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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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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 절대 금지)
실종신고를 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무턱대고 신고부터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나가 그냥 바람을 쐬러 나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것이 한밤중 어떤 침입자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는 것보다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에는 더 설득력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조금 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스크랩하듯 정리했다. 처음에 거실을 서성인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거실로 나갔을 때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만약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누나였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누나는 더위에 못 이겨 잠을 깼고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지금쯤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고 있을 것이다. 한밤의 산책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까운 마을 공원이나 초등학교로 달려가 보면 운동장을 뱅뱅 도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밤 열두 시든, 새벽 한 시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인생의 태엽을 감는 사람들처럼 밤의 가장자리를 돌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누나도 그들 부류와 합류하여 운동장이나 공원을 맴돌고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가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거실에서 보았던 마스크 여인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냥 환상? 그렇게 넘겨버리기엔 내 정신이 너무나 멀쩡하다. 헛것 같은 것을 볼 나이는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형체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움직임을 생생히 목격했다. '그녀'는 분명한 침입자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문득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다.
베란다에 있는 대형 세탁기.
그 안이라면 숨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발걸음은 어느새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어떨까! 이제라도 세탁기 덮개가 살며시 열리며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올까! 그녀가 그 비좁은 곳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올까!
베란다 창을 열지 않고 헛기침을 몇 번했다. 관두자. 이런 상상! 무리다. 성인 여자가 그 공간에 들어가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애써 무서운 상상을 거두고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서 거실로 향했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했다. 돌아보지 말자. 지금 돌아보면 베란다 창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그 여자의 하얀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것이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상상이 만들어낸 공포로 심장사한 남자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상상력을 입체화시키지 말자.
거실로 나와서 냉장고를 열고 찬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선잠 속에서 나는 복도를 걷는 발자국 소리, 거실을 서성이는 인기척, 잠든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알 수 없는 인물의 숨소리 등을 느껴야 했다. 그것이 꿈인지 꿈으로 가는 여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 여섯 시였고 누나의 방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누나가 돌아와 있었다.
누나를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무척 피곤해 보여 그냥 두었다. 한밤중에 몽유병 환자처럼 어딘가를 돌아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겠지.
내방으로 돌아와 전날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아침의 빛이 원군이 되어 주었기에 전날의 공포 따윈 코흘리개 적 본 전설의 고향만큼이나 시시한 것이 되어 있었다. 세탁기 덮개를 열었다. 어제 내가 벗어놓은 양말 한 켤레만 놓여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교복을 입고 현관을 나서려 할 때 누나의 방문이 열렸다. 누나는 아직 잠에서 깬 것이 아니라는 징표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거의 감고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려는 누나를 불러 세웠다.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뭘 어디 가?"
누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한 가지 확신을 했다. 어젯밤 누나가 외출한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누나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이건 정말 공포영화 같은 고민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나가 자신의 외출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쪽에 올인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젯밤 누나가 사라진 후 나는 신발장을 보았고 신발장에 누나의 신발 여섯 개와 나의 신발 새 개가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두 켤레의 슬리퍼도 그대로 있었다. 말하자면 누나는 맨발로 외출을 했던 것이다. 정말로 공포영화 속에서 몽유병에 걸린 환자가 그러는 것처럼.
보충수업은 총 네 시간이었고 오후는 자율적이지 못한 자율학습을 네 시간 더 해야 했다. 이런 열정적인 수업방식이 멈추지 않는 엔진처럼 가동되었기에 작년 졸업생들 중 서른 명의 서울대생을 배출해 낸 것이다. 교장은 조회 때마다 이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사실은 '열정적인' 것이 아니라 '숨막히는' 것이라 표현함이 옳을 테다. 어찌됐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나는 수업 내내 턱을 괴고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불현듯 닥친 미스터리들이 나에게 사춘기의 고민 같은 것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민혁,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돌아보니 수학 선생님이 술에 취한 듯한 벌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칠판에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좌표들이 지하철 노선도처럼 그려져 있었다. 하마터면 선생님 이게 다 뭡니까, 하고 물을 뻔했다.
"야, 너 뭘 그리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어?"
점심 시간에 희선이 다가와 물었다. 희선은 작년에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온 아이였는데 이년 연속 같은 반이었다. 그녀는 탤런트 김희선만큼이나 예뻤다. 또한 농구선수 김희선만큼이나 키가 컸다. 백칠십이 센티미터인 나보다 삼 센티미터나 더 컸다. 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혹시 어젯밤에 마스크 쓰고 우리 집에 안 왔냐?"
"뭐?"
"아냐! 그냥 더워서-! 스케줄 바쁠 텐데 그만 가봐라. 난 생각할 게 좀 더 남았으니."
자율학습 시간에 형만이 다가와 옆구리를 찔렀다.
"민혁아. 그 새끼 한번 쳐야 안 되냐?"
"그 새끼가 누군데?"
"상민이 말야. 박상민."
"박상민은 영화배우잖아."
"아니- 육 반 짱 말야!"
"짱 나는 구만 정말!"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머리를 단무지처럼 물들인 형만의 주절거림이 성가셨다. 녀석의 입에서 풍기는 니코틴 냄새도 싫었다. 녀석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충분히 알만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가서 상대해라 그냥."
"내가? 그 새끼 키가 워낙 커서- 좀……."
형만이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키 크다고 다 싸움 잘 하냐? 그럼 한기범이 우리 나라 짱이냐?"
"그게 아니라-."
"지겹다. 그냥 놔두자!"
내가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팔을 베고 엎드리자 녀석은 잠시 후 사라졌다. 돌아서는 형만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뭐야 저 녀석 혹시 겁먹은 거야, 하는 표정. 이럴 때는 정말 한 학급의 짱이라는 자리도 무척 피곤했다. 더불어서 이 엄격한 사립학교도 피곤하고 이 찜통 같은 여름도 피곤했다. 나는 내 팔뚝 밑에 깔린 언어영역 문제집을 한참 응시하다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어차피 대학을 갈 군에 속하지도 못하는 내가 어째서 꼬박꼬박 여기 이 자리에 나와 문제집을 펼쳐놓고 있어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어영역 문제집을 치우고 좀더 편한 프라임 영어사전을 베고 누웠다.
팔 교시까지의 모든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나는 매점으로 가서 시원한 소이밀크를 마셨다. 상민이란 녀석이 무리와 함께 매점으로 들어왔다. 과연 긴 녀석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다. 녀석은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새우 같은 눈으로 슬쩍 훑어보았다. 나도 녀석을 훑어보았다. 별다른 위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이마와 뺨에 여드름이 많은 녀석이었다. 녀석과 싸우게 된다면 필히 가죽 장갑을 착용해야할 듯 싶었다.
교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틀림없이 상민의 무리라고 생각하고 주먹을 들었다.
"왜 이래?"
예상과는 달리 희선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또 너냐?"
"어깨한번 쳤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어째서 이 애가 자꾸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진짜 김희선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만큼이나 희한한 일이었다. 그 애는 나와 달리 공부를 잘하고 또 굉장히 예쁜 소녀였다.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만큼 나에게는 그녀에게 필적할 만한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진 나는 그녀를 그냥 남겨두고 버스 정류소까지 달렸다.
정류소에서 내려 판자촌이 보이는 곳을 지나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반이었다. 나는 어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정글 마당으로 들어가 보았다. 무슨 비밀의 화원 같은 것은 없었다. 거미줄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애벌레만 잔뜩 숨어 있었다.
집으로 가려다가 정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혁이냐? 마침 잘 됐다. 천백오 호로 와라. 짜식, 먹을 복은 있구나."
요컨대 미팅이 끝나고 저녁을 시켰는데 탕수육과 자장면이 너무 많이 남았으니 내가 와서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처리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천백오 호는 정미경의 집이었다. 무슨 휴대폰 만드는 회사의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올해로 스물 두 살이었다. 전형적인 청순가련형의 미인인 그녀는 사실 내가 '하늘모' 만들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작년 가을, 밤 열 시까지의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번인가 그 버스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마침 그녀는 나와 같은 정류소에서 내렸고 나는 본의 아니게 그녀의 뒤를 밟게 되었다. 어쩌면 나와 같은 방향일지도. 하는 아련한 기대 속에 그녀는 정말로 나와 같은 방향을 걷고 있었다. 단정한 정장치마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가는 다리가 무척 추워 보였다. 어쩌면 나와 같은 아파트일지도. 하는 설레는 기대 속에 그녀는 정말로 나와 같은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윤기 나는 단발머리 아래로 앙상해 보이는 어깨가 몹시 힘겨워 보였다. 어쩌면 나와 같은 층일지도. 그 마지막 기대는 무너졌다. 칠 층에서 내가 먼저 내려야 했고, 나는 그녀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십일 층까지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십일 층 어디인가에 사는 여자.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안식처로부터 오 층을 오르면 그녀의 안식처가 있는 것이다. 뻔한 사실이 그토록 기묘하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알고 지내던 정규와 공모를 해서 '하늘모' 모임에 대한 공고를 아파트 게시판에 걸었고 인터넷을 통해 회원을 모집했다. 한 달이 지나자 회원 수는 열 명에 달했고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서로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마침내 첫 미팅을 가졌다. 첫 미팅은 정규의 집에서 가졌는데 마침 내가 기다린 그녀가 와 주었다. 그녀는 수줍음을 잘 타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또한 친절하고 상냥한 여자였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금방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 인간은, 무척 외로운 동물인 것이다.
그후 약 이 개월 동안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져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미팅을 가졌다. 회원수도 스무 명으로 늘었다. 우리는 주로 점심시간에 모여서 가벼운 티타임을 가진 후 회원들이 추천하는 비디오를 두 편 정도 감상했다. 그리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꽤 즐거웠다. 활동이 주춤해진 것은 올해 들어서였다. 별 것 아닌 이유로 회원들간의 감정 다툼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임이 소원해진 것이다. 역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인 것이다.
"그래도 많이 모였네. 난 또 아무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천백오 호에 도착한 나는 방안을 빙 둘러보며 정규에게 그렇게 말했다. 미팅에 참가한 인원수는 나와 정규를 포함해서 아홉 명이었다.
"한 명 더 있었는데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먼저 갔어."
정규가 설명해주었다.
분위기는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후식까지 마친 그들은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반가움을 표해주었다. 나의 시선은 제일 먼저 미경 누나에게로 향했다. 오늘 그녀는 스포티한 스타일이었다. 어느새 길어진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서 한 줄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나에게 시원한 보리차 한 컵을 따라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많이 마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요즘 야근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른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흔 아홉의 영순 이모, 마흔 다섯의 정희 이모, 서른 셋의 태희 누나, 서른 둘의 우식 형, 스물 여섯의 혜주 누나,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분은 오늘 처음 오신 분이야."
우리 모임의 회장인 영순 이모가 그 남자를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여기 아파트로 이사 온지 한 달쯤 되신 분인데 게시판에 붙은 공고를 보고 찾아오신 거래."
남자는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었다.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다. 나이는 우식 형보다는 위인 것 같았다. 가끔씩 그가 우식 형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녕. 내 이름은 정 혁이야. 같은 혁자 돌림이네."
그가 굵은 팔을 나에게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그의 악력은 무척 셌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유도가 삼 단이었고 지금은 이 근처 중학교의 체육 교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네가 주선한 모임이었다며? 아직 학생이, 좋은 생각을 했군. 정말 멋진 모임이야."
그는 점잖게 웃으며 말했지만 어딘지 불쾌했다. 형광등 빛에 드러난 허연 얼굴과 짙은 눈썹, 번들거리는 눈매가 마치 악마의 가면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미경 누나의 거실에는 나와 정규, 혜주 누나 그리고 미경 누나만 남았다. 우리 넷은 뒷정리를 했다. 정규는 방 청소를 혜주 누나와 미경 누나는 설거지를, 나는 남은 음식물을 먹어 치웠다. 정리가 끝난 후 미경 누나가 얼음을 띄운 냉커피를 가져왔다. 우리는 거실 탁자에 둘러앉아 냉커피를 마셨다.
"참, 언니. 아까 그건 무슨 얘기예요?"
미경 누나가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뭐? 송운동 살인 사건? 그 얘긴 그만 하자. 진짜 끔찍해서 정말-."
혜주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내가 혜주 누나에게 물었다.
"살인 사건이라뇨? 뭔데요?"
"너도 못 들어봤니? 송운동 살인 사건이라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혜주 누나는 커피가 아니라 진흙 물을 마시고 있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아까 공포영화 보다 잠깐 나왔던 얘긴데- 송운동이라고 알지? 여기서 좀 떨어진 동네. 그 동네에 다미 빌라라고 있어. 굉장히 크고 좋은 빌란데, 부자들만 사는 곳이지. 그런데 그 빌라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대. 그저께 저녁에 이웃 주민의 신고로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칼 같은 흉기로 목을 어찌나 그어댔던지 뒷목 가죽 한 장만 남겨놓은 상태였대. 게다가 뾰족한 송곳 같은 걸로 눈도 여러 번 찔렀대."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인지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혜주 누나의 말은 내 신경을 마비시켰다.
"끔찍한 건 그 시체가 사실은 죽은 지 한 달이 넘은 시체라는 거야."
"어머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한 달이 넘게 발견되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
미경 누나가 치를 떨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야. 죽은 여자는 부모 돈으로 놀고먹는 백조였나봐. 그런 여자가 이웃하고 차나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나누며 지냈을 리 없잖아. 아마 집에 틀어박혀서 인터넷 쇼핑이나 하며, 온라인 게임이나 하며, 음악이나 들으며 지냈을 거야. 사실 요즘 세상은 이웃의 이름이 뭔지도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세상이잖아. 그러니 그런 여자가 죽었다고 한들 누가 어떻게 알겠어?"
"친구들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핸드폰 해서 연락 안 되면, 얘가 많이 피곤한가보다 생각하지 누가 집까지 찾아가고 그러겠냐?"
"그래도 그렇지……."
미경 누나는 혀를 찼다. 그녀는 커피 잔을 십자가처럼 가슴에 꼭 품었다.
"들어봐! 이제부터 더 무서운 얘기를 해 줄 테니."
혜주 누나가 눈을 번쩍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살인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이라도 한 것 같은 매서운 눈빛이었다.
"경찰이 탐문 수사를 하려고 빌라에 사는 사람 모두를 방문했대. 그런데 글쎄, 그 빌라에서 시체가 두 구나 더 발견됐다지 뭐야. 둘 다 그 빌라에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이었대. 물론 살해된 지 한 달쯤 되었고 시체는 엄청 부패되어 있었대. 그러니까 그 빌라에는 한 달 된 시체가 세 구나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다는 거야."
혜주 누나의 말이 끝나자 우리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묵직한 기운이 거실 탁자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 기운은 지금 막 혜주 누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살육의 이야기가 공포의 입자로 재구성되는 영적인 움직임이었다. 누군가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입 속으로 그 공포의 기운이 고스란히 빨려 들어갈 것 같았기에 침묵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침묵을 깬 사람은 나였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죠?"
혜주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해보았다.
"요컨대 범인은 한 달 전쯤, 그 빌라에 혼자 사는 여자 세 명을 노린 후, 차례차례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홀연히 사라졌단 말이죠. 이거 꼭- 무슨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공포영화 같네요. 정말 공포영화라면 지금쯤 살인마는 다음 희생자를 물색 중이겠죠."
나의 그 말에 침묵은 더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일곱 시가 넘어서였다.
누나는 집에 없었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학생이라 벌써 방학을 했지만 무슨 모임이 있는지 누나는 매일 학교엘 갔다. 대부분 과 친구들과 어울려서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술이나 마시려는 의도일 테다. 특별히 건설적인 무언가를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리라. 그런 게 대학 생활이라면 별로 부럽지도 않았다.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려다가 삼십 초만에 관두었다. 괜히 실없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영어 책들을 저만치 치워버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끼적이기 시작한 소설을 빨리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글문서를 들여다보는 순간 졸음이 쏟아졌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이었다.
악몽 끝에 잠을 깼다. 눈을 뜨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먼지 낀 마우스였다. 컴퓨터 앞에 머리를 처박고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것이다. 허리를 펴고 어깨를 주물렀다.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미쳐 베란다를 보았다. 마스크를 쓴 여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베란다 창을 활짝 열었다. 혹시나 싶어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도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만이 두 개의 벤치를 희미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가 들었다. 나는 마땅히 그곳을 보기 위해 처음부터 잠을 깨고 베란다 창을 열고 이곳으로 나온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십오 층까지 뻗어있는 아파트의 외벽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보다 더 위, 옥상에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새까만 어둠을 등지고 선 그 얼굴은 파마 머리를 늘어뜨린 중년 여성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오늘 모임에서 보았던 하늘모의 회장, 영순 이모였다. 영순 이모는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그 얼굴은 산 자의 얼굴 같지 않았다.
베란다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썼다. 영순 이모의 얼굴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그 얼굴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얼굴이었다. 손목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 정각이었다. 어째서 이런 시각에 이모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일까.
옥상으로 가서 확인을 해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밤새 그러한 고민에 시달렸고 꿈속에서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십삼 층으로 향했다. 영순 이모의 집은 천삼백칠 호였다. 초인종을 다섯 번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영순 이모는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단 둘이서 산다. 나는 그 아들이라도 나와주길 기대하며 초인종을 다섯 번 더 눌렀다. 역시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누나의 방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누나는 자고 있었다. 어젯밤에 또 맨발의 외출을 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누나의 왼쪽 목에 난 점같이 까만 두 개의 상처였다.
<계속>
첫댓글 흥미진진~~
ㅎㅎ 이거 가면 갈수록 무서워지는...
답글 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흡혈귀에게 물린거군요...
마르스님 답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오홋....+..+..~!!
재밌어요..역쉬!!!
잘 보고있습니다.
잘 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