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롱 파이프 / 이향지
할아버지는 담뱃대로 잎담배를 비벼서 피우셨다
긴 담뱃대 끝 불함지에 잎담배를 꽁꽁 다져 넣고
마루 아래 놋화로에서 잿불을 뒤적거려
담뱃불을 붙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시다
잎담배 대신 조그만 고모를 불함지에 눌러 넣었다
기분 좋게 담뱃불을 붙여 빨아들이자
연기 대신 조그만 고모가
할아버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할아버지는 목에 걸린 고모를
칵칵 소리 내어 뱉었다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
난데없이 마당에 떨어진 고모를 안고
할머니는 술도가로 달려가서 큰 독 속에 숨었다
갓 빚은 술이 가득 들어 있는 깊은 항아리
술독에서 건진 할머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대소변 받아 내며 롱롱 파이프를 피웠다
어느 여름 아주 조그만 나는 고모 집에서 자고
혼자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억수 소나기를 뚫고
큰 내를 건넜다, 쌍무덤 도깨비를 꽁무니에 달고
산유골 고개를 뛰어넘었다 할아버지는 마루 끝에서
혼자 롱롱 파이프를 피우시다 ‘할바시’
젖은 창호지 같은 내 목소리에 놀라 또 한 번 고모를 뱉었다
그날 할아버지가 고모 뱉는 소리는 어떤 천둥소리보다 컸다
『야생』, 파란, 2022.
감상 – 묘한 시 한 편이다. 어떤 가계의 전설을 동화의 말투로 받아쓴 듯한 느낌이지만 동화에서 흔히 보는 흐름도 아니고 해피엔드도 아니다. 단, “할아버지는 눈뜬장님 / 할아버지 담뱃대는 롱롱 파이프”란 동요풍 시구가 반복되면서 전체 이야기가 자칫 비장해지거나 무거워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롱롱’이 주는 어감도 단순하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길이가 길다는 의미겠지만 또 다르게 보면 오래전 고릿적 이야기란 뜻도 된다. 현재까지 길게 이어지는 ‘롱(long)’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와 단절된 느낌을 주는 데서 장난기 다분한 ‘롱(弄)’까지 생각이 미친다.
할아버지 담뱃대로 시작되는 서사는 인과가 불분명한 비약과 마술적 공상으로 인해 흥미로우면서도 아주 낯설다. 할아버지는 담뱃대 끝 담배통에 담배 대신 딸(화자에겐 고모)을 눌러 담는다. 할아버지는 고모를 보지 못했는가. 고모는 조그마하다. 조그마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모는 할아버지에게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시인은 고모가 담긴 담배통을 생경한 “불함지”란 단어로 대신했다. 고모는 단어 그대로 불구덩이를 뒤집어쓴 것이다. 고모는 끝내 바닥에 내팽개쳐진다.
할머니는 고모를 안고 몸을 피했다가 술독에 빠져 반신불수가 된다. 한 불행이 다른 불행을 불러오고 그 뿌리엔 할아버지가 있는 셈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고모를 연상케 하는 조그만 화자의 등장은 할아버지의 이성을 또 한 번 잃게 한다. 분노인지 자책인지 모를 과거의 한 장면은 이렇게 페이드아웃 된다.
여러 함의를 가졌을 서사를 무리하게 단순화시킨 오류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또한 독자의 권리임을 믿는다. 이런 믿음으로 한 마디 보탠다면, 이 시의 파이프는 남성의 상징이다. 여성을 실제보다 조그맣게, 미미하게 보고 부당하게 대하는 그런 남성이다. 전근대적인 남성 가부장의 외침은 마지막 “천둥소리”를 정점으로 꺾여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시를 쓴 이향지 시인의 고향은 통영이다. 「가죽」을 보면, 증조할머니가 일구었다는 산유골 어느 집에서 호랑이 기운을 받고 태어나서 잠결에도 가죽을 쓸어보게 된다고 했다. 담뱃대 문 할아버지에 대한 개인 기억을 소환해서 한 가계의 역사와 변곡점을 보여주는 시 한 편도 지역민 삶이 녹아있는 마을 공동체 이야기가 그 원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옛날 옛적(Long Long years ago)하면 그냥 귀가 솔깃해지는 마음이 하고많은 시 중에 「롱롱 파이프」에 머물게 했나 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