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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마르코 14,1─15,47)
Then Jesus said to them,
“All of you will have your faith shaken, for it is written:
I will strike the shepherd,
and the sheep will be dispersed.
But after I have been raised up,
I shall go before you to Galile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모욕과 수모를 받는 ‘주님의 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른다(제1독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낮추시고 십자가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다(복음).
20. 이 미사의 3개 독서는 다 봉독하는 것이 좋지만, 때에 따라서 독서 가운데 하나를 빼거나 둘을 다 빼고 수난기만을 봉독할 수 있다. 그러나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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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묻기 시작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유다만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단의 대표인 베드로는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맞으면 두 손 들어 예수님을 환호했고, 그러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철저히 배반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더없이 고독하고 괴로운 길이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의 생각이 내 뜻과 맞지 않으면 등을 돌립니다. 내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친구는 하루아침에 원수가 됩니다. 폭력과 죽음의 문화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는 생각조차 하기 귀찮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로 주님을 배반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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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웬만해서는 작은 갈등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외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고, 하느님께 항의하기도 합니다.
물론 힘겨운 갈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이 그런 갈등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갈등 역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깊은’ 갈등이라면 그만큼 ‘크고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누구나 갈등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수난 복음 역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휘청’거리셨습니다. 힘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들지 않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고통스럽지 않는 갈등은 없습니다. 크고 무겁더라도 작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총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마음’이 있습니다. 억울하게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달리 생각할 수 있건만 억울한 쪽으로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에 연관된 사람을 떠올리며 벽을 쌓습니다. 언젠가 보복할 것이라는 생각마저 합니다.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은총이 오게 해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햇볕처럼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성주간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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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한 사람일수록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다면 이러한 불의와 불공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지 않다면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게 하셨다면, 그 뒤에 뭔가 그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를 일부러 고생스러운 일에 내맡기는 아버지들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고통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서광석신부-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인간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들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해 모든 이들을 소집하고 의논 끝에 예수님을 결박해 빌라도에게 끌고가 넘겼다.
그들이 시기해 예수님을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던 빌라도는 "도대체 이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대사제들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쳤다. 빌라도도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
병사들은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를 지게 해 해골산으로 오르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사제들,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으며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도 예수님을 모욕했다. 오후 3시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은 사랑과 이성을 저버린 인간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험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슬픈 역사적 사건이다.
어느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한참 나뭇짐을 묶고 있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겁에 질려 떠는데 호랑이는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벌렸다. 가만히 보니 큰 가시가 박혀있었다. 가시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무척 고마워하며 선물로 눈썹을 뽑아주고 "이것을 붙이고 다니면 세상에서 속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노인은 기뻐하며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반가이 맞이하는 아내가 여우로 보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면장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는데 면장이 늑대로 보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토끼, 곰, 오소리 등 온갖 동물로 보였다. 노인은 "내가 사람들 속에서 사는 줄 알았더니 사람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짐승 같은 사람만 있구나"하며 탄식했다.
인간은 누구나 동물적 본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닮은 사랑이 결핍된다면 참으로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된다. 우리는 자신보다 나은 상대를 싫어하고 배척하며 아첨하는 자를 곁에 두기 좋아한다. 이런 시기는 사실 자신의 '나쁜 본성의 화살'로 인격적 자아를 공격해 죽이는 어리석은 짓이며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기심과 아집 때문에 타인의 좋은 일과 명예로움에 대해 시기ㆍ질투ㆍ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인간 공해나 해충과 다름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은 선동을 받은 군중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대사제들이었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장한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규정의 문자에 얽매여 아전인수 격으로 사리(私利)만을 취하는 자를 법비(法匪)라 한다. 그리고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지성인의 공감을 얻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이용할 때 그는 공비(共匪)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의 근본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종교를 현세적으로 이용할 때 종비(宗匪)라 하겠다.
우리는 하찮은 일로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타인은 항상 옳고 정의롭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불의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한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너그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면서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는 까다롭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뒤바뀐 가치관, 극단적 이기주의, 물질숭배 등 여우와 늑대 같은 이런 우리의 나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이익을 위해 부정과 불의와 적당히 타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도 예수님을 모욕하는 십자가의 좌도(左盜)가 되는 것이다. 나쁜 습성을 매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할 때 그 우도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된다.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못 박히신 주님을 하루에도 수없이 만져야 합니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만지면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말씀을 묵상하며 어려운 여정에서도 단순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깨어 기도하고 참회해야 한다.
‘인간’의 품위를 잊지 말라
- 장재봉 신부-
겁쟁이 요셉
수난복음을 읽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 시대, 그 상황을 살았더라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였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끝까지 의연하게 그분 편을 들 수 있었으리라 자신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무지막지하게 굴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여느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분께 실망한 마음이 분노로 바뀌어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러댔을 것만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요셉’이라는 의로운 인물의 보호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늘로 돌아가는 날, 그분의 찢긴 몸은 또 다른 요셉이 정성껏 거두었습니다. 묘합니다.
따져보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 때문에 고생바가지를 둘러쓴 인물입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몸고생은 차지하더라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진리’를 가슴에 담고 묵묵히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비밀을 들키지 않도록 그분의 계획이 망가지지 않도록 스스로의 말과 생각을 단속하는 일도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내 입’을 침묵시키고 ‘내 눈과 마음’이 의심치 않도록 ‘마음단속’을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니까요.
마르코 사가는 아리마태아 요셉이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린 사람”이었다고 밝힙니다. 그가 “당당히”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고 청한 사실을 ‘고마워’하는 눈치입니다. 마태오도 “예수님의 제자”임을 천명하고 루카도 “착하고 의로운 이”로 묘사하며 칭송 모드에 동조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만은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요한 19,38)며 따끔히 질책합니다. “두려워 그 사실을 숨겼다”는 요한의 표현에서 우리는 아리마태아 요셉이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는데요. 저는 오늘 겁쟁이의 변화된 모습이 너무 좋으니, 웬일입니까?
그는 그날부터 예수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들통이 났을 겁니다. 의회에서 추방되었을 것이고 일상의 불이익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했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며 주님의 제자임을 밝히는 일마저 조심스러워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리 소심하고 겁 많던 요셉이기에 그날 그의 변화는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이미 ‘죽음’을 당한 예수, 다 끝장나버린 초라한 청년 사형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인간을 다만 연민과 사랑과 정성으로 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 착하고 의로운 이’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라 싶습니다. 그분의 제자였지만 결코 뭔가를 얻어내려고, 어떤 실익을 챙길 꿍심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 싶습니다. 그분 곁에서 언제나 더 높은 자리를 탐했던 제자들이 죄다 도망쳐버린 사실에 빗대면 더더욱, 겁쟁이 요셉의 따름이 진실이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날도 그는 겁이 났을 것입니다. 주위의 이목이 두려워서 몸을 숨긴 채 멀리서 그분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없이 망설이며 뒷걸음을 치면서 한 발 한 발 그분의 길을 따랐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하나 둘 도망치는 모습에 아연실색, 번민했을 듯도 합니다. ‘누군가’ 그분의 시신을 거둘 기미만 보이면 슬금 ‘돌아서리라’, 다시는 ‘미련 갖지 않으리라’ ‘그분과의 인연을 감쪽같이’ 묻고 잊으리라 다짐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겁쟁이’였으니까요. 그 때문에 더욱, 그의 마지막 결단이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의 새 무덤을 아끼지 않은 통큰 선행에 감격합니다. 결 고운 아마포를 사러 달려간 정성을 고마워합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여타 도사들처럼 홀로 지내지 않고 기꺼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양부 요셉의 보살핌으로 자라났으며 지상의 삶을 마감하실 때에도 또 다른 요셉에게 당신 몸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당신을 몽땅 내어주십니다.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에너지를 이웃에게 ‘사랑과 용서와 기쁨’으로 사용해달라 당부하십니다.
새삼 예수님께 두 요셉이 도움을 드린 일이 인간으로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야말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변화된 믿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키운 ‘인간’의 지위를 기억하고 하느님의 아들의 마지막 길에 예우를 갖추어드릴 줄 알았던 ‘인간’의 품위를 잊지 말라는 주님의 배려로 듣습니다. 겁 많고 두려움 많은 우리가 당당해지도록 단단히 전구해 주시기를 두 분, 요셉께 청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땅에 떨어져 죽어 생명을 주는 밀알로 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표징의 책’(112장)에 해당하는 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요한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과 다음 장들에 이어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1317장)와 수난과 부활(1821장)의 경계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온 그리스인들이 필립보한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라고 청하는데 그들의 부탁은 단순히 얼굴을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 개인적으로 대화 나누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태생 유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로 개종하여 어떤 특별한 모세의 법을 지키는 사람,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사도 10,2 이하)일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성전에서 보인 그 표징을 보고 어떤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유다의 지식층인 바리사이들이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요한 12,19)라고 한탄만 하고 있을 때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발을 움직여 그분에게 옵니다.(2021절)
예수님을 보고 싶은 그리스인들의 청에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23절)라는 말로 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영광스럽게 될 때’는 그분의 죽음, 이 세상에서 아버지에게로 건너가는 ‘때’를 가리킵니다.(13,1)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12,28; 13,31) 이 ‘영광’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보러 온 그리스인들한테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12,21) 그들이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26절) 그분은 단순히 바라보고 이해하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2733절은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고뇌를 표현하는데 공관복음에 나오는 겟세마니의 이야기들(마태 26,3646; 마르 14,3242; 루카 22,3946)과 병행하는 ‘제4복음서의 겟세마니’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고통스런 순간에 홀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아버지는 즉시 하늘에서 응답하십니다.(요한 12,28)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님의 생애,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들 그리고 그분이 보여준 거룩함과 선한 행위들 안에 드러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죽음과 고통 안에서 영광을 받습니다.
한 알의 밀알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에 심판을 가져옵니다.(31절)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는 이상한 방법은 ‘땅에서 들어 올려지는 것’(32절)입니다. 이 표현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요한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33절) 예수님이 ‘들어 올려진다.’라고 표현한 것은 당신의 고통을 당신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 사이로 높이 들어 올려진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세상의 구경거리가 됩니다. 믿는 이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이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걸림돌이자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당신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고 가르치십니다. 이 지상에서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생명에 지나치게 애착하지 말고, 그것을 주신 분을 기억하고 모든 이를 위한 생명의 봉사에 자신을 넘기라고 초대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213)
희생양 그리스도
-전삼용신부-
우리는 영화나 책을 통해 로마 네로 황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장본인이 되었지만 집권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집권 초기에는 경기장에서 살육하는 시합을 금지시켰고 세금을 내렸으며 사형을 금하고 주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예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고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까지도 사면해 주었습니다. 잔인한 검투경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시, 연극, 운동경기로 돌리게 한 개혁적인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보다는 무절제한 취미와 향락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엔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하게 되고 스스로 연극배우와 음악공연을 하는 등 이상행동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로마에 있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로마의 건물들을 그리스 식으로 새로 짓기 위해서 일부러 재개발지역에 불을 낸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네로는 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게 합니다. 즉, 불이 발생할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화재 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퍼뜨린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남에게 가하려고 한 대로 자신도 똑 같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불로 사람을 죽이려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켰습니다.
또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는데 시민들은 네로황제에 대한 분노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면서 풀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 그들의 희생을 통해 로마인들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부른 분노에 대한 합당한 대가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으로서만이 그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희생양으로 좋았던 것이 힘없던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가 나면 무엇이든 막 부수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화를 다른 것을 통해서 풀고 싶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혼나거나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개를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그 개가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풀이로 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때려도 대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개가 대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못 때렸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개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름 화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개를 때린다고 억울하게 당한 심정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당신이 만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마련해두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을 하기는커녕 하느님과 똑같아지려는 욕망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합니다. 그리고 나무 뒤로 몸을 숨깁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희생양을 만들어서 양심의 가책을 없애보려 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 때문에 그랬다고 하고 하와는 뱀 때문에 그랬다고 서로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양심이 편안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도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희생 제사도 양심의 죄책감을 완전히 사리지게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의 죗값은 사람이 치러야 온전한 것이지 동물을 대신 죽인다고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고 바오로사도도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상할 합당한 희생은 바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희생도 양심의 가책을 깨끗이 없애거나 하느님의 분노를 완전하게 끄지는 못할 것입니다.
죄는 죽음이지만 피는 생명입니다. 누군가 세상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야하는데 세상엔 누구도 남의 죄까지 짊어지고 피를 흘릴 만큼 완전한 희생양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 네로 황제처럼 아무나 잡아 희생시키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분노케 한 세상의 죄를 짊어질 희생양이 있어야하는데 하느님은 또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강요하실 수 없으십니다. 오직 성자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당신 자유로 희생양이 되실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으로 네로 황제와 백성들 간에 평화가 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로 인해 갈라졌던 하느님과 인간에게 다시 평화가 온 것입니다. 마치 잘게 부수어진 시멘트가 갈라진 벽의 틈을 메우듯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 양심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 관계를 정상화시켜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손수 희생양이 되셔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분노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잊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의식의 해방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모든 백성은 그 분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다시 행복을 되찾아 주실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모든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분이 오실 때 그렇게 기뻐하던 백성이 이젠 그 분을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목청을 높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나도 끼어 있습니까? 만약 그 백성 가운데 내가 끼어있지 않다면 아직 그 분은 나의 희생양이 아니고 나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 분을 때린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에게 침을 뱉고 오물을 던진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고통을 드린 것도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양심이 자유로워집니다. 실제로 그 분은 다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채변봉투에 변을 담아오라고 해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중 채변봉투가 그만 변기 구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의 짧은 팔로는 그 채변봉투를 다시 집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도 거의 변기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간신히 채변봉투를 건져 올리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지만 아버지가 대신 희생하시고 다시 원래상태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더러운 곳으로 추락한 우리들을 대신해서 손수 더러운 곳에 내려오시어 더러운 냄새를 맡으며 우리를 다시 건져 올려주신 것입니다. 그 희생 덕으로 우리는 다시 아버지와의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는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 가져야 하는 마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나’라는 것과 따라서 그 분을 더 ‘사랑’해야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작은 희생양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삶
-배광하신부-
악이 만연한 세상을 향하여
여러 차례 떨어진 신학교를 어렵사리 합격한 조카가 삼촌 신부님에게 인사차 들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떠나오던 아침, 삼촌 신부님은 제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광하야! 네가 신학교에 들어가거든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거라. 신학교는 천사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땐 삼촌 신부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 보았더니, 정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신학교도 인간이, 그것도 죄지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삼촌의 말씀인즉, 고귀한 사제의 길에서 결코 인간에 대한 갈등과 상처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지 말라는 충언이셨던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이 모인 공동체는 천사가 아닌 죄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도 성 요한은 우리 죄 많은 인간을 향하여 분명한 가르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 10).
때문에 독일의 저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 큉’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현실의 교회는 죄 많은 교회다. 역사상 교회의 모든 그릇된 결정과 그릇된 발전의 내면에는 항상 개인적인 실수와 개인적인 과오가 있고, 온갖 불완전한 결함과 기형적 현상, 죄악과 비행이 숨어 있다. 그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떠나 환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환상이 아닌 현실, 그 죄 많은 인간의 세상에 오신 겸손과 가난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안고 있는 불협화음과 죄악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당시 기득권에 안주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 지키기에 급급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악이 만연한 자리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맞닥뜨렸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에 휩싸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온갖 불평불만 속에 찾고자 했던 것은 이집트에서의 쾌락과 방종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옛 죄악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기 위해서 악의 대표적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어둠을 깨뜨리고 오소서
스승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결단코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려던 옛 신앙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같은 고통과 눈물의 믿음 속에서도 그들의 한결 같은 희망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때 신앙인들의 삶, 예루살렘의 화려한 입성 뒤의 처절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옛 신앙인들의 모습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에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메고 다녔습니다”(히브 11, 36-38).
이는 오늘 먼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였던 메시아 수난의 모습을 그대로 빼어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 6).
이 세상의 것을 버리려면 반드시 당하게 될 박해의 조롱을 견디면서도 그들의 한결 같은 믿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값진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닮은 지상의 삶이 구원으로 이끄는 삶임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깨달았기에 그 같은 곤궁과 박해를 달게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죽음 앞에 나의 어둠을 깨뜨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미국의 ‘죽음의 여 의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이렇게 일깨웁니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인 것이다.”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루살렘 입성의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
-허영엽신부-
서 울대교구는 4월5일 김수환 추기경님 공식 추모 기
간을 끝내면서 평화방송∙평화신문과 함께“감사
와 사랑 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주제로
부활 기간 동안은“내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합니다”로 정했
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나 동료 등은 자칫 쉽
게 지나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곁에 있
는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자주 사랑의 정을 표
현하도록 권고합니다. 사실 한 번도 사랑의 정을 표현하지
못했다면 용기를 내어 문자를 보내거나 편지를 쓰거나, 혹
은 직접 사랑을 표현하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또한 미소를
짓고 먼저 인사하기를 실천사항으로 정했습니다. 쉬운 일
같지만 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사만 잘 해도 우리 주변의
분위기는 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이를
포용하고 끌어안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다른 생각, 사고
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흔히 우물안 개구리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거나 식
견이 좁은 사람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절
대적이라 생각하면 다른 생각과 사고를 수용하기가 어렵습
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는 같이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화하는 사
람은다른생각을가진이들에게때로는적대적이됩니다.
오늘 수난 복음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
살렘에 입성하자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크게 환영하며‘호
산나 다윗의 자손’을 노래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열심히 환영했을까요? 유다인들은 오랫동안 자신
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고대하던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
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전능하신 힘
을 지닌 구세주였습니다. 이제 그들의 구세주가 로마의 억
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다
윗 왕조의 위대함을 세상에 다시 한 번 드높일 것이라 한껏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때
오늘날의 슈퍼스타가 부럽지 않을 인기를 누리셨던 것입
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얼마 후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
중들이 완전히 돌변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릅니다. 예수님을 영웅처럼 떠받들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다분히 철저하
게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은 비폭력과 무조건적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주장하셨습
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에게 크게 기대를 걸었던 유다인들은 실망한 나머지 예
수님을 죽이려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과는 아
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우리들도 그때 그 군중처럼 예수님
께 오직 현세적인 행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요? 사순절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
다. 왜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
히 가셨는지 말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14,1)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풀려나온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유다인들은 이 축제 첫날 저녁 파스카 양을 먹습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곧 무교병만을 먹도록 되어 있어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기준이 예수님과 달랐던 유다교 지도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분의 말씀 선포와 행위를 손 놓고 보기만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종교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위험한 인물로 예수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이 소동을 일으킬까 두려워 축제 기간은 피하기로 합니다(2절).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루살렘에 몰려든 수많은 순례자를 자극해 소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백성의 안녕과 평화가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요로 인해 로마 제국이 개입하고, 이에 따라 자기네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님은 이제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들어와 값진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향유는 인도의 나르드나무 또는 그 나무의 뿌리에서 채취한 것으로, 여기서는 그 값이 3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노동자의 300일 품값에 해당하는 값어치입니다. 여인의 행위에 담긴 깊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비싼 향유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데에 화를 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68절)
여기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는 ‘기름 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서로 무척 대비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그가 이제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그분을 떠나갑니다(10절).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실망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지 않고 헛되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예수님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한 여인과 달리, 유다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메시아상에 부합되는 예수님만을 사랑했던가 봅니다.
이와 같은 유다의 배반과 달리 우리가 지닌 한계, 인간의 약함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다른 제자 베드로가 묘사됩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힘주어 장담합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31절)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고(50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6672절 참조). 또 다른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52절) 이 비극적인 순간에 자신이 따르던 스승과 함께하지 못하고 ‘알몸으로’ 달아나는 제자입니다. 그는 몸에 둘렀던 아마포를 남겨둔 채 자신의 무력함과 수치심을 상징하는 알몸으로 도망갑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겟세마니 언덕 어둠 속으로 불러냈을까요?(32절)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그분은 지금 완전한 고독에 잠겨 당신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에서의 유혹(마르 1,13)과 한적한 곳에서 바치신 기도(1,35)를 떠올려 봅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아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기도에서 얻으시던 예수님은 이제 어둠 속에서 당신의 마지막 길을 앞두고 괴로움과 비탄에 잠기십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34절) 그러나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고 죽음을 당하실 때에 그분 옆에 함께할 수 없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여기서도 봅니다.
슈퍼스타
-강인봉-
누 구에게나‘빵’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자
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이유, 보람 등 생
명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반
적인 일이겠지요. 특히 가수나 연기자 같은 소위 연예인의
경우 대중들의 박수와 환호는 그들의 삶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소중한 그‘무엇’입니다. 제가 만들고 부르는
노래에, 이야기 하나하나에 울고 웃어주며 부모나 형제자
매 이상으로 저를 걱정해 주고 잘 되기를 빌어주는 팬들에
게 더없는 애틋함과 책임감까지도 느끼게 됩니다. 저의 경
우에도 몸이 아파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치 홀린 듯 무대 위에서 노래한 적이 적지 않으니
까요. 하지만 그 순간의 박수와 환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히려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순간은 바
로 내리막을 예고한다는 것을 대부분 깨닫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따라준다는 사실, 그리고 나의 노
래가,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한편
부담스러우면서도 그만큼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권력이건 금력이건 또는 인기이건 한번 그 맛을 보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
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한번 인정을 받으
면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무리한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
지릅니다. 시작은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했던 많은 일들과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추하게 변하고 부끄러운 모습
으로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것도 결국 이런 욕심
때문이겠지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소위‘월드스타’
의 모습입니다. 소문만으로 예수님을 흠모하고 추종해 왔
던 많은 사람들이 막대풍선 대신 팔마가지를 흔들며 열렬
히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한번 뵙기 위해 지
붕 위에도 올라가고 나뭇가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와 비교해 봐도 손색없을‘스타’예수님의 인기를 느
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1주일 후 예수님의 인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그분을 환영하던 바로 그 손,
그 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돌팔
매질을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꿋꿋하십니다. 인기에 연
연하는 모습이었다면 얼마든지 대중들의 인기를 회복할
방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향해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오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슈퍼스타’가 되셨습니다.
주목받고 싶어 하는 것이 저희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튀려고, 큰 소리를 내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순간의 관심은 곧 사그라지고 맙니다. 마치 오늘의
성지가지가 내년 사순시기의 재가 되어지듯이….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저녁, 성지에 어떤 부부가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부탁을 위해 형제님께서 퇴근한 후인 저녁 시간에 저를 찾아오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분들은 저를 보자마자 저 때문에 다투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하고 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쭈어 보았지요. 그리고 그 이유를 들어보니, 저 때문에 다투신 것이 맞기는 하더군요.
형제님께서는 저녁에 퇴근하시고 천천히 저를 방문하려고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자매님께서 “신부님께서는 8시면 잠자리에 들어가셔. 그러니까 빨리 가야해.”라고 재촉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형제님께서 생각해보니 이상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신부님 자는 시간을 어떻게 알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부도 남자인데, 외간 남자의 자는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께서 저의 자는 시간을 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저 때문입니다. 사실 강론 시간에 “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8시면 비몽사몽대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비밀은 웬만하면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내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까지 종종 새벽 묵상 글이나 강론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솔직함이 한 부부 사이에서 약간의 다툼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네요.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솔직하셨지요. 그래서 정말로 비밀스러워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까지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솔직함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주는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결심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나쁜 것은 하나도 주시지 않으려고 하셨던 분, 불의한 행동을 전혀 하시지 않으신 분, 또한 해가 되는 말씀 역시 한 번도 하시지 않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셨을까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 않을까요? 똑바로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을 때,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과 정반대가 되는 죄를 범하고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이천년 전의 군중처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기쁘게 부활을 맞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싸움이 날 수도 있습니다.
빠다킹신부
예루살렘 입성
-김훈일 신부-
오 헨리의 단편소설 가운데 ‘묵은 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빵집에서
싸게 파는 묵은 빵을 사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빵집 여주인은 매일
묵은 빵을 찾는 그 남자를 동정하여 빵 속에 버터를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남자에게 큰 낭패를 보게 합니다. 그 남자는 건축 설계사로
몇 달째 현상 응모에 출품할 설계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묵은 빵은 그 설계도면을 그릴 때 지우개 대신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빵집 여주인이 동정심에서 듬뿍 넣어준 버터 때문에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려왔던 설계도면을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현상 응모에 설계도면을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오 헨리는 이 작품에서 여주인의 얄팍한 동정심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경우, 어쩌다 베푼 동정심이 오히려 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얄팍한 신앙에 머무르며 뜨겁고
차갑고를 반복하다가는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결국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배신을 하든지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환호합니까? 그분의 사랑을 진정으로 느꼈습니까?
오늘 우리는 환호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셨습니다.
다시 어리석은 군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배미애 수녀-
◆예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나병은 어떤 병인가? 그 당시에는 천형처럼 두려워하며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질병이었다. 그러한 병에 걸린 시몬의 집에 예수님은 가셨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
그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그 속에 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행동을 보며 분개하였다.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말이다. 그 여인이 나병환자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두려움은 없었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것을 몰랐을까? 그 여인이 비난 속에서도 옥합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 예수님 발 아래 가져갈 나의 옥합은 무엇인가? 비싸다고 품어 안고 내놓지 못했던 향유는 무엇일까? 명예일까? 돈일까? 아니면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일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과감하게 깨뜨리는 아픔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여정으로 갈 용기를 청해 본다.
결국 세상의 가치를 보지 않고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 발 아래 내려놓았던 여인의 행동은 대사제들에게 돈 몇 푼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와 그녀의 행동을 비난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지게 된다. 옥합을 깨뜨리는 순간, 그 향기는 바람에 날려 멀리멀리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수 신부-
4년 전, 온 나라를 환호와 열기로 들뜨게 했던 월드컵 군중들의 열광은 세계적인 뉴스거리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월드컵 응원전의 한국인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 모여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과연 군중은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군중의 거대한 힘은 새 역사의 물꼬를 트기도 했지만 반대로 가장 추악한 인간성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 시대에 히틀러의 선동에 따라 독일 군중들이 보여준 무서운 단결과 힘은 군중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에는 군중들의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첫 번째 군중의 모습은 환호하는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에 목말라했고 호기심으로 몰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몰려다니는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굉장한 이벤트(?)를 벌이시리라 기대하였고 흥분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신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2, 24)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두 번째 군중의 모습은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바랍빠와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할 것인가에 대한 빌라도의 요구에 바랍빠를 선택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씁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젠 완전히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한 사람들의 충동에 의해서 그들의 극단적인 호기심이 죽음을 요구하는 마음으로 뒤바뀌고 마는 군중들의 속성을 알고 계셨기에 애초부터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이 변덕스런 군중 앞에 예수님만이 당당하게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군중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런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이러한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 세계적이라 칭하는 가짜 학자들, 타락한 종교인들, 악덕 경제인들, 거짓 예술가들은 국민들을 군중으로 삼고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군중을 휩쓸고 다니는 사회는 이성을 상실하고 구호와 편 가름으로 술렁대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가니까, 거기에 화끈한 감동이 있으니까 덩달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고백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서 신앙고백을 통해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의 흥분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군중심리가 바뀌면 신앙도 언제든지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기웃거리며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있지 않고 확신 없고 변덕스런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이천년 전에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들과 함께 소리 지르고 손을 치켜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을 등지고 살았던 삶을 되돌려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4년 전, 온 나라를 환호와 열기로 들뜨게 했던 월드컵 군중들의 열광은 세계적인 뉴스거리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월드컵 응원전의 한국인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 모여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과연 군중은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군중의 거대한 힘은 새 역사의 물꼬를 트기도 했지만 반대로 가장 추악한 인간성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 시대에 히틀러의 선동에 따라 독일 군중들이 보여준 무서운 단결과 힘은 군중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가 묵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에는 군중들의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첫 번째 군중의 모습은 환호하는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에 목말라했고 호기심으로 몰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몰려다니는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굉장한 이벤트(?)를 벌이시리라 기대하였고 흥분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신 예수님은 당신의 표징에 호기심을 지니고 기웃거리는 군중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흥분한 군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2, 24)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두 번째 군중의 모습은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바랍빠와 예수님 중 누구를 석방할 것인가에 대한 빌라도의 요구에 바랍빠를 선택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씁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군중의 모습입니다. 불과 닷새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젠 완전히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님을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한 사람들의 충동에 의해서 그들의 극단적인 호기심이 죽음을 요구하는 마음으로 뒤바뀌고 마는 군중들의 속성을 알고 계셨기에 애초부터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이 변덕스런 군중 앞에 예수님만이 당당하게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군중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 호기심 많고 변덕스런 군중들을 도구로 삼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려 했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군중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이러한 군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흉한 정치인들, 세계적이라 칭하는 가짜 학자들, 타락한 종교인들, 악덕 경제인들, 거짓 예술가들은 국민들을 군중으로 삼고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군중을 휩쓸고 다니는 사회는 이성을 상실하고 구호와 편 가름으로 술렁대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한 군중심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가니까, 거기에 화끈한 감동이 있으니까 덩달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 고백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서 신앙고백을 통해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의 흥분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군중심리가 바뀌면 신앙도 언제든지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하고,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군중들, 확신 없는 신앙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신앙의 껍데기를 기웃거리며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있지 않고 확신 없고 변덕스런 군중 속에 머무르는 한 이천년 전에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여전히 그 무리들과 함께 소리 지르고 손을 치켜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공모자들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여전히 저 군중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을 등지고 살았던 삶을 되돌려 하느님 앞에 겸허하게 나아간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반겨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군중이 아닌 ‘나’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신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충만한 하느님 자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랄 일이 세가지 있습니다. 첫번째 놀랄 일은 이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천국에 와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 놀랄 일은 천국에서 만끽하게 될 기쁨이 우리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표현 못할 충만한 행복이 거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기 천국에'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의 사람들도 천국에 와 있어서 또 한번 놀라게 된답니다."
사순절을 지낼 때마다 제 뇌리 속을 떠나지 않는 묵상거리 한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성지(聖地)에 들렀을 때, 연로하신 신부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여러분들,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언젠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은 너무 기뻐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을 여러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너무나 깜짝 놀란 나머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게 될 것입니다."
또 다시 맞이한 성주간(聖週間),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늘 '내 인생'에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정녕 역설적이기만 합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십자가 사건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주님께서 사악한 무리들의 끝도 없는 폭력 앞에 어찌 그리도 무력하십니까? 만왕의 왕께서 일개 병사들의 조롱과 침 뱉음 앞에 어찌 그리 침묵하실 수 있습니까? 왜 메시아께서 인류역사상 가장 고독한 모습으로, 가장 고통스런 모습으로 그렇게 임종하십니까?
연인(戀人)들 사이에서 사랑이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끼는 현상'입니다. 이 때는 약간 비정상이 된다지요. 딴 사람이 된답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습니다. 먼저 '물질공세'로 나갑니다. 평소 '소득'으로는 무리가 되는 고가의 선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점점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섭니다.
보십시오. 부족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한없는 '자기증여'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이뤄지는 사랑이 이러한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증여는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수천수만 배의 자기증여가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은 예수님 일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 가장 무력한 순간, 그래서 가장 슬펐던 순간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 아버지께 부여받았던 인류구원사업을 완전무결하게 마무리 짓던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완벽한 순종'과 '철저한 수동성'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가장 큰 영광과 기쁨을 드린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도 끔찍했던 이승의 삶을 마무리 짓던 그 순간은 어떤 사람들 눈에는 가장 비참했던 순간이었지만, 예수님께는 가장 충만한 자기실현의 순간이었습니다. 완벽한 자기해방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간직하셨던 꿈이 이뤄지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간직하셨던 꿈은 모든 인류의 행복이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에 안기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이제 예수님 최후의 소원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상 예수님은 이제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한 생명의 은인, 생명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서공석 신부-
오늘 우리는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에서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길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패였고 그분에게 희망을 두었던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의 심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백성에게 허락하는 자치 기구였습니다. 지방 유지들인 원로들과, 대사제외 중견 사제들, 그리고 율사 대표들로 구성된, 전체 인원 71명의 의결 기관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라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 최고 회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야기가 그분이 거짓 예언자로 단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했는지 알아맞히라고 놀렸습니다. 유대인 최고 회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해야 했습니다.
최고 회의가 붙인 거짓 예언자라는 죄명은 총독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최고회의는 정치범으로 둔갑시켜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하였다는 고발입니다. 이 사실은 총독 관저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장면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자주색 옷을 예수님에게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그 앞에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식민지에서 왕이라고 자처한 인물이 점령군 군사들로부터 받는 조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지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병고, 가난, 실패 등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이 무자비한 그만큼, 그들 자신도 무자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단죄하면 하느님도 당연히 단죄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가르침이 불온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과연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살리시는 아버지라면,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여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지를 보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집단이거나 비 종교 집단이거나를 막론하고, 한 집단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군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반성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보존하고 누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독선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를 무자비하게 제거합니다.
그 시대 유대교 실세들의 눈에 예수님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목수의 아들입니다. 종교적 신분은 평신도이며, 재산과 지위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공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크게 존경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3,31)고 폭언까지 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회가 누리는 질서를 혼란에 빠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대사제 가야파의 말을 전합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 죽고 온 겨레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요한 11,50). 자기들이 만든 질서와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이롭다는 대사제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그렇게 제거되셨습니다. 유대인 최고회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거부하던 로마 총독의 협조마저 얻었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로마제국을 거슬려 음모하는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편법입니다. 가까이 있는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멀리 있는 원수의 협조를 받은 것입니다. 미움은 이렇게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고, 식민지 유대아를 무사히 통치하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통치자인 그에게 식민지 청년 한 사람의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빌라도가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에게는 식민지 군중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독선적 권위주의와 옹졸함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배경에는 진리에 대한 무관심과 인간 생명을 소홀히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죄는 우리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어 왔고, 우리는 누구도 그런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라고도 고백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투신(投身)하면, 그 생존은 순탄하지 못합니다. 그 대의가 신앙이면 순교, 그것이 나라라면 순국, 그것이 직장이면 순직입니다. 자기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쳐 대의를 추구하다 목숨을 잃은 생명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살기보다 하느님의 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발생시키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 안에서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빌고 바쳐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소인(小人)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대의입니다.
-조욱현 신부-
오늘의 전례는 분위기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것 같으면서 그 순간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모든 것이 수난과 죽음을 향한 비탄으로 젖고 만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늘을 '성지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충되는 면이 아니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유다 지도자들에게 강한 반발심을 야기한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왕'이 되시어 메시아 왕권을 획득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복음사가들의 의도이다. 오늘의 전례는 기쁨과 슬픔으로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독서: 이사 50,4-7: 나는 욕설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야훼의 종이 비록 혹심한 능욕을 당하여 자신의 사명이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으로 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6-7절).
복음: 마르 15,1-47: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39절)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복음에는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38절)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구약의 구원계획에 따른 성전의 기능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신비의 베일을 '찢고서' 그 내부를 열어 보임으로써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서,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축성해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나약함'의 행위,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 '나약함'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14,33) 계셨고,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15,5), 고발에 대한 무응답(15,5), 십자가를 질 기력이 없어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지심(15,21), 십자가 밑에서의 조롱 즉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살리지 못하는구나!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느냐?"(15,31-32)로써 그분의 나약성이 극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바로 이 극한에 이르는 '나약성'에서 나타난다. 백인대장이 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15,39)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나약성'은 '권능'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가 과연 찬양 받으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14,61) 라고 물었던 대사제에게 당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14,62)라고 대답하시며, 종말론적 심판자로서의 당신의 품위와 권능을 말씀하신다.
이제 자신의 '나약성'을 통하여 '권능'이 드러나는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도전에 합당한 응답을 하도록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십자가의 도전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주위가 비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14,71),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난 제자들(14,50), 환호하던 군중이 바랍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친다(15,6-15). 이러한 '배반'의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는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보다 큰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기민한 통찰력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품위를 회복하고 있다(15,40-41). 여하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때에 즉 참담한 고통의 때에 홀로 남아 계셨다.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14,27).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곧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일 용기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오늘날의 우리의 사회, 즉 뱃속에 든 아이를 살해하거나, 남편이나 아내를 배신하거나, 자기를 거슬러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아 없애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기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풍토에서는 대단히 힘들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찬란한 징표를 세상에, 그리고 가치관의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오늘에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인간생활의 '맛'을 더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복음이 요청하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2,6-11: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를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8절) 철저한 '비움'의 보상으로 얻게 되는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9-11절).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된다. 오늘 전례의 환호와 비탄이 함께 있는 것같이 이 성주간에도, 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약성'과 '십자가의 도전'이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서 갈 때에 구원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고 성주간을 더욱 열심히 지내도록 하자.
-김영남 신부-
"호산나!” 환호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아우성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의 전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네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했던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무섭게 외치는 복음말씀을 듣습니다. 미사 전에는 성지를 들고 성가를 부르며 행렬하면서 기쁨에 잠기지만, 미사 동안에는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사를 들으면서 전율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데, 나귀는 사실 ‘말(馬)’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사람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짐승이었습니다. 그리고 말(馬)은 군사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어서 그런지 힘과 전쟁을 상징하는데 비하여, 나귀는 서민들의 평화와 겸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사가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겸손한 메시아’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즈카 9,9-10 참조).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였던 ‘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 지혜의 기준에서 보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런 ‘메시아’의 모습은 오늘 제2독서(필리 2,6-11)에 나오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제1독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도 참조).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주간인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우리 자신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처럼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어, 성당 안에서는 참회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생활 현장에 들어서면 언제 성당에 다녀왔느냐는 듯이 헛된 욕심 때문에 가족과 이웃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며 신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는 ‘언제 그렇게 열성적이었느냐’ 할 정도로 쉽게 하느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중에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을 향해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쳤던 군중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면서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약한 믿음이 굳세어 지도록 복된 성주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겟세마니에서 졸고 있다가 도망친 제자들, 음모를 꾸미고 유다를 매수하는 지도자들, 유혹에 빠져 스승을 팔아 넘긴 유다, 예수를 모른다고 거듭 부인하는 베드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주는 빌라도, 예수의 죽음은 이 모든 이들의 죄의 합작(合作)품 이다. 우리도 때로 무관심과 방관으로 이런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다.
1. 무죄한 예수의 죽음에 공모한 자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11,10)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얼마 안 가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15,14)하며 악을 쓰는 사람들을 만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세상 인심을 너무나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을 보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소리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책임이 없는가? 무죄한 예수의 죽음에 공모한 사람들은 누구들인가?
-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마태26,4)
예수의 죽음에 가장 깊이 관여한 이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대제관들이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예수의 성전정화(마태21,12-17)때부터 더욱 구체화되었다. 예수는 그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앗아갈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그들은 은전 서른 닢으로 유다를 매수하였다.(마태26,15)
-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이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며 “낭비한다.”고 비난하던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청부살인이나 밀고나 배신은 손쉬운 일이다.
-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마르14,37).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있어라.”(마르14,34) 하시는 스승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다. 스승이 붙잡히자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가 심문을 받는 곳에까지 갔으나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마르14,67)하는 하녀의 말에, 베드로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르14,71)하며 거듭 부인하였다. 믿음 때문에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겠다는 자세는 이런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며 소리질렀다.(마르15,13)
지도자들의 충동질을 받으며 덩달아 춤을 추는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른다. 세상 인심은 항상 그런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보다는 구호와 매스컴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군중이다.
-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주었다. ”(마태27,31)
빌라도는 예수가 죄 없는 줄 알면서도,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를 보고(마태27,24) 그리고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19,12) 하는 말은 빌라도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말이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 몇 명 죽이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예수는 기득권자들의 음모와, 물욕과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다스와, 무기력하고 어떤 신념도 없는 제자들과, 덩달아 춤을 추며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과, 정치적 출세욕에 포로가 된 빌라도 등, 이 모든 이들의 죄가 예수를 죽음에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고 우리도 그것들을 방관하며 묵인하는 때가 많다. 예수의 죽음, '예수 사건'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우리의 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2. 죽음은 가장 힘있는 말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세레자 요한이 제수(살로메)를 데리고 사는 헤로데의 부도덕한 생활을 비판하다, 살로메의 질투의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또한 숱한 기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항상 '아버지의 뜻'(마태26,42)을 따르고 찾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힘을 가진 이들의 질투와 음모의 희생이 되어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15.30)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가23,39) 온갖 조롱과 모독 가운데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는 참으로 철저히 혼자된 고독을 맛보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말이 없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15,34)
예수는 위안이 가득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른 보람이 무엇인가? 하느님께 철저히 외면당한 것과 같은 죽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죽기 전에 모든 일의 성패를 판가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는 참으로 십자가의 철저한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다 바치신 분이시다. 예언자에게 있어 죽음은 그 생애 중에 가장 큰 부르짖음이다. 마르틴 루터 킹도, 간디도,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모두 비명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정의로운 사람의 억울한 죽음' 그것이 가장 큰 메시지이며, 세상을 향한 가장 큰 외침인 것이다. 우리는 혹시 생전에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위로와 평화가 가득한 가운데 죽겠다는‘욕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