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탑의 이해
우리나라 탑의 구조는 목조건물의 구조를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탑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목조건물의 건축양식이 많이 반영됩니다.
흔히 3등분으로 나누어서 그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편하고 일반적인데
탑의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층수를 세는 방법은 탑신석과 옥개석 각 1개씩이 한 층이 됩니다.
방형의 돌과 그 위에 지붕모양(위에는 반듯하고 아래는 계단처럼 생긴.. 일명 층급받침이라고 하는데)의 돌 한쌍을 한 층.. 그 위에 그거 또 있으면 2층.. 이런 식으로 층수를 셉니다.
층수를 세면서 조심할 것은 탑 윗부분에 밥상처럼 생긴 노반이란 부분은 탑신이 아니라 상륜부에 속하는 부속으로 이것은 층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탑의 층수가 홀수(3,5,7,9...)으로만 되어 있는 이유는
불교적 차원의 숫자의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즉, 불교에서는 홀수를 양의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흔히 듣는 말로 '음양오행설'이라고 할 때 음양이라하면
음은 잡귀와 부정과 난잡을 뜻하고 어두운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양은 반대죠....
수학에서도 음수, 양수을 배우는데....
그리고 불교에서는 10을 만(卍)이라고 읽습니다.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것입니다.
인간의 경지로는 9까지가 되겠고....
바둑이 중국에서 전래되었는데, 최고의 고수를 9단이라고 하죠?
10단은 없습니다. 바로 신의 경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탑의 의미와 명칭 유래
탑(塔)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고 예배하는 대상물이다.
탑이란 말은 고대 인도에서 무덤을 이르는 말인 '스투파(stupa)'가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탑파'로 되고, 줄여서 '탑'이 된 것이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그 안에 모셔놓고 부처를 예배하듯이 하였으나,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건립되는 모든 탑에 진신사리를 모실 수가 없으므로 후대에는 다른 사리나 불경, 작은 금동불 등 공경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탑 안에 대신 모셨다. 그래서 절에 들어가면 부처를 모신 법당 앞에 있는 탑에 합장하여 예배하거나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탑은 크게 재질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나뉜다. 그리고 탑의 이름은 대개 그 탑이 있거나 옮기기 전에 있던 자리, 층수, 재질에 따라 붙이게 된다. 말하지면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은 불국사에 있는 삼층으로 지은 돌로 된 탑이라는 뜻이다. 또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절 이름은 모르고 지금 안동시 신세동에 있으며 벽돌을 쌓아 세운 칠층탑이라는 뜻이 된다.
지금 경북궁에 있는 경천사터 십층석탑은 본래 경기도 개풍군의 경천사터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므로 명칭이 그러하다. 또한 일반이 쉽게 탑의 층수를 알려면 지붕돌(옥개석)의 수를 세워보면 된다.
탑의 기원과 나라별 변천
우리 나라에서는 '탑'이라고 하면 대개 불국사 석가탑처럼 돌을 다듬어 쌓은 삼층석탑을 떠올리지만, 세계 모든 탑이 재료나 모양에서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
'탑'이라는 명칭이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지역어에 맞게 정착되었듯이 탑의 모양도 지역 특성에 따라 형성되었고 그래서 나라마다 특징도 다르다.
탑은 원래 인도 고유의 무덤 형식에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돌아가자(涅槃) 유해를 화장하여 여덟 나라에 나누어주고 탑을 세우게 하였으니 그것을 근본 팔탑이라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 산치에 있는 거대한 탑으로 기원전 1세기에 기본 구조가 축조된 것이다. 반구를 엎은 모양인 무덤 자체에는 맨 위에 우산 같은 덮개처럼 산개(傘蓋)를 얹었을 뿐 다른 장식이 없으나, 둘레에 돌 난간을 두르고 동서남북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조각한 문을 세웠다.
그후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질 때에 한길로는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의 북방을 통해 우리 나라로 전파되었고, 다른 한길로는 인도 남부의 스리랑카에서 바닷길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치고 중국 남부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의 묘탑 형식이 고집되기보다는 각 지역의 고유한 건축물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원래의 다층누각이 초기의 탑이 되었고 뒤에 벽돌을 쌓아 구축한 전탑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탑의 연원과 형성 과정
중국을 통해 불교를 수용한 우리 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다층누각 형식을 본받아 다층목탑을 지었다. 그 자리가 발굴된 것으로 평양의 금강사 팔각목탑자리와 경우 황룡사터 사각목탑자리, 부여 천군리 절터 목탑자리 등이 있다. 시대에 가장 널리 지어졌고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계속 지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전란이 나거나 했을 때에 불에 타기 쉬운 성질 때문에 거의 파괴되었고, 조선 후기에 지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만이 목탑 형식을 간직한 건축물로 남아 있다.
18세기에 지은 쌍봉사 대웅전은 특히 목탑의 고유한 기울기를 그대로 간직하여 삼층목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녔는데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은 그 자리에 복원되어 있어 원래의 고아한 맛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목탑의 형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탑들을 겉에서는 삼층 또는 오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높은 기둥으로 지탱하여 통층으로 뚫려 있다.
목탑의 그러한 제약을 깨닫고 좀 더 견고하고 불에 타지 않는 구축물로 고안된 것이 벽돌을 쌓아 세운 전탑이나 돌을 쌓아 세운 석탑이다. 나라마다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하여 탑을 세웠는데, 중국에서는 풍부한 모래를 이용한 벽돌집이 이미 발달했던 터라 전탑을 많이 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의 전탑을 찾을 수 없다. 또 벽돌 생산 자체도 손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대신 풍부한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은 탑을 볼 수 있는데, 661년에 건립된 경주의 분황사탑이 그것이다. 원래는 오층 이상이었으나 지금은 삼층까지만 남아 있다.
분황사탑이 석재를 벽돌 크기로 자른 반면에, 돌 크기를 좀더 크게 하여 부재의 수효를 줄이고 모양을 단순하게 하여 쌓은 탑이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이다.
이런 탑들은 몸돌에서 한 단계씩 점점 넓혀가며 쌓다가 가장 넓은 면에서 다시 한 단계씩 좁혀가며 쌓는 식으로 하여 옆에서 보면 한 층의 모양이 마름모꼴을 이룬다.
백제에서는 돌 자체의 성질을 살려 목탑의 부재를 돌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전라북도의 익산의 미륵사탑은 7세기 초 무왕이 미륵사를 세울 때 가운데에 목탑을 세우고 동서로 석탑을 세웠는데, 그 중에 서쪽 탑 일부가 남은 것이다. 1층 기둥 모양의 돌에 목재를 다듬듯이 배흘림을 주었고, 기둥 위에도 목조 건축의 가구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두공과 방(枋) 등을 두었으며, 넓은 판석을 다듬은 지붕돌의 처마 부분도 기와집의 지붕처럼 처마선이 살짝 들린 느낌을 주도록 석재를 깎았다.
원래는 구층탑이었으나 윗부분이 무너져 지금은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을 그대로 본따 동탑 잘에 새로 탑을 복원해 놓았다.
이처럼 목재를 석재로 대체하려면 돌을 나무처럼 깎아야 하므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의 성질에 맞게 세부를 단순하게 해서 다듬게 되었으니 그렇게 만든 탑이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오층탑이다.
미륵사탑보다는 훨씬 간결해졌으나 1층 탑신에는 여전히 배흘림 수법이 남아 있고, 두공 위에 지붕이 얹힌 형식이나 얇은 판석으로 처마선의 느낌을 살린 점 등에서 목조 건축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인 비례로는 땅에 발 붙이기보다는 하늘을 향한 상승감이 더 강한 편이다.
탑의 이런 모양은 삼국 통일기에 매우 대담하게 정리되어 형식적인 통일성을 보인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동해를 바라보는 산중턱에 감은사를 세웠으나 끝을 보지 못한 채 죽자, 그 아들인 신문왕은 감은사 건립을 마무리하고 동남쪽을 향한 금당의 앞쪽 좌우로 의젓하고 둔중한 쌍탑을 세웠다.
681년에 완성된 이 감은사탑은 모든 목조적인 세부가 정리되어 단순해지면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인다. 감은사터 쌍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7세기 중엽 삼국 통일의 기상과 힘을 표현한 반면, 100년 뒤에 축조된 불국사 석가탑은 전체를 받치는 기단부보다 몸돌과 지붕돌이 작아져 안정성이 강조됨으로써 신라문화 전성기인 8세기의 안정됨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9세기 이후에 세워진 탑들은 형식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이 석가탑을 본따 세워졌으므로 석가탑을 석탑의 전형 양식이라고 한다.
전형이 확립된 뒤의 탑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 중심에서 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경상남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까지 많을 절이 지어졌는데, 거기에 세워진 탑은 석가탑이 작아진 모습이다.
우리가 절에 가서 볼 수 있는 탑들이 대개 그러하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쌍탑을 세운 예도 많다.
감은사탑을 동서 쌍탑으로 세운 것에서부터 전남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앞의 쌍탑, 근처에서 옮겨온 것이지만 경북 영주 부석사의 쌍탑 등이 그 보기이다.
석탑
석탑의 의의
탑파는 '탑'이라고도 하고 '스투파'라고도 쓰이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 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에서 비롯되었다. 교주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므로 불가에서는 가장 존엄한 존재이고 예배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사 찰 경내의 중심부 곧 법당 바로 앞에 건립하여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한편 승려의 사리탑은 부도라 하여 불가에서의 숭배대상은 될 수 있지만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기 때문에 사찰 경내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건립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리탑은 세워진 위치로 우선 구별된다.
석탑의 발생
우리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 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목탑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남아있는 청암리사지에서 8각전의 8각탑파와 대동군 임원면 삼오리사지에서 8각당의 기담부가 조사되어 목탑지로 추정된바 있다. 또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의 군수리사지와 익산군 왕군면의 제석사 지에서 방형의 목탑기단부가 확인되었으며,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에서 거대한 방형 9층 목탑지가 남아있다. 이러한 목탑의 유형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이렇듯 백제에서는 사찰이나 탑파의 건립이 융성했으며 특히 건축술이 발달하였다. 우선 목탑을 살펴보면 그 재료가 목재이므로 불에 타기 쉬워서, 사실상 여러 차례의 병화로 모두 타버리고 고대에 만들어졌던 목탑의 실물은 없다. 그러나 신라 시대 목탑이 있었던 흔적으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와 사천왕사 목탑지, 망덕사 목탑지 등이 남아있다. 백제시대의 목탑 유적으로는 부여 군수리사지의 목탑지 와 평안남도 대동군 상오리사지의 목탑지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충북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은 옛 목탑의 양식을 오늘날까지 전해 주고 있는 유일한 목탑의 유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채취되는 자연적인 조건 아래에서 석탑이 크게 발달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천여기의 탑파 가운데 대부분이 석탑이고 그 모양도 다양하며 다채로운 수법을 보이고 있어 한국의 탑파를 이해하고 탑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곧 석탑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석탑의 양식
(1) 삼국시대
[백제탑]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전북의 미륵사지 석탑과 충북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뿐이지만 이 2기의 초기 석탑에서 석탑의 발생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두탑은 건조 재료가 화강암이고 가구 수법이 매우 견고하다. 우선 미륵사지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있는데 이 탑을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 작으며 모서리 기둥이 배흘림(entasis)으로 표 현되었다. 한편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隅柱)에 보이는 배흘림의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과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 옥개석 하면의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형시킨 받침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두두룩한 우동(隅棟) 마루형 등에서 목탑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 수법에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 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풍을 풍기고 있다.
[신라탑] 신라의 석탑은 전탑을 모방하는데서 출발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 사석탑으로 이 탑은 전탑 형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그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 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 제 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그런데 이 탑도 백제의 두 석탑과 같이 기단부의 우주 탱주나 옥신의 우주, 주신에 배흘림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2) 통일신라시대
[전형석탑]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비로서 한국 석탑의 전형이 성립되었고 백제와 고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다. 이들 전형양식의 건 조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구축하고 그 위에 2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하기단 면석에는 각 면에 양쪽 우주와 2주의 탱주를 각출하였으며 상층기단 감석에는 하면에 부연을 모각하였다. 그러나 신라하대(9세기)에 접어 들면서 점차 변화를 보였다. 이는 정치와 사회의 혼란과 선종의 대두로 예술도 힘찬 기상을 잃고 섬약해감에 따라 조형미술품도 그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 양식도 간략, 생략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나타난 변화로 2층 기단이 단층기단으로 되고 5단 에서 3∼4단으로 간략화되고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아주 심해졌다. 이 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월광사지 서삼층석탑과 대흥사응진전삼층석탑, 불국사삼층석탑등 많은 탑들이 있다. [특수형 석탑]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형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들이 건립되는 한편 '이 형적인 석탑'들이 출현하였다. 탑의 전체적인 규모는 조금 축소되면서 장식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3) 고려시대
이 시대의 석탑은 훨씬 다양한 양식으로 변하고 백제 신라양식의 변형과 개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고려양식이 나타남. 그리고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히 나타나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백제 때인 충남·전북 지역에서는 백제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 중 많은 수의 일반형 석탑이 신라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옥개석의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추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고 단층기단이 많아지고 삼층기단 갑석의 부연이 형식화되거나 생략되는 등 부분적으로 약화되었다. 고려시대의 신라양식 석탑으로 개심사지 5층석탑, 보원사지 5층석탑, 천흥사지 5층석탑 등이 있다. 백제 양식의 석탑은 옥개석 양식이 모 두 판형석의 낙수 면석이고, 대개 그 밑의 받침부가 별석으로 조성된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이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각 부를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량사오층석탑이 있다.
(4)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여운이 아직도 엿보이는 시기여서 불교미술의 분야에 서도 조성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던 반면 조선후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력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선초기 석탑 중 방형중층의 일반형 석탑으로는 낙산사 칠층석탑, 신륵사 다층석탑, 벽송사 삼층석탑등이 있다. 그 중 벽송사삼층석탑은 방형중층의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어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여 신라의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에 있어서 삼층면서에 탱주가 생략되고 탑신 부에 있어서는 옥개 받침이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들어 일률성이 없어 기본형 식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체의 조형이 무기력해진 점등과 아뢰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이형석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원 각사지 삼층석탑은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 수법이 세련되었으며 의장이 풍부하여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수한 석탑이다. 또 수종사팔각오층석탑은 평면이 팔각인 원당형을 이룬 탑으로 현존하는 희귀한 예의 8각형석탑이다.
한국의 전탑에 대하여....(열화당 한국의 미술2/저자 김희경 1986.11.1 에서 발췌)
전탑은 한국 탑파중에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건축물에서 전재(塼材)를 사용한 것은 매우 적으며, 다만 일부의 장식용으로 벽돌이 쓰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탑파의 발생과 그 계보(係譜)의 변천과정을 훑어 보면, 신라에서는 먼저 목탑이 발생하였고, 그 다음에 목탑양식을 본받은 전탑이 나왔으며, 목탑과 전탑의 두 양식을 갖춘 석탑의 양식이 정립되는 과정을 밟아 왔다.
전탑의 존재를 문헌상으로 살펴보면, 『삼국유사』권4에 신라 선덕여왕 때에 석양지(釋良志)가 작은 전탑을 만들어 석장사(錫杖寺)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삼국시대에 전탑이 조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권10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그 절 남쪽에 고려 태조가 세운 7층전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의 권49 갑산조(甲山條)에는 백탑동(白塔洞)에 전탑이 있다고 했으니, 고려조에서도 전탑이 세워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전탑으로는 안동 신세동7층전탑, 안동 동부동5층전탑, 안동 조탑동5층전탑, 칠곡 송림사5층전탑, 여주 신륵사다층전탑 등 5기가 있고, 파괴되어 전재(塼材-벽돌과 그 자재)만 전하는 것으로는 안동 금계동 다층전탑, 청도 불령사전탑, 안동 장기동전탑, 안동 개목사전탑, 청도 운문사작압전 등 5기가 있으며,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고 흔적이 없는 것도 몇 개의 예가 있다.
위의 탑을 보아 전탑의 특징을 간추리면 단층기단을 하고 있고 옥개추녀가 단촉(短促)하며, 옥개 상하에 층단을 마련하고 감실을 설치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전탑의 재료로 화강암을 혼용한 것은, 중국의 전탑이 전재만으로 축조된 것과는 사뭇 다른데, 이러한 점은 전탑이 우리 것으로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음을 뜻하며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목조탑파(열화당 한국의 미술2/저자 김희경 1986.11.1 에서 발췌)
탑파 양식의 형성과정으로 보아 우리나라 초기의 탑파는 목조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면이 방형(方形) 또는 다각(多角)이었고, 다층인 누각형(樓角形)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고루형(高樓形)인 목탑양식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고루 건물이 유난히 발달했던 중국에서 영향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사정은 고구려.백제.고신라가 모두 동일하였을 것 같다.
먼저 불교가 전해진 고구려의 경우를 본다면, 오늘날 남아 있는 탑파는 하나도 없는데, 다만 1938~9년평양 시외의 청암리(淸岩里)절터의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8각기단의 목탑지(木塔址)와, 1940년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大同郡 林原面 上五里)절터에서 발굴된 목탑지가 추정될 뿐이다.
백제의 목탑으로는 부여 군수리(軍守里)의 방형 기단지,부여 부소산(扶蘇山)산허리에 있는 절터의 목탑지,최근의 조사연구로 전북 익산군 왕궁면(王宮面)의 제석사지(帝釋寺址)에서 방형의 목탑지가 발굴되어 백제말 무왕(武王,600~641)대의 유지(遺址)로 추정되고 있다.
고신라(古新羅)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전해지기는 하였으나(법흥왕14년,527년), 처음부터 당탑가람(堂塔伽藍)의 건립이 왕성하여 오늘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여러 절터에서 목탑자리를 찾을 수 있거니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황룡사(皇龍寺)목탑지를 들 수 있겠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에 경주 구황동(九黃洞)에 세워진 황룡사9층목탑은 한반도에 세워진 탑파중 최고(最高),최대의 것이며, 이에 관하여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탑상편 황룡사 구층탑의 기록을 보면 '선덕여왕이 황룡사를 지으려하니 신하들이 백제에서 장인을 초빙하여야 한다고 하여 보물과 비단으로 백제에 청하여 아비지(阿非知)초빙하였다(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는 기록이 있다)
1964년 이 탑자리에서 발견된 900여자의 금동탑지(金銅塔誌)에서는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법사의 건의로 삼국통일의 국가적.민족적인 염원 아래 백제에서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이 황룡사 목탑을 건립하는 대역사를 맡게 하여 완공한 사실과,신라 고대의 사리장치법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탑은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신라인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오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지금은 절터에 남은 방형기단과 64개의 방형초석으로 높이 225척의 큰 탑을 머리속에 그려 볼 따름이다.
위에 든 여러 목탑들은 석탑이 발생하기에 앞서 국가의 대탑으로 세워지곤 하였다. 통일 후에는 쌍탑가람제의 최초의 예로 사천왕사목탑지와 망덕사동서탑지, 그리고 보문사동서목탑지등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토벌하려 함에 당시 입당하였던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문무왕 15년(675)에 귀국하여 아뢰어 명랑법사(明朗法師)로 하여금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으로 당나라의 병사들을 물러가게 하였다는 절이다.
망덕사탑은 사천왕사탑보다 7년 늦게 건립되었는데 보다 약화된 평면배치로 보인다.
보문사 동서 목탑지는 동탑지에 초석 1개가 남아 있을 뿐이고 서탑지 중심에는 8엽의 겹입 연꽃이 조각된 심초석(心礎石)이 있어 일찍이 유례를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그 양식이 주목된다.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왕건이 신라천년의 사직을 무혈로 물러받고, 옛신라의 황룡사 목조9층탑을 본받아 개경에 7층탑,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국통일을 기원하게 된다.고려말에는 경조면연천세억(景祚綿延千世億)을 위하여 개경 연복사목조5층탑 건립을 발원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왕조가 바뀌게 된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 공사를 이아 받아 완성시키고 '역자불교이방국'(亦資佛敎利邦國)이라 하였다.
그는 또 비(妃)인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를 창건하고 동7년에 목조5층탑을 세워 여기에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목조5층탑을 탑파라 부르지 않고 사리각(舍利閣)이라 부른 점이다.
이 탑은 조선왕조때 건립된 것으로 가장 뚜렷한 목탑인데,『중종조실록』에는 중종5년(1510)3월28일 '흥천사사리각재(興天寺舍利閣災)'라 기록하여 그 소실을 전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은 법주사의 5층목탑을 팔상전이라 부르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팔상전은 탑 내부의 사천주(四天柱)사이의 네 벽에 석가본생(釋迦本生)의 팔변상도(八變相圖)가 묘사되어 있어서 마치 인도의 고탑에 석가불본생담을 새겨 사리봉안의 묘처(廟處)를 장엄하게 하여 석가불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팔상전은 불탑이기도 한데 이와같이 불탑을 팔상전이라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의 '사리봉안 묘처'를 가르키는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여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리봉안의 묘처인 탑파의 호칭에 변천을 가져 왔고, 사리봉안의 묘처가 탑파 형식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문헌이나 유적을 널리 찾아 본다면 더욱 많은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도읍인 경주의 모습을 "절들은 별처럼 자리잡고, 탑들은 기러기 날 듯이 솟아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묘사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탑은 거의 목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웃나라의 재난을 막기 위한 국가적.민족적 염원으로 황룡사 목탑을 세운 것을 본받아 고려 왕건이 개경에 7층탑을,조선 태조 이성계가 연복사탑을 완공하는 등, 역대 왕조의 건국자가 탑을 세우고 불력에 의하여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했던 역사적 사실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목탑으로는 보은 법주사 5층탑(팔상전)과 화순의 쌍봉사대웅전이 있을 뿐이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탑에 깃들인 역사와 미학
글 정리:김준호(97.10.25)
1. 탑-사리신앙의 원류
탑은 집이다. 부처님의 몸이 모셔져 있는 집이다. 탑 속에 사리가 있으면 부처님의 유골이 담긴 집이요, 경전을 모셔 놓으면 부처님의 영원한 몸[法身]이 모셔진 집인 것이다.
탑(塔)이란 본래 탑파(塔婆), 즉 스투파(범어;St pa) 또는 투파(팔리어;Th 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한 약칭이다. 탑은 사리(舍利, ar 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교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火葬)함으로써 그 유골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이다.
그런데 탑은 사리의 봉안 유무에 따라 탑파(塔婆) 이외에 지제(支提, Chaitya)라 불리기도 한다.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파'라 함에 대해서 지제(支提)는 사리가 없는 탑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투파'는 부처님의 신골(身骨)을 봉안하는 묘소(墓所)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리의 있고 없음을 구별하기란 사실상 매우 곤란한 문제이며, 따라서 이러한 정의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오늘날의 불교국에서는 탑과 지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불신관(佛身觀)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 뿐만 아니라 불경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에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 통용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 말하게 된다.
물론 불교 최초의 탑은 석가모니의 불사리를 봉안한 것인데, 보통 근본8탑 또는 근본10탑이라 부른다. 석가모니가 열반하자 소식을 접한 주변의 7나라에서는 각각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겠다'고 하면서 석가모니의 장례를 치른 말라족에게 사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말라족이 거부하자 마가다국의 왕인 아자타삿투와 바이샬리의 릿차비족들은 무력으로라도 사리를 입수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사리의 분배를 둘러싼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드로오나'라는 바라문이 중재에 나섰고, 마침내 사리를 8몫(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성의 석가족, 알라캅파의 부리족, 라마그라마의 콜랴족, 베티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쿠쉬나가라의 말라족)으로 나누어서 원만하게 분배하였다. 그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8탑'이라 한다. 그리고 배분을 중재했던 드로오나는 사리가 들어 있던 병을 받아 병탑(甁塔)을 세웠고, 뒤늦게 당도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웠다. 따라서 이를 모두 합하여 '근본 10탑'이라 부르는 것이다.
2. 불탑 건립의 목적
불탑 건립의 목적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사리신앙에 있다. 그래서 탑은 불상과 더불어 불교의 예배대상으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이른바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불탑 건립이 호국·호법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와 연관을 맺으며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목적은 곧 불탑건립의 외형적 동기를 부여해준다. 예를 들어 황룡사 9층목탑의 경우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되며, 신라의 감은사의 창건 또한 왜병을 진압하고 국가를 보호하려는 호국적 발원에서 출발되었으며, 이곳에 건립된 3층석탑은 삼국통일의 기념비적인 쌍탑장엄을 이룩하였던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불탑의 건립은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나 형국에 따라 산천을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수많은 불탑이 건립되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특히 불탑 건립의 한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탑의 기본형식과 종류
1) 인도
불교 전성기의 인도탑은 현재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완전에 가까운 것은 기원전 3-1세기에 세워진 중인도의 산치대탑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이 탑의 구조를 보면 밑에서부터 기대(基臺)·복발(覆鉢)·평두(平頭)·산개(傘蓋)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기대(基臺)는 귀중한 것을 높은 대(臺) 위에 모셔서 경의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복발(覆鉢)은 반구형(半球形)의 봉분이다. 마치 엎어놓은 발우(鉢盂)모양과 같다고 하여 복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탑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그야말로 '스투파'에 담긴 뜻처럼, 흙을 쌓아 올린 분묘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평두(平頭)는 네모진 상자의 모양으로 복발 위에 놓여지며, 신성한 곳을 둘러싸는 울타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평두의 한가운데는 높이 솟은 간(竿, 장대)이 있고 그 위에 산개(傘蓋)가 있다. 산개는 우산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인도나 중국에서의 ?頻岵? 가린다는 실용적인 의미와 함께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산개를 널리 사용하였다.
이러한 인도의 탑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의 상륜부에 남아 있다. 곧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인 것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나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는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 나라의 탑의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중국
중국에서 탑이 건립되는 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어 불탑이 세워진 것과는 그 사정이 다르다. 중국에서는 옛부터 궁전건축을 중심과제로 하여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그 양식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도교를 믿는 집단적 조직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이 고취되어 있었고, 이와 결부된 고층의 누각(樓閣)건축을 세우는 기술도 개발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처음부터 인도탑과는 다른 모습의 독창적인 탑이 건립되었다. 중국인들은 인도탑을 상륜부로 삼고 그 아래 쪽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고층 누각(樓閣) 형태인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를 만들어서 탑의 중국적 변신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탑이 문자로써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후한(後漢) 시대부터라고 하지만, 조각품이나 실례(實例)로서 그 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위(北魏)의 탑이 가장 오래다. 운강 석굴에 새겨진 단층(單層)의 탑신에는 인도탑 모양의 지붕을 얹은 형식이 있는가 하면 여러 층을 겹친 층탑(層塔) 형식의 조각 등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탑의 대부분은 목조(木造)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남북조시대(386-589) 초기부터는 실제로 많은 목탑이 건립되었으며, 수나라 때까지는 목탑중심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초기에는 인도탑과는 다른 목탑을 먼저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618-907) 때부터는 전탑(塼塔)이 점차 많이 건립되었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서 쌓아 올린 탑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전탑으로는 북위(北魏) 정광4년(523년)에 건립된 신통사(神通寺) 사문탑(四門塔) 등이 전하며, 당나라 대의 대표적 전탑으로는 현장법사가 세운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을 들 수 있다. 이 절과 탑은 648년에 건립되었으며, 대안탑은 4각 7층탑이다. 당나라 이후의 오대(五代)·송대(宋代)·요(遼)·금(金) 시대에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탑이 건립되었고, 원대(元代)부터는 목탑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탑 일색이 되었다.
3) 한국
① 목탑(木塔)
초기의 중국 목탑 양식은 우리 나라에 그대로 전래되어 삼국에서도 고루형(高樓形)의 목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물론 삼국시대의 목탑은 현재 하나도 남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미 광개토대왕 때 요동성 가까이에 7층의 목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4c말에는 우리 나라에 목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목탑자리는 모두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기단은 8각형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목탑은 다층다각의 매우 큰 건물이었으며, 탑이 법당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부여와 익산 등지의 목탑자리에서 그 원형을 추리해 볼 수 있는데, 고구려의 목탑과는 달리 정사각형이 평면으로 되어 있었고, 위치도 중문(中門)·목탑·법당·강당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3국 가운데 건축기술이 가장 앞섰던 백제의 목탑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목탑을 변환시켜 만든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남아 있어 백제 목탑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의 결구수법(結構手法, 얽어 짜서 조형물을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정림사지 석탑(국보 19호)은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층의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 양식'(기둥의 아래는 굵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수법), 얇고 넓은 각층의 옥개석 형태, 낙수면 4귀퉁이에 우동 마루형은 이 탑이 목탑에서 발전된 석탑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목탑은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이 탑은 우리 나라 목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신라인의 정신적 조형물이 되었으나, 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탑 높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225자를 환산하여 74.22m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왕건이 신라의 황룡사 9층을 본받아 개경에 7층목탑, 서경에 9층 목탑을 세워 후삼국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게 된다.
조선시대에서도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천사를 창건하고 1398년 5층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한 목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1605년 사명대사가 재건한 법주사의 팔상전(높이 22.7m)만이 유일하게 남아 과거 우리 나라 목탑의 윤곽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특히 팔상전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수행과 예배의 장소로 이용되었던 목탑의 참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밀폐되어 내부가 통해있지 않는 석탑이나 전탑과는 달리, 목탑 속에서는 예배를 비롯한 각종 의식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탑 바깥쪽을 돌면서 행하는 탑돌이 의식도 이 팔상전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② 전탑(塼塔)
우리 나라는 중국과는 달리 건물을 벽돌로 짓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지질구조상 우리 나라는 화강암 등의 석재가 풍부하고, 흙 또한 뻘보다는 모래 성분이 많다. 뻘 등을 이용하여 벽돌을 만든 다음 다시 그것으로 탑을 쌓는다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인 노역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전탑이 크게 유행하지 못한 채 경상도 일부지역(안동 일대)에서만 전탑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전탑은 안동 신세동 7층탑, 안동 조탑동 5층탑, 안동 동부동 5층탑, 송림사 5층탑, 신륵사 다층전탑 등 모두 5기뿐이다. 이들을 통하여 신라시대 전탑의 특징을 간추려 보면,
ⅰ. 기단부가 단층으로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ⅱ. 지붕[屋蓋] 추녀가 매우 짧고 가파르며
ⅲ. 지붕의 상하에 매우 많은 층단을 마련하였고
ⅳ. 탑신의 초층에는 인왕상 등이 지키는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는 점 등이다.
전탑(塼塔)과 석탑(石塔)의 중간형태(또는 모전석탑과 전탑의 중간형태) 즉 모전석탑(模塼石塔, 전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석재로 만든 탑)의 전형인 분황사탑도 화강암의 기단부 위에 안산암이라는 회백색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탑이다. 탑의 기단부 사방에는 석사자(石獅子)가 지키고 있으며, 1층의 사방에는 각각 문이 있고 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존하는 신라 전탑의 특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③ 석탑(石塔)
우리 나라의 불탑은 7c초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미륵사지 석탑은 이를 대표하는 석탑이다.
전탑 이후의 신라 불탑은 그 양식을 그대로 추종하면서도 이를 변용 하여 더욱 간결하고 장중하게 처리하여 새로운 조화미를 성공적으로 구가하게 된다. 이른바 신라 석탑의 탄생이다. 그 대표적 예가 고선사지 3층석탑을 비롯하여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이다. 이들은 모두 신라 7c중엽에 건립된 석탑으로서 그 장중하고 웅장한 남성적 기백은 바로 신라 국력의 외형적 표출이라 할 것이다.
특히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라 삼국통일의 기념비적 대탑으로서 신라 전형석탑(典型石塔)의 양식을 완성하였으며, 그 형태는 방형을 기본으로 하여 2중기단 위에 중층(中層)의 옥개석을 형성한 특수한 신라석탑의 형식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후의 신라석탑은 감은사와 고선사의 석탑을 본받으면서도 차츰 그 규모가 축소되고 간략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을 추종한 석탑은 이후 전국적으로 유행되었으며, 그 대표적 양식을 완성한 것은 역시 8c 중엽에 이룩된 불국사의 석가탑이다. 이 석탑은 상하좌우 어디에서나 잘 조화된 하나의 군형미를 형성하고 있고, 그 세련된 선과 형에서 한민족의 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석가탑의 양식을 모범으로 하여 이후 신라의 석탑은 장소를 달리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건립되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서탑 석가탑과 마주하고 있는 동탑 다보탑은 그 건축방식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각부의 양식은 더욱 화려·섬세하고, 보다 치밀한 세부의 결구수법(結構手法)을 지니고 있고, 온갖 기교와 장엄을 더하고 있어서 도저히 돌로 다듬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석조 건축의 최고봉을 이루어 놓고 있다. 따라서 이 탑은 석가탑이 신라의 전형석탑(典刑石塔)이라 함에 대하여 그 놀라운 양식적 특수성 때문에 이형석탑(異型石塔)이라 불린다. 이와 같은 이형석탑(異型石塔)의 대표적 예로는 다보탑과 함께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월성 정혜사지 13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석탑은 8c중엽을 지나 9c로 접어들면서 도읍인 경주를 떠나 점차 지방으로 확산된다. 선불교(禪佛敎)의 전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흥 보림사 쌍탑과 영주 부석사 3층석탑, 합천 청량사 3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서 3층석탑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이들 석탑은 상층기단의 탱주가 1주(이전에는 상층기단 탱주 2, 하층기단 탱주 3)로 변화되어 있다. 다만 옥개석의 받침은 이전처럼 5단을 유지하고 있다.
그 뒤 9c말로 내려오면서 석탑의 규모는 더욱 작아지고 약화된다. 남원 실상사 동서 3층석탑과 대구 동화사 금당암 3층석탑 등이 이 시기의 것인데, 하층기단과 하층기단의 탱주가 모두 1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받침도 4단 또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신라말기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형은 2층의 기단부가 단층으로 변화하는 경우인데, 문경 내화리 3층석탑과 봉암사 3층석탑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석탑의 분포는 개경·평양·경상도·충청전라 등의 4지역을 중심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백제의 옛 땅인 충청도 지방에는 백제 때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정림사지 석탑과 매우 유사한 목탑계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여 무량사 5층석탑, 부여 장하리 3층석탑 등 옛 백제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석탑이 8기가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땅에는 8각 또는 6각으로 된 다층석탑이 많이 건립되었다. 이들 석탑은 현존하지 않지만 1938년 발굴조사에서 8각목탑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라 계통의 석탑이 계승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포용한 석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어 석탑보다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한편 원나라의 지배로 인해 1348년 원나라 탑의 양식을 따른 경천사 10층석탑(국보 86호)이 원나라 공장(工匠)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탑의 각층 각면에는 온갖 상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된 상륜부는 우리 탑의 상륜부와는 완전히 다른 라마교적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의 탑까지도 거의 대부분 라마교식 상륜부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탑은 반도의 동서에서 전탑과 목탑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7c에 이르러 석탑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다른 불교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화와 통일을 구축한 석탑이야말로 오로지 믿음과 정성의 결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