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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7일 은퇴를 선언한 박종호. 그는 자신을 사랑한 모든 팬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 손짓은 다시 만날 날의 악수와 다름 아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어디니?” 휴대전화의 통화버튼을 눌렀을 때 박종호의 첫마디는 그랬다. “잠실야구장”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야구장에서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루 전 잠실구장에서 LG 관계자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관계자는 2군에 있는 박종호의 상태를 묻는 말에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조만간 가부간의 결정이 날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한창 시즌이 진행 중인 5월 말 프로야구판에서 ‘가부간의 결정’이라면 그건 바로.
“나 은퇴한다.” 잠실구장에서 만난 박종호는 악수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개나리처럼 얼굴이 노래졌다.
5월 27일 박종호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1992년 성남고를 졸업하고 LG 유니폼을 입은 뒤로 19년 동안 뛰었던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1973년생 동갑내기이자 누구보다 치열하게 1990~2000년대를 살았던 동시대인으로서 박종호의 은퇴는 ‘젊은 날의 퇴장’이자 ‘익숙했던 것과의 이별’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에게 해줄 말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고생했다”는 말밖엔.
5월 30일 목동구장에서 박종호와 다시 만났다. 늘 그라운드에서 <스포츠춘추>를 반겼던 박종호를 이제 기자실에서 <스포츠춘추>가 반겼다. 박종호는 난생처음 그라운드가 아닌 기자실과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동갑내기 두 친구는 기억이란 바다에 소금이 돼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박종호' 1편에 이어)
![]() 5월 30일 목동구장을 찾은 박종호. 선배 김동수 넥센 코치의 은퇴식을 축하하고, LG의 마지막 경기를 보려는 게 방문 목적이었다. 조만간 우리는 그를 지도자로 만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코치는 슬럼프다.” 올 초 일본 도쿄에서 만난 노무라 가쓰야 전 라쿠텐 이글스 감독에게 “어떤 감독이 명장이냐?”라는 우문(愚問)을 던졌을 때 돌아온 답은 그랬다.
현역시절 8년 연속 퍼시픽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5번이나 리그 MVP에 뽑힌 바 있는 노무라 전 감독은 “프로선수에게 슬럼프는 자신의 단점을 발견해 보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중병을 앓은 이가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 혹독하게 슬럼프를 겪은 선수는 다시는 슬럼프에 빠지지 않으려고 더 많이 노력하고 더 진지하게 대비한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야구에서 슬럼프는 일상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슬러거라도 슬럼프를 비켜가진 못한다. 박종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00년 타율 3할4푼으로 타율왕에 올랐지만, 이듬해 2할4푼1리로 추락했다. 특별한 부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훈련을 게을리 한 건 더욱 아니었다.
박종호는 2000시즌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타율 3할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0년 3할4푼이었던 타율이 다음 해 2할4푼1리로 ‘뚝’ 떨어졌어. 1년 새 타율이 1푼도 아니고 무려 1할이나 떨어졌는데. 부상이라도 있던 거야?
선수생활 마무리하면서 지금도 그 부분이 가장 아쉬운데…(크게 한숨을 내쉬고서) 사실 잔부상이야 있었지. 하지만, 타격이 1할이나 떨어질 만큼의 큰 부상은 없었어. 그보단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는 참 흐름이 좋았는데, 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갈 때 그 좋은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고개를 흔들며 조용한 목소리로) 일은 무슨. 2000시즌이 끝나고 코칭스태프에서 자율훈련을 지시했어. 당시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도 했겠다, 코칭스태프에선 자율훈련을 내걸지, 그냥 ‘푹’ 쉬고 싶단 생각밖엔 없었어. 현대 와서 너무 앞만 보고 달린 통에 몸이 말이 아니었거든. 어떻게 해서든 고갈된 체력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 그래 한동안 배트를 내려놨지. (다시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그게 돌아보면 잘못된 결정이었던 거야.
몸 관리 잘하기로 소문난 네가 개인훈련을 아예 안 했을 리는 없고. 잠시 배트를 내려놓은 게 2001년 부진의 주요 원인이 됐다니 좀 믿기 어려운걸.
타격은 수비와는 달라. 수비는 감(感)이 한번 오면 계속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지만, 타격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법이야. 배트를 하루만 손에 놓고 내일 다시 잡아도 느낌이 ‘팍’ 다른 게 타격이란 말이지. 그래서 타자들이 계속 좋은 흐름을 이어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거야. 그런데 당시에 내가 그걸 알고도 깜빡했지 뭐야. (자책하는 표정으로) 솔직히 고갈된 체력만 보충하면 좋은 흐름이 계속 이어질지 알았거든. 하지만.
하지만?
막상 시즌 앞두고 페이스를 올리려고 하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 거야. 뭐랄까 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나 할까. 시즌 내내 그 감을 찾으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도 안되더라고. 결국, 2001시즌 완전히 추락했지.
타자들은 스윙하면서도 자신의 타격밸런스나 몸 상태가 어떤지 느낄 수 있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스윙하면서도 다 느끼지. 난 사실 2001시즌 스프링캠프 첫날 배트를 ‘딱’ 잡았을 때부터 이전과 감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 전해와 비교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음, 네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박용택(LG)이 생각나는데. 지난 시즌 타율 3할7푼2리에 안타만 168개를 친 타자가 올 시즌엔 타율 2할1푼7리만을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야.
(박)용택이도 냉정하게 보면 지난 시즌 타격폼이나 밸런스가 몸에 완전히 뱄던 게 아니었던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흔들렸을 리가 없지. 거기다 지난 시즌 좋았던 흐름을 이어가야 하는데 코치진이 바뀌면서 다소 혼란이 왔지 않았나 싶어. 그러니까 과거의 나처럼 감을 잊어버린 거지. 하지만, 용택 이는 뛰어난 선수니까 나보단 훨씬 일찍 감을 찾을 거야.
너도 2001년 타율 2할4푼1리로 부진했지만, 2002년엔 2할6푼6리로 소폭 상승했고 2003년엔 2할9푼3리까지 올랐어. 2004년엔 모두가 아는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세웠고. 어쩌면 너도 감을 일찍 찾은 선수 가운데 한 명인데.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지 않아. 사실 난 은퇴하는 날까지 그 감을 찾지 못했어. 물론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세우고 2003, 2004시즌 2년 연속 140안타 이상을 치긴 했지만, 냉철하게 말하면 경기 출전수가 많으니까 안타수도 자연스럽게 많아진 것에 불과해. 정말 내가 만족할만한 타격폼이 은퇴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어. (기자를 바라보며) 참, 희한하지?
![]() 2003시즌이 끝난 뒤 삼성과 FA계약을 맺은 박종호(사진 오른쪽)가 김재하 삼성 부사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삼성) |
# 2003년 현대는 SK와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접전 끝에 4승3패로 이기며 창단 이래 3번째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주전 2루수였던 박종호에게는 4번째 우승이었다. 그해 박종호는 타율 2할9푼3리, 6홈런, 61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2번 타자이자 2루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해를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준 박종호는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겠다며 전격 FA를 선언했다. 그러나 속내는 ‘현대 잔류’였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명가 현대에서 동료와 마지막까지 남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고, 그 역시 이상을 좇지만은 않았다.
2003시즌이 끝나고 대망의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었어. 결국, 대박 계약을 터트리며 삼성 유니폼을 입었는데, 삼성에서 영입제안이 왔던 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삼성에서 언질이 있었지.
언질이라, 어떤?
구체적인 건 아니었어. 그저 “우리는 박종호 선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하는 정도였지.
그게 언제였어?
현대와의 우선협상기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어. 사실 난 현대에 남고 싶은 마음이 강했어. 하지만, 당시 구단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두 명은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새어나오고 있었어.
두 명? 누구…?
나랑 (이)숭용이 형.
아, 이숭용.
구단에서 숭용 이형은 잡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삼성과 만난 거야?
(물 한 컵을 쉬지 않고 마신 뒤) 처음에 현대에서 3년에 10억 원을 제시했어. 그런데 사실 난 만족을 못하겠더라고. 그래 삼성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지.
처음 삼성에서 얼마를 부른 거야?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4년에 18억 원이었을 거야. 물론 옵션 제외하고. 그걸 내가 이야기를 잘해서 옵션 포함 22억 원으로 올려놨어.
옵션 포함이라면.
내가 걸 수 있는 옵션이 뭐 있겠니? (“글쎄, 모르겠다”고 하자 활짝 웃으며) 출루율이잖아. 아무래도 내가 2번 타자니까 출루율이 중요하지 않겠어? 주로 출루율을 옵션으로 걸었지.
삼성 말고 다른 팀에선 ‘콜’이 없었어?
롯데에서 전화가 오긴 왔는데, 그건 그냥 전화 한번 오고 만 수준이고. 음, 아마 롯데가 나와 그즈음 FA로 풀린 정수근 사이에서 고민을 좀 한 것 같아. 그건 삼성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다 롯데가 정수근을 선택하고 내가 남으면서 삼성이 연락한 것 같아.
3번째 팀인 삼성은 어땠어?
무척 잘해줬어. 대우도 좋고. 구장 빼곤 모든 게 좋았어(웃음). 나도 정말 잘하고 싶었거든.
삼성에 있을 때 보면 팀 사랑이 원래 그 팀에 있던 선수들보다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더라.
사실 어렸을 때부터 동물 가운데 사자를 가장 좋아했어(웃음).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면…(갑자기 기자를 바라보며) 넌 어렸을 때 어느 팀 어린이 회원이었니?
원래 삼성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그만 가입기간을 놓쳤지 뭐야. 다른 팀도 다 모집기간이 끝났는데 유일하게 해태(KIA의 전신)만 남아서 결국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어.
그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난 삼성 어린이 회원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응원했던 팀에서 뛰게 됐으니 당연히 그 팀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야구선수도 직장인이야. 이직을 하면 새로운 동료와 사귀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야구선수에게도 그건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
대구가 서울이나 경기도보단 작은 지역이다 보니까 되레 선수들끼리 어울리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많았어. 선수들끼리의 소통도 좋았고, 여러모로 굉장히 편했어. 김재하 단장님도 무척 잘해주셨고. 그리고 삼성에 뛰어난 선수들이 어디 한둘이었니.
![]()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에 패하며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부상으로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한 박종호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옛 동료였던 현대 전전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사진=삼성) |
삼성 유니폼을 입은 첫해,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네 역할이 컸어.
그러면 뭐해. 현대에 패하면서 우승을 놓쳤는데. 내심 “박종호가 FA로 와서 삼성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거든. 이전까지 그렇게 한국시리즈에 오르고도 삼성이 우승컵을 거머쥔 게 한 번(주 : 2002년)뿐이었기 때문에 꼭 우승의 주역이 되고 싶었지. 하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그해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어. (입맛을 다시며) 이야, 아마도 내가 야구 시작하고 억울해서 울기는 그때가 처음일 거야. 벤치에서 팀이 지는 걸 보는데 얼마나 속이 상한지.
그래도 삼성에 간 지 2년 만인 2005년 두산을 꺾는 데 이바지하면서 다시 한국시리즈 반지를 끼는 데 성공했어.
그해도 정규시즌에선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막상 한국시리즈에선 별다른 기여를 못했어. 한국시리즈 1차전에 나갔다가 손목에 공을 맞았거든.
이런, 어쩌다가.
벤치에서 희생번트 나왔는데 그때 하필 두산 투수 다니엘 리오스가 몸쪽으로 투구하는 거야. 그런데 어디 피할 수나 있나. 아니 피해서야 되나. 그냥 맞았지. 결국, 부상으로 이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어. 우승은 했어도 팀에 미안해서 얼굴을 제대로 들기 어려웠어.
그해 삼성 우승의 원동력이 뭐였다고 생각해?
그때 삼성은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해줬어.
동기부여?
경기에 이길 때마다 구단에서 확실하게 돈을 풀었거든. 삼성은 정말 매리트 시스템이 잘 정착된 팀이었어. 선수들이 경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됐지.
매리트 시스템은 현대 때도 있지 않았나.
아마 있었을 거야. 한 경기에 얼마씩을 걸어두고 이기면 그 돈을 선수단이 사이좋게 배분하는 식이었어. 그날 경기의 MVP한테도 보너스가 갔을 거야. 그런데 현대는 가세가 기울면서 액수가 작아졌어. 음, 보자. (기억을 더듬다가) 2005년을 기준으로 하면 삼성이 현대보다 10배 정도는 더 돈을 건 것 같아. 게다가 삼성은 경기 다음날 바로 현금으로 보너스를 지급했어.
![]() 2005년 대망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대구 시내를 카페레이드 하고 있는 삼성 선수단. 가운데 이가 박종호이고, 사진 오른쪽이 김재걸이다(사진=삼성) |
그런데 공교롭게도 2005시즌을 끝으로 경기 출전수가 계속 떨어졌어.
2005시즌 이후로 잔부상도 있었고. 김응룡 감독님이 구단 사장이 되시고 선동열 감독님이 부임하면서 내 위치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지.
선 감독 부임 뒤 내 입지가 상당히 축소된 게 사실이야.
선 감독님은 이전 감독님과 다른 야구를 추구하셨어.
어떤?
공격에선 특히나 기동력 야구를 강조하셨어. 내 기록 보면 알겠지만, 1999시즌 이후로 내가 도루 10개 이상을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물론 주루는 잘한다고 칭찬받았지만, 그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고. 어쨌거나 선 감독님이 지향하시는 야구를 내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경기 출전 기회가 줄었어. 이때부터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 제어도 못 하면서 급격하게 무너진 것 같아.
내림세엔 부상도 한몫했지?
그랬지. 사실 2004년 삼성 이적 시절부터 오른쪽 팔꿈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거든. 2006년까지 ‘꾹’ 참고 뛰었는데, 2007시즌 중반에 병원 가서 정밀진단을 받으니까 ‘오른쪽 팔꿈치에 뼛조각이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 바로 오른쪽 팔꿈치 뼛조각 제거 및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지. 2008시즌 복귀하긴 했는데, 33경기밖에 뛰지 못했어.
결국, 2008년 7월 시즌 도중 삼성이 널 웨이버 공시했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시즌 도중 날 웨이버로 공시하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프로인걸. 웨이버 공시 후 다른 팀에서 일주일 안에 데려가야 선수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팀에서 ‘콜’이 올까 기다렸는데….
끝내 콜은 오지 않았어.
맞아. 일주일이 가도록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더라고. 실망은 컸지만, 그래도 열심히 준비하면 다음 해 기회가 ‘꼭’ 올 것이라 생각했어. (강한 어조로) 야구처럼 ‘꼭’ 다음 타석이 찾아올 거라고 믿었지.
![]() 37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한 박종호. 대구구장 전광판에 이를 기념하는 숫자가 떴다(사진=삼성) |
# 2004년 4월 23일 새벽. 호텔 창문을 연 박종호가 오른손을 뻗고서 손바닥을 폈다. 샤워기를 틀어놓은 듯 무수히 많은 빗방울이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비가 많이 와야 하는데….” 박종호는 소원이라도 비는 아이처럼 하늘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박종호는 2003년 8월 29일 수원 두산 전부터 계속된 연속경기 안타 행진을 39경기째 이어가고 있었다. 아울러 42경기 연속 출루라는 대기록도 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연속경기 안타 행진은 그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매 타석 집중하는 바람에 경기가 끝나면 녹초가 되기 마련이었고, ‘반드시 연속경기 안타 행진을 이어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심신이 피곤했던 박종호에게 우천 경기취소는 꿀맛 같은 휴식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설마 비가 그치겠어’하며 잠자리에 든 박종호. 그러나.
거짓말처럼 갑자기 비가 그쳤다. ‘설마’가 현실이 되면서 박종호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나다를까 23일 수원 현대전에서 5타석 무안타를 기록하며 38경기에서 연속 경기를 멈춰야 했다.
일본프로야구의 다카하시 요시히코(1979년·히로시마)의 종전 아시아 최다기록(33경기)을 갈아치우며 미 메이저리그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안타 기록(1941년) 경신을 바라봤던 박종호의 도전은 그러나 그에겐 끝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위한 시작이었다.
연속경기 안타가 좌절된 다음날. 박종호는 “연속경기 안타는 비록 ‘40’에서 멈췄지만, 앞으로 40살까지 선수로 뛰겠다”며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야구전문가들 사이에서 좀체 깨지기 어려운 기록 가운데 하나로 ‘39경기 연속안타’를 꼽아. 1백 년이 넘는 미국프로야구 역사에서도 56경기의 조 디마지오(뉴욕 양키스)를 제외하고 40경기 이상 연속 경기 안타를 친 선수는 4명에 불과하거든.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기록인데. 언제부터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한 거야?
2003년 현대에 있을 때 23경기 연속 안타를 치고 이듬해 삼성에서 기록을 이어갔어. 처음엔 그런 기록(연속경기 안타)을 세우는 줄도 몰랐지. 삼성 와서 24경기 연속안타를 치고 나니까 기자들이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 거야. 그때부터 기록을 조금씩 의식하기 시작했어.
말이 39경기 연속안타지 그 기록을 세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듯싶어.
왜 아니겠어. 37경기 연속안타를 치고 38경기에 도전하던 때였을 거야. 마침 상대가 현대였거든. 9회 2사까지 안타를 못 쳤지 뭐야. 불안했느냐고? 당연히 불안했지(웃음). ‘아, 여기서 기록이 깨지는구나’싶었어. 아, 그런데 9회 1사 조동찬이 희한한 내야땅볼 안타로 출루하더라고. 다음 타자 박한이가 아웃되고 내 차례가 왔지. 그때 현대 투수가 조용준이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때 (조)용준이 공이 좀 좋았니. 2스트라이크 2볼에서 용준이가 유인구를 던지나 싶었는데 다행히 정면승부를 하지 뭐야. ‘딱’하고 쳤는데 타구가 운 좋게 2루타가 되면서 죽다 살아났지(웃음).
그해 4월 13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롯데 박정태(현 롯데 2군 감독)가 1999년 세웠던 31경기 안타 기록을 깨뜨렸어. 그때 LG 투수가 김광삼이었던 거 기억나?
글쎄. 다른 건 모르겠고 32경기 연속안타를 쳤을 때 기억나는 게 ‘딱’ 하나 있어.
‘딱’ 하나라, 뭘까 궁금한데.
난 사실 지금껏 야구하면서 뛸 듯이 기뻤던 적이 별로 없었어. 항상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지. 32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세우는 날, 경기 전 김재걸(현 삼성 코치) 선배가 내 언더셔츠에 매직펜으로 뭘 적으시더라고. 처음엔 뭔가 했지. 그런데 (김)재걸이 형이 “너, 안타치면 꼭 유니폼 상의를 들고 언더셔츠를 보여주라”고 하는 거야.
그래 안타치고 시킨 데로 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했지. 보니까 언더셔츠에 ‘야구 사랑~ 팬 사랑~’이라고 쓰여 있지 뭐야. (얼굴을 붉히며) 이야, 안타치고 1루에 나간 다음에 유니폼 벗고 언더셔츠를 보여주는데, 진짜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웃음).
![]() 김재걸이 쓴 '야구 사랑, 팬 사랑'을 펼쳐보이는 박종호. 그의 표정이 매우 묘하다(사진=삼성) |
39경기 연속안타도 대기록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할 기회도 있었잖아. 그렇지?
아, 그거. 2003년 현대 있을 때 삼성과의 경기였을 거야. 홈런, 3루타, 2루타를 모두 때려내 마지막 타석에서 단타 1개만 추가하면 개인 첫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때 팀이 1점차로 뒤지고 있어 내 욕심만을 채울 수가 없었어.
욕심을 채운다니? 전 타석까지 3타수 3안타를 기록했던 타자라면 누구라도 타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을 거야. 그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야. 게다가 단타 1개만 추가하면 선수 자신뿐만 아니라 팀으로서도 대단한 영광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데 어디 다른 작전을 생각할 수 있겠어. 하지만, 이런 세상에! 당시 벤치에선 보내기 번트 사인이 나왔어.
그 당시엔 전혀 서운한 감정이 없었어. 되레 보내기 번트에 실패하면서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고 진루도 시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었지. (잠시 생각하다가 혼잣말을 하듯) 참, 돌이켜보면 현대 있을 때 번트 많이 댔다. 정말이지 난 만날 번트만 댔다니까. 2000년 타율 3할4푼으로 타율왕이 됐을 때도 희생번트를 20개나 댔으니까 말 다했지.
그렇게 번트를 많이 댄 이유라도 있어?
김재박 감독님이 원체 안전한 야구를 좋아하셨거든. 개인적으로 난 번트 때문에 다친 적이 많아. (오른손가락을 보여주며) 한번은 번트 연습을 하다가 공에 맞아서 손톱이 빠지기도 했어. 그래도 번트 대는 법은 현대에서 확실하게 배웠지. 나중에 후배들 가르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웃음).
![]() 박종호는 번트를 비롯해 감독의 작전을 가장 잘 수행하는 선수로 통했다(사진=삼성) |
# 2008년 11월. 삼성으로부터 웨이버 공시되고 팀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던 박종호에게 ‘다음 타석’이 찾아왔다. 친정 LG가 영입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의 영입 뒤에는 김재박 감독(현 KBO 경기위원)과 염경엽 운영팀장(현 LG 수비코치)의 노력이 있었다.
김 감독은 “경험이 풍부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박종호가 선참으로서 선수단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는 말로 그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타의에 의해 LG를 떠나야 했던 박종호는 그렇게 11년 만에 다시 잠실로 귀환했다.
LG에서 언제 연락이 온 거야?
2008시즌이 끝날 때쯤이었어. LG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우리 팀에서 뛸 생각이 없느냐”고.
기분이 묘했을 듯싶어. 11년 전 쫓아내듯 트레이드를 시켰던 친정팀에서 다시 ‘콜’이 왔으니까.
묘하긴 했지. 하지만, 기다렸던 제안이다 보니까 몹시 기뻤어. 무엇보다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꼭 LG에서 장식하고 싶었거든. 1992년 LG에 입단할 때보다 더 벅찬 감정으로 트윈스 줄무늬 유니폼을 다시 입었지.
11년이면 꽤 시간이야. 과거 내가 뛸 때만 해도 LG에게 포스트 시즌은 정규시즌의 연장일 뿐이었어. 하지만, 2002년 이후 LG에게 포스트 시즌 진출은 그야말로 ‘꿈’이 됐어. 다시 LG에 돌아왔을 때 예전과 비교해 어떤 점이 달라져 있었어?
음, 처음 놀란 건 선수들의 훈련량이 부족하다는 거였어. 현대 때도 그렇지만 김재박 감독님이 그렇게 훈련을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그러면 선수들이 알아서 개인훈련으로 보충해야 하는데 그걸 잘 안 하더라고. 줄곧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그게 가장 아쉬웠어. 뭐, 달라진 게 어디 한두 가지겠느냐만, 그래도 발전한 부분도 상당히 많았어. 그런 점에선 후배들이 참 자랑스럽더라고. 하지만, 2년 동안 특출난 활약을 보이지 못해 송구할 뿐이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것뿐이야.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6개, 골든글러브 3회 수상, 39경기 연속안타, 42경기 연속출루 등 네가 세운 기록은 셀 수 없이 많아. 이 가운데 어느 기록이나 상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
우승반지 6개나 골든글러브 3회 수상이야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영광이지. 하지만, 돌아보면 내 야구인생은 그리 특출날 게 없었어. 난 뭔가를 해결하는 입장이 아니라 늘 누군가를 도와주는 역할이었어. 그래서일까. 다른 기록보단 2000년 몸에 맞는 공 31개를 기록했을 때가 뜻깊었던 것 같아. 네가 웃겠지만, 개인적으로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는 기록이야(웃음).
한 시즌 몸에 맞는 공 31개라, 그게 가능하긴 한 모양이네. 4경기당 한 번씩 공을 맞았다는 뜻인데.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가능하지. 몸을 사리지 않고 팀을 위해 희생하다 보면 30개가 아니라 100개도 맞을 수 있지.
됐고. 그렇게 맞다 보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누가 아니래. 다른 덴 다 맞고도 참겠어. 아, 그런데 종아리에 맞으면 답이 없어. 왜냐? 도저히 뛸 수가 없거든. 그럴 땐 무조건 한두 경기 쉬어야 해.
![]() 날아오는 공을 두려워하지 않던 박종호. 그가 정작 두려워한 건 날아오는 공을 피하는 자신이었다(사진=삼성) |
지금껏 많은 지도자를 만났어. 가장 생각나는 이가 있다면 누굴까.
아무래도 김용달 코치님이시지. 프로에 입문했을 때 스위치 타자가 되도록 도와주시고 잔뜩 움츠러들었던 내게 언제나 자신감을 심어주셨던 분이야. 야구를 떠나서도 내겐 정신적인 지주 같은 분이야. 물론 원체 고집이 세셔서 내가 고생한 것도 있었지(웃음).
선수 가운데는 누구야?
(한마디로) 심정수지. 야구 열정이나 연구는 내가 본 선수 가운데 최고였어. (심)정수는 야구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면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스스로 이해할 때까지 연구를 거듭했어. ‘지금도 충분히 대스타인데 저렇게 밤을 새울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스프링캠프에서도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많이 훈련했고. 후배지만, 참 배울 게 많은 선수였지 싶어.
1990년대만 해도 2루수는 그리 주목받는 포지션이 아니었어. 상대적으로 3루와 유격수에 더 좋은 선수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거든. 하지만, 2000년대 들어 2루수의 중요성이 상당히 두드러진 느낌이야. 고영민(두산) 같은 경우는 ‘2익수’란 별명을 얻을 만큼 넓은 수비범위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어. 그래서 하는 뜬금없는 질문인데. 골든글러브 3회 수상자로서, 현재 한국프로야구에서 최고의 2루수는 누구라고 생각해?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SK 정근우지. (정)근우는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 어려운 타구를 잡아낼 줄 아는 선수야. 타석에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자기 팀으로 넘어오게끔 하는 능력도 있고. 거기다 경기를 읽고 분석할 줄 아는 힘까지 있다니까. 시쳇말로 타고난 선수지. 두산 고영민도 뛰어난 2루수인데, 올 시즌은 좀 불안해 보여. 방망이도 예년보다 약간 기복이 있어 보이고.
정근우, 고영민 모두 수비가 뛰어난 2루수들이야. 수비하면 너도 이름깨나 날렸고. 근간 들어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수비의 중요성이 크게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도 타격에 집중한 채 수비엔 소홀한 선수들이 많아. 우리가 흔히 그러잖아. “수비는 훈련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한 분야”라고 말이지.
수비라, 허허. 누가 뭐래도 수비는 역시 반복이야. 정말 답이 없어. 반복 숙달하면서 유연성 강화에 힘써야 해.
정확한 지적이야.
(앉는 자세를 취하며) 내야수는 무릎이 유연해야 어떤 타구도 따라갈 수 있어. 물론 포구도 중요하지. 우리 선수들 수비할 때 잘 보면 글러브에 공이 들어갔다가 튕겨 나오는 경우가 많아. 한번 잡은 공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프로야구 선수의 임무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포구 연습은 프로선수이니만큼 꾸준히 해야 해. 정말이지 타격은 타고나는지 몰라도, 수비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보강할 수 있어.
![]() 넓은 수비범위와 안정된 송구로 최고의 2루수로 불렸던 박종호(사진=삼성) |
우문(愚問) 하나만 더 하자. 한국시리즈 챔피언 반지 6개에다 39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보유한 만큼 너도 앞으로 명예의 전당이 생기면 헌액 후보로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커. 만약 네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면 어느 팀 유니폼을 입고 가입할까?
허허, 참(한참 헛웃음을 짓다가). 글쎄.
말해봐. 어디야?
만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영광이 주어진다면 여러 생각할 거 없이 당연히 LG지.
챔피언 반지는 현대에서 제일 많이 챙기고, 돈은 삼성 덕분에 많이 벌었는데 명예의 전당엔 LG 유니폼을 입고 헌액되겠다고?
(차분한 어조로) 생각해 봐라. 고교시절 야구선수들의 꿈이 뭐야? 프로야구팀 입단이잖아. 난 LG에 입단하면서 그 꿈을 이뤘어.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실수도 연발했지만, 그 팀에서 야구의 기초를 닦았고 야구가 무엇인지 깨달았어. 그리고 아직도 나를 기억해주는 팬이 많아.
(눈을 가늘게 뜨며) 지난해였을 거야. 시즌이 끝나고 늦가을 잠실구장에서 ‘LG 페스티벌’행사를 하는데 내가 팬들께 인사드리는 차례가 됐어. LG에 돌아와서 뚜렷하게 뭔가 이바지한 게 없는데도 팬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시는 거야. 속으로 ‘이런 팀에서 꼭 우승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한 팬이 있는데 우리 LG가 좌절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
난 지금까지 살면서 ‘축복’같은 건 믿지 않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축복이 주어졌던 거야. 그래 바로 LG 팬이 축복이었던 거야. LG 선수들이 나처럼 축복의 존재를 늦게 깨닫지 않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 박종호는 LG에서 7번째 우승 반지를 끼고 싶었다. 그러나 후배들의 길을 터주려고 은퇴를 결심했다. 조만간 LG는 'V3'로 박종호의 꿈을 이뤄줄 것이다(사진=LG) |
# ‘박종호는 평범했으나, 위대했고, 위대했으나 평범했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야구선수란 걸 정확히 알았던 이였습니다. 은퇴 후 더 뛰어난 야구인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 야구팬 김정화 -
요즘 일본어 배운다며?
연수 가려고.
일본으로?
응. 길게는 아니고 몇 달 정도 단기로 다녀오려고. 그러다 배움이 부족하다 싶으면 상황 봐서 미국으로도 연수를 다녀올 생각이야. 일전에 김용달 코치님이 (미국에) 다녀오셨잖아. “미국 쪽으로 연수를 다녀오고 싶다”라고 말씀드리면 도와주시지 않을까 싶어.
분야는?
타격이든 수비든 주루든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울 생각이야.
여담인데, 늘 궁금한 게 있었어.
뭐?
수염은 왜 길러?
아, 수염(웃음). 2008시즌이 끝나고 LG로 돌아왔을 때 구본준 구단주님이 일본 오키나와 캠프에 오셨어. 그때 내가 수염을 기르고 있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스프링캠프에서 어디 면도할 시간이 있니. 그런데 공교롭게도 구단주님이 내가 수염 기른 걸 보셨지 뭐야. 내 쪽으로 오셔서는 “박 선수, 수염 좋네요. 계속 기르세요. 우리 LG 선수들은 너무 순하게 생겨서 오히려 산적 같은 터프한 이미지가 필요합니다”라고 하시는 거야.
다른 이도 아니고 구단주의 청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겠네.
(수염을 어루만지며) 다음날 호텔 사우나에서 구단 고위관계자 분들을 만났어. 그분들이 웃으시면서 그러시더라고. “박 선수, 절대 수염 자르시면 안 됩니다.”(웃음). 그 뒤로 구단주님의 말씀도 있으시고, 수염 깎기도 귀찮고 해서 슬쩍 다듬으면서 기르고 있어.
![]() 역대 최고의 스위치 타자였던 박종호. 그는 은퇴할 때까지 스위치 타자를 고수했다(사진=LG) |
(대화 도중 넥센 이숭용이 큼지막한 공을 쳤다.)
어, 넘어가나.
누구야? (이)숭용이 형이야? 넘어갔어? (아깝게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되자) 이야, 대단하다. 저거 넘어갔으면 (선수생활) 더 연장되는 건데(웃음). 참 자기관리에 뛰어난 형이야.
저런 타구 보면 괜히 은퇴했다 싶지 않아?
(손 사례를 치며) 에이, 난 뒤는 안 돌아봐.
집에 챔피언 반지 6개는 잘 모셔다 놨어?
반지야 있긴 있지. 장모님 하나 드리고, 아버지께도 하나 갖다 드리고, 와이프도 끼고 다니기도 해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웃음).
반지도 반지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을 6번이나 경험했으니, 그때 받은 포상금만 해도 몇억 원은 되겠다.
그렇지도 않아. 현대 때는 우승해봤자 포상금으로 1천만 원밖에 안 나왔어. 물론 삼성 때는 2005년 우승하면서 우승공로자 가운데 A급으로 분류돼 1억 원을 받긴 했지. 하지만, 2006년엔 팀이 우승했는데도 C급으로 분류돼 얼마 받지도 못했어(웃음).
야구계에서 ‘박종호’하면 떠올리는 게 ‘성실함’과 ‘철저한 자기관리’야. 어떻게 자신을 관리한 거야?
일단 술과 담배를 은퇴할 시점까지 가까이하지 않았어. 그게 현역생활을 오래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사실 프로야구선수한테 자기관리는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거야. 그렇게도 안 하고 그룹 계열사 사람들이 힘들게 번 돈을 마냥 쓸 순 없잖아.
말이 쉽지 자기관리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겠어.
더 자세히 설명하면 프로야구 선수는 자기통제력이 있어야 해. 사실 몸 관리하는 법이야 선수들이면 누구나 다 잘 알지. 개인적으론 말이야. 프로야구 선수는 일단 잠을 잘 자야 해. 현역생활 동안 변하지 않는 철칙이 그거였어. ‘식사는 걸러도 잠은 푹 자야 한다’고. 요즘 보면 젊은 야구선수들이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건 부상보다 더 무서운 거야. 자라나는 유소년 야구선수들도 꼭 잠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박종호. 올 시즌 2군에 있을 때도 박종호는 술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유는 간명했다. "언제 1군으로 오를 지 모르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퇴를 선언했을 때도 그는 술잔을 피했다. "은퇴하고 나서도 스스로를 관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다짐 때문이었다(사진=LG) |
(그때였다. 박종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대화 도중 다른 전화는 받지 않았던 그가 부리나케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휴대전화 액정에는 ‘규건’이란 이름이 떴다. 박종호의 열 살 먹은 아들이었다.)
음.
(통화음이 옆에까지 들렸다.) 어, 규건아. 아빠 언제 오냐고? 오늘 오냐고? 오늘은 못 가지. 경기해야지. 에이, 아빠가 언제 내일 간다고 했어. 다음 주에 간다고 했지. 알았어. 아빠가 대구 내려가거든 우리 규건이랑 많이 놀아줄게.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알았어. 아빠도 규건이 사랑해. 그래.
혹시 너, 아들한테 은퇴 이야기 안 한 거야?
아내한테만 하고 아이들한테는 아직 이야기 안 했어. 아직 아빠가 은퇴한 지도 몰라(웃음).
언제 이야기하려고?
은퇴식이나 하면 모를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서.
음…(주 : LG는 박종호의 은퇴 선언 뒤 “은퇴식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간단한 은퇴 인사를 계획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박종호는 이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나중에 알면 실망할 텐데.
박 기자, 아니 동희야.
왜?
(그라운드의 먼 곳을 바라보며) 야구선수는 힘이 달리고, 실력이 떨어질 때,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 할 때 은퇴를 결심해.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야. 아무리 별 볼일 없고, 힘이 없고, 초라해도 아이들 앞에선 끝까지 영웅으로 보여야 하는 거야. 아버지한테…은퇴가 어딨어. (환한 미소로) 아버진 언제까지나 영원한 현역이야. 영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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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종호 선수... 주간야구에 성남고 4번타자로 유격수로서 유망주로 이야기 될 때부터 알아왔던 선수... 이제 은퇴한다니 아쉽네요. 작년에도 참 잘해줬는데... 꼭 좋은 코치가 되서 LG코치로 7번째 우승 반지 끼우시길 바랍니다.
은퇴식해줘야하는거아닙니까ㅠㅠ
94년 우승당시 백넘버 67번의 박종호선수.. 당시 2번타자였었고.. 참 좋아했는데...
아쉽네요 엘지와서 경기하는 모습 보고싶었는데..
아 눈물 나네요 정말. ㅜㅜ 엘지가 성적이 나쁜 이유가 있군요.. 젊은 선수들 늦기전에 빨리 깨닳았으면 합니다. 박종호선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구단에서 은퇴식은 꼭 해줬으면 좋겠네요. 타팀에서 오래 뛰었다고 은퇴식 안해주는건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