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사회장 엄수…"고향 사랑 숭고한 뜻 깊이 간직…"
(서귀포=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지난 8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폭풍의 화가'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 영결식이 12일 오전 8시 제주 서귀포시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서귀포시 한빛장례식장에 마련된 영결식에는 사회장 장의위원장인 김재봉 서귀포시장과 변 화백의 부인 이학숙 여사를 비롯한 유족, 도내외 문화예술인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김재봉 장의위원장은 영결사를 통해 "명예와 부가 보장된 중앙 화단을 뒤로하고 귀향해 평생을 고향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바친 사랑과 숭고한 뜻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고인이 갈망하던 명품 문화예술의 도시, 서귀포시를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고인의 제자인 김현숙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은 추도사에서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힘들고 외롭게 걸어가신 그 길이 이제 황토 빛으로, 제주의 그림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며 "수족처럼 같이하던 지팡이를 내려놓으시고 사랑했던 서귀포의 그 따스한 햇살 받으며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변시지의 폭풍의 그림들'이란 부제가 붙은 문봉섭 시인의 '부서지는 바람'과 '화가 우성 변시지'란 부제의 '황홀한 고독'이란 추도시 2편이 낭송 돼 유족과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헌화와 분향이 끝나자 고인의 유해는 영결식장을 떠나 자택과 변시지예술공간, 기당미술관을 거쳐 서귀포시 하원동의 가족묘지로 운구됐다. (선생님 편히쉬세요 제자 엉 전도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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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변시지 화백에 헌화
- (서귀포=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12일 오전 제주도 서귀포시 한빛장례식장에서 '폭풍의 화가' 故 변시지 화백의 서귀포시 사회장이 엄수된 가운데 참석자들이 헌화, 분향하고 있다. 2013.6.12. <<지방기사 참고>> khc@yna.co.kr
1957년 귀국한 고인은 서라벌예대 교수를 거쳐 1975년부터 제주대 교수로 근무하며 고향에서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는 폭풍이 치는 바다, 초가집, 까마귀, 기울어진 소나무, 어깨를 움츠린 사내 등을 즐겨 그려 '폭풍의 화가'라고 불렸다.
1987년 문화예술의 불모지였던 서귀포시에 전국 최초의 시립 미술관인 기당미술관이 건립될 수 있도록 하고 개관 때부터 명예관장을 맡아 김기창, 장우성, 서세옥, 이왈종 등 국내 화단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한 명소로 만들기도 했다.
인터넷포털 사이트인 야후가 선정한 세계작가 100인에 들기도 한 그는 지난 2007년 한국에서는 두 번째이자 현존 작가로는 처음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작품 2점을 전시하기도 했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바람, 바다, 말
난무_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 변시지의 두 작품 중 하나.
변시지 기념 초청전 ‘폭풍, 갈 수 없는 곳, 나를 따르지 마라’가 12월 10일부터 1월 9일까지 KBS제주방송총국 개국 60주년을 기념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변시지의 ‘제주시대’ 즉, 80년대 이후 작품들로 구성돼 있어 제주에서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깊이 있게 감상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거친 바다, 젖은 하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나그네
기다림
기다림 소식
제주바다
이어도
고립
생존
말과 까마귀
폭풍의 바다 1
폭풍의 바다 2
폭풍의 바다 5
폭풍의 바다 8
폭풍의 바다 13
희망, 의욕, 평화, 그리고 사랑
점 하나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변시지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다섯 살 때인 1931년. 제주바다를 건널 때 소년이 가슴 깊이 품은 제주. 소년은 제삿날 지붕에 뿌린 잡식을 먹던 까마귀의 기억과 조랑말을 타던 추억, 한시도 쉬지 않고 얼굴을 때리던 바람을 배와 함께 실었다. 스물셋에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1957년 귀국하여 서울대,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하다 1975년 마침내 제주로 돌아간다. 실로 44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1년이면 85세가 되는 원로작가 변시지는 주로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말을 그린다.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가는 한 채의 초가(화가의 말에 따르면 그 초가는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라 한다)와 소나무 한 그루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구부정한 한 사내가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 이러한 변시지 회화의 기본 구도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고즈넉하게 녹아 있다.
변시지의 그림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1997년 변시지가 인터넷에 올린 그림을 본 미국 야후사가 요청하자 그림 사용을 허락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세계 100대 화가’에 등재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변시지의 작품 2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변시지 예술의 구도자적 순례는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마침내 황토빛으로 열렸으며 그것은 이제 그의 사상이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바라보는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어떤 높은 경지에 와 있는 듯하다.
<열화당 미술문고 변시지>의 저자 서종택 교수는 “변시지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결론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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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토색의 신비한 아름다움이 저변에 있습니다.
저도 그의 그림 세계가 마음에 들어서 좋아했는데 아쉽습니다...어째 그리도 고향을 사랑할 수 있는지.
평소 잘 몰랐던 분이네~! 암튼 살아서 인정 받은 분이니 행운아시네~! ^ ^
폭풍과 말...냅튠과 폭풍(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