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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여자 애들 몇 명이 모여서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 교실 바닥이 부서져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소리. 여기저기서 질러대는 고함 소리. 어느 고등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소란스럽고 역동적인 쉬는 시간의 풍경이었다.
창문을 통해 찬란하게 비추는 햇빛 때문이었을까? 그런 반 아이들 사이에서 마치 그림을 걸어놓은 것처럼, 움직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짝꿍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두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 중 창가에 앉은 여학생의 교복 왼쪽 가슴엔 ‘이하예라’라고 새겨진 명찰이 기울어진 채 매달려 있다. 그 명찰이 달려있는 곳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내려간 곳엔 ‘최재희’라고 적힌 명찰이 한 개 더 대롱대롱 달려 있다. 하지만, 여학생의 옆에 앉아 있는 남학생의 교복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명찰이 없다. 교복도 단정하고, 넥타이도 삐뚤어짐 없이 잘 맸는데, 명찰 하나만이 보이질 않는다.
“야아! 문학 온다!”
시끌시끌한 소리 때문에 종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인지, 한 아이의 우렁찬 소리에 반 아이들이 우왕좌왕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느라 바쁘다. 드르륵, 드륵.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이 책상과 의자를 끌고 끌리는 소리에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여학생이 미간을 좁힌다.
탁. 탁. 탁. 아이들이 전부 자리에 돌아가기도 전, 교실로 들어 온 얄상하게 생긴 남자 선생님이 길다란 회초리를 문 위에 휘두른다.
“야, 이 새끼들아. 종 치면 바로 자리에 앉으라고 했지! 니들 귀엔 학교 종소리가 개소리로 들리나?”
버럭 소리를 지른 남선생이 뚜벅뚜벅 걸어와 다시 한 번 책상 위를 내리쳤다. 콰앙! 엄청난 굉음에 반 아이들이 흠칫 놀란 듯 전부 어깨를 들썩였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 아이들 전체를 한 번 훑던 남선생이,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빳빳이 고개를 들고 남선생과 시선을 마주하는 남학생.
“이 새끼 봐라. 최재희, 명찰 똑바로 달라고 했지.”
“명찰 달았는데요.”
“네 거에 달랬지, 누가 남의 옷에 달라고 했어?!”
“제 거에 단 거 맞는데요.”
“이게 누구 눈을 병신으로 아나! 이하예라 너 당장 최재희 명찰 안 빼?”
명찰을 빼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남선생이 손에 쥐고 있던 회초리가 허공으로 높이 올라 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다시 빠르게 내려 온 회초리는, 하예라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춰 섰다. 재희에게 잡힌 남선생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너 이 새끼!!”
“이하예라 제 꺼 맞다구요.”
아직도 재희의 손에 붙들려 있는 남선생의 손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다. 재희는 그런 남 선생의 손목을 으스러져라 세게 쥐었다가 이내 놓아준다.
“너, 너!”
“남에 거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거, 코흘리개 꼬맹이들도 잘 알던데요.”
“너 당장 따라 나와. 이것들이 선생이 무슨 지들 장난감인 줄 아나! 넌 오늘 죽었어, 이 새끼야. 당장 나와!”
오늘은 기필코 결단을 내겠다는 듯, 두 팔을 걷어 올린 남선생이 손에 쥐고 있던 회초리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땡그르르. 빈 깡통만큼이나 싸구려 소리를 내며 떨어진 회초리는 저 멀리 사물함이 있는 뒤편까지 굴러가 버린다. 굴러가는 회초리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가 있는 사이, 남선생은 씩씩거리며 교실 앞 문으로 나가버린다.
“최재희.”
옷자락을 붙잡는 하예라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준 재희가 싱긋 웃고는 남선생의 뒤를 따라 나간다. 재희가 나가고 나자, 적막이 흘렀던 교실이 소란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교실에 홀로 남아 있는 하예라를 향한 불편한 시선. 그런 반 아이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재희가 사라진 뒷문에서 자신의 책상으로 시선을 돌리고 만다.
그렇게 수군거리는 아이들 틈 사이에 한 시간을 보내고, 시끌벅적한 쉬는 시간은 다시 찾아 왔다. 조금 전 쉬는 시간과 다를 게 없던 교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어슬렁어슬렁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재희. 교실에 있던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재희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다.
어느 새, 하예라의 옆으로 와 털썩 앉은 재희가 하예라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인기척을 느낀 하예라가 책상에 엎드렸던 상체를 벌떡 세워 재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일그러지는 하예라의 얼굴. 터져버린 입술. 붉어진 오른쪽 뺨. 눈썹 아래로 생긴 상처. 애써 앞머리로 가려보려고 한 건지,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상처 위로 살짝 내려와 있다.
“재희야, 너 얼굴.”
“이 오빠는 얼굴이 생명인데, 하필이면 얼굴에 흠집이 갔다. 나 어떡하냐?”
“지금 농담 할 때야?”
“농담 아냐. 안되겠다. 네가 나 평생 데리고 살아줘라, 하예라.”
맞고 와서도 좋다고 헤죽헤죽. 실없는 농담만 던지는 재희를 보며 짐짓 인상을 쓰는데도 마냥 웃는다. 결국, 나름대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한 하예라가 자신의 명찰 아래 달린 재희의 명찰을 빼버린다.
“이걸 왜 빼.”
“네 거니까 네가 달고 있어. 안 그러면 맨날 이렇게 맞을래?”
“네꺼랑 내꺼 구분이 어디 있어?”
“너 진짜.”
“알았어. 집에 가는 길에 명찰 하나 더 새기면 되잖아. 이건 떼지 말고 좀 달고 있어.”
“왜 이렇게 고집 부려.”
“너 이 학교에 널 호시탐탐 노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안심이 안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생각했다. 이하예라의 남자친구는 최재희라는 게 전교생에게 다 퍼지고 얼굴까지 알려진 마당에, 대체 누가 노리고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재희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예라가 다시 재희의 명찰을 자신의 교복에 달고 만다.
그랬던 게 바로 3년 전. 우리 사이게 그렇게 순조로웠던 게 불과 3년 전이었는데. 너 없인 살 수 없었던 내가, 너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가 이제 너에게 외치고 있다.
“나 남자친구 생겼어.”
라고.
# 01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재희와 소파에 앉아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함께 보고 있던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이거 꽤 재미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난 폭탄선언을 터뜨렸다. 하지만 긴장한 나와 달리, 폭탄을 받은 재희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소리라고 믿는 사람처럼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이거 볼만하네’ 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재희의 표정도 담담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결국 내가 ‘최재희’하고 이름을 부르며 재촉했을 때, 재희는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농담이지?”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재희와 다른 반이 된 적이 있었다. 개학식 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울어대는 바람에 결국 반을 옮겨 재희와 같은 반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그 뒤로는 줄곧 재희와 다른 반은 한 적이 없었고 심각한 대인기피증 때문에 재희 외에 다른 또래들과 짝꿍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최재희가 아닌 또 다른 남자친구라니. 이미 한 달이 넘었지만 나조차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아니.”
“네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그제서야 재희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재희의 말에 나는 차마 ‘응’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을 법도 했다. 정확히 5살 때, 입양된 곳에서 두 번이나 파양된 이후로 고질병처럼 따라다닌 대인기피증 때문에 재희 아닌 다른 사람을 단 한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으니까. 자그마치 16년이었다. 솔직히 보육원에서 재희를 만나기 전이었던 5살 이전의 기억은 나지도 않으니, 최재희와 평생을 지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평생을 최재희 외에 다른 사람의 손길은 타본 적도 없었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최재희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지낸 내가 재희를 벗어나려고 한다는 건 확실히 충격이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도 텔레비전에선 와하하하 웃는 방청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넘었어.”
“여태까지 아무 얘기 없었잖아.”
“미안해.”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재희에게까지 들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주먹을 꽉 쥐는 재희의 행동을 통해 들렸겠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하예라.”
“응.”
배신 당한 사람은 재희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때 재희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나는 눈물을 쏟아내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지도 몰랐다. 재희의 감정에 변화가 일어날 때면,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민희윤 때문에 이러는 거야?”
민희윤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들리자 속이 뒤틀린 것처럼 거북해졌다. 이미 1년도 넘은 것 같은 내 남자친구 최재희의 세컨드. 갑자기 얄미운 민희윤의 여우 웃음이 잔상처럼 눈 앞에 그려졌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민희윤의 얼굴 때문에 내 대답이 늦어져 버렸다. 대답 없는 내 모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 들인 건지, 재희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이어갔다.
“희윤이 정리하겠다고 했는데 말린 건 너잖아.”
하지만 나를 먼저 놓아버린 건 너였잖아. 식도까지 차오르는 말을 꿀꺽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재희의 생일 날, 재희를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하며 재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재희가 민희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던 너의 말과 그 충격이 1년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했다.
“희윤이한테 상처 주지 않아도 돼.”
“너야말로 나한테 상처 주지 좀 마.”
상처……. 이미 나는 너로부터 수도 없이 받아 온 상처를 너도 받을 줄 아는구나.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랐다. 내가 널 놓은 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희도 상관 없다고 여기고 있을 줄 알았다. 나를 먼저 놓아버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으니까…….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단하네. 여태까지 이하예라가 마음 준 사람 최재희 밖에 없었는데. ”
“…….”
“나 웃어야 되는 건지, 울어야 되는 건지 답을 모르겠다, 하예라.”
답을 모르겠다던 재희의 표정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최재희가 세컨드가 생겼다고 나에게 말하던 날, 내가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그냥 잠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게. 네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니까 모든 게 새롭고 들뜬 기분에 그러는 거라고 믿을게.”
“애들 장난처럼 이러는 거 아냐. 나 그 애 진심으로 좋아해.”
“그래도 너한테 내가 첫 번째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그것도. 이젠 잘 모르겠다, 재희야. 네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젠 너 없는 세상이 그려진다는 거야. 들뜬 기분이 만든 호기심도 아니었고, 날 먼저 놓아버린 너에 대한 일종의 복수도 아니고. 다만, 내가 지쳤을 뿐이야. 마치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것처럼, 서로를 놓지도 붙잡지도 못하는 우리 사이가…….
나에게서 무슨 대답이라도 듣길 바랬던 재희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한다면, 재희는 정말로 울어버릴 지도 몰랐다. 결국, 재희가 한참 동안 내 대답을 기다리던 재희가 지쳤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 있어서 먼저 나갈게.”
수요일은 우리 둘 다 공강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 내 앞에서, 재희는 수업이 있다는 거짓말로 뒷모습만 보인 채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재희가 그렇게 가버린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만약 내 대답을 끝까지 고집했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재희가 눈 앞에서 멀어지고 나자, 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조금씩 엄습해 왔다. 나는 부엌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 들고, 재희가 나간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어, 단축번호 2번을 길게 눌렀다.
[응, 하예라.]
내가 전화할 줄 알았다는 듯이 몇 번의 신호음이 가지 않아 연결된 전화 너머로 부드러운 다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건지 목소리가 들뜬 것 같기도 했다.
“뭐하고 있어?”
[내 여자 굶길까 봐 일 하고 있지. 지금 어디야?]
“나 방금 집에서 나왔어.”
[아, 그럼 우리 만날까? 나 오늘 일 빨리 끝낼 건데.]
“너 그러다가 또 점주님한테 혼나. 맨날 시간도 안 채우고 월급은 다 받아가고.”
[나 일 진짜 잘해서 점주님 쫓아내지도 못해. 걱정 말고 얼른 와. 보고 싶다, 하예라.]
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들리는 다현이의 시원한 웃음 소리에 방금 전의 일도 잊고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다현인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내 마음을 읽어냈다. 감정에 서툴고 항상 옆에 있음을 내가 확인해야 하는 재희와 달리, 항상 내 곁에 있음을 알아서 표현해주는 사람이었다.
“알았어, 갈게. 조금만 기다려.”
[응. 천천히 그리고 조심해서 와. 쪽.]
다현이와 통화를 끝내고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 견디기 힘든 더위에 손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려고 하는 내 눈 앞에 재희의 모습이 보였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나와 똑같이 손 부채질을 하며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수업이 있다고 가버렸던 최재희는,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민희윤에게 부채질을 해주며 걸어가고 있었다.
대체 너와 나는 어디서부터 엇갈려버린 걸까.
< 너와 나의 세컨드>
다현이가 일하는 카페에 도착하자, 내가 온지도 모르고 휘파람을 불며 가게 안을 닦고 있는 다현이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 등을 쿡쿡 찌르자, 휘파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다현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밖에 엄청 덥지? 시원한 거 줄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대학로에 위치한 카페라서 그런지 시간대에 불문하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손님들이 앉기에도 바쁜 테이블을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내주는 다현이.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과 혹시라도 어디서라도 튀어나올 지 모를 점주님 눈치를 보느라 쉽게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는데, 다현이가 내 어깨를 살짝 누르며 반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나 금방 끝나니까 잠깐만 앉아 있어. 점장님 안 계시니까 눈치 보지도 말고 편하게 있어.”
그러곤 다른 알바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 무슨 말을 주고 받더니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다현이가 올라간 2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주변에 있던 손님들 중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저 사람이 여자친구 맞는 거 같지?”
“그런 거 같아. 쩐다, 진짜. 나 저 남자 때문에 맨날 이 카페 온 건데 여자친구 있었나 봐.”
“헐, 대박이다. 근데 좀 예쁘긴 한데?”
“저게 뭐가 예뻐! 남자가 훨씬 아깝지. 아, 저 여자 복 터졌다. 저런 사람이 남자친구라서..”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두 사람의 이야깃 거리는 나와 다현이었다. 손다현의 여자친구. 나에게 재희 아닌 다른 사람의 여자친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게 아직은 낯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희와 다른 반에 배정 되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 다른 반이 됐던 적이 있었으나, 나의 땡깡으로 인해 다시 같은 반이 되었으니 그 때 일은 무효다.) 그 때, 다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다현이가 우리 반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반에 무관심했고, 특별히 다현이와 말을 섞은 적도 없었다.
그렇게 있는지도 몰랐던 고3 생활을 마치고, 대학교라는 명목 하에 처음으로 재희와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고야 말았다. 항상 최재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지냈던 탓에, 20살이 되도록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었고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아기처럼 온통 배워야 할 것 투성이였다. 재희 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녀본 적도 없는 탓에, 사람 사귀는 방법에는 특히나 서툴렀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와 준 게 다현이었다. 어쩌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로 오게 됐고, 재희가 없는 낯선 환경에서 홀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붙잡은 지푸라기가 다현이었다. 그 땐 우리 사이게 이토록 발전하게 될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만약 다현이가 없었다면 난 또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미친 듯이 울어대며 재희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달라며 떼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년 신입생 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고 있는데, 옆에서 내 어깨를 콕콕 찌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스무디에요. 다현이가 특별 주문 넣고 갔어요.”
좀 전에 다현이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알바생 중에 한 명이었다. 나는 잠깐 마주쳤던 눈을 피하며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차가운 얼음 때문에 물방울이 맺힌 플리스틱을 만지며, 알바생이 멀어져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알바생은 계속 내 옆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의 시선도 자꾸만 나를 향하는 것 같이 느껴져 뻘줌하기만 했다. 알바생을 향해 왜 그러고 서 있냐고 묻고 싶은데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예전에 비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대인기피증이 문제였다.
“다현이가 하도 자랑해서 궁금했었는데, 진짜 미인이시네요.”
이럴 땐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머리 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도대체 어떻게 상황을 대처 해야 할 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나타났다. 내 구세주, 손다현.
“강준성, 너 마실 거만 주고 네 할 일 하랬지? 죽을래?”
“얘기 좀 한다고 뭐 닳냐?”
짐짓 인상을 쓰며 나타난 다현이의 모습에 준성이라는 알바생은 투덜거렸다. 알바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좁혔던 미간을 핀 다현이가 다시 샐쭉하게 웃었다.
“미안해. 내가 너랑 빨리 데이트 가려고 쟤한테 맡겼더니, 저게 감히 내 여자한테 꼬리를 치네?”
꼬리를 친다니. 다현이의 언어 선택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현이가 특별 주문했다는 스무디를 들고 카페를 나오자 뜨거운 태양이 우릴 반겼다.
“어디 갈까?”
“알바해서 피곤하지 않아?”
“아니. 나 지금 충전하고 있어서 힘이 넘쳐 나!”
다현이가 나와 맞잡고 있는 손을 위로 올리며 흔들어 보였다. 이 뜨거운 여름에도 내 손이 충전기라며 맞잡은 손. 새하얀 다현이의 손과 그에 대비되는 까만 내 손이 마치 흑인의 손바닥과 손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파.”
“아, 그럼 인도음식 먹으러 갈까?”
“응, 갈래!”
재희와 같이 호기심에 갔던 인도 음식점이 언젠가부터 내가 자주 찾는 곳이 되어버렸다. 주변에 알아주는 인도 음식점이 많지 않은 터라, 가는 곳도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나와 입맛이 별반 다르지 않은 재희도 내가 가자고 할 때마다 자주 먹으러 가곤 하던 곳이었다. 처음엔 재희와만 가던 장소를 다현이와 간다는 게 껄끄럽기도 했지만, 이젠 오히려 다현이와 가는 게 더 익숙할 정도로 자주 찾는 곳이었다.
“나 오늘 재희한테 다 말했어. 우리 사이.”
문득 떠오르는 재희 생각에 오늘 있었던 일을 다현이에게도 알려야겠다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내 말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꺼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몰려오는 기분이 든다.
“하예라, 오늘 진짜 힘든 일 했네? 고생 했으니까 밥 많이 먹여야겠다.”
그렇게 싱긋 웃는 다현이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따뜻하게 손을 더 꽉 잡았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지만, 그게 참 편안했다. 항상 내가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느긋해질 수 있는 편안함이 좋았던 것뿐이었다.
< 너와 나의 세컨드 >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은은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낮인지 밤인지를 방불케 했다. 문 앞에서부터 자리까지 안내해주는 종업원을 따라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예라 언니!”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부터 그 손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민희윤. 죽도록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내 얼굴은 민희윤을 향해 웃고 있었으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반갑게 뛰어와 내 앞에서 방방거리는 민희윤 뒤로는 심드렁한 표정의 재희가 서 있었다.
“언니도 식사하러 온 거에요?”
“아, 응.”
“여기서 보니까 되게 반갑다!”
“그러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도무지 웃어지질 않았다. 입으론 반갑다고 했지만, 머리 속에선 민희윤이, 그것도 오늘 아침 나와 싸우고 나간 재희의 옆에 있는 민희윤이 절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민희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었다.
“근데 이분은 누구세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다현일 힐끔거리며 물었다. 표정에선 이미 ‘남자친구’라는 걸 감지했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나에게 명확한 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기 전에 우선 재희를 눈치를 살폈다. 재희의 시선은 나와 다현이가 맞잡고 있는 손으로 향해 있었다. 내 손이 너무나 뜨겁게만 느껴진다.
“……내 남자친구야.”
“우와, 진짜 잘생기셨어요!”
남자친구라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어딘가 당당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런 내 모습에 서운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현이를 힐끗 바라보자, 오히려 괜찮다는 듯 한 쪽 눈을 찡긋하고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내 손은 뜨거워 미칠 것만 같았다.
“뭐냐, 하예라. 네 세컨드냐?”
“오빠! 말 좀 예쁘게 해. 뜬금없이 무슨 세컨드야. 언니 남자친구분 오해 하실라.”
비꼬는 듯한 재희의 말투에 희윤이 핀잔을 줬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핀잔을 줄 수 있는 희윤이 말에, 난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나 아닌 다른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너는 그렇게 당당한데. 나는 왜 이렇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희윤만이 우릴 보고 히죽거리며 웃을 뿐, 우리 셋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재희의 눈을 바라봤지만, 재희는 내가 아닌 다현이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재희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 마냥 날카로웠다. 싸해지는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민희윤도 곧 웃음을 멈추며, 우리들의 눈치를 살폈다.
“오빠, 왜 그래?”
당황한 희윤이 재희의 오른 팔을 잡아당기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애썼다. 재희는 그런 희윤이의 팔을 슬쩍 쳐내며, 다현이의 바로 옆까지 걸어왔다. 제법 큰 두 사람의 키가 대충 비슷해 보였다. 다현이의 얼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재희가, 귓가에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부탁 하나 하겠는데.”
“……?”
“나보다 못생긴 주제에 하예라한테 찝적거리지마. 너 한번만 더 나한테 걸리면 혼난다.”
제 딴엔 귓속말이라고 중얼거린 말들이 내 귀에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들어왔다. 재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재희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현이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듯싶었으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유치한 심술이었다. 최재희의 행동에 내가 나서서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재희가 먼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점심은 네 세컨드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 해서 먹고 와. 오늘 저녁은 내가 해줄게. 집에 일찍 들어와라, 하예라.”
헐. 헐. 소설이 왜케 우울우울 할까요? 원하던 건 이게 아닌뎁...ㅋㅋㅋ
갑자기 왠 인도음식? 왜냐면 제가 좋아하니까여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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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을 평생 애정할께요. 여러분도 저를 꾸준히 애정해주세요T.T 으허어어엉
★ 업쪽은 '손다현찬양' OR '최재희찬양'
최재히 찬양!
저는 남주 다좋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