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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9 - 12년간 브리타니아를 비롯해 제국을 순방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오현제 시대에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이며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지만 오늘날 재평가되어 제국의 내정을 개선한 명군으로 평가 됩니다.
**** 위 사진과 아래 사진들은 티베리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고향 스페인 이탈리카 유적지 모습 입니다 ***
전임 트라야누스 황제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로 제위 초 부터 광대한 제국을 순행하고 감찰하는등 끊임없이
행정적인 업무와 제국의 문제해결에 몰두했지만 광범위한 순행으로 건강을 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심취로 유명했으니 이전까지 로마 지도자는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로 수염을 기르는 사람도 생겼고 양성애자라는 점에다가
뛰어난 심미적 취향과 감각으로도 유명했으니 복잡하고 흥미로운 면모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로 누나 도미티아 파올리나가 있었으며 76년 1월 생
으로 그의 양부이자 오촌 당숙 (아버지의 외사촌) 트라야누스 처럼 속주 히스파니아(스페인)
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인들은 6촌 까지를 같은 가문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가문의 기원은 아드리아해와 가까운 이탈리아 중동부 피케눔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직계 조상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휘하 퇴역병들이
이탈리카를 건설할때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으로 백인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입니다.
하드리아누스의 가문은 기원전 3세기 이전에 히스파니아의 로마인 식민 도시 이탈리카에
정착한 본국 이탈리아계였는데... 몇년전 스페인 여행중에 찾아가 보니 집 안 바닥에
모자이크가 정교했다는 기억이 나는데, 그들은 로마 중앙 쪽과 연줄은 있었다고 하며
어머니쪽은 스페인 남서부 카디스 태생 부유한 히스파니아계 로마인 귀족가문 이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본가 사람들은 로마 중앙 정계와 연줄이 있었는데, 기원전 2세기부터 코르넬리우스
가문 전체를 대표한 대귀족 스키피오 일가와 긴밀한 사이를 맺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집안 직계는 고조부 시절부터 로마 중앙 정계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하드리아누스의 고조부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아들들 간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도왔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지지를 한 카이사르군 장교일 확률이 높다는데
옥타비아누스 (후일 아우구스투스) 에게 추천을 받아, 집안 최초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됐습니다.
증조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원로원 의원이었는데 의원직을 세습받기 전에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장교를 거쳤으며
조부는 원로원 의석을 세습받기 전까지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였으며 3대째 원로원 의원을 유지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는 동향 출신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고모 울피아와 결혼해 하드리어누스
황제를 낳았으니 외조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할아버지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고모도 마룰리누스 3세 처럼 고향만 이탈리카일 뿐 대부분 삶을 로마에서 살았던 귀부인이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법무관까지 올랐고 외삼촌과 사촌 형제인 트라야누스 부자를 도울 수 있는
배경이 됐으며 트라야누스 가문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서 황제로 지명한다는 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드리아누스는 귀족 자제들이 받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거액으로 고용한
가정교사들이 아닌, 그를 친부모 처럼 돌보고 훈육한 유모 게르마나 부부였으니 저들은
모두 게르만인이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유대 관계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무척 깊었다고 합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들을 친부모 처럼 대우하고 상냥했으니 주인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부모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떴음에도, 소년 하드리아누스를 친자녀 이상으로 훈육하고
사랑을 베풀면서 상상이 풍부하고 자유 분방한 하드리아누스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 게르만인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면서 일찌감치 자유를 줬고,
게르마나 부부의 자녀들과도 유대 관계가 친가족처럼 대했는데 이는 누나에게조차
무척 신경질적이고 본래부터 성격이 까칠하고 잔정이 없는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의외일 정도였습니다.
황제가 된뒤 게르마나 부부를 위해 거처를 마련해주고 형제처럼 지낸 이들의 자녀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었으며
유모 게르마나는 하드리아누스 보다 장수했으니 황제의 호의로 티볼리의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하드리아누스 생전부터 거주하면서 말년에 까칠해진 하드리아누스의 수발을 들면서 큰 감동을 줬다고 합니다.
86년에 하드리아누스는 불과 10살 나이에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를 잃었는데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대대장이었던 사촌 트라야누스와 고향
사람이던 당시 기사 계급에 속한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 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오촌 당숙 트라야누스가 엄청난 인내력으로
참으려고 노력해도 힘들만큼 다루기 힘든 소년이었으니 부잣집 도련님답게 오락이나 사냥같은 취미생활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으며, 유모 부부 외에는 자상하게 행동하지 않아 속을 단단히 썩였다고 합니다.
오촌당숙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5살이 되었을 때 사실상 양자인 하드리아누스의 정신머리를 고쳐놓고
규칙적인 삶을 몸에 익히겠다며, 강제로 군복무를 시키려고 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사냥 취미 탓에 무산됐고
하드리아누스의 매부가 될 세르비아누스가 참다못해 하드리아누스의 무절제한 생활을 트라야누스에게 알립니다.
트라야누스는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군복무를 시켰는데 하드리아누스가 배속된 군단은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
였고 직위는 군단장이었는데, 뜻밖에도 하드리아누스는 군복무를 상당히 잘했으며 그후 도나우강에
주둔 중인 제5군단 마케도니카 군단장을 역임했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고 네르바가 제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후 병사하는데, 97년 당숙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해에는 라인강 일대 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제위
계승자가 된 의미에서 하드리아누스는 군대 축하 메시지 전달 사절에 뽑히는 영예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르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의 사망 소식을 전달
하는 첫 주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자신을 질투하면서 방해한 다른 사절들을 제끼고, 그들이 놓은
여러 장애물들을 다 헤친뒤 걸어간 노력 끝에 트라야누스에게 제위 등극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고 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 친족이 몇 없는 황제 밑에서 승승장구했으니 제2차
다키아 전쟁이 벌어진 105년에서 10년 동안 제1군단 미네르비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다키아 전쟁을 지휘했고, 공로를 인정받아 106년도 법무관이 됩니다.
그리고 107년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하 판노니아 총독을 지냈고, 이듬해 집정관까지 지냈으며
이후 114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진할 당시, 황제가 출정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5촌 조카로 황제의 최측근이었으며 다키아(루마니아)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웠음에도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이야기나 확실한
징후는 전혀 없었으며 그는 확장 정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나마 트라야누스의 황후로 하드리아누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습니다.
파르티아 전쟁은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가
서기 117년 8월 9일에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했는데.... 죽기 직전에 황제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117년 양자 지명과 즉위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제국 내 위치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어머니 역할을
해준 황후 플로티나의 지지 외에는 확고하지 않았지만 황제 죽음 당시, 옆에 있던 이는 부인 플로티나
였고 뚜렷한 유언장 같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의 주장을 뒤집을만한 것도 전무해 로마제국 황제에 오릅니다.
트라야누스의 재위 기간 하드리아누스는 정식 집정관직을 얻지 못하고 보결 집정관 1회(108년)
역임에 그치는등 원로원 내 다른 유력자, 차기 제위 경쟁자들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으며....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서 받았던 카이사르 지위 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사이에 반감은 있었으니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제지하지 않았고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해
왕조를 열겠다 라고 연상시킬수 있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아들을
원했으니...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루머도 돌았습니다.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데, 하드리아누스가 좋은 황제이든 나쁜 황제이든
즉위 과정이 불분명한건 사실이며, 트라야누스 본인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논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통치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원로원 의원을
지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베일에 쌓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황제 등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로 인한 계승 음모를 거론했으니, "트라야누스는 실제로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하지 않았다" 고 말합니다.
하드리아누스 제위등극과 양자 입적은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가 한 일이고, 며칠간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겼으며, 플로티나 황후가 하드리아누스의 입양을 알리는 편지들을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는데,
황후가 보낸 '트라야누스 편지' 에 "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서명 대신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등극 직전 플로티나 황후는 이에 대해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을 할 수 없었다"
는 구실을 댔을 것이라고 하며, 또 다른 소문에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합니다.
해방노예 마르쿠스 울피우스 파이디무스는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으로 사망한 날짜가 트라야누스
가 사망한 3일 후였으며 사망 당시 겨우 28세 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시종이
플로티나의 명을 받고 트라야누스의 목숨을 끊은 후 입막음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베일에 쌓인 과정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시리아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트라야누스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총독으로 있던 중이니 셀레우키아로 향한뒤 양자로서 황제의 시신을 셀레우키아
로 운반해 화장후 선박을 이용해 황제의 유골을 로마로 보내고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 기단에 안치하도록 합니다.
이후 로마를 향해 먼 길을 갔는데, 그 동안 자신이 복무했던 도나우 방어선의 도나우강 하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위기를 해결했고, 102년 트라야누스가 병합한 영토를 포기했으니 이런
과정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만큼 뛰어난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고 자신의 국정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과 정통성에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 4명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국가 전복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모두 최고 고위직
(집정관) 을 지낸 사람들이어서 로마인들에게 이 사건은 '네 명의 집정관 사건' 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트라야누스 파르티아 원정시 황제의 뒤통수를 치고 많은 로마인을 학살한 유대인들의 '키토스
반란' 을 진압한 명장 루시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루키우스 푸블릴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 였으니 이 4명의 전직 집정관을
처형한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은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 였습니다.
"네명의 집정관 사건" 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내세운 명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냈고 다른 숙청 이유는 그들의 부와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하드리아누스가
이들의 처형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 흐름이 꼴사나워졌다고 지적합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는 등극부터 암울하게 시작됐는데, 로마 도착후 자신은 사건에 책임이 없고 아티아누스의
과잉 충성 때문이었다는 서약을 했고,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앞으로는 재판 절차 없이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또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는데 원로원 의원직은 유지시켰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순방은 2차례에 걸쳐 12년간 이어졋으니 121년 갈리아와 레누스(독일 라인강)
일대를 시작으로, 다음해 브리타니아 방문으로 이어졌으니.... 이때 그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접경 지역에 있는 그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 공사 계획을 직접 점검합니다.
옛날에 만든 안토니누스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어놓고 보니 방비가
힘들다고 판단해 건설후 불과 8년만에 버려지니, 브리타니아 북부 지형의 험악함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함경북도 전체와 평안북도 중에 3분지 1은 여진족의 땅이니 세종대왕이 최윤덕을 보내 여인족
들을 죽이고 압록강 건너편에 몰아내고는 4군을 설치했는데, 수백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여진족
들이 고향을 되찾으려고 수시로 공격해 오니 견디지 못하고 3개 군을 폐지하고 물러선 일과 유사합니다.
무려 천년 이후인 잉글랜드 왕국 시절에도 스코틀랜드 지역은 험준함으로 유명하여 농업도 상업도 제대로 발달
하지 못했을 지경이니 카이사르 시대에 한번 정벌을 마쳤음에도 로마 제국은 최전성기 시절에도
브리타니아 중부 지역을 넘지 못했으며 남부 지역 정도가 상대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반란의 불씨가 남아 있는 먼 속주 통치를 단념하고는 아라비아를 제외한 동방 영역을 포기했으며
수세(守勢) 로 돌아서서 정복 보다는 방위쪽에 관심을 쏟게되니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
의 성벽" 건설로 라인강과 도나우강 상류를 강화하는 550㎞ 에 이르는 게르마니아 방위선도 구축합니다.
이후 잉글랜드 남부를 거쳐 갈리아 서부와 히스파니아 일대를 통과해 히스파니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봄,
그는 모로코 일대의 로마인 식민 도시들이 무어인들의 공격을 받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합니다.
파르티아가 평화 협정을 깼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그는 아나톨리아 반도 에페수스로 향했으니 하드리아누스는
아나톨리아도에 도착한후, 집결한 군대를 사열했으며 근동 일대의 군사, 행정, 외교 사무를 직접 책임졌습니다.
그는 신전, 공중 목욕탕, 수로와 군용 도로 정비 및 보수 공사를 명하고, 극장 건축을 비롯해
시지쿠스 신전 건설 등을 명하고 지켜봤으며 황제는 소아시아 내 헬레니즘
문화권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의 청원과 불편 사항을 듣고 직접 결정을 내립니다.
128년 하드리아누스는 황제 소유 사유지를 시찰하면서, 풍요로운 북아프리카 일대의 토지 이용 방법을 보고
받고 논의했는데, 이듬해 겨울 황제는 아테네로 건너가서는 그리스 일대의 오락과 축제를 주재했습니다.
이때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만든 신전을 재건립해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에게 봉헌했으며, 아테네 근교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건설하고 도시 안에 스토아 라고
불린 건축물과 판헬레니온을 세워 "낭만적으로 이상적인 그리스 통일과 평화" 라는 이름으로 바쳤습니다.
129년 봄,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해 그리스계 도시
들을 들르며, 일대의 인프라 건설을 지시 내렸는데.... 이집트 방문 중에는
총애한 미소년 안티누스가 나일강 유람 중에 익사해 죽는 비극을 당해 엄청 울게 됩니다!
그리스풍을 좋아하는 취미는 네로 황제를 연상케 했으며 하드리아누스는 사랑하던 연인 안티노우스 를 이집트
에서 사고로 잃은 후에는 더욱 신경직절이고 냉혹한 사람으로 변해 그의 평판은 점점 더 땅에 떨어 집니다.
130년 하드리아누스의 아나톨리아 남부 아탈리아 (Ἀττάλεια) 방문을 기념하여 개선문 형태의 성문을
세웠으니 하드리아누스 문 Hadrianus Kapisi 이라고 하는데, 몇년전에 직접 찾아가 보니
안탈랴에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으며.... 132년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Three Gate 라고 불리는 이 문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는 문이 현재 시가지 보다 3m 아래에 서 있기
때문이니 그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흙이 3m 나 옛 시가지 건물 위에 쌓였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소아시아 지중해 연안을 로마가 정복한 것은 폼페이우스 장군으로 BC 67년 지중해
안탈랴에서 실리프케에 이르는 해적들을 소탕했으며 BC 66년
미토리다테스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BC 63년까지 레반트 지역을 수중에 넣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라면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 이어지는 5현제 시대인데 중국의 요순 처럼... 황위를 자식이 아니라 현명한 사람을 골라 넘긴게 특색입니다.
하드리아누스는 21년의 재위 기간 동안 12년간이나 제국을 시찰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모든 속주를 직접 방문하고 현지에서 직접 문제들을 해결 했으니 무엇이든
확실히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비밀경찰을 조직해 경쟁자들의 사생활을 엿봅니다.
서기 132년에 파괴된 성지 예루살렘 을 재건하여 식민도시로 삼으려다가 이교도의 이주에 반발한 유대인의
반란을 초래했으니..... 저 유대인들의 진압에 4년이 걸렸고 로마군은 수많은 전사자 들을 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드리아누스는 재위 기간의 절반이 넘는 시간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직접
점검했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으니 이러한 예방 조치 덕분에 로마는
이후 흔들리던 시기에도 버텨낼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는 것은 긍정적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반면 그의 속주 순방은 수도에서의 황제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당대 원로원 계급으로부터 그리스적인 그리스인
이라고 비판받기도 했으며.... 제국의 재정을 비효율적으로 소모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당대 부터 있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가 아프리카 속주와 이집트, 그리스 등을 순방할 당시 부유하기로 유명한 도시들은 황제와
일행들의 체류비용을 떠맡은 탓에 재정 부담을 피하기 어려웠으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때 황제와 원로원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 지진 피해가 나자 복구 자금을 투입해야만 했습니다.
또 제국 순방중 명령들은 로마제국의 법과 속주의 전통을 무시한 독재행위였으니 좋게 말하면 "순방" 과 "꼼꼼한
황제의 열정" 이나, 로마인과 속주민 눈에는 황제가 법과 전통을 어기고, 권한을 남용해 지역마다 "감놔라
배놔라" 하는 모양새라..... “특유의 이중적이고 자기과시와 잘난척을 숨기기 위한 열정과 과장" 이라 비난합니다.
하드리아누스를 수행했던 역사가 플로루스는 반어법을 써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는 시를 바쳤습니다.
저는 카이사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브라타니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게르마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스키타이의 혹독한 추위에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요.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아래의 답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나는 플로루스가 되고 싶지 않소.
여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싸구려 술집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배부른 벼룩들 사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트라야누스 시절에 일어난 유대인 대반란인 키토스 전쟁을 해결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 있을때 뒷통수를 친
것이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할수 없었으며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합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에 또 다시 대규모 반란인 바르 코크바의 난을 일으켰는데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가 무려 40만명에 달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제국은 전체 군사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명의 군대를 유대로 보냈으니 유대인들이나 로마나 모두 전력을 다해 싸운 것입니다.
하드리아누스는 134년에 진압한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는데,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한 거이니....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하게 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
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으니,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유의 "디아스포라" 성향은 그 전에도 강했으며,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로마인으로 동화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한편, 역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서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기존 로마인들도 많았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 이후 로마 제정이 계속 엄수하지는 않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에 다시 유대인들이
어느정도 모여들긴 했는데..... 그러므로 현대의 유대 문제를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트라야누스의 확장 정책은 제국의 판도를 넗혔지만 공격 위주의 정책으로 제국 내부의
이완과 균열이 가시화되고 있었으니..... 하드리아누스는 순행을 통해 행정
을 바로잡고 군단을 시찰하며 문제점을 고쳐 나갔는데 당대에는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강화된 군단과 정비된 행정 체계로 인해
제국의 위기를 어느정도 지연시키는데 기여하게 되니..... 대단한 선견지명과
넓은 시야로, 군주로서의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평가를 잘 받아야 하는 지점 입니다.
물론 제국 전역을 순행하면서 경비와 하사금, 건축자금등 엄청나게 돈을 써버려서 유대
전쟁으로 인한 지출과 함께 제국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그로 인해 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때 은화 함유량을 줄이면서 긴축 모드에 돌입하게 됩니다.
또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브리타니아(브리튼 섬) 를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자주 남하하자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을 쌓았는데 장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2년 브리타니아 시찰중 내린 명령에 따라 5년간 공사 끝에 완성한 폭 3m, 높이 5m 의 장대한 성벽입니다.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장장 118km 를 거의 일직선으로 건설했으니 장성에는 15개의
요새를 설치했고, 요새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00∼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북방의 동향을
살피도록 했으며 성벽 바깥으로 폭 8m, 깊이 2.5m의 해자까지 둘러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하지만 성벽에는 문이 있었고 북부 지역에 로마식 도로가 깔려 있었으며 로마인 도시도 있었는데..... 로마제국
쇠퇴 후에는 잉글랜드가 이 장성을 1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으며,
스코틀랜드는 오래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고 전통 문화도 지켜냈는데, 내가 찾아 보니 많이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에서 카타프락토이가 처음 도입되었으며 알란족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창을 들고 팔랑크스
형태의 방진을 짜는 군단병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러한 로마군의 변화는 3세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후기 로마의 많은 부분이 로마의 전성기라고 하는 오현제 시대때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있지 않아도 충분히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티베리우스 이후 100여년
만에 다시 로마인들에게 보여줬으니 그의 치세동안 이탈리아는 다른 속주와 다를바 없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로마 제정 시대의 황제들은 속주 총독, 재무담당관, 속주행정장관, 황제대리인들이 보내온 보고서와 편지
등을 받고, 그들과 끊임없는 서한 교환을 통해 속주 행정을 처리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아예 순방길에 나선뒤 직접 속주에 들려 시찰하고 속주민들의 불편사항을 황제가 직접 받아 해결했습니다.
지엽적이고 사소할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도 이런 문제에 신경썼으니
다른 황제들과 달리 "휴밀리오레스 콘트라 호네스티오레스" 라고 불린 속주 내 백성을
보호하고, 토착세력과 파견 관리의 탐관오리 같은 악행을 황제가 직접 개입해 처벌할 정도로 꼼꼼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는 제국 도시화와 문화발전 및 경제력 향상은 절정에 달했고, 로마 시민권 취득 비율이 증가
하고 대상도 확대됐으며, 도시 평의회, 지방 원로원으로 해석되는 데쿠리오네스 의원들과 속주 정무관에게
"라티움 마이우스" 라는 이름의 라틴권을 수시로 부여했으니 세수확대와 병력자원 대상을 확대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더 이상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관료체제만으로는 공무를
처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한 상태였는데, 하드리아누스 개인이
꼼꼼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특유의 성향과 맞물린 탓에 제국 관료제 재편과 확대로 이어집니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보완해 오늘날 관료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중앙정부
관리들에게 행정실무능력과 체계화된 처리능력,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규정했으며
관료들에게 넉넉한 보수를 지급하고 업무 난이도에 따라 보수액을 지급하는 차등보수제도도 적용합니다.
기존 네 개의 행정부서 외에 각료급 두 부서를 새롭게 만들었지만 행정부서의 책임자에는 해방노예가
아닌, 기사계급 로마인들을 기용했고 관료들의 직위도 에그레기우스, 비르
페르펙티시무스 같은 칭호를 붙여 다양화시키고, 직위분류제에 따라 봉급체계도 세분화시켜 운영합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창설된 기존 4부는 아브 에피스툴리스(우정부). 리벨리스(법무부) 라티오니부스(재무부),
스투디이스 (교육부) 이고 새로 만든 각료급 2개 부처는 제국 우편 및 통신 담당관과 교통 담당관 입니다.
새롭게 창설된 부처는 징세 체계, 특히 5% 의 상속세 징수 업무도 처리했는데, 프로쿠라토르를
감독하는 국가기관이 세금징수 회사들을 감독하게 됐으며, 제국 각지로 파견된
프로쿠라토르들은 제국 전역에 파견된 다음 빠르게 상속세와 직간접세를 징수해 로마로 보냅니다.
속주 내 군행정과 민간행정의 분리라는 그의 결정은 군사령관들이 민간행정업무에 무지해지는
상황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점증된 군국화를 유발했고 이런
문제들이 방치되면서 군인황제 시대로 불리는 3세기의 위기 기간에는 혼란을 심화되게 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스토아 학파에서 주장한 내용과 본인의 철학에 따라 약자와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을 보호하려
노력했으며, 법률 정비와 프린켑스 이름으로 발의된 칙령, 고시, 명령서를 법적 근거의 명확성에 의거해
발표했으니 일관된 판결과 법적 구속력의 확립으로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때 법전 편찬에 활용됩니다.
그는 노예와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위한 약자보호, 법과 정의를 통한 비인륜적 범죄자 처벌에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니 주인이 노예를 죽이고, 거세 또는 고문하는 것을 불법으로
명확히 명문화했으며 노예들이 검투사로 팔리거나 불륜과 성욕을 위한 목적으로 팔리는 것 역시 금지시킵니다.
또 파테르 파밀리아스(가부장) 들의 생사여탈권을 박탈해, 미성년자들이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버림당하는 것을 막았으며, 부모가 죽은뒤 미성년자녀들이 친인척에게 재산
상속과 소유 권한을 뺏기거나 일부만 받는 일 역시 문제가 있으니 법적으로 보호하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이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내 빈민 가정 자녀 양육 기금을 분배하고 집행하기 위해 아동복지
감독관을 임명했으며, 제국 각지의 은퇴 교사와 중등교육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운영했습니다.
오랜시찰과 여행은 체력을 빼앗아 갔으니 40대 한참 나이에 즉위했고 사자 사냥을 취미로 여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제국 변경 시찰에 쏟다보니 가혹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었고,
성격과 업무스타일도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인데다 논리적이고 열정이 넘친터라 체력은 132년부터 약화됩니다.
유대분쟁후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근교의 티볼리 황제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수종 증세로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자 목숨을 끊으려고 여러번 시도했는데 시종과 측근들의 만류로 실패했으며 독약을 마시려고 하거나,
단검으로 자결하려고 했고.... 마스토르라는 황실 노예에게 옆구리를 검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마스토르는 오랜 설득에도 차마 자신이 모시는 황제를 찌르지 못하겠다고 줄행랑을 쳤고,
다른 시종들도 마스토르 처럼 황제의 간곡한 명령을 한사코 따르지 않자
하드리아누스는 절망에 빠졌는데, 말년의 자살 시도와 까칠해진 성격 탓에 인망도
잃었다고 하며 그럼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책임감이 강한 탓에 국정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습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 선정을 미룰수 없다고 판단해 루키우스 콤모두스 라는 에트루리아 출신 로마
귀족 청년을 양자로 입양하면서, 이름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했는데 금발머리와
벽안으로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부터 내려온 귀족이며 평판은 원로원과 로마 안팎에서 훌륭했습니다.
더욱 콤모두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118년 네 명의 집정관 사건때 처형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사위인데다가 원로원내 유력 가문들과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된터라 원로원과 사이가 냉담한 늙은 황제에게 훌륭한 후계자감 이었으니 집정관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매부 루키우스 세르비아누스가 반대한다고 생각해, 90살 세르비아누스
를 반역죄로 기소했으며 또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던 누나
도미티아 파울리나의 18살 손자 루키우스 푸스쿠스도 함께 기소해 그들에게 자살을 강요합니다.
90이 넘은 세르비아누스는 향을 피워놓고 신들에게 기도하는등 자신과 손자의 억울함을 호소
했는데, 까칠해지고 예민해진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호소에도 그들이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햇으니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자택에서 자결 방식으로 살해당합니다.
세르비아누스는 유언으로 "유피테르 신이시여,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해주시오!" 는 말을 남겼는데.... 이 사건 후, 하드리아누스의
까칠해진 성격과 그가 자신의 누이 일가를 비롯한 혈육들과 아내에게 매정했던 일화가 조명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매부와 생질손을 죽인뒤, 양자로 삼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밀어줬는데 다음해 판노니아
총독으로 떠났던 후계자는 폐결핵에 걸려 138년 1월 요절했으니
하드리아누스는 "군대와 백성들에게 지불한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잃어버렸다" 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다시금 후계자 고민에 빠져들었으니.... 138년 오랜 친구이자 인척 관계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의 사위로 고결한 성품을 지닌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정한뒤
통치권을 넘겨주고는 아예 로마를 나와 바이아이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138년 7월 10일 붕어합니다.
하드리아누스 영묘(로마 산탄젤로 성) 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던 터라, 황제의 유해가 화장돼 맨처음 묻힌 곳은
로마가 아닌 바이아이 근처 푸테올리였으니 공화정 말의 정치인 키케로의 소유지였던 곳이었다고
하며 그나마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차기 황제로 선택한건 로마 제국으로서는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았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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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건너는 시간.
저녁이 오면 하루를 빨래처럼 차곡차곡 접어 서랍 속에 넣습니다. 남들에게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 서랍 안을 들여다보면 참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꺼내어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세월의 풍파에 닳고 닳아 종이보다 얇아져 있습니다. 가만히 숨을 쉴 때마다 그 얇은 마음들이 조용히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살다 보면 참 이상한 일도 많습니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신발 속이 눅눅하게 젖어 있는 날이 있습니다. 밖으로는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돌아서면 얼굴 뒤로 긴 침묵이 그림자처럼 눕습니다.
자식들 키우고 살림하며 꼿꼿하게 버텨온 세월 같아도 실은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들 합니다. 모진 풍파 견디는 게 삶이 되고 그 삶이 간절해지면 결국 기도가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마음 한쪽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비로소 나이를 먹어갑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가도 결국은 내 안의 나를 다독이며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오늘도 나는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가만히 읽어 보니.....
마치 한폭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