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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지의의 번뇌즉보리와 현대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효과의 관련성 연구
이원선(동국대학교 박사수료)
佛敎學報 第76輯 - http://abc.dongguk.edu/abc/c4/sub1_1.jsp 에서 <번뇌즉보리>로 제목 검색
Ⅰ. 서론
Ⅱ. 천태지의의 번뇌즉보리
1. 지의의 번뇌즉보리론
2. 지의의 번뇌즉보리관
Ⅲ. 현대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효과
1. 사고방식 전환 효과
2. 사고방식에 대한 심리학적 개입 효과
Ⅳ.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의 일치점
1.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
2.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의 심리학적 개입 효과
Ⅴ.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의 차이점
Ⅵ. 결론
<한글요약>
대승불교의 정점인 ‘번뇌즉보리’는 대립되는 것을 하나로 보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대승불교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불교의 관점은 여전히 번뇌를 끊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의외로 과학적 토대를 갖는 현대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번뇌즉보리의 대승적 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극복해야 할 스트레스를 획득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라고 주문 ․ 강조한다. 이는 끊어야 할 번뇌를 취해야 할 보리로 보는 대승의 관점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번뇌즉보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천태의 상즉론을 현대심리학으로 접근하여 그 관련성을 고찰해 보았다. 천태관은 번뇌와 보리 즉 세간적 번뇌와 출세간적 보리를 상즉의 중도적 원리로 관찰하는 관심법이다. 세간과 출세간을 하나로 하는 중관법이기에 세간적인 현대 심리학의 인식전환과도 원리상 토대를 함께하고 있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획득해야 할 번뇌라는 천태의 번뇌론이나,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스트레스라는 현대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똑같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연구 방향이나 방법 등에서 전혀 다른 분과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양자를 관련시킨 연구는 그동안 도외시했던 번뇌즉보리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번뇌즉보리, 관부사의경, 번뇌, 보리, 사고방식 전환, 심리학적 개입, 스트레스.
Ⅰ. 서론
초기 불교 이래, 번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였다. 사제나 십이인연만 보더라도 번뇌를 끊는 것이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번뇌가 끊어질 때 이상의 경지인 열반이 성취되는데, 초기불교부터 부파와 대승으로 이어지는 번뇌론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음의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번뇌론은 여러모로 다른 태도를 띠게 된다. 기존의 소승불교에서는 번뇌를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며 보리와 대립되는 존재로 취급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번뇌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번뇌와 보리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닌 상즉의 관계로 바뀌어, 그 둘을 둘로 보지 않는 불이사상(不二思想)으로 전개되기까지에 이른다. 번뇌즉보리설은 구마라집(鳩滅什, 344-413)의 전역에 의해 촉발되지만 불이사상의 극치는 중국의 수대(隋代)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 중심에는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가 있다. 그는 원융사상을 완성하는 가운데 번뇌즉보리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대승불교의 원융설을 조직화한다. 지의는 마하지관(摩訶止觀) 제7정수장에서 번뇌경(煩惱境)을 다룬다. 지의는 번뇌경에서 번뇌를 일단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한다.1) 또한 번뇌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크고 무거운 죄를 짓게 된다고 강조한다.2) 그러나 지의는 번뇌가 두려워해야할 대상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대치하는 태도만을 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번뇌에 대해서 원돈지관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데, 지의는 번뇌의 경계에 관부사의경을 적용함으로써 번뇌를 보리로 보는 태도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번뇌즉보리론은 사실 대승불자라 할지라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동북아 삼국의 불교가 아무리 원돈에 근거한 대승불교라 하더라도 실제 일반적인 불교의 형식은 번뇌는 없애야만 한다는 일방적 사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교계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번뇌즉보리라 해도 실속 없는 구호라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북방불교에 비해 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남방불교에 기울이는 관심은 더욱 커가고, 대승불교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이에 한쪽으로 치우친 교계의 풍토 속에서 대승불교의 정점인 번뇌즉보리의 유용성을 밝히고 대승불교의 가치를 이 시대에 보이기 위해 대승불교의 최고 이치인 번뇌즉보리론을 현대심리학으로 다가서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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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上), “若欻起煩惱控制則難. 何者. 生來雖瞋諫曉則息. 今所發者咆勃可畏.”
2)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上), “非唯止觀不成更增長惡業. 墜黑闇坑無能勉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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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적인 것은 현대심리학의 추세가 북방 대승불교의 번뇌론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와 같이 번뇌를 없애야만 한다는 적대의식보다는 번뇌도 충분히 나의 일부로서 봐야한다는 공동의식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상즉의 번뇌론은 남방의 불교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오히려 대승불교의 정점인 원돈관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번뇌를 현대 심리학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번뇌라는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스트레스(stress)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심리학적 관점에서 번뇌즉보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의 전환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사고방식 전환은 스트레스를 끊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수용해야 할 대상으로 바꾸어 준다. 이는 대승의 번뇌즉보리론을 수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이에 먼저 법화현의의 사종사제론를 통해 번뇌즉보리론을 밝히고, 마하지관의 번뇌에 관한 관부사의경을 통해 지의의 번뇌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 성과에 대해 소개하고, 번뇌즉보리에 대한 현대 심리학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면서 양자의 동이점을 밝혀 보도록 하겠다.
Ⅱ. 천태지의의 번뇌즉보리
1. 지의의 번뇌즉보리론
구마라집(鳩滅什, 344-413)이 전역한 대승경전의 원융원리의 하나인 번뇌즉보리나 생사즉열반은 대승불자라 하더라도 많은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동북아의 대승불교권 조차 이러한 원융사상을 수용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는 오히려 무시하고 비방하기도 한다. 대승불교학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만을 논의하려 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해가 가능치 않은 번뇌즉보리를 논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대승불교의 원리인 번뇌즉보리를 가장 체계화하여 해석한 이는 천태지의(538-597)다.3) 그의 번뇌즉보리론은 법화현의(法華玄義)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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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池昌圭, 「天台의 四種四諦 연구: 法華玄義와 天台四敎義를 비교하여」, 불교학보 Vol.46(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7), pp.7-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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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를 사종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종사제(四種四諦)에 기초한다.4) 생사 ․ 번뇌 및 보리․ 열반에 대하여 네 개의 관점 즉 생멸(生滅) ․ 무생(無生) ․ 무량(無量) ․ 무작(無作)을 제시하는데, 그 중 무작은 생사즉열반 ․ 열반즉생사 ․ 번뇌즉보리 ․ 보리즉번뇌로 보는 것이다.5)
무작은 고뇌의 현실이 바로 열반해탈임을 가르친다. 즉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의는 무작에 근거해 번뇌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일체중생이 보리의 모습이니, 만약 열반이 생사인 것을 알면 이것은 무작의 고제이며, 만약 보리가 번뇌인 것을 알면 이것은 무작의 집제이다. 만약 생사가 열반인 것을 알면 이것은 무작의 멸제이며, 만약 번뇌가 보리인 것을 알면 이것은 무작의 도제이다. 다만 생사가 아니고 열반이 아니라면 보리가 아니고 번뇌가 아니니, 이것은 일실제이다.”6)
지의를 계승하는 관정(灌頂, 561-632)도,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인 것은 삼관의 원돈지관이니, 일념생사의 마음이 이것이 중도열반이다”7)고 한다. 관정도 사제에 기초한 번뇌 즉 보리를 계승하면서 중도원융의 꽃이 천태에서 만개하기에 이른다. 종래에 끊어야만 한다는 단혹(斷惑) 일변도의 취지를 지의는 번뇌즉보리의 중도원융적 해석을 통해 새롭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의는 번뇌를 교상적 측면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그는 법화문구(法華文句)를 통하여 그것을 현실적으로 일반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그것이 사종의 해석방법이다. 지의는 “관심의 방편을 쓰지 않는다면,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8)이라 하며, 불교의 추상적 개념들의 현실적 적용을 시행한다.
예를 들어 관심의 방편으로서 대선지법(大善地法)을 부처님의 십대 제자들에 적용하는데,9) 그러한 맥락에서 견사혹의 하나인 교만심과 필릉가바차를 관련지어 번뇌를 현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10) 즉 원돈관을 적용하여 교만심을 부처의 덕성으로 바라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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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池昌圭, 「대승 경론의 四諦 해석: 천태 사제론과 관련하여」, 불교학보 Vol.49(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8), pp.111-142. ; 李永子, 천태불교학(대구: 해조음, 2008). ; 池昌圭, 천태학노트(서울: 법화학림, 2009). ; 池昌圭, 천태사상론(서울: 법화학림, 2008).
4) 法華玄義 卷2(大正藏 33, pp.700下-701上).
5) 天台四敎儀 巻1(韓佛全 4, p.521下).
6) 四敎義 巻11(大正藏 46, p.761中), “一切衆生卽菩提相. 若知涅槃卽生死. 是爲無作之苦諦. 若知菩提卽煩惱. 是爲無作之集諦. 若知生死卽涅槃. 是爲無作之滅諦. 若知煩惱卽菩提.是爲無作之道諦. 但以非生死非涅槃. 非菩提非煩惱. 是一實諦.”
7) 觀心論疏 巻2(大正藏 46, p.599中), “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者. 三觀圓觀一念生死之,心卽是中道涅槃.”
8) 法華文句 巻1(大正藏 34, p.20上), “若不作觀方便, 於行人無益,”
9) 法華文句 巻1(大正藏 34, p.20上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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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의의 번뇌즉보리론의 원돈적 특성이 제대로 그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의가 법화문구를 통하여 번뇌를 비롯한 불교 전반의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 또는 일반화한 작업에 뒷받침되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현실적 이해 및 적용을 위한 노력이 지금에서야 새롭게 시도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도되는 현대 심리학적 연구의 적용은 지의의 현실화 작업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지의의 번뇌즉보리관
법화현의에서 번뇌를 교상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마하지관에서는 지관으로 번뇌에 대한 원돈관을 펼치고 있다.11) 이것을 번뇌즉보리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하지관 제7정수장에서는 지관의 경계[境]를 십경(十境)으로 나누는 가운데 둘째 번뇌경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앞 오음(五陰) ․ 십팔계(十八界) ․ 십이입(十二入)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은 알맞은 것이 아니다. 또 관찰을 마치지 않았더라도 번뇌가 격동(擊動)하여 탐욕과 진에가 발작(發作)한다면 이때는 음입계를 버리고 번뇌를 관찰해야 한다12)”라고 한다.
번뇌경은 제1음입계경에 십승관법을 적용하여 관심 수행을 할 때 발생하는 번뇌를 새로운 지관의 대경(對境)으로 한다. 번뇌는 잠복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음계입을 관찰하려 하면 맹렬하게 일어나 정신을 압도한다. 이 번뇌를 자각하지 못할 경우 크고 무거운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이는 지관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고, 악업을 증장시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이것을 경계로 하여 관심 수행을 해야 한다고 번뇌경의 존재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13)
마하지관 번뇌경에서는 번뇌상과 번뇌의 인연, 번뇌의 대치, 번뇌의 지관 수행법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 중 번뇌상에서 “번뇌란 어둡고 번잡한 법으로서 심신(心神)을 뇌란시키고 또 마음과 함께 번잡함을 이루고 마음으로 하여금 뇌란을 얻게 한다. 이것이 견사혹의 예리함과 둔함이다”14)라고 설명한다. 또한 예리한 번뇌와 둔한 번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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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法華文句 巻1(大正藏 34, p.16下).
11) 佐藤哲英, 天台大師硏究(京都: 百華苑, 1961), pp.364-400.
12)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上), “上陰界入不悟. 則非其宜而觀察不已. 擊動煩惱貪瞋發作. 是時應捨陰入觀於煩惱.”
13)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上), “煩惱臥伏如有如無. 道場懺悔觀陰界入. 如觸睡師子哮吼震地. 若不識者則能牽人作大重罪. 非唯止觀不成更增長惡業. 墜黑闇坑無能勉出.為是義故須觀煩惱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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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치면 8만 4천의 번뇌가 되는데, 그것을 총괄하면 탐욕 ․ 진에 ․ 우치 ․ 각관의 사분번뇌가 된다고 밝힌다.15) 번뇌에는 8만 4천이 있지만,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이사(利使), 둔사(鈍使)로 구별된다. 번뇌가 발생하는 원인으로는 습인(習因)의 종자와 업력(業力)의 격작(擊作), 마(魔)의 선동(扇動)이 있다. 그러나 “마(魔)와 업(業)은 아래에서 설할 것과 같지만, 습(習)으로 움직이는 번뇌를 관찰하는 것은 지금 관찰할 바이다”16)라고 함으로써, 번뇌경에서 관경으로 하는 것은 ‘습인의 종자’임을 밝힌다.
마하지관의 번뇌경은 결국 십승관법에 의해서 번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번뇌를 기존과 같이 적대적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 그 자체를 그대로 획득해야할 보리이자 실상으로 전환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십승관법을 사용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관부사의경이다. 관부사의경은 부사의한 경계를 관찰하는 관법이다. 관부사의경은 십승관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관법으로, 나머지 9승관법17)의 관체(觀體)라고도 한다.18) 이를 통하여 관부사의경이 십승관법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19)
지의는 관부사의경에서 설명하는 ‘부사의한 경계[不思議境]’를 일념삼천설로 풀어낸다. 지의는 여기서 십법계(十法界) ․ 삼세간(三世間]) ․ 십여시(十如是)로 이뤄지는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을 논한다. 찰라심과 일체법계가 하나임이 천명되는 순간이다.20) 일념삼천을 설명한 다음 ‘언어도단 심행처멸’로 공제(空諦)를 관찰하도록 하고, 다시 사실단으로 가제(假諦)를 관찰하도록 하며, 마지막으로 ‘일즉다다즉일’의 원리를 통하여 중도제(中道諦)를 관찰하도록 한다. 번뇌의 관부사의경은 찰라의 망심에 대하여 일심삼관을 닦는 것으로, 그럴 때 번뇌의 일념삼천경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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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上), “煩惱是昏煩之法惱亂心神. 又與心作煩令心得惱.即是見思利鈍.”
15) 大野栄人, 天台止観成立史研究(京都: 法蔵館, 1994), pp.433-438.
16)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2下), “魔業如下說. 觀習動煩惱是今所觀也.” 마와 업은 각각 마사경과 업상경에 상응하는 것으로 번뇌경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17) 摩訶止觀 번뇌경에서는 관부사의경 이외에 9승관법의 설명을 더하고 있다. 9승관법은 관부사의경을 좀 더 순차적으로 밝혀주는 관법으로,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에서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그 관체인 관부사의경만을 밝히도록 하겠다.
18) 혜명, 마하지관의 이론과 실천(서울: 경서원, 2007), p.524.
19) 安藤俊雄, 天台學(京都: 平樂寺, 1969), pp.291-292.
20) 摩訶止觀 巻5(大正藏 46, p.54上), “夫一心具十法界. 一法界又具十法界百法界. 一界具三十種世間. 百法界即具三千種世間. 此三千在一念心. 若無心而已. 介爾有心即具三千.亦不言一心在前一切法在後. 亦不言一切法在前一心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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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심삼관으로 번뇌를 지관하는 것이 번뇌즉보리로의 실질적 실천방안이며, 이것이 천태에서 가르치는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지의는 이를 통해서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초주의 성불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지의가 교관으로 설명하는 번뇌는 현대 심리학에서 언급하는 스트레스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하지관에서 언급하는 번뇌란 예리한 번뇌와 둔한 번뇌를 합쳐 8만 4천의 번뇌가 된다. 이 같이 번뇌는 무한하고 제한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스트레스21)란 심리적 ․ 신체적 긴장상태나 불안, 우울, 초조감과 같은 정서 반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는 무수한 번뇌들의 한 종류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스트레스가 무수한 번뇌들을 다 포괄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천태에서의 번뇌는 견사혹으로서, 십경을 차제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22) 번뇌는 부정적인 정신 상태를 총칭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트레스가 번뇌 전반에 걸쳐져 있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번뇌를 좀 더 심도 있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현대 심리학적 연구들을 적용해 보기로 한다.
Ⅲ. 현대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효과
십승관법의 제1관부사의경은 일심삼관이 부사의경의 본질임을 나타낸다. 결국 관부사의경이 문제로 삼는 것은 마음이다. 이러한 관부사의경의 관점은 개인이 지닌 기존의 상식이나 신념을 180도로 전환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번뇌즉보리’와 같이 기존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확고한 신념을 다르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스트레스나 산만함, 비관주의 등을 ‘번뇌즉보리’처럼 뒤집어보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21)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학자들에 따라 그 정의가 다양하다. 또한 스트레스원과 스트레스 반응을 스트레스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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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摩訶止觀 권제5상에서는 십경의 호발에 대하여 차제와 불차제로도 구분하여 보는데, 여기서 차제란 10경이 순서대로 생기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이 때 병환경은 번뇌경 다음으로 생기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번뇌가 병환의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만병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스 역시 번뇌라는 개념에 적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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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스트레스 반응으로서 이를 적용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러한 태도는 왜 우리가 번뇌와 보리를 상즉으로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본 장에서는 사고방식 전환과 관련된 심리학적 연구들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사고방식 전환 효과
사고방식(mindset)이란 개인이 상황을 해석하거나 그에 접근하는 태도 혹은 관념이나 신념 등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인생철학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믿음”23)으로, 이 믿음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이것은 행복, 건강 등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 예로써, 사고방식과 수명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몇몇 연구들이 보여주듯이, 어떤 믿음들은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연구를 살펴보면, 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보다 장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노화를 긍정적으로 지각할 경우 수명은 7.5년 더 증가한다.24) 이는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잘 관리할 때 발생하는 효과보다 크며,25) 낮은 신체질량지수 (body mass index)를 유지하거나 금연, 혹은 운동을 함으로써 얻는 이점보다도 크다.26)
왜냐하면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관리, 혹은 체중관리나 금연, 운동 등은 평균 1년에서 4년 이하의 수명밖에 연장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믿음만으로 수명을 연장시킨다는 사실은 어떠한 사고방식을 갖는지가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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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켈리 맥고니걸, 신예경 역, 스트레스의 힘(파주: 21세기북스, 2015), p.39.
24) Levy, Becca R., Martin D. Slade, Suzanne R. Kunkel, and Stanislav V. Kasl, “Longevity increased by positive self-perceptions of ag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83 no. 2 (2002): pp. 261-270.
25) Friedman, Howard S., Joan S. Tucker, Joseph E. Schwartz, Carol Tomlinson-Keasey, Leslie R.Martin, Deborah L. Wingard, and Michael H. Criqui. “Psychosocial and behavioral predictors of longevity: The aging and death of the “Termites.”,” American Psychologist 50 no. 2 (1995):pp. 69-78.
26) Fraser, Gary E., and David J. Shavlik, “Ten years of life: is it a matter of choice?,”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 161 no. 13 (2001): pp. 1,645-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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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방식은 신체의 직접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객실 청소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살펴보면 사람의 믿음이 건강과 체중에 미치는 효과를 잘 알 수 있다.27)
실제 객실 청소는 매우 힘든 일로 다양한 보건기구들이 권유하는 하루 권장 운동량을 충분히 충족시키거나 이를 초과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객실 청소부들은 자신의 작업이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연구에서 객실 청소부들에게 하루에 얼마나 운동을 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이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한 인식은 객실 청소부들의 신체에도 반영되어, 충분한 운동을 하고 있음에도 체중이나 체지방 등에서 나타난 수치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과 비슷하게 측정되었다.
이에 연구자들은 객실 청소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어 줌으로서 건강이나 신체에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연구자들은 그들의 작업이 충분한 운동이 된다는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28) 4주후 그들의 신체에서 변화가 발생한 것을 발견하였다. 실험 집단의 체중과 혈압, 체지방, 허리와 엉덩이 비율, 체지방지수가 사고방식 중재를 받기 전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결국 신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어떤 사고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삶의 다양한 측면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우리가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사고방식은 어떠할까. 스트레스나 번뇌, 산만함 등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부정적이라는 확고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선택하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처럼 견고한 사고방식도 바뀔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심리학적 개입(psychological intervention)’ 연구들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사고방식에 대한 심리학적 개입 효과
심리학에 있어서 ‘개입(intervention)’이란 개인의 행동, 정서 상태, 감정 등을 변화시키기 위해 수행된 행동 ․ 행위들을 말한다. 이러한 심리학적 개입은 정신병이나 심리치료 뿐 아니라 개인의 사회생활이나, 결혼생활, 인간관계 등 다양한 방면에 적용된다. 그 중 본 장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사고방식의 전환과 관련된 심리학적 개입 연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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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Crum, Alia J., and Ellen J. Langer, “Mind-set matters exercise and the placebo effect,” Psychological Science 18 no. 2 (2007): pp. 165-171.
28)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객실 청소는 충분히 운동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이 보건기구에서 이야기하는 하루 권장 운동량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침구를 바꾸고, 청소기를 돌리는 등의 작업을 행할 때 소비되는 칼로리 수치 등을 적은 포스터를 휴게실에 붙여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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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방식의 전환과 관련하여 시행된 실험 중 하나는 대학의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29)
연구자들은 신입생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혼자만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소속감 문제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문제가 아니며,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그 개입 과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구자들은 먼저 신입생들에게 선배들이 쓴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읽도록 했다. 글의 내용은 대략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서 소속감으로 고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이었다. 그 후 신입생들에게 좀 전에 읽은 글과 관련하여 이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지금 자신의 대학생활에 비추어 에세이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 내년에 입학할 학생들의 대학생활을 돕기 위한 영상을 제작하는데 자신이 쓴 글을 카메라 앞에서 읽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것이 개입의 전부였다. 선배들의 글을 읽고, 에세이를 작성한 후, 내년 신입생들을 위해 사회적 소속감에 대한 메시지를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게 다였다.
이렇게 짧은 개입을 시도한 다음 월튼은 이 실험이 흑인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았다.30) 그 결과, 실험에 참여한 흑인학생들은 참여하지 않은 흑인학생들보다 학업 성적이 더 높았고, 건강해졌으며, 행복지수도 올라갔다. 그 학생들의 성적은 3년 동안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흑인 학생들보다 높았다. 한 번의 심리학적 개입이 개인의 삶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사고방식과 관련된 심리학적 개입 연구들은 간단한 개입만으로 사고방식의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개인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시행된 몇몇 연구들을 살펴보면 사고방식의 전환은 참가자들의 학업 성적을 올려주고, 그 집단에 더 잘 적응하게 만들어주었으며, 우울증에 걸릴 확률을 낮추어 주기도 하고31), 때로는 사회의 범죄율을 낮추기도 했다.32) 그러나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잘 믿지 않는다고 고충을 토로한다.33) 그것이 너무 간단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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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Walton, Gregory M., and Geoffrey L. Cohen, “A brief social-belonging intervention improves academic and health outcomes of minority students,” Science 331 no. 6023 (2011): pp. 1,447-1,451.
30) 월튼은 흑인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편견 등으로 인한 사회적 고립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했다.
31) Yeager, David S., and Gregory M. Walton, “Social-psychological interventions in education They’re not magic,” Review of educational Research 81 no. 2 (2011): pp. 267-301.
32) Walton, Gregory M, “The new science of wise psychological interventions,”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23 no. 1 (2014): pp. 73-82.
33) 켈리 맥고니걸, 신예경 역, 앞의 책, pp.57-59.
34) Yeager, David S., and Gregory M. Walton., op. cit., pp.26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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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의 개입만으로 개인의 삶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적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효과를 비난하기도 하며, 그것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대체로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찌 보면 번뇌를 보리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연구들은 사고방식의 전환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결국 번뇌즉보리라는 사고방식의 전환 역시 우리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며, 번뇌즉보리를 어떠한 관점으로 조망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Ⅳ.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의 일치점
1.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
마하지관 권제8상에서는, 부사의경의 입장에서 번뇌의 본질에 대해 밝히고 있다.35) 무행경(無行經)을 인용하여, “탐욕은 도(道)다. 진에와 우치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삼법 가운데 일체 불법을 갖추고 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치와 탐애 등의 사분번뇌를 끊지 않고, 모든 밝은 해탈을 일으키는 것이 도(道)이다. 이것이 부사의경으로 살펴본 번뇌의 본질이다.
소승불교에서는 번뇌와 해탈을 실체로서 인정하며,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즉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에서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이자 열반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대승에 이르러 180도 돌변하게 된다. 현상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번뇌와 보리를 대승에서는 상즉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는 번뇌와 보리가 자성적 실체가 없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것인데, 이 사상은 더 나아가 번뇌와 보리 그 자체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사상(不二思想)으로 이어지게 된다. 번뇌가 들끓는 그 자리가 바로 보리를 증득하는 곳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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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3中), “如無行云. 貪欲即是道恚癡亦如是. 如是三法中具一切佛法. 如是四分雖即是道復不得隨隨之將人向惡道. 復不得斷斷之成增上慢. 不斷癡愛起諸明脫. 乃名為道. 不住調伏不住不調伏. 住不調伏是愚人相. 住於調伏是聲聞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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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번뇌즉보리’가 심리학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까. 탐 ․ 진 ․ 치와 같은 번뇌라는 용어는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스트레스라는 말로 대체가 가능하다. 실제 많은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여긴다. 이것은 없애야 할 적이자, 벗어나야 할대상으로 간주된다. 많은 연구들이 스트레스가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하며, 심할 때는 폭력이나 자살, 절도 등의 악한 행위에까지 이르게 함을 잘 증명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번뇌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번뇌라는 말은 스트레스로 대체될 수 있다.
위 마하지관에 따르면 번뇌는 본래, 조복이나 부조복과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다.36) 부조복에 머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고, 조복에 머무는 것은 성문법이 된다. 스트레스를 조복과 부조복의 문제로 본다면, 부조복이란 스트레스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방치하면 그것은 증장하여 더욱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37) 그러므로 스트레스에 대한 방치는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조복시킨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극복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는 불교 명상법도 포함된다. 문제는 이 역시 스트레스를 다루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트레스가 없는 삶, 혹은 번뇌에서 벗어난 삶을 바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 결과들은 우리가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노력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10년 간 시행된 연구에 따르면38),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우울해지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심지어 스트레스 회피는 우울증 외에도 이혼, 해고, 동료와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등의 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였다. 역설적이게도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노력이 더 큰 스트레스 상황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스트레스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번뇌를 끊으려는 이승적 태도가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가져오기 보다는 번뇌를 더욱 증장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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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大野栄人, 앞의 책, p.451.
37) 스트레스를 방치할 경우 부정적 정서가 계속 증폭되는 경향이 있으며, 면역계 이상 및 그 외 다양한 심리적, 신체적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38) Holahan, Charles J., Rudolf H. Moos, Carole K. Holahan, Penny L. Brennan, and Kathleen K. Schutte, “Stress generation, avoidance coping, and depressive symptoms: a 10-year model,”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73 no. 4 (2005): pp. 658-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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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번뇌에 대해 보살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마하지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39)
보살은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열반을 맛보는 일도 없다. 어째서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가. 원래 무생인 것이 임시로[假] 발생한 것으로서, 그 생법(生法)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열반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공(空)이 개념으로서의 공(空)이 아님을 알아서 공법(空法)으로 증득되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40) 보살의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번뇌는 존재하지 않으니, 끊을 것도 없이 열반에 들어간다. 오욕(汚辱)이라는 비존재의 번뇌를 끊는 일 없이 육근(六根)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는 조복하거나 부조복하거나 하는 문제의 범위 밖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는 스트레스도 이러한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성인 약 3만 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와 건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41) 이 때 그들에게 질문한 내용 중에는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과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의 인식을 묻는 질문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8년 후 응답자들의 사망률을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사망률이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특이점은 스트레스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이러한 사망률이 발견된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도 그것을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망률은 증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사람들보다도 사망률이 낮았고, 실험 참가자 집단 중에서도 가장 낮은 사망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해롭다고 지각한 사람들은 사망 위험률이 43%나 증가했다. 이에 연구자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원인이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 그 자체와 그것이 해롭다는 믿음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스트레스 이론에 대한 중요한 발견이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이 단순히 스트레스의 양 때문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번뇌에 대한 사고방식의 전환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보살이 번뇌를 보는 방식과도 연관된다. 이승이 번뇌를 극복하려 하듯이, 우리가 스트레스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 그것은 우리를 해치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트레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범부는 번뇌를 번뇌로 보지만,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부터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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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3中-下), “菩薩不爾. 於生死而有勇. 於涅槃而不味. 勇於生死無生而生. 不為生法所污. 如花在泥如醫療病. 不味涅槃知空不空不為空法所證. 如鳥飛空不住於空. 不斷煩惱而入涅槃. 不斷五欲而淨諸根. 即是不住調伏不住不調伏意.”
40) 大野栄人, 앞의 책, pp.451-452.
41) Keller, Abiola, Kristin Litzelman, Lauren E. Wisk, Torsheika Maddox, Erika Rose Cheng, Paul D. Creswell, and Whitney P. Witt, “Does the perception that stress affects health matter? The association with health and mortality,” Health Psychology 31 no. 5 (2012): pp. 67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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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지관에서는 보살이 조복 ․ 부조복 ․ 비조복비부조복 ․ 역조복역부조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한다.42) 번뇌는 공(空)이기 때문에 부조복에 머물지 않고, 번뇌는 가(假)이기 때문에 조복에 머물지 않으며, 번뇌는 중도이기 때문에 역조복역부조복에 머물지 않고, 쌍으로 번뇌를 비추기 때문에 비조복비부조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단지 일구(一句)만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고 일체법은 탐욕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에, 조복 ․ 부조복 등에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실제로는 조복 ․ 부조복 등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조복 ․ 부조복 등에 머문다고 해도, 실제로는 조복 ․ 부조복 등에 머무는 일은 없게 된다. 이것을 무애(無礙)의 도(道)라고 하는데, 일체에 무애한 사람은 일도(一道)를 활로 하여 생사계를 벗어나는 것이다.43) 그렇다면 이러한 보살의 관점은 스트레스와 어떻게 연관될까.
시카고대학교의 심리학자 S. 매디(Salvatore Maddi)는 스트레스가 일리노이 벨 전화회사 직원들에게 미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44) 이 당시 벨 회사는 큰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는 직원들이 있었고, 매디는 그들에게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연구했다. 그리고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먼저 그들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그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전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그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다. 비록 긍정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그들은 이 역시 삶의 한 부분으로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배우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해지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하며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어떤 환경에 처하든 끊임없이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 선택이란 상황을 바꾸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상황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바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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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p.103下-104上), “今言. 不住調伏不住不調伏. 不住非調伏非不調伏. 不住亦調伏亦不調伏. 亦住調伏亦住不調伏. 亦住非調伏非不調伏. 亦住亦調伏亦不調伏. 何以故. 煩惱即空故不住不調伏. 煩惱即假故不住調伏. 煩惱即中故不住亦調伏亦不調伏. 雙照煩惱故. 不住非調伏非不調伏雖不住調不調等. 而實住調不調等. 雖實住調不調等. 而實不住調不調等. 何以故. 不偏觀一句故. 一句即諸句. 一切法趣貪欲故. 貪欲是諸法所都故. 用此意歷一切句. 所謂計貪欲是有名住不調伏. 計之為無住於調伏. 如是等自在說(云云). 如是體達名為無礙道. 一切無礙人一道出生死.”
43) 大野栄人, 앞의 책, p.453.
44) Maddi, Salvatore R, “The story of hardiness: Twenty years of theorizing, research, and practice,” Consulting Psychology Journal: Practice and Research 54 no. 3 (2002): pp. 17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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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적대적이거나 타인으로부터 고립되기 보다는 사람, 사물, 상황 등을 포용하고 그들과 연계할 가능성을 높였다. 즉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찾으려 한 것이다.
매디는 이러한 태도를 스트레스 내성(hardiness)이라고 불렀다. 스트레스 내성은 기존의 방법처럼 스트레스를 삶의 적으로 보고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스트레스에 능숙해진다는 의미이다. 역경에 동요되지 않는다거나 어려움에도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통해 내면에서 용기, 관계, 성장이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힘을 깨우치라는 얘기다.”45)
스트레스에 능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 잘 제거하는게 아니다. 스트레스 그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환함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킬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46) 즉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존재에서 활용 가능한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번뇌를 보리로 보는 태도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번뇌를 부조복하는 것도 아니고, 조복하는 것도 아니며, 그러면서도 조복과 부조복에 머무는 태도일 것이다. 스트레스를 그냥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부조복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지도 않으며(조복에 머물지도 않으며), 스트레스 그 자체를 인정하고(부조복에 머물며),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활용할 존재로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조복에 머문다). 즉 스트레스를 지혜를 획득하기 위한 촉매제로서 전환할 줄 아는 것이다.
2.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의 심리학적 개입 효과
그렇다면 번뇌(스트레스)에 대한 견고한 사고방식도 앞에서 살펴본 심리학적 개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이에 심리학적 개입이 스트레스에도 적용되는지를 몇몇 연구들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J. 제이미슨(Jamieson)과 그의 동료들은 박사과정 입학 자격시험인 GRE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반응의 이점에 관한 연구를 시행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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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켈리 맥고니걸, 신예경 역, 앞의 책, p.142.
46) 켈리 맥고니걸, 신예경 역, 앞의 책 pp.138-143.
47) Jamieson, Jeremy P., Wendy Berry Mendes, Erin Blackstock, and Toni Schmader, “Turning the knots in your stomach into bows: Reappraising arousal improves performance on the GRE,”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6 no. 1 (2010): pp. 20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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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참가 학생들에게 실제 GRE 시험과 비슷한 환경에서 연습 시험을 보게 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을 보는 동안의 생리적 각성이 수행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연구라고 알려주었다.
통제집단의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메시지만 전달한 후 시험을 보게 했다. 반면 실험집단 학생들에게는 시험을 보는 동안의 스트레스와 관련된 하나의 메시지를 더 전달했다. 그 내용은 대략, ‘사람들은 시험을 치르는 동안 긴장을 하면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스트레스가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도리어 시험을 보는 동안 긴장할수록 성적이 더 좋게 나온다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이러한 메시지를 받은 학생들은 메시지를 받지 못한 통제집단에 비해 성적이 더 높았다. 연구자들은 혹여나 이 메시지가 학생들의 긴장감을 낮추어서 성적 향상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타액을 채취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험 전후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실제 스트레스에 대한 메시지를 받은 학생들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내려가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스트레스는 더 올라갔음이 드러났다. 이 메시지가 스트레스를 줄여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이롭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인 학생들은 스트레스가 더 높을수록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스트레스가 유용하다고 생각하니 정말 유용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 후 연구진들은 실제 GRE 시험에서도 이러한 메시지가 도움이 됐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스트레스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인 학생들은 실제 시험에서 더 많이 긴장하기는 했지만 더 좋은 성과를 냈음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메시지를 받지 못한 학생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3개월 전 실험에서 제시받은 메시지가 여전히 학생들에게 유용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시험이라는 긴장감이 더 높은 상황에서 그들의 성적은 연습 때보다 더 향상되었다. 즉 스트레스가 더 클수록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메시지의 힘이 더 크게 발휘되었다. 불안감을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받아들였을 때 실제 스트레스가 유익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는 한 번의 짧은 심리학적 개입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같은 메시지의 전달 시간은 매우 짧지만 그 영향력은 장기간 더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 전환은 신체 반응 방식에도 변화를 줄 수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A. 크럼(Alia Crum)의 연구를 살펴보자.48)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먼저 참가자들에게 그들의 기분과 스트레스 사고방식과 관련된 설문을 요청 했다. 그 다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과 디하이드로에피안드로스테론(dehydroepiandrosterone,DHEA)이라는 호르몬을 측정하기 위해 그들의 타액을 채취했다. 코르티솔과 DHEA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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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Crum, Alia J., Modupe Akinola, Ashley Martin, Sean Fath, and Alia J. Crum, “The Benefits of a Stress-‐is-‐enhancing Mindset in Both Challenging and Threatening Contexts,” Standford Mind & Body Lab (2015): p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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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부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코르티솔은 보통 ‘붕괴(breaking down)’ 호르몬, DHEA는 ‘형성(building up)’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티솔은 급성 스트레스 적응, 면역력 증장, 각성, 그리고 인지적 기능에 필수적인 호르몬이다. 그러나 코르티솔 수준이 높거나 만성적이 되면 심장혈관계 질병이나 궤양, 면역 기능 감소, 암 등의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49) 반면 DHEA는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신체를 보호하고 재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에너지 및 기억력 강화, 면역 체계의 개선, 자가 면역 질환 등에 효과가 있는 호르몬이다. DHEA는 스트레스 경험을 통해 뇌가 더 건강해지도록 돕는 호르몬으로, 코르티솔의 영향력을 일부 상쇄시킨다.
이 두 가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비교하기 위해 타액을 채취한 후,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3분짜리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비디오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트레스가 삶의 질을 높여주고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트레스가 우리의 심신을 쇠약하게 한다는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참가자들은 둘 중 하나의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어떤 비디오를 볼 지는 임의로 정해졌다.
다음으로 참가자들은 스트레스 유발 테스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의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설계된 둘 중 하나의 조건에 그들을 할당했고, 참가자들은 2명의 면접관 앞에서 스피치를 했다. 그리고 8분의 스피치 동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참고로 긍정적인 피드백은 도전적 상황을, 부정적인 피드백은 위협적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난 다음, 그들의 감정에 대해 간단히 기록한 후 다시 참가자들의 타액을 채취했다.
그 결과, 스트레스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DHEA가 더 많이 분비되었다. 특이점은 이들 중에서도 스피치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우(위협적상황)에 DHEA가 더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스트레스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를 받거나, 긍정적인 스피치 피드백을 받은 경우에는 DHEA가 특별히 더 증가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트레스가 크면 클수록 스트레스에 대한 긍정적 개입 효과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장점을 끌어올린다는 생각이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180도 달라진다. 이는 우리가 번뇌즉보리에 대한 사고방식을 취하면 번뇌가 정말 보리일 수 있으며, 번뇌가 크면 클수록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깨달음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번뇌(스트레스)가 우리를 고통스럽게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게 만드는 보리 그 자체도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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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Bruce Mcewen ․ Elizabeth Norton Lasley, 이연경 ․ 최준식 공역, 브루스 맥쿠엔의 스트레스의 종말(서울: 시그마북스, 2010), p.38, pp.140-142, pp.16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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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지관에서는 “또 ‘비도(非道)를 행하여 불도(佛道)에 통달한다’고 하며, 또 ‘번뇌가 보리이다’고 하며, 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고 한다”50) 또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인용하여, “어둠 속에서 나무 그림자는 어둠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천안(天眼)으로는 볼 수 있다”51)고 하는 구절을 근거로, 어둠 속에 밝음이 있다고 한다. 번뇌의 어둠이 그 자체로 중도지혜의 광명이라고 관찰하여, 불보리를 현현한다면 어둠의 미혹은 오지 않는다. 이처럼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도 중도지혜의 광명으로 전환하여 볼 수 있다면 이것이 ‘번뇌즉보리’에 대한 대승적 관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Ⅴ. 번뇌즉보리와 사고방식 전환 효과의 차이점
양자의 공통점 이외에도, 연구방향으로부터 방법에 이르기까지 양자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양자의 넘을 수 없는 현실적인 벽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태의 번뇌즉보리는 십승관법을 통하여 지관수행을 행함으로써 체득되는 것이다. 반면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는 사회과학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수행과 그를 통한 체득을 요구하는 천태와는 다르게,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측정을 비롯한 통계 방법론을 사용하여 그 효과를 증명한다.
둘째, 천태의 관부사의경과는 다르게, 스트레스에 대한 심리학적 개입 연구들은 제3자를 통하여 번뇌(스트레스)에 대한 인식 변환을 꾀해야 한다. 제3자인 연구자가 당사자인 실험 참가자들에게 스트레스가 유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입과정을 거침으로써 스트레스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셋째, 천태의 번뇌즉보리는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보다 그 세계가 훨씬 넓다. 천태에서는 단순히 번뇌를 보리로 보는 상즉의 개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번뇌를 일체 번뇌로 보는 일즉다다즉일의 원리가 적용된다. 하나의 번뇌를 일체의 번뇌로, 그리고 그것을 일체의 보리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연구에서의 스트레스는 그 정도로 범위가 확장되지 않는다. 내 순간의 스트레스는 그저 하나의 스트레스일 뿐이다. 사고방식 전환이 다른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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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4下), “亦名行於非道通達佛道。亦名煩惱是菩提。亦名不斷煩惱而入涅槃”
51) 摩訶止觀 巻8(大正藏 46, p.104上-中), “經云。闇中樹影闇故不見. 天眼能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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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의 번뇌즉보리처럼 하나의 스트레스를 전체의 스트레스로 확장하는 개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또한 천태에서는 일념삼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내 한 순간의 번뇌심이 온 우주의 번뇌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연구에서는 그러한 적용이 불가능하다. 내 순간의 스트레스는 나 하나만의 스트레스일 뿐 그것이 온 우주의 스트레스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사상과 관점의 차이는 어찌 보면 심리학의 사고방식 전환 연구가 아직 불교적 사고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드러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넷째, 천태의 번뇌즉보리는 그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불도(佛道)를 향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세속적이다. 불도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에서의 나아진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도수행자와는 그 목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상즉에 대한 방향성의 차이가 있다. 천태의 번뇌즉보리는 번뇌를 보리로 보는 동시에, 보리를 번뇌로도 본다. 즉 양방향으로 둘의 관계가 상정된다. 반면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는 보지만, 반대 방향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번뇌라는 식의 연구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고방식 효과의 연구들이 개인의 삶을 향상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반대되는 효과에 대해서는 관심을 덜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번뇌즉보리만이 아닌 보리즉번뇌와 같이 우리 삶에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다른 이면을 밝혀주는 연구들이 진행된다면 삶을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연구들은 불교의 번뇌즉보리 및 일념삼천관의 더 깊은 현실적 이해를 위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천태의 번뇌즉보리와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 전환 연구들은 공통점도 있지만, 이처럼 차이점도 존재한다. 따라서 양자의 관련연구는 서로의 설을 보충하고 보완하자는 데 목적을 가진 원융적 학문체계의 초석을 다지자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향후 발전된 양자의 관련 연구를 위하여 이런 차이점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따라야 할 것이다.
Ⅵ. 결론
사고방식이란 개인이 가진 신념이나 선입견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한 번 형성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신념으로 굳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견고한 사고방식에는 ‘스트레스는 해롭다’, ‘번뇌는 고통스러우니 벗어나야 한다’, ‘산만한 것은 좋지 않다’ 등이 있다. 만약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더 받으세요”, “번뇌망상에 안주하세요”라고 한다면 상대는 격하게 거부감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보리로 보라는 대승적 관점은 굉장히 급진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따라서 지의는 이러한 급진적 사고방식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알고, 이를 부사의경, 즉 부사의한 경계라고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심리학에서 이 같은 관점의 변환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지지하던 태도와는 달리,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연구들이 다양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스트레스다. 기존에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던 스트레스를 요즘 연구들에서는 취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의 ‘번뇌즉보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대승불교의 사상과 현대심리학이 그 결과의 일치를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천태가 번뇌에 대해 관부사의경을 통해 보리(깨달음)라는 관점을 취했듯이, 현대 심리학에서도 스트레스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 기존에 전혀 보지 못했던 긍정적 측면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둘 간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대승불교의 사상과 현대심리학이 같은 방향과 내용을 지닌다는 점에서 앞으로 본격적으로 관련연구를 시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문화권과 학문적 토대가 전혀 다른 두 영역의 벽이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겠지만, 대승불교의 번뇌즉보리에 대한 현대 심리학적 접근이 그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원융적 대승사상을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 생략
논문접수일: 2016년 7월 24일, 심사완료일: 2016년 8월 25일,
게재확정일: 2016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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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멸해야 할 번뇌> vs <번뇌 즉 보리>
어찌들 생각하실런지 궁금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기도 하네요^^
1) 소승불교에서는 번뇌와 해탈을 실체로서 인정하며,
2)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1)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제법무아가 실체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번뇌의 실체가 없다고 보는 점에서는 초기불교나 후기불교나 다름이 없습니다.
2)의 진술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초기불교의 수행이 번뇌(스트레스)를 싫어하여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뇌를 직면하여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를 통찰함
으로써 번뇌의 뿌리를 끊는 것이라는 점에서 필자의 주장과는 아무래도 좀 거리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육체 자체를 고의 원인으로 보아서 무여열반을 추구하는 입장에 대해
자비로 인해 생노병사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보살의 입장을 "사고방식(믿음과 태도)의 변환"으로 보고, 심리학적인
연구와 관련지어 설명한 것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관련된 주제의 논문 하나를 답변 글로 올립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번뇌론은 여러모로 다른 태도를 띠게 된다. 기존의 소승불교에서는 번뇌를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며 보리와 대립되는 존재로 취급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번뇌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번뇌와 보리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닌 상즉의 관계로 바뀌어, 그 둘을 둘로 보지 않는 불이사상(不二思想)으로 전개되기까지에 이른다. 번뇌즉보리설은 구마라집(鳩滅什, 344-413...]
[소승불교에서는 번뇌와 해탈을 실체로서 인정하며,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즉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에서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이자 열반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대승에 이르러 180도 돌변하게 된다. 현상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번뇌와 보리를 대승에서는 상즉의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이는 번뇌와 보리가 자성적 실체가 없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것인데, 이 사상은 더 나아가 번뇌와 보리 그 자체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사상(不二思想)으로 이어지게 된다. 번뇌가 들끓는 그 자리가 바로 보리를 증득하는 곳이 되는 거다...]
@노랑 -> 저자가 참 많은 조사를 하셔서 글 쓰셨네요.
그런데 위 부분이 좀 걸립니다.
1.
대승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번뇌 즉 보리> 는 사실
대승불교 전유물은 아닙니다.
이미 초기불교의 사제 <고성제> 에서 언급 하기 때문이지요.
고성제란 <과로움이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으로
<번뇌즉 보리> 와 다른 말이 아니지요.
@노랑 2.
<번뇌즉 보리>를 실체론 관점에서
설명하신 것은 좋아보이나
이를 부각하기 위해 초기불교에서
<번뇌를 멸하라> 를 실체론으로
비판하는것은 센스가 안되보입니다.
@노랑 초기불교에서 <번뇌를 멸하라>
하는것은
실체론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착한일 해라'
'쓰레기는 버려라'
이런 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말을 실체론 입장에서 메스하면
아주 어색해져 버립니다.
쓰레기를 버리라 를
실체론으로 문제 삼으면 이상하둣이..
어떨때 실체론 관점에서 문제 삼아야 할지 구별해야 겠지요
그렇습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을 번뇌 실체론으로 규정하고 후기불교와 비교한 것도 문제지만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면 스트레스도 유익한 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논지(論旨)도 문제입니다.
스트레스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면 스트레스로 인한 2차적인 병폐는 감소하겠지만
스트레스 자체는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최근의 인지심리학이 시사하는 바는 스트레스가 인지활동 즉, 경험에 대한 해석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트레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는 스트레스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인지구조 즉 경험에 대한 해석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경험에 대한 전도된 해석을 불교적인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겠습니다.
애욕과 집착의 대상이라고 해석했던 것을 무상, 고, 무아, 부정인 것으로..
불교수행은 결국 인지구조를 바꾸는 것이고 번뇌(스트레스 포함)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후기불교에서 일체를 공으로 보는 것도 결국 같은 것이겠습니다.
공한 것에 대해 애욕과 집착을 일으킬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는 물론 후기불교 역시, 보살의 목적이 중생을 고통과 번뇌로 부터 구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엔 <번뇌를 멸하라>에 귀결됩니다.
<번뇌는 결국 멸해야 할 것>임을 전제로 한다면, <번뇌 즉 보리>는 필자가 주장하는 맥락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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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들끓는 그 자리가 바로 보리를 증득하는 곳>// 필자 '이원선'
맞는 얘기입니다.
번뇌는 스스로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깨치지 못한 저로서는 <번뇌 즉 보리>가 과연 이런 의미일런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생겨나는 자리가 같은 곳>이라는 것과 <같은 곳에서 생겨난 것들은 서로 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연 //번뇌와 보리 그 자체를 둘로 보지 않는 불이사상(不二思想)//
<A와 B는 실체가 없는 점에서 같다.>는 것과 <A와 B는 그 자체가 둘이 아니다.>가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요?
이것도 결국, 일체의 언어에 의한 규정이나 해석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중도'의 성격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번뇌와 보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번뇌와 보리는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다.>?
중도설에 자타작중도설이 있습니다.
이 중도설에선
외도가 누가 업보를 받냐고 물으니
부처님이 답변을 않하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지은 업보
눈 자신이 받는다는 자업자득
업보설도 설명합니다
부처님이
한입같고 두 말 한것과 같은
이 두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아직, 위에 언급한 번뇌즉보리, 중도, 유업보 무작자...모두 이해불가입니다.ㅠㅠ
부처님 말씀이 그러하시니 그렇다고 인정하고 믿을 뿐입니다.
모두 논리적인 사고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겠지요?
중론을 보아도 언어로 표현된 것이기에 이해가 되는 듯 싶어도 결국엔 그저, 모두 <아니다>일 뿐이니,
<~이다.>라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ㅠㅠ
- <일체는 "~인 것이 아닌것"이다>??? ^^
@수연 공감합니다. ()()()
@수연 삼시불가득이지만
부처님도 아침 저녁 이런말
다 사용하고 실제로 거기에 맞추어
생활하셨습니다. 전 이리 봅니다.
세간의 것을 받아드리고
<그것이 실체가 없음을 여실히 아는 것>
이게 세간과 출세간을 조화시킨
'유업보 무작자' 가 아닐지요.
불교의 백미죠
문제는, 번뇌즉보리라면, 번뇌를 번뇌 그대로 두고 그것을 동시에 보리로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번뇌는 이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글 - <불교의 행복 개념과 인식 - 대승보살의 서원과 번뇌>에서는 보살의 경지가 번뇌를 멸하지 않은 채로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살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과 윤회 세계에 다시 들어오는 것은 범부와 같은 번뇌를 없앴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서원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윤회 세계에서의 보살의 삶은 바로 열반의 상태와 다르지 않게 된다.>
<세간적인 차원에서의 번뇌를 그대로 느끼면서 동시에 열반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보살의 삶>???
- 보살은 번뇌와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번뇌는 더이상 번뇌가 아니고 생사는 그대로 열반이라는 것일까요?
아무개인 [나]의 번뇌가 아니라 일체 중생의 번뇌, 곧 우주적 번뇌를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번뇌가 아니라
보리라는 것일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경험과 관련한 자상한 설명, 감사합니다.^^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공감합니다. ()()()
번뇌는, 우리가 번뇌를 느끼는 고통의 측면이 있고, 번뇌라는 것을 바라보는 각자(깨달은 자)의 관점이 있겠습니다.
어느 쪽에서 번뇌를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를 것 같습니다.
번뇌에 혹사 당하면 ,, 감당을 못하면 고통에 빠지고
번뇌를 이기면 깨달음이 됨니다
가난을 이기면 가난에서 벗어나고 ,, 지면 가난속에서 고통을 받듯이,,
원글 글자가 너무 작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