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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화 - 재 회(2)
"죄송합니다!"
다른 쪽 테이블에 물 잔을 갖다 주던 종업원이 손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유리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리 깨지는 소리에 카페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종업원을 쳐다보았지만 해서와 시연은 그러한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서로가 바라보고 있었다.
시연은 해서의 물음에 순간 가슴이 멎은 듯 숨이 막혀왔다. 도저히 지호와의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청현의 믿음에 또 한 번 배신감을 안겨줄 것만 같았다. 그의 물음에 도저히 '아니오'란 진심이 아닌 대답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꿈에서 깨어야 한다.
"아, 아니오."
"그래요? 하긴...지호가 제 얼굴보고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었겠냐며 누군가를 정말 사랑했다면 그건 연극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의 그녀 외엔 없었다는군요."
가슴이 아려온다.
연극에 미쳐 자신의 온 인생을 다 내걸 정도로 미쳐있었던 그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을 했었다. 나, 자신을...
하지만 온 마음 다해 자신을 사랑했었던 그 마음을 이제는 지금의 곁에 있는 그녀에게 다 바치고 있겠지. 나, 자신을 사랑했듯이...
"설란이라는 그 분이요?"
"어제 보셨죠? 하하."
해서는 멎쩍은 듯이 크게 웃어 보였다. 시연은 그의 그런 웃음은 처음 보는 터라 그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세월이라는 건 무시 못 할 정도로 위대했다. 이렇게 크게 웃는 그의 모습은 시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설란이란 그녀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정말로 그는 자신 곁에 있으면서 그렇게 크게 웃은 적이 없었기에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한 순간이고 그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슬펐다. 지금처럼 크게 웃어주지 않은 건 자신과 있었을 적에 그렇게 많이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테니.
시연은 지호의 말대로 자신만의 피에로가 살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라 자신을 위로했다. 정말, 자신의 곁에 있을 때 보다 더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그를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며 깨끗하게 그를 잊어보겠노라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지호와의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지켜주고 있는 청현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오늘로 정말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한 서희는 이제 잊어야지.
서희...안녕.
"서희라는 사람. 저랑 그렇게 닮았나요?"
"네?"
"제가 생각보다 사람 이름은 잘 외우거든요. 분명, 서희라고. 절 안으며 그렇게 불렀죠."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그를 마주보고 있기가 처음보다는 많이 편해지고 있었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이미 5년 전에... 죽었지만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너무나 많이 닮아서 순간, 정말 살아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했어요."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고 그 진동은 해서의 정장 자켓 안주머니에서 울리고 있었다. 해서는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가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에 뜨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한 껏 들떠서 귀로 가져댔다.
"설란!"
그의 입에서 '설란'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시연은 창가로 시선을 옮겼지만 어쩐지 두 사람간의 대화에 귀 기울여 졌다.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에는 지호의 전화라 처음에 생각했었다. 5년 만에 그리고 이번이 어제이후로 세 번째 만남이었으니 시연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었던 지호가 혹시나 그와의 약속을 어기지나 않았을 까 조바심에 전화를 했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서의 표정이 액정을 들여다보고서 환해진 것을 보고서 그녀임을 알아챘다.
해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서 잠시 통화를 하겠다는 눈빛과 손짓을 시연에게 해보였고 시연은 그저 싱긋 웃어주었다.
- 인터넷기사 봤어. 어쩌자고 갑자기 발언해버린 거야?
"하하.. 그렇게 됐어."
- 정말 당신은 바람과도 같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지. 그럼, 약속대로 연극은 손 떼겠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그거 확인하려고 전화 한 거야?"
- 묻는 말에 대답먼저 해.
"좋아. 너와의 약속대로 오늘로 하늘그룹사 사장임을 발언한 이상, 니가 바란 대로 연극엔 발 떼겠어."
"...!..."
사장...? 하늘그룹...?
시연은 자신과 눈을 마주친 채 미소를 머금으며 전화 너머의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해서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쳐다보았다.
5년이나 지났다.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어제 처음 눈앞에 마주 선 서희의 잘 차려입은 모습에서. 그리고 거대한 이벤트를 준비한 모습에서. 그가 빈곤했던 연극으로 비로소 성공을 했구나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하늘그룹은 이전부터도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도 뼈대가 탄탄한 기업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역시 이전에 하늘그룹 이사까지 오르기도 했었다. 그런 기업의 사원도 아닌 사장이라고 틀림없이 그렇게 분명하게 들었다.
아버지가 그런대로 명성은 있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있기 때문에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이 그런 기업들 간의 소식이었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늘그룹이 대단한 기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청현 역시 하늘호텔의 지배인으로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하늘그룹에 관해서는 잘 알게 되었다.
5년 전, 새로 취임한 사장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사장은 본사 사람이 아닌 이상 그의 얼굴을 보는 이는 극히 드물며 공식석상에서도 그 모습을 잘 비추지 않았으며 또한 매스컴 역시 하늘그룹의 요구에 따라 그의 베일에 싸인 모습을 파헤치지 못했다는 점.
그래서 지호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또 하나 있어요."
"뭐든... 지킬게요."
"지킬건 아니고..."
"...?..."
"해서. 오늘로 밝혔거든요."
"밝혀요?"
"그동안 몰랐던 해서의 정체에 놀라지 말아요."
그럼... 지호, 그 사람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그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해서는 이미 통화를 끊고 시선을 아래에 두어 한 참이나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시연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네?"
"서희라는 사람... 생각했나요?"
"아, 아니오. 아니에요."
시연은 두 손을 들어 내저으며 강한 부정을 해보였다. 해서는 피식-하고 웃어 버리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실례지만... 주문 하시겠어요?"
유리잔을 깨뜨렸던 종업원이 조심히 다가와 물었다.
어떤 남자와 단 둘이 앉아서는 나중에 시키겠다 이미 나가고 없는 남자의 말에 주문을 미뤄놓고는 이십여 분의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도중에 일행인 여자가 와서는 자리에 앉았고 주문을 미룬 남자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주문을 받아볼 까 하다가 물을 달라는 손님의 요청에 갖다 주면서 주문을 받아, 말아를 생각하던 통에 손이 미끄러져 유리잔을 깨고 말았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시급도 짤뿐더러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주인의 핀잔을 피할 길이 없었다. 틈을 노리다가 어쩐지 대화를 오래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대화만 나누다가 주문도 못했네요."
"아, 뭐 드시겠어요? 제가 보답해 드리고자 일부러 시간까지 내주신건데..."
"아닙니다. 마신 걸로 하죠. 바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미소씨. 일어설 겁니다."
해서는 짧은 사이에 종업원의 왼쪽 가슴 편에 달린 금색빛 명찰을 확인하고선 정중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죄송하다 말을 전했다.
실로 가까이서 다가와 보니 남자는 꾀 한 인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을 까 짧은 시간에 생각에 잠겨 카운터 쪽으로 돌아가던 발을 다시 돌려 미소는 확신에 찬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도 다시 돌아왔다.
"혹시... '아메리카노' 에 나오는 서도진 맞죠?"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는 드라마의 남주를 굉장히 많이 닮아있었다.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분명, 서도진이었다.
"미안합니다만, 아닙니다."
"아, 죄송해요."
미소는 또 한 번 주인에게 밉보이는 일을 했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느낌이 틀렸다는 것에 실망을 하여 발길을 돌렸다.
어제 서후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엄마가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고 했었지. 그 남주를 닮았기에 사인까지 받으려 했던 서후의 행동까지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고 분명 연예인 서도진을 닮았다는 말은 서희라는 사람과도 분명 닮았을 테니, 역시 그 때문에 그렇게 즐겨보는 걸 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자 쿡쿡-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
시연은 갑자기 혼자 웃는 해서의 모습에 어리둥절 하면서도 그의 웃음이 또 다시 기분 좋게 하여 따라 미소지었다.
"반가웠습니다, 시연씨."
"...!..."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어 시연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변화를 놓칠리 없는 해서는 싱긋 웃어보였다.
"이름을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거든요. 비록 어제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요. 무슨 시연이에요?"
"아, 함시연."
"함시연..."
심장이... 이상하네.
"일어날까요, 시연씨? 여자친구가 이쪽으로 온다고 하네요."
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연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워요. 차 대접. 꼭 하고 싶었는데."
"아닙니다. 이것도 연이니, 청첩장을 지호를 통해서 전하도록 할게요. 와주셔서 축하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슴이 아려온다.
가슴 속에 깊숙이 품고 있던 그의 이름을 지우고 진실 된 마음으로 그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축하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딸랑-
해서는 시연 먼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당겨 주었고 그녀가 나간 뒤에 따라 카페를 나섰다.
"남편과 함께 축하해주러 꼭 갈게요."
"해서씨!"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고 시연과 해서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 까, 설란이 짧은 숏 커트의 머리칼을 날리며 이쪽으로 높은 굽의 힐을 운동화 신은 듯 편안한 걸음걸이로 당당히 걸어오고 있었다.
해서는 가까워져 오는 설란에게로 한 걸음에 다가가 그녀를 가벼이 안았다.
"여자랑 있다고 해서 허겁지겁 달려왔네."
"하하... 나 못 믿어?"
"저 사람이야?"
단 둘이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설란은 조금은 거리를 두어 부르는 바람에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먼 곳을 응시하는 시연을 보고 물었다. 해서는 '응'이라 짧게 대답을 하고선 설란의 왼 손을 잡고서 시연에게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자신의 여자를 자랑하고 싶었다. 조금은 오랜 시간 시연을 바라봐서 그런 탓인 지 어쩐지 묘하게도 설란을 닮은 듯 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연이었다. 짧은 머리칼의 설란과는 달리 긴 머리칼의 시연. 두 사람이 가까이 서고 보니 서로 닮아 있었다. 기분 탓인 걸까.
"인사해요,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
"반가워요. 스크린으로 봤던 것 보다 훨씬 이쁘시네요. 함시연이에요."
"..."
"...?..."
시연은 고개 숙여 인사해 보였으나 어쩐 일인지 설란은 시연을 넋나간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설란아?"
옆에 서 있던 해서가 여전히 잡고 있는 설란의 왼 손을 조금은 힘주어 잡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제서야 '아'를 짧게 내뱉으며 어쩐지 어색한 미소를 짓는 설란.
"...네. 저도 반가워요. 함.시.연.씨."
표정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칼날이 시퍼렇게 선 듯 차갑고도 날카롭게 시연을 쏘아보고 있었다.
함시연, 너. 왜 돌아 온 거야.
*
안녕하세요. 닉네임명을 바꿔서 신모연으로 새로 인사드려요^^
소설 제목도 바뀌었답니다.
업쪽 = 피에로★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댓글은 연재의 힘입니다.
첫댓글 완전 짱이예요ㅡ아 진짜 슬퍼요ㅜ해서ㅡ언제쯤이면 기억이돌아올까요. ?빨리기억찾아왓으면 조케어요ㅜ
댓글 감사합니다^^ 아, 저도 슬프네요.ㅜㅜ 서희 정말 언제 기억이 돌아오려나..
정마 재밋어요 앞으로 어떤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네요 빨리 서희가 기억 찾으면 좋겠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도록 더 분발할게요~ 끝까지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