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5장으로 들어갑니다.
요15장은 아버지 집에 거하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집, 그 처소 안에 있는 영적인 상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요15장입니다.
그래서 만일 세상 임금이 우리를 잡으러 와도 너희는 내 안에만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절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 임금이 있는 곳에 그 자리에 머물면서 마귀와 싸우는 싸움터로
나가자 이러지는 말아야죠. 마귀와 잘 싸우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북한을 대적하는 것은 나 혼자 북한으로 가서
김정은이를 때려잡아야 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북한을 대적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남한에서 군대생활 잘하고 경제활동을 잘하는
것이 북한을 대적하는 것이지 홀로 1군사령관보고 휴전선 걷어 치워 내가 올라가겠어
김정은을 때려잡겠어 때려잡자 김정은 소리 지르는 것이 북한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복하는 것이 바로 마귀를 대적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북한을 대적하는 길은 철저하게 남한 소속이 되어서 사는 것과 같은 이치인겁니다.
그래서 14장 마지막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14:31) 하시고는 어디로 가느냐
바로 요15장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요14:30에서 보혜사 성령도 오시고 세상 임금도
같이 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사단을 따라갑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성을 전혀 얻지 못하는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아래
그대로 머물므로 환난과 곤고로 인해 여러 가지의 고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신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요14장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도마나 빌립, 가룟인 아닌 유다의
이 질문은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입니다. 지금도 육신에 속한 자들의 물음입니다.
인간적인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대답을 하신 것이 바로 요14장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세상을 향해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편으로 사용하면 요14장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생각나게 하심을 입은 사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그 길’이라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아버지를 알고,
또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가르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와 하나가 되어 참 평안을 누린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받는 참 복이라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요14장 31절을 보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하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율법을
완성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만들어 가시지만
세상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지막에 아차 그렇구나하는 순간 끝나버리는 겁니다.
마25장에 악하고 미련하고 게으른 종을 한번 보세요.
마지막에 주인이 설명을 다하고 나니까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순간
“이 종을 쫓아내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도 “아차!” 하는 순간에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택한 백성도 처음에는 모르기는 세상과 똑같습니다. 우리나 세상이나 모르는
건 다 똑 같은데,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열심에 걸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이 율법을 기어이 완성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마지막에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순간 그만 심판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 때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심판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것만
늘 깨닫지만 개(改)가 되질 않습니다. “회”(悔)는 있는데 “개”가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생활 속에서 성령을 소멸해 버리므로 이럴 때 없을까요?
성령이 십자가의 도를 알게 해서 우리로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와
생명으로 옮기심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므로 아차 하는 순간에 십자가를 건너온
자신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공로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때마다 그 아들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불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는 되는데 고쳐지질 않는 건 성령을 소멸했다는 증거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없으면 내가 잘못했구나 까지는 깨달아지는데 도무지 고쳐지질 않습니다.
우리 육체는 자신을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구약의 사울이고,
신약의 가룟 유다입니다. 사울도 아차! 하는 깨달음은 있었지만 스스로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밀고 나가다가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가룟 유다도 같습니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는 순간에 자신을 돌이켜 주님의 제자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만 자살하므로 멸망의 길로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이 회개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 자신을 두고
애통할 수 있다는 것은 복으로 알아야 합니다(마5:4) 그런데 제가 솔직하게 말해서
많은 분들을 뵈면서 느낀 것은 말씀을 듣고는 “아차! 내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고
깨닫는 분은 많은 것 같은데 속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너무 오랫동안 소멸시켜서
그 성령님이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심을 따라서 애통함의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였기 때문에 회는 있는데 개가 안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 회개인 줄 알기도 합니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아차!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이렇게만 고백할 뿐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애통하는 기도는 많지 않는 걸 봅니다.
주여 우리가 잘 못 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부르짖을 뿐 주님께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신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성령에 대한 무지나 소멸 때문에 이 땅의 교회가
점점 더 황무지가 되고 황폐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국교회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나름대로 이래선 안 된다는 말들은 하지만 아무도 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첫댓글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배려는 가슴에 남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사랑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