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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도파민 홍수 시대
우리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삶의 형태는 ‘무위’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현대 사회에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재조명하며, ‘무위하는 삶’에 찬사를 보낸다. 신간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성취 욕망과 인스턴트식 도취에 붙들린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삶의 태도를 요청하는 비평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의도와 목적’을 띤 활동을 멈추고(무위無爲), 그 순간 ‘마법’처럼 드러나는 세계의 참모습을 바라볼 것(관조觀照)을 주문한다.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성과사회의 잔인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 결핍’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결핍’을 메우기 위해 더 바쁘게 일하고, 더 열심히 소비하며, 여가마저도 정신없는 놀이와 빽빽한 일정으로 채운다. 그들에게 ‘강렬한 삶’은 더 많은 노동, 성취, 소비, 자극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는 ‘행위의 쳇바퀴’(행위하는 삶)에 머물러서는 진정한 행복과 안식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삶의 강렬한 형태”라고 추켜세운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초기 낭만주의자, 현대 철학자까지 주요 사상가들(플라톤, 노발리스, 한나 아렌트, 니체, 발터 벤야민 등)의 글과 주요 개념들을 폭넓게 인용, 또는 반박하면서 ‘무위’의 숨겨진 역할과 가치, 창조적 힘에 주목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섬세한 비평을 통해 한병철 특유의 미학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한병철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전 유럽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정보의 지배≫ ≪사물의 소멸≫ ≪리추얼의 종말≫ ≪고통 없는 사회≫ ≪폭력의 위상학≫ ≪땅의 예찬≫ ≪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선불교의 철학≫ ≪권력이란 무엇인가≫ ≪죽음과 타자성≫ ≪서사의 위기≫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책을 썼다.
목차
무위의 풍경들
장자에게 붙이는 사족
행위에서 존재로
절대적인 존재 결핍
행위하기의 열정
도래하는 사회
주
도판 출처
책 속으로
침묵은 말을 심화한다. 고요가 없으면 음악은 없고 단지 소음과 잡음만 있다. 놀이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자극과 반응의 패턴, 욕구와 충족의 패턴, 문제와 해답의 패턴, 목표와 행위의 패턴만이 지배할 경우, 삶은 생존으로, 발가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13면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호흡이 짧고, 근시안적으로 되어버린 이 서두름의 시대에 무위는 희귀하다. 오늘날 모든 곳에서 관철되는 것은 소비주의적 삶꼴이다. 그 삶꼴 안에서 우리는 모든 욕구를 즉각 충족시킨다. 우리는 기다릴 끈기가 없다. 그 끈기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24면
무위의 변증법은 무위를 문턱으로, 불확정성 구역으로 변신시킨다. 그 구역 덕분에 우리는 이제껏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문턱이 없으면, 같음이 반복된다. -33면
생산 강제가 언어를 장악하면, 언어는 노동 모드로 전환된다. 그러면 언어는 정보 운반자로 쪼그라든다. 즉, 한낱 소통 수단이 된다. 정보는 언어의 행위 형태다. -36면
우리 행위하는 자들은 이제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관조하는 능력의 상실은 우리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 및 소통 도취에 빠진 우리는 언어를 관조하기로서의 시 쓰기를 멀리한다. 심지어 우리는 시 쓰기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36면
우리는 인간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사용대상들 사이에서,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도시에서 산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시간에 우리는 이 모든 사물을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아서 할 수 있는 인간적 행위의 관점에서만 그 모든 사물을 본다. -43면
세잔의 무위의 풍경은 인간화된 자연과 결별하고 인간화되지 않은 사물들의 질서를 재건한다. 그 질서 안에서 사물들은 사물들 자신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세잔의 사과는 먹어 치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세잔의 단지와 접시는 위하여에, 곧 인간의 목적에 예속되어 있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고유한 존엄성을, 고유한 찬란함을 지녔다. -43면
거침없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인간 행위의 절대화가 임박한 재앙의 원인이라면, 인간 행위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에서 관조적 성분이 차지하는 몫을 높이는 일, 바꿔 말해 행위에 성찰을 덧붙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70면
존재는 시간적 차원을 지녔다. 존재는 느림과 오램 안에서 성장한다. 오늘날의 단기성은 존재를 허문다. 당신이 존재 곁에 오래 머무를 때 비로소 존재는 농축된다. 그런데 정보 곁에 오래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정보는 존재의 절대적 소멸 단계에 해당한다. -85면
우리는 존재 결핍을 벌거벗은 삶의 연장을 통해 벌충하려 한다. 그러면서 집약적인(강렬한)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집약적인 삶을 더 많은 생산, 성과, 소비와 혼동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생존꼴들일 따름이다. -88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행위하는 삶의 최종 목적은 관조하는 삶의 행복에 종사하는 것이다. “행위하는 삶은 관조하는 삶을 향한다.” 관조하는 삶은 “인간의 삶 전체의 목표”다. -91면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주된 방식이 바라보기였을 때, 인간은 결핍 없는 신적인 존재와 아직 관련되어 있었다. -95면
관조하는 삶이 비로소 신적인 자족을, 완전한 행복을 약속한다. 역사는 행위하기가 완전히 밀려나고 바라보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에, 곧 무위의 안식일에 완성된다. -98면
쉼은 창조의 본질적 핵심이다. 안식일이 비로소 창조에 신적인 장엄함을 부여한다. 쉼이 신적이고, 무위가 신적이다. 쉼이 없으면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잃는다. -102면
인식을 향한 길, 진실을 향한 길로서의 관조는 행위하기에 선행한다. 관조하는 삶 없는 행위하는 삶은 눈먼 삶이다. -134면
낭만주의는 자연에 신적인 찬란함을 입혀준다. 자연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자원으로 간주하는 순간에 벌써 우리는 자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자연을 도구로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는 불가피하게 파국으로 귀결되는데, 낭만주의의 자연 이해는 그 태도를 수정할 잠재력을 지녔다. -142~143면
도래하는 평화의 나라에서 인간과 자연은 화해한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들의 공화국에 속한 시민일 따름이다. 식물들, 동물들, 돌들, 구름들, 별들도 그 공화국의 동료 시민이다. -156면
출판사 서평
도파민 홍수 시대
우리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삶의 형태는 ‘무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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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 재조명
노동과 성과 강제에 맞서는 ‘무위’ 능력 고찰
한나 아렌트의 ‘비타 악티바(행위하는 삶)’에 대한 독창적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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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 그리고 무위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이, 그리고 온 역사가 향하는 목표가 아무튼 있다면, 그 목표는 오로지 바라보기에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현대 사회에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재조명하며, ‘무위하는 삶’에 찬사를 보낸다. 신간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도파민 홍수의 시대에 성취 욕망과 인스턴트식 도취에 붙들린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삶의 태도를 요청하는 비평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의도와 목적’을 띤 활동을 멈추고(무위無爲), 그 순간 ‘마법’처럼 드러나는 세계의 참모습을 바라볼 것(관조觀照)을 주문한다.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성과사회의 잔인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 결핍’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결핍’을 메우기 위해 더 바쁘게 일하고, 더 열심히 소비하며, 여가마저도 정신없는 놀이와 빽빽한 일정으로 채운다. 그들에게 ‘강렬한 삶’은 더 많은 노동, 성취, 소비, 자극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는 ‘행위의 쳇바퀴’(행위하는 삶)에 머물러서는 진정한 행복과 안식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삶의 강렬한 형태”라고 추켜세운다.
이 책에는 〈무위의 풍경들〉, 〈장자에게 붙이는 사족〉, 〈행위에서 존재로〉 등 여섯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저자의 전작들(≪시간의 향기≫와 ≪피로사회≫,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등)에서 선보였던 ‘삶의 가속화’, ‘존재의 결핍’ 등의 우리 시대의 중요한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다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초기 낭만주의자, 현대 철학자까지 주요 사상가들(플라톤, 노발리스, 한나 아렌트, 니체, 발터 벤야민 등)의 글과 주요 개념들을 폭넓게 인용, 또는 반박하면서 ‘무위’의 숨겨진 역할과 가치, 창조적 힘에 주목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섬세한 비평을 통해 한병철 특유의 미학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무위 예찬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호흡이 짧고, 근시안적으로 되어버린 이 서두름의 시대에 무위는 희귀하다. 우리는 기다릴 끈기가 없다. 그 끈기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무위하는 삶’을 살라니, ‘관조적인 쉼’을 가지라니 책의 메시지가 꽤나 달콤하게 들린다. 특히나 매일매일 쫓기는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새삼 눈길이 갈 테고, 한껏 게으름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의 몇 대목에서 죄책감을 덜어줄 든든한 아군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병철의 애독자라면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사나 관조적 명상을 위한 실천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고 상업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창조적인 무위’를 호명하고 옹호하는 책이다.
한병철에 따르면, 무위는 한낱 게으름이나 거부, 무기력한 삶의 태도, “활동의 공백”이 아니다. “고유한 논리, 고유한 언어, 고유한 시간성, 고유한 구조, 고유한 찬란함, 고유한 마법”을 지니고 있는 “인간 실존의 찬란한 형태”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절대화하고 효율성과 기능성을 중시하지만, 오히려 “참된 행복은 목적 없고 효용 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몸짓들 덕분에 있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무위의 예식성).
한편 ‘무위’는 일종의 창조적인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행위’(행위하는 삶)는 주어진 목적과 목표에 따라 똑같은 것들을 반복, 재생할 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발명하는 인간에게는 “목적 없고 규칙 없는 행위를 하기 위한 (무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 무위의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던 적 없는 무언가의 발생이 가능해진다.”(무위의 변증법) 이처럼 ‘무위’는 목적과 효용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삶을 위한 해독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위’
“활동에서 무위가 차지하는 몫만큼 활동은 진정으로 인간적이다.”
한병철은 ‘무위’가 인간적인 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쉼이 없으면 새로운 야만이 발생한다. 침묵은 말을 심화한다. 고요가 없으면 음악은 없고 단지 소음과 잡음만 있다. 놀이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그는 만약 우리에게 “망설임과 멈춤의 순간”이 없으면, 우리의 행위는 맹목적인 능동과 반응으로 변질된다고 경고한다. 자극-반응, 욕구-충족, 목표-행위의 패턴이 지배할 때 우리의 삶은 생존으로, 즉 “벌거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무위’ 능력의 상실은 곧, 우리를 “단순히 기능만 하는 기계”로 만든다. 인간의 실존은 활동에 남김없이 흡수되고, 생산 활동에서 벗어난 여가조차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하기 위한 시간(곧 “노동의 파생물”)쯤으로, “따분함이 고개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때려죽이는 시간”으로 격하된다.
한병철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무위”라고 단언한다. 그는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 ≪인형극에 관하여≫에서 인간 춤꾼이 자신의 몸짓을 의식하는 순간에 우아함을 잃는 장면에 주목한다. “명인은 연습을 통해 의지를 떨쳐낸다. 명인의 솜씨란 무위다. 행위는 무위에 이르러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한병철은 “행위하기가 완전히 밀려나고 바라보기(관조)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무위의 안식일”에 비로소 ‘역사’가 완성된다고 본다. “안식일이 비로소 창조에 신적인 장엄함을 부여한다. 쉼이 없으면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잃는다.” 그는 ‘무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이렇게 쓴다. “무위가 없으면 삶은 불가능하다. 무위는 살아 있는 놈이 존속하고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다.”
‘비타 악티바’와 인류의 위기
“관조하는 삶 없는 행위하는 삶은 눈먼 삶이다.”
한병철이 20세기를 ‘행위의 시대’로 규정한 한나 아렌트를 비판하는 대목은 자못 흥미롭다. ≪행위하는 삶Vita activa≫을 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자유의 빛나는 모범으로 이상화하며,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기를 “행위하는 삶의 원천이자 중심점”이라고 말한다(“인간은 정치적인 것의 무대 위에서 불멸에 도달한다”). 반면에 ‘관조하는 삶’은 “세계를 외면하는 도피”쯤으로 해석한다.
한병철이 보기에 아렌트의 주장은 “행위하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고, 오늘날 지구적 위기를 불러온 ‘근대정신’에 물들어 있다. 오늘의 위기는 “자연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자원으로 간주”하며 인간의 행위에 완전히 종속시킨 데서 빚어진 결과다. 근대 이후 자연은 “독자성과 존엄”을 완전히 잃은 채, “인간 역사의 한 성분으로, 부록으로 격하”된다. 한병철은 오늘날 문명 위기의 담론에서 회자되는 ‘인류세’를 “인간의 행위가 자연을 완전히 흡수하고 착취하는 역사적 시기”라고 규정한다.
한병철은 이 국면에서 우리가 ‘무위의 윤리’(땅에 비유하자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땅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인위적인 변화를 가하지 않고 놔두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침없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인간 행위의 절대화가 임박한 재앙의 원인이라면, 인간 행위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에서 관조적 성분이 차지하는 몫을 높이는 일, 행위에 성찰을 덧붙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행위하는 사람들의 권능”이 아니라 “관조하는 능력을 되살리기”에 달려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관조하는 삶을 도외시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영혼의 타락과 온 지구의 소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