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며는!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 때, 흰눈은 퍼부어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5. / 『김소월 시전집』(권영민, 2007)
감상 : 김소월 시인(1902〜1934)의 『진달래꽃』은 문화재로 등재된 시집이다. 시집 속 127편의 시 중에 절반 이상이 노래로 불릴 정도로 축복 받은 시인이지만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저녁」도 여러 곡이 창작되고 있는 중에 백순진이 곡을 붙이고 박상규가 노래(1972) 부른 것이 오리지널에 가까워 보인다. 1974년, 백순진 본인이 참여한 ‘사월과 오월’에서 다시 부르더니, 1978년 백순진 프로덕션을 통해 음반을 낸 오정선도 이 노래를 불렀다. 2001년 김성호도 자신의 앨범에 「눈 오는 저녁」을 넣었다.
백순진의 곡은 초반부에 그리움이 몸에 스미듯이 은근한 느낌을 주다가 “저녁 때, 흰눈은 퍼부어라”를 후렴처럼 부르면서 감정을 터뜨리는 면이 돋보인다. 숨을 고르고 감정을 잡아가던 중에 “저녁 때”로 시간을 환기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목소리 성량을 높인 “흰눈은 퍼부어라”라는 외침은 정적인 상황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그리운 마음을 더욱 사무치게 해준다. 명령 혹은 감탄의 느낌을 자아내는 어미 “-어라”가 시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럼, 인상적인 마무리를 선보인 김소월 본인은 정작 시의 맛을 살리는 어미의 느낌까지 의식하고 있었을까? 결론은, 단연코 그렇다.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임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 꽃 향기롭게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는 부르고 나는 마시리.
- 「님과 벗」, 《개벽》 제26호, 1922년 8월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임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과 벗」, 『진달래꽃』(1925)
『진달래꽃』의 「님과 벗」은 3년 전 《개벽》에 발표했던 시를 수정해서 실은 것이다. “딸기 꽃 향기롭게 향기로운 때를”에 나오는 향기의 중첩은 일부러 그런 것이지만 중첩의 효과는 미미하다. 평이하게 쓴다면, “딸기 꽃 향기롭게 피어난 때”나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로 두 가지 길이 있어 보인다. 앞의 것은 단순한 꾸밈에 불과하지만 뒤의 것은 인과 혹은 새로운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소월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더욱이 “그대는 부르고 나는 마시리”를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로 바꾼 것에서 소월의 언어 감각이 삼 년 사이 상당한 경지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개인 기호는 갈리겠지만 중간에 연결어미를 둔 앞의 것이 아무래도 시적 긴장감이 떨어진다. 퇴고에 필요한 것은 쉼표 두 개와 어미변화 한 글자다. 쉼표의 등장은 ‘그대’를 독립시켜 존재감을 높여준다. 여기에 감탄형 종결어미까지 더해, 그대는 그대대로, 나는 나대로 감탄과 여운을 남기게 된다.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는 감정선을 건드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소리 내어 제 마음대로 흥얼거리기도 좋다. “저녁 때, 흰눈은 퍼부어라”도 그러하다. 소월의 시는 읊조리기 좋고 노래하기 좋다. 김억의 회고에 따르면, 소월은 술자리에서도 또 평상시에도 자기 시를 외워서 읊조리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소월이 꿈길에서조차 그리워하던 님과 벗에게 자기 노래를 닿게 했으면 소월은 조금이나마 행복했을까.
「눈 오는 저녁」을 부른 여러 가수 중에 개인적으론 박상규 노래에 마음이 더 간다. 어찌 들으면 탁하고 또 어찌 들으면 맑기도 한 음색이 미묘하게 사람 마음을 파고들면서 리듬에 정조가 제대로 얹히는 기분이 들어서다. 오늘처럼 흰눈이 내릴 것 같으면, 그대는 부르고 나는 마시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첫댓글 소월의 시 '눈오는 저녁'
여러 버전 중 박상규 노래가
듣기에 저도 가장 좋습니다.
소월은 천재인 것 같습니다.
모든 시가 주옥 같으니~
좋은 시평 잘 감상했습니다.
소월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이름도 소월과 같으시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