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etn.com/News.aspx?NewsID=1231853
명나라 말기의 가장 정예부대라고 하면 그 중에서도 '관녕기병'이 가장 좋았고, 병력은 3만 명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전투력은 꽤 강력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기병 대열은 몽골의 유명한 왕들을 죽이고, 팔기 수비대를 격파하고, 이자성을 사냥했지만, 청군이 관에 들어간 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관녕기병의 "관"은 산해관을 의미하고 "녕"은 닝위안을 의미하며 산해관, 닝위안, 진저우(현재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 및 기타 요동 영토는 후금에 대한 명나라의 중요한 방어선입니다. 당시 명나라 말기의 명장 원숭환은 “요동 현지인을 이용해 요동을 지키자”라고 제안했다. 그러므로 요동 현지인 중에서 체력이 강한 자를 선발하여 군대를 부유하게 하는 동시에 주다수(朱大參), 망귀(萬象), 조려자오(趙立角) 등 요동 출신 장군들을 대거 양성하였다.
1627년 5월, 홍타이지가 직접 후금군을 이끌고 금주를 포위하고 영원을 공격했고, 원숭환은 조대수와 함께 정예 기병 4천을 이끌고 영원성 기슭에서 후금의 만주족 팔기군과 맞서 싸웠다. 후금군은 머스켓과 곤봉 겸용으로 사용 가능한 삼안총을 든 관녕기병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근접전이 계속됐다. 후금 팔기군의 시체가 광야를 뒤덮었고, 성 밖으로는 닝위안(寧源)의 피가 흘렀다. 사상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후금군은 영원(寧源)을 구제하고 더 많은 병력을 보내 금주(金州)를 공격하였고, 금주(金州)는 마침내 무너지지 않았다. 6월 5일, 후금이 군대를 철수했는데, 이는 역사상 '영원 대첩'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원숭환은 관녕 기병을 이끌고 곳곳에서 싸워 팔기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 명나라 숭정 황제는 원숭환이 적인 후금과 협력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체포해 처형했다.
동시에 숭정제는 관녕기병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조대수에게 귀속되어 금주를 지키고, 한 부대는 오삼계가 지휘하여 영진 방어선에서 기동했고, 다른 부대는 이자성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개로 옮기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성의 농민봉기를 진압한 관녕기병 일부가 전투에서 전멸하고, 금주성을 지키던 조대수관녕기병이 청군에 항복하고, 오삼계 휘하의 관녕기병만 남아 산해관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마침내 청군에게 항복했고, 명나라가 멸망한 후 오삼계는 관녕 기병을 이끌고 청군과 함께 이자성의 10만 농민군을 격파했다. 청군이 고개에 들어간 후 오삼계는 관녕 기병을 이끌고 이자성의 반군이 모두 전멸 될 때까지 추격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쓰촨으로 진군하여 장헌중의 농민군을 제거했습니다. 명나라의 막대한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이 정예사단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선봉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녕기병의 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강희 12년 강희제(康熙帝)가 삼번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자 오삼계가 군대를 일으켜 청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삼번의 난은 끝내 실패했고 그렇게 관녕기병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