의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 장소에서 하루 다섯 차례씩 매일 기도를 올리고, 금요일이나 무슬림 축제 기간 중에는 더 많은 이들이 찾는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북쪽 현관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서쪽 현관이 가장 눈부시게 장식되어 있다.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Covered Bazaar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아치형 돔 지붕이 있는 대형 시장. 터키의 전통 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터키 이스탄불. 터키 이름으로 카팔르 차르쉬라고 하는데,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이다. 30,700㎡의 면적에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약 5000여 개 이상의 점포가 가득 들어서 있다.
터키어로 '덮여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파르 차르쉬(Kapar Carsi)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1461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의 명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세(Suleiman I)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여러 번의 증·개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현재 60여 개의 미로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으며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금,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 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동서양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에는 하루 최소 25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çe Sarayı
터키의 이스탄불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의 궁전이다.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56년에 재건되었다. 1843년 착공하여 1859년에 완공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였다.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현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들을 보면 당시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 후기 6명의 술탄이 일부 사용했다.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의 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성만 출입이 가능하였다. 하렘은 왕실의 가정으로 술탄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 곳을 관저로 사용하였다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집무실과 침실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1]
터키 국회의 관할이라 뮈제카르트로 입장이 불가능하다. 입장료는 세람르크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 하렘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 둘 다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있으며, 국제학생증이 있으면 5리라에 세람르크와 하렘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개별 관광은 금지되어 있으며, 가이드 관광만이 허용된다.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웠다. 원래는 술탄 하흐메트 1세가 휴식처로 쓰던 건물이 있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새로 궁전을 지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은 유럽풍 건축물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황제의 방' 천장에 매달려 있다. 또한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사용했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방의 시계는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재된 돌마바흐체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동양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는 톱카프 궁전과 대비되는 서양식 궁전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이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들은 톱카프 궁전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도 영빈관으로 이용된다.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285개, 홀 43개, 발코니와 목욕탕이 각각 6개 있다. 규모는 톱카프 궁전보다 작지만 눈길을 끄는 볼거리가 많다. 궁전 건립에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으며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실내를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것이다. 바닥에는 최고급 수제 양탄자가 깔려 있다.
한편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대기 시간을 포함해 궁전을 전부 둘러보기까지 약 1시간 30분~2시간 소요된다. 관광객이 붐비는 여름 성수기에는 방문 시간을 여유롭게 계획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가 서 있다. 이 궁전은 자신의 하렘과 궁정, 그리고 외국의 군주들과 사신들을 영접할 넓은 응접실을 갖춘 건물을 원한 오토만 투르크의 술탄 아브뒬메시드 1세를 위해 지어졌다. 술탄의 전속 건축가였던 가라벳 아미라 발리얀(1800~1866년)은 이러한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웅장하고 압도적으로 큰 궁전을 세웠다. 발리얀이 채택한 스타일은 정교한 신 바로크 양식이었다. 2층 높이의 포르티코와 풍부한 조각은 웅장함과 정교하고 값비싼 장식을 결합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긴 파사드와 숙소로 쓰이는 윙은 내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도 거대한 규모가 풍부하고 복잡한 장식과 결합하였다. 수많은 방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방은 36미터 높이의 돔과 늘어선 기둥들, 아치들로 꾸민 무도회장이다.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은 계단 홀인데, 이 중 말발굽 모양의 층계는 크리스털 난간으로 유명하다. 또 끝없이 이어지는 접견실, 화려하게 도금한 개인실, 그리고 설화석고를 두른 욕실 역시 돌마바체의 자랑거리다.
20세기 들어서 터키가 공화국이 되면서 돌마바체는 국가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관저가 되었다. 1938년 무스타파 케말은 돌마바체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오늘날 터키에서 돌마바체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바치는 기념비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