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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주에 대하여
벧전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18-25 / [그리스도의 고난] 하인들이여, 주인을 존경하고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하십시오. 친절하고 사리판단이 명확한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 19) 만일 여러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벌을 받았거든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여러분이 악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참아낸다고 무슨 상이 내리겠습니까? 옳은 일을 한 것 때문에 벌을 받고도 말없이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 운 일입니다. 21)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아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22) ㄱ)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ㄱ. 70인역 사53:9) 23) 욕을 당해도 욕하시지 않고 고난을 받아도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리고 몸소 ㄴ)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떠나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신 대신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길 잃은 양처럼 헤매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적이 공격해 와도 여러분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 주서는 감독자와 목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고난의 길을 순종으로 걸어가셨던 그리스도의 삶은 모든 믿는 자들이 따라가야 할 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회복된 모습으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18-21) 노예와 같이, 사회 계급상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일 때, 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베드로는 이들이 나타내야 할 자세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와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이 포함된 표현이 순종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러한 순종은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노예들의 진정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순종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여 슬픔을 참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삶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본(22-25) 성도들이 따라야 할 삶의 본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 그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계실 때 죄를 짓지 않으셨고, 고난 속에서도 욕을 하거나 위협을 받아도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인류의 죄를 담당하셨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보여준 삶은 그를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본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에 목적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구원의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구원입니다. 그의 고난이 믿는 자들의 온전함을 이루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길을 잃은 양이 아니라, 그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
적용: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 주신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표준적인 모습입니다. 당신은 일상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 속에 답을 찾고 있습니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종일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자유’와 ‘종’이라는 단어가 매우 상충적인 표현들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 땅의 모순된 질서마저도 역설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들인의 “바른 행위”가 정말 필요한 하루하루입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
벧전 2장 24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최대 관심사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종 병과 약한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큰 관심사였었습니다. 그와 똑같은 사역을 12사도와 70인의 제자에게 명하셨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전 성도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론>
1. 인간과 죄의 빚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가 바로 죄를 지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의 빚을 모태에서부터 짊어지고 태어납니다.
우리의 죄 짐도 감당하기 힘든데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은 그 죄 짐을 죄의 빚으로 우리에게 상속을 넘겨준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의 빚을 걸머진 후에 우리 죄를 또 걸머졌으니 죄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죄 중에서 잉태가 되고 죄 중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 덩어리입니다. 세상에서 삶은 유전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빚에 더욱 빚을 더하여 결코 청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우리는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죄 짐을 벗어 버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빚도 어느 정도면 갚을 수가 있지만 너무나 많은 빚은 갚을 수가 없어요. 한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빚을 청산하려고 했습니다. 그 신하가 임금에게 준 빚이 대략 우리 생각으로 한 1천억 원쯤 되는 것 같습니다. 1만 달란트. 여러분 백만 원 같으면 갚을 수 있고 천만 원 같으면 갚을 수 있겠지만은 1천억 원쯤 되면은 개인으로써는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얼마라도 돈을 건지기 위해서 네 처자를 종으로 팔아서 가지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땅을 치고 울면서 "말미를 주면 갚겠다." 갚기는 뭘 갚아요? 그러나 임금님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을 해줘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탕감해 줘 버리면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천억 원의 탕감을 받았으니 엄청난 탕감을 받고 너무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입이 찢어지라고 웃으면서 나오는데 궁중 밖에서 나와 보니까 자기 친구 한 사람이 자기에게 백만 원 빚진 친구를 만났어요. "야 이놈아! 백만 원 빚 갚아라!"고 멱살을 잡으니까 "말미를 주면 갚겠다."고 "잔소리 말고 안 갚으니까 너는 감옥에 들어가라!"고 감옥에 쳐넣어 버렸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보고 괘씸하게 여겨서 이것을 임금님에게 보고하니 임금님이 대노 했습니다. "나는 1천억 원을 탕감해 주었는데 단돈 백만 원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잡아서 감옥에 넣다니 그 놈 도로 불러 오너라!" 그 놈 불러 오니까 "이 나쁜 놈아! 네가 탕감을 받았으니 너희 동료도 탕감을 해줘야 마땅하지 않느냐. 이놈을 감옥에 가둬서 1천억 원을 다 갚을 때가지 고생의 떡과 물을 먹게 하라!"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영원히 감옥에서 못 나온다는 것입니다. 감옥 밖에서 일을 해도 1천억 원을 갚을 수가 없는데 감옥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에 빚의 이자는 이자를 놓고, 이자는 이자를 놓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걸머지게 되기 때문에 영원히 감옥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 무슨 예를 드느냐. 우리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죄의 빚을 상속으로 받은데다가 우리의 빚을 또 보태니 그 빚을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것인데 탕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면 영원히 그 죄 값으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탄다는 것입니다.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지옥 불에서 타면서 그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력으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구원받는 길은 죄가 탕감 받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탕감해 주는 길밖에는 구원 받을 도리가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도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요, 모래알 같은 조그마한 일에 불과하므로 절대로 탕감 받을 수 밖에 구원받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가 많지요.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마호메트교도 있고 또 크고 적은 종교가 많은데 어느 종교치고 나쁜 일 하라는 종교는 없습니다. 다 선을 행해서 착한 행실을 해서 좋은 결과를 맺고 낙원에 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큰데 좋은 일로 갚아지지 않습니다. 승산이 없습니다. 1천억 원이 되는 그 빚을 짊어지는데 한 달에 3백만원 월급 받아가지고서 생활하고 빚 갚으려면 언제 그 빚을 갚습니까? 선한 행위는 그와 같이 해서 도저히 그 행위로써는 빚을 갚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빚을 갚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죄 없는 사람으로써 33세에 우리 죄 값을 다 짊어지고 사형을 받은 것입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니까. 하나님이 인생을 위해서 자원하여 사형을 받아 몸 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부림치며 고통당하고 죽으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 "테틀레스타이"라는 헬라어는 내가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너의 죄, 나의 죄,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린 값으로 다 갚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죄를 탕감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의 생명을 값 주고 사기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 주신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교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명을 우리 대신 대속물로 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종교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니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빚을 갚아준 이는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예수님 옷자락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믿으면 누구든지 죄의 빚이 탕감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성경에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고난당할 것을 미리 보시고 예언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5백년전 약 6백년 쯤 될 때에 이사야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8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주님께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채찍에 맞아 산산으로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상을 보면 여러분, 이사야 52장 13절로 14절에 확연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십자가에 못박혀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형통해서 받들어 높이 들리어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간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주님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임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은 하루 이틀 만에 된 것이 아닙니다. 벌써 창세기에 아담이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보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사야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대로 우리에게 사람으로 오셔서 예언 된 대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라도 예수님 옷자락 붙잡고 예수님 끌어안고 예수님 쳐다 보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나오면 일절 다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행함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의식을 집행하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빽을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 대가를 주님이 너무나 크게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가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햇빛도 돈 주고 비취지 못하고, 공기도 돈 주고 숨쉬지 못하고, 물도 원천적으로 돈 주고 마실 수 없는 것은 너무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값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값으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짜로 받습니다. 너무나 값이 비싸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은혜로 공짜로 받는데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계산 못해요. 여러분 계산해서 받으라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공짜로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오늘날 캄캄한 흑암 속에 사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등지고 어둠의 길을 걸어가지만 얼마 있지 아니하여 심판 받지 않습니까?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후에 다 죽어야 되고, 모두다 죄 값으로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이 심판을 면할 길은 우리 주 예수를 구주로 마음속에 모시고 입으로 시인하면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고 죽음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은혜가 크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한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지 우리가 대가를 주고는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 가운데 은혜로 값없이 속량을 얻었다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주시는 분이 좋아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 받는 사람은 아무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지불하는 값이 없기 때문에 공짜로 받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데 예수 믿는 사람은 적고, 구원이 길은 열려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받아 들이지 아니하니 정말 가슴이 답답하고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여러분은 예수 믿게 되었는지 깜짝 놀라게 복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너무나 복이 많아서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값없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기뻐 춤추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 487장 다같이 한번 불러 보십시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죄 짐 맡은 우리구주 / 어찌 좋은 친군지 / 걱정근심 무거운 짐 /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 복을 얻지 못하네 / 사람들이 어찌하여 /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 / 없는 사람 누군가 / 부질없이 낙심 말고 /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 하신 친구 / 찾아 볼수 있을까 / 우리약함 아시오니 / 어찌 아니 아뢸까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욕먹은 그대로 예수에게 나오면 주님께서 짐을 맡아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죄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른데 가지 마라. 방황하지 마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 못사는 사람, 서양사람, 동양사람, 흰 사람, 검은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예수께 의지하고 나오면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받아 주어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인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 들이고 입으로 시인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놀라운 기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길인 줄 안즉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전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였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이라.
2. 예수님의 채찍에 맞으심과 치료
그 다음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시는 사역은 두 가지 중대한 사역인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 하시고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죄요, 병인 것입니다. 병은 주님께서 가는 곳마다 고치셨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역의 3분의 2를 병 고치는데 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잘못 해석해서 병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병은 축복이 아니고, 형벌인 것입니다. 병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이란 영적인 사망은 지옥 가는 것이고, 육체적 사망이란 몸이 병들어서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병은 결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채찍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심판을 대속해서 갚았으므로 주님께서는 기어코 병을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에 대해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은 그 머리 덩어리에 채찍에 40에 하나 뺀 매를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빌라도의 뜰에서 말뚝에 묶임을 당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 등허리와 가슴이 다 찢어져서 선지피가 흘렀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 채찍에 맞았는가요. 병을 주님께서 청산하기 위해서 그 병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을 보면 주님은 병 고침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병 앓으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신 알아주마. 내가 네 대신 채찍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너 고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너는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 내가 살이 찢어져 살 뭉치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너는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주님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큰 병이 있는지 작은 병이 있는지 주님은 고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은 청산과 치료의 대상이지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병을 보고 청산하고 치료해야지. 아.. 병들었으니 복 받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축복을 주기 위해서 병을 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병은 심판이요, 채찍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병고치기를 원했던지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면 주님이 고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이 너무나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 보통 믿는 자들이 병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할 때 나을 것을 확실히 믿지 않고 희미하게 될는지 안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지만 주님은 기대하기를 여러분이 믿음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면 나음 받을 것을 믿고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병 고침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입니다.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 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병을 청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얻어맞게 하셨는데 하나님 뜻이 아닐 수가 있나요?
마가복음 8장 2절로 3절에 보면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나병환자가 자기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몰랐습니다. 옛날에 나병은 하나님이 주신 천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가 병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안 뜻인지 몰라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어 엎드려 "주님이 원하시면 내 병을 깨끗이 낫게 해줄 수 있나이까?" 하니까 예수님이 손을 당장 내밀면서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으라."즉시로 정결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병고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짓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닌 것처럼 병드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주의 뜻인 것처럼 병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와 병을 동시에 취급해서 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멸하는 주님은 병도 멸하고, 죄를 사하시는 주님께서는 병도 고치시고, 죄를 미워하는 주님은 병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냥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 낫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주님은 더 병고치기를 더 사모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원해서 병에 대한 심판의 재물이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심판의 재물이 되기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자원해서 내놓은 것입니다. "나를 때리고 저 사람 건져 주십시오. 나를 때리시고 저 사람을 고쳐 주십시오."
이사야 53장 10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댜.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상함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였다. 하나님의 소원이 "네가 질병 대신 짊어지고 내 백성의 병을 고쳐라! 내 소원이다." 오늘 병 낫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병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병을 예수님께 책임지어서 매를 맞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병을 고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그 뜻이 성취 되었다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병 고칠지 안 고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병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고치는데 있고 하나님은 고치는 것을 기뻐하시고 심지어는 여러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재물로 그 몸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은 성령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성령으로 감동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경에 말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했었습니다. 성령께서 마태복음 8장 17절에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연약함을 당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장 24절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입니다. 사람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거짓말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신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치료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또한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어린 양 예수의 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고함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피는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으므로 이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고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피를 흘렸으니 이 피는 너의 병을 다 청산했다고 피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합창곡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 병이 나았다고 말하고 예수의 피가 너희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합창곡에 우리도 합쳐서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성령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아멘! 그렇다. 내 채찍에 맞은 피가 내 증거가 된다. 그렇게 말하므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멘! 아멘!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고 시인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병든 자를 고치라고 말했고, 70인의 제자를 두 사람, 두 사람 보내면서 네가 어느 곳에 가든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그 집에서 쓰는 음식을 먹고 병을 고치라고 말했고, 마지막에 예수님 승천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유언하기를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심각하게 주님은 치료를 명령했는데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등한이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병 고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 열심을 다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병 고침은 교회가 해야 될 사명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하시고 성령이 그것을 증거하시고 예수의 피가 그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조금도 타협하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예수 믿고 병 고침 받으라고 외치고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치료는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을 치료하기 위하여 고난 당하였으므로 이것은 우주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여러분 고치려고 등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니 우주적 사건 아닙니까? 이것은 대한민국의 사건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천지가 아는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치료 자체가 우주적 사건이요,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한번 치료받으면 하늘의 아버지가 내 뜻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천사들이 박수를 치고 예수님이 그 씨앗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치료는 우주적 사건인 것입니다. 치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치료받는 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6월 20일 순복음가족신문에 실린 성북지교회의 송정심 집사님의 간증을 여러분 읽어본 적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집사님은 동생들의 간절한 기도로 교회 다니게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정말 병 고침이 있을까? 의심을 하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해서 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두 달 밖에 안 된 아이가 자꾸 경련을 해요.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니까 의사가 이는 간질이라고 간질병에 걸렸는데 이 간질은 약을 먹으면 조금 안정은 될지 몰라도 평생토록 고칠 수는 없다고..간질은 고치는 병이 못되니까 그렇게 알라고 결과를 말해 주었었습니다. 기적이 아니면 치료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난 다음에 그때 밤새 울고 괴로워 하다가 비로소 교회에서 주님이 병을 고친다는 설교를 들은 것을 기억하고 나도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리라는 결심과 함께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로 빠짐없이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2년 동안 그 딸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100일을 작정했는데 99일 날 되는 밤에 꿈에 그는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송가가 꿈에 입술에서 나오면서 시편 91편 말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우리 딸 예은이가 간질이 치료 되었다고 확신하고 감사를 올리고 병원에 찾아가서 조사를 하니까 뇌파를 다 조사하고 의사가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당신 혹시 예수 믿느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 아니고는 이 간질이 나을 수가 없다. 이것은 기적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약을 안 먹어도 간질도 안하고 뇌파에 이상도 없고 잘 자라서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 낙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뜻인 것과 같이 병 고침도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곧장 이어서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치료는 언제나 손과 손을 마주잡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만 전도하고 치료에 대한 전도를 안 하면 절뚝발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음은 구원과 치료가 항상 동시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구원과 치료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증거하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다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고개를 끄덕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끄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다르다고 말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한 것입니까? 동일하다고 말했죠. 그러면 옛날 2천년전에 용서하고 고치는 예수님은 오늘날도 용서하고 고치는 예수님 아닌 것입니까? 그 예수님 그대로 믿고 기적을 기대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구원 받고 치료 받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채찍에 맞으심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 세대는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구원사건을 우리는 듣고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몰랐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고행을 하고 괴로움을 당했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다음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로운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데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치료를 받는다는 새로운 소식도 듣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은 의사를 통해서도 고치고 약을 통해서도 고치고 좋은 환경을 통해서도 고치지만 또 우리가 믿으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이 주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는 병에서 고침 받아 건강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아무리 좋은 집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몸이 괴로우면 좋은 음식 먹어도 기쁘지 않습니다. 몸이 고통스러우면 좋은 옷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몸이 괴로우면 늘 얼굴을 찌푸리고 사랑과 행복을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잘 누리고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어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공기를 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오곡백과 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남편 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아내 주신 하나님이 감사하고, 자녀 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이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거이 살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평안해야 짜증이 안 나지 내 몸이 건강해서 짜증이 나고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감사한 말이 안 나오고 탄식하는 탄식이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다 치료받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병고침(신유)의 은혜를 받으려면
벧전 2장 24절 / 김홍도목사
마태복음 8장 16~17절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큰 승리를 얻고 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는 부흥회를 마치고 담임목사님께서 “전에 받아보지 못했던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고, 시카고 선교사 대회에서도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지 제가 40년 목회하고 부흥회 인도했지만 한 번 설교에 이처럼 성령의 불바다가 되고 많은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의 병고침(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병고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병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원어는 “우리의 질병(disease)과 고통(pains)을 짊어지셨다”는 뜻입니다(Dr. Isaac Leeser). 이사야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신 말씀을 마태가 응용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2,000년 전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질병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고침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질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사탄이 준 것을 갖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사탄 마귀에게 눌린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6절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현대 병명으로 관절염(arthritis)병에 걸려 18년 동안 꼬부리고 다녔던 모양인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고 고쳐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건강을 도적질하고 물질을 도적질하고 생명을 파괴하려고 오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병마를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병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신구약 성경에 신유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병고침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또 병을 고치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는 의사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26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다 타파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면 병을 고쳐 주시고 양식과 물에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날 수를 채우리라”고 하셨지 죽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7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랑하고 번성케 하시고 태의 열매를 축복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시편 107장 19~20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보내사 치료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말씀을 통하여 병을 고쳐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도 그의 자녀들을 치료하십니다.
미국에 93세 된 할머니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50년 동안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괴악한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고 제 수명을 못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5장 14-1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병들어 앓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지요. 여러분, 자녀들이 가난에 쪼들리고 빌어먹기를 원하시는 부모가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들보다 자녀를 덜 사랑하시겠습니까?
4.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하나님의 병고침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① 마귀에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라
질병이 떠나가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demand)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3~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6장 23절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하라”는 말씀은 “명령하라”(demand)는 뜻에 가깝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명령할 권리가 있습니다. 마귀에게 풀고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내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이름을 무서워합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라고 당당히 명령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에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다음 한 말씀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고,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②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병고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3~24절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③ 합심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18장 19절부터 보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주시겠다”고 하셨고, 20절에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음과 뜻을 합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합심하여 기도하면 더 좋습니다.
④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야고보서 5장 14절에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기름을 안 바르면 안 낫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⑤ 안수함으로 병고침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안수하지 않으면 안 낫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16장 15~18절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안수는 신유의 역사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크리스찬들은 누구나 안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안수하려들거나 아무한테나 안수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너무 안수만 자꾸 받으려고 하면 남을 의지하는 버릇이 생깁니다.
안수는 하나님과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만들고 믿음이 흘러 들어가게도 합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⑥ 신유의 은사를 통해 신유를 받아들이라
고린도전서 12장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했는데 그 중에서 병 고치는 은사를 말했습니다. 특별히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이가 있는데 그들을 통하여 병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⑦ 신유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
이사야 53장 4~5절, 마태복음 8장 17절, 베드로전서 2장 24절 등에 나타난 것과 같이 병고침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먼저 고치시는 것과 인간의 믿음을 통한 병고침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앉은뱅이, 소경, 병든 자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38년 된 환자를 자원하여 찾아가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유의 역사는 모든 사람에게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유의 은사가 강한 사람도 15~20%만 고침받습니다.
또 혈루증 앓던 여인이 간절히 사모하여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나을 줄 믿고 손을 대었을 때 곧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이 렇게 간절한 믿음을 가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6. 즉각적인(instant) 고침과 점차적인(gradual) 고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열 문둥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고침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기도 받고 두 달 후에 나았습니다. 즉시 낫는 것이 오히려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그 병이 다시 도질 수도 있습니다.
7. 영적으로 병나음을 얻었으므로 영이 잘못되면 병마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능력도 성령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받아들일 때 성령이 떠나는 동시에 질병이 다시 도질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항상 다시 침투해 들어오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을 대적해 물리쳐야 합니다. 신유의 은사는 느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이 나고 쑤시고 아파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치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항상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신 말씀과 마태복음 8장 17절의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증언
벧전 2장 22~25절 / 김양인목사(목양교회)
오늘은 시몬 베드로의 증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로서 복음서에 보면 열 두 제자 가운데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이는 그만큼 제자들 중에서 역할이 컸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본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였습니다. 하루는 밤이 맟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지 못했어도 저녁에 고기 잡으러 나가기 위해 그물을 씻어 정돈해 두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수면은 아침 햇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이 마치 무수한 물고기가 뒤엉켜 펄떡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감상에 잠길 겨를이 없습니다. 빨리 그물을 정돈하고 집에 가서 조반을 먹고 한숨 자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많은 사람들이 시몬이 있는 해변으로 다가왔습니다. 군중의 맨 앞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시몬은 일전에 동생 안드레의 소개를 받아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 말고도 그는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좋은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가에 대어놓은 빈 배를 보시고 그 중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놓으라 하시고는 배에 앉으셔서 해변에 섰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자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예수님을 배에 모신 그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했더니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니 물에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잡았으니 수지맞았습니다. 또한 지난밤의 부진을 말끔히 씻었으니 기분이 상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이라도 붙잡고 “예수님, 너무나 고맙습니다. 덕분에 횡재했습니다.”하고 사례할 일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시몬은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니, 시몬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에 내내 열과 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같은 시몬을 귀히 여기시고 늘 가까이에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시몬 베드로를 생각할 때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한 신앙고백입니다. 때는 공생애가 끝나기 여섯 달 전쯤이었는데, 예수님은 머지않아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지방으로 여행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마다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대체로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이 세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에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 같은 분으로 인정했으니 아마, 제자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그 말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의 진실한 생각입니다. 제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잠히 있는데, 정적을 깨고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이 고백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시몬의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에 딱 들어맞았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중 하나쯤으로 알아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지혜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습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입니다. 육은 영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수로 예수님을 올바로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님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교회의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밝히 알리신 그 때부터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껏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그처럼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왜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만류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진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칭찬하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천구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베드로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차이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으나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데 제자로서 담담히 받아들인다면 그편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들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곧 사단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메시아께서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실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위해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유월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맨 마지막 재앙이 곧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재앙은 유대월력으로 정월 14일 밤에 임하였는데, 그 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을 택하여 14일 저녁에 잡아서,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고기를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아니하고 불에 구워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두루 다니시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감으로 죽음의 재앙을 면하였습니다. 이렇게 재앙이 넘어갔기 때문에 이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유월절 어린 양이 피 흘려 죽음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듯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어려서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시몬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주의 깊게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느 복음서든지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를 기록한 첫째 목적이 예수님의 고난을 증언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이후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기조차 겁을 내고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쉼 없이 십자가를 향하여 다가가셨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어린 나귀의 등에 걸치니 그 위에 예수님께서 타셨습니다. 또한 무리가 주님의 입성을 환영하며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또 길가의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뒤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지켜본 제자들의 마음은 어느덧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아이신 것을 선포하셨으니 곧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제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벌써 예수님을 처형할 죄목을 정해 두었습니다. 그 죄목은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들을 때려서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성전의 책임자들이 와서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했습니다. 곧 이런 일을 하는 자격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니, 그들이 놀라 말하기를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은 성전 모독죄로 고발당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급전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근심에 사로 잡혔습니다.
드디어 유월절 저녁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조촐한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근심에 사로잡혀 각각 여쭙기를 “주여, 내니이까?”, “주여, 내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어 가룟 유다가 다락방을 나와서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어두운 밤길을 더듬어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조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갔을 때,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식사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에 앞서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단호한 어조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베드로의 말을 허풍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심을 말했습니다. 정말로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밤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검과 몽치로 무장한 큰 무리를 데리고 왔을 때, 시몬은 검을 빼서 예수님께 손을 대려는 자를 향하여 내리쳐서 그의 한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상대의 머리를 내려친 것이 그만 빗나가서 귀를 잘랐습니다. 자, 이 같은 베드로를 보고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드디어 예수님께서 포승에 결박되어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멀찍이 예수님의 뒤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가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고 모닥불을 쬐고 있는 하속들 틈에 끼어 앉았습니다. 그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는 동원된 하인들로 그득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뜰에 모닥불을 쬐고 있는 하속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인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열린 산헤드린 법정은 예수님을 죽일 목적으로 열린 것이므로 기어코 예수님께 성전 모독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증인들의 증언에 대항하여 한 말씀도 대꾸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자, 이제껏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하자 모두 대답하기를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만장일치로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이에 하속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숨을 죽이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부인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으로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당황한 베드로는 맹세하고 부인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고 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불현듯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시몬의 실패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점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으나 예수님이 공회에서 사형을 언도 받는 것을 보고서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눈물로 회개함으로 다시금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 뵈었고, 주님의 재신임을 받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제자들이 밤새 수고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나오는데, 해변에서 웬 사람이 서서 “고기 잡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없다”고 하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는 헤엄쳐서 뭍으로 나왔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해변에는 숯불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떡과 생선을 먹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다시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대답하기를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그의 실패를 만회하게 하시고 주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양 무리를 보살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재신임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사도 베드로는 아세아의 여러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2-25)
베드로는 주님의 공생애 내내 함께 하면서 그 행하신 일과 가르침을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도 베드로의 증언을 보면 이사야의 예언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그의 사도직을 걸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증언을 믿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그의 증언을 믿어 길 잃고 방황하던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시몬 베드로처럼 생명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충성스런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벧전 2장 22~25절 / 조재호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 중 22절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24절의 '나무'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원래 성경시대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찬송 147장 1절 가사를 보면,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세상의 욕심이 사라지고, 세상의 힘든 일로 지쳐 있을 때 위로 받게 되고, 시끄러운 일들이 많을 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방에도 달아놓고 목에도 걸고 차에도 붙이고...
찬송가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고,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새 삶을 주고 나를 구원해준 십자가를 자랑하며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십자가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나무 십자가의 쓰임새는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을 죽이는 사형집행기구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여러 가지 처형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의 연설가인 키케로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가장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서워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합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십자가를 귀히 여깁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요?
1. 첫째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24)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움직일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죄에서 놓임 받고 해방되고 자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 원수된 우리들과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파스칼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위대한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그는 수학의 천재, 유명한 과학자, 철학자이나 저술가입니다. 이 화려한 그의 명성보다 가장 위대한 인생의 경험은 주님을 만난 어느 날 밤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그 놀라운 경험을 종이 쪽지에 적어 심장 가까운 주머니에 집어넣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임종하고 나서 그의 주머니에서 낡고 주름잡힌 작은 종이가 발견되었습니다.
"밤 10시 30분에서 12시30분까지 - 불! 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자혜자의 하나님이 아닌 복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 안정감, 느낌 평안, 기쁨 - 기쁨의 눈물. 아멘"
파스칼은 논리적이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수학적인 계산에 뛰어난 과학자요 수학자였으나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불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철학적 사고로 이해 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 인간의 작은 계산으로 만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불로 찾아오신 하나님.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양을 태우고 죄를 태우고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사이 좋게 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섭고 두렵고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친근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파스칼은 안정감, 평안,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십시오.
3. 셋째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5)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얼마전 프로 야구 개막식에 9살짜리 꼬마가 운동장 가운데 서서 시구를 했습니다. 한국 이름은 오인호, 미국 이름은 애덤 킹인데,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모두 붙어 있었고 무릎 아래로 다리는 썩어 들어가는 희귀한 질병이어서 친부모가 양육을 포기하여,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 양부모는 한국 장애아이 4명, 인도아이 1명, 미국아이 2명 친자녀 3명 10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해 맑고 천진한 모습의 아이가 낳은 한국인 부모를 만나서"나는 엄마 아빠를 기억해요"라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보면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가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딱한 처지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봄 햇살과 같이 따뜻한 광경이었습니다. 인생은 가치가 있고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졌습니다. .
여러분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까? 영혼이 단비를 기다리는 봄의 대지와 같이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면의 영적 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져 있지는 않는지요? 새벽에 가만히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영혼의 만족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죽은 영혼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병든 영혼 고치는 하나님의 치유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외로운 사람에게 힘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고난 주간 동안 나를 살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생각하며 큰 은혜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에 대하여 산 자
벧전 2장 22~25절 / 조학환목사
여러분, 주님 안에는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은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 그 은총을 온전히 누릴 수만 우리는 정말 영육 간에 엄청난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아직도 우리의 심령에 죄와 무지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무지로 인하여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것도 너무 많고, 동시에 알면서도 잘 가지도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모르는 것도 많고, 알면서도 안되는 것이 많으니 당연히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지 못하고,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니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 속에 살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 불만 원망 시기 질투 갈등 싸움하며 사랑하고 나누고 귀히 여기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바르게 알고 그 길로 간다면 당연히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되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다면 당연히 불평 불만 시기 질투 갈등 싸움 없이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며 귀히 여기며 나누며 살게 되고 그러면 현재적인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등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자기 생각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는데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먼저 생각할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비록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고 심지어 억울한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불평 불만 분노 정죄 싸움하지 말고 그저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오직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세상에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 때문에 불평 불만 분노 갈등 싸움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우선은 자신이 힘들어지고 남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그래서 문제는 점점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와 주권을 믿지 않습니까?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살아계심과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모든 걸 알고 계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런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늘 많은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그 문제해결의 길은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나쁜 놈, 망할 세상 하면서 불평 불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 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래서 내가 살고 네가 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시37편에서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우선 22,23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여러분, 보세요. 주님은 완전한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의 주님이신데 무지몽매한 인생들이 온갖 모욕과 조롱을 퍼붓고 침뱉고 뺨을 치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했는데 주님은 같이 욕하고 저주하고 대항하지 않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모든 불의에 대하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것임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무 죄도 흠도 부족함도 없으신데 오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런 온갖 멸시천대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또 참으며 자신의 길을 가셨다면, 주님이 그 온갖 멸시 천대 조롱 고통 처절한 죽음 앞에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더 참고 기다리며 그저 주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의 길을 가야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억만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의 잘못과 허물과 죄에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한다면 어불성설이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우리는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건만 아직도 여전히 죄와 무지에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여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도 남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줄 때가 많은데 남이 나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준다한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험하고 혼탁하고 악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과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억만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동시에 우리도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기도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또한 세상이 그러할지라도 우리가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이 결국 서로가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다른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맡기고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산 사람들이라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억울한 일에 대하여 오래 참으며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야 하고 그렇게 정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른다면 설령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같이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선으로 대함으로써 악을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너무 당연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는 억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이나 세상이 내게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준다고 같이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게 어찌 억만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합당한 모습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에서 보았던 2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즉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흠도 불의도 없으셨지만 온갖 조롱과 핍박과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절대로 같이 욕하고 위협하고 싸우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당연히 그것만이 유일한 인류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불의와 고통과 죽음에 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으셨다면 그 크고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하겠습니까? 동시에 앞에서 언급한대로 서로에게 대하여 불평 불만 분노 정죄하고 싸우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오래 참는 가운데 사랑과 선과 의로 대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저주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을 돌려대라고 하시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라고 말씀하셨고, 롬12:17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악에 대하여 혹은 내 자신이 악의 피해자가 될지라도 인간적인 어떤 방법으로 같이 싸우고 대항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욕하고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은 그 모든 걸 알고 계시고 결국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래서 그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귀하고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설령 악에 대해서조차도 욕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거듭난 자로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이요, 그래야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 24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만 아니라 구원을 받고 난 연후에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죄와 무지 가운데 살던 내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태어났으면 당연히 과거에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모습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죄와 무지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함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거듭난 자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아직 죄와 무지의 찌꺼기가 남아 있고, 세상은 여전히 죄와 무지가운데 있음으로 세상에 완벽할 수는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향해 힘써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 옛자아가 죽고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모습이요, 그래야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그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어떠하든 누가 뭐라하든 심지어 누군가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할지라도 불평 불만 원망 비난 분노 정죄하지 말고 그저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선과 진리와 의와 사랑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죽고 거듭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
벧전 2장 21~25절 / 이수영목사
지난 월요일 저녁에 시사회에 초청을 받아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영화제목은 우리말로 옮기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멜 깁슨이라는 호주 출신 헐리우드의 배우 겸 감독이 제작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간접적으로 다룬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와도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최대한 복음서들이 전하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해보려 애쓴 작품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열두 시간 동안 받으신 고난을 두 시간으로 압축하여 재현한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다룬 모든 영화들 중 그 구성과 내용이 가장 단순한 작품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영화처럼 통렬하게 가슴을 치는 영화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 영화의 최대의 특징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극사실적으로 재연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지 여러 가지로 이론적인 추측을 해왔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잔혹하고 처참할지는 전혀 상상을 못했었기에 이 영화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병사들이 예수님께 행하는 가혹행위는 너무나 끔찍하고 야만스러워서 한 동안 눈을 감고 빨리 영화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그 고난은 제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표현력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대속의 희생이 너무나 거룩하고 숭고해서 감히 언급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말 않고 그저 여러분 모두가 꼭 한 번 이 영화를 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40일 특별기도회 참석하시는 심정으로, 수난주간 한 주일 금식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 한 편 보시기를 권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내시기 바랍니다. 기왕이면 고난주간 지나기 전에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일찍 보시기 바랍니다. 시사회가 있으면 그 때 보시고 아니면 개봉하자마자 보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으면 온 식구들이 다 함께 보시되 임신부나 심장 약하신 분,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은 참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며 소리치는 대제사장들이 어쩌면 그렇게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게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게 폭력을 가하는 병사들에 대하여 얼마나 증오감과 분노심이 끓어올랐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들을 짐승 같다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짐승들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행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 병사들은 악독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의 그 포악하고 징그러우며 일그러진 모습들이 다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비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대제사장들의 모습도, 자신의 입신양명 때문에 무죄한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내주고 마는 빌라도의 모습, 은전 30냥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의 모습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도 다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이며, 그들의 흉악한 모습이 곧 나의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참혹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것이 바로 나의 무지와 나의 불신앙과 나의 탐욕과 나의 이기심과 나의 배신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모든 죄가 그 무서운 채찍 되어 예수님의 몸에 가해졌고 그의 살점들을 뜯어냈고 그의 피를 튀기게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화를 보던 중간에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그 무지막지한 병사들의 폭력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 내 죄라는 가책의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수님께 가한 그 고통으로 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내가 흘리게 만든 예수님의 피로 나의 죄를 씻으시는 데에 사용하신 것임을 이 영화는 다시 한번 처절하게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고난이 바로 나 때문이고 나를 위해서임을 다시 깊이 되새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을 아무 말 없이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맥없이 무너짐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 위대한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그동안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믿었던 것은 고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의 말씀 따라 십자가를 진다고 여겼던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죄 때문에 아무 죄 없으신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담당시키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희생 앞에서 모든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사역의 완전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신 것은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고 흉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다 씻으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와 희망을 얻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4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5절)이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오는 7절에서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했고 12절에서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고 벧전2:21-25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우리가 얻은 치유가 어디서 온 것이며 누구에 의해 주어진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그 혹독한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 어떤 사람에게든 우리가 품었던 탐욕과 시기와 이기심이나 우리가 저질렀던 위선과 기회주의적 처신과 배신과 비난과 중상과 모함과 정죄와 잔인함이 그 당사자들뿐 아니라 주님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인지도 바로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온전한 참회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그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놀라운 대속적 고난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승리
벧전 2장 19~25절 / 김진호목사
20세기 성자로 알려진 슈바이쳐 박사는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살이 마치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다가 잔잔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 바다가 바람이 불고 폭풍이 일어날땐 바다같이 위험한 곳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스럽고 아무런 인생의 문제가 없을 때는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가 찾아옵니다. 여기서 많은 인생들이 좌절도 하고 절망도 하며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란 사람은 그의 시속에서 "그대 웃음이 솟는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 눈물로 채워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루사"태풍이 지나간 자리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수재가 이 땅에서 생겼습니다. 수재로 인한 피해 액수가 돈으로 7조원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서울 한복판에 한꺼번에 900밀리의 비가 쏟아졌다면 서울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강릉근처에 어느 농촌 마을은 강뚝이 무너진다고해서 급히 동네 사람들이 동네 근처 산으로 피해가는 순간 강물이 넘쳐서 한동네 12채집이 순식간에 폭우에 쓸려가고 동네는 진흙으로 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인생을 사는데 이런 고난 저런 고통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아파트에서는 당시 19세의 이규탁군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콩팥 한 개를 잃고 다리 한쪽을 쓰지 못해 불구의 몸으로 간신히 학교를 다니긴 하나 부모의 눈에는 다시 회생하기 어려운 식물인간처럼 느껴지다가 결국 이 사고 당한 막내아들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당한 이희윤씨 부부와 장남이 몹시 슬퍼하다가 이 고통과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집 아파트에서 동반 자살을 세식구 모두가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집에 가장인 이씨는 모 회사에 중견간부였고 인생 나이도 50이나 된 장년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막내 아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다가 집단적으로 온 식구가 자살하면서 남은 재산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들을 위하여 써 달라는 내용의 유서까지 남겼다고 그 신문은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슬픈 이야기 인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가끔씩 매 토요일 저녁마다 방영되는 이웃돕기 리퀘스트 프로를 보면서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이웃들이 고통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줌으로 전화 한 통화들이 모여서 1억 이상의 위로금이 모여지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더욱이 서울시경에 보고에 의하면 작년 한해에서만도 교통사고에서 부상한 사람들이 6만9천명에 달하고 지난 해에도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어 갔다는 보도도 함께 이 슬픈 사건이 보도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토록 끊임없는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삶의 현장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생을 가리켜서 고해와 같다"고 해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고난스러운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서도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은 고난과 환란이 분명히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이 저절로 물러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께 고난을 내게서 하나도 없이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어떤 고난이 와도 이 고난을 이기며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바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면에서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은 피할 수도 없고 근본적으로 없애 버릴 수 없는 인생의 과제중의 과제요, 문제중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도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슬픔도 통과해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것이 곧 인생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피한 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승리하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 모두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종류의 슬픔이나 고난이나 실패의 쓴 잔을 가지고 나온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고 고난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고난을 이기며 극복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본문 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고난의 이유를 알수없이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으로 인해서 받은 엄청난 고난의 사건들입니다. 또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당하는 고난과 그리고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인 교통사고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슬픔의 사건들은 정말 애매히 당하는 고난과 역경들입니다. 이번에 태풍으로 당한 수재로 인한 많은 고난의 일도 우리가 그 고난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고난 받는 뚜렷한 이유를 알면 해답도 쉽게 나올 수 있는데 고난받을 아무런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을 견디기란 인간으로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현대아파트의 이희윤씨 가족 동반자살 사건도 바로 이런 애매한 고난의 문제로 고민하고 비관하다가 이런 비극적인 동반자살을 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애매한 고통과 슬픔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이 인정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 몸의 병도 원인 없이 아픈 병이 있습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아플 때 그 병에 대한 치료가 더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병의 분명한 이유를 알면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알아서 더 쉽게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도 이런 애매히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아무런 죄 없는 갈릴리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인 사건이나 또, 실로암 망대를 건립하다가 그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이 깔려죽은 사건을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면서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건을 듣고 본 사람들은 회개하라고 회개를 강조하신 말씀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강하는 불의의 고난과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이 내게 닥칠 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고난과 슬픔을 참으면 그 결과가 아름다운 것으로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합시다.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이런 애매한 고난과 슬픔을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알고 계십니다. 내 중심과 나의 억울한 고난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선하게 갚아 주십니다. 종종 우리들도 내 자신의 고민과 괴로움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깊이 알아주고 이해만 해줘도 큰 위로와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애매한 고통과 슬픔을 알아주신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고난을 잘 참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당한 고난-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에 팔리우는 고난 보디발 집에서 억울하게 당하여 감옥에 갇힌 고난-모두 참아냄으로 하나님이 요셉을 크게 들어 쓰신 것입니다. 현대 아파트에 사는 이희윤씨 가족도 자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그 아픔과 슬픔을 참았다면 그런 비극적인 인생으로 삶을 마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욥의 고난-하나님은 아셨지만 욥 자신은 모릅니다-참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이유를 알수 없는 고난과 슬픔을 잘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는 이런 고난은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아주 가치있는 고난입니다.
본문 20절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짐으로 그 결과 고난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형벌입니다.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이 바로 두가지입니다. 그 첫째는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야고보서 1장 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죄로 인해서 당하는 결과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자복해야 됩니다. 이로 인해서 당한 어떤 벌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죄로 인해서 당한 고난을 회개도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고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번 지자제 선거가 그런대로 잘 치루어진 줄 알았는데 선거이후 당선된 많은 사람들이 선거법에 저촉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낙선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도 죄로 인해서 받는 심판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당선 되었던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죄로 인한 고난을 받을 필요도 없고 받아서도 안됩니다. 이런 고난은 무가치한 고난이요 죄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요 시련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다가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슬픔까지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달게 받을 뿐만 아니라 이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결과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10절-이하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케 하셨고 온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리고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한 선한 목적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요 그 고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속에서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군인 생활을 한 분중에는 그냥 복무기간만 채우고 제대한 군인이 있는가하면 어떤 군인은 값지고 귀한 훈장을 받고 제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해주고 있습니까? 훈장하나 받지 못하고 제대한 군인이 무사하게 군 생활을 마쳤을지라도 나라를 위해 어려운 역경과 희생의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에겐 별다른 공로와 보상이나 표창도 받을 수 없으나 많은 훈장은 군인은 수없는 위험과 역경에서 용감하게 싸웠기에 그에게는 표창도 있고 특별우대도 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해서 고난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고난이요 값진 고난이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더 귀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이하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당시에 바울도 편하게 예수를 믿을 수도 있엇습니다. 평범하게 고난 안받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고난과 시련과 희생을 피하지 않고 믿고 충성하였기에 바울은 기독교역사에 큰 인물이 된 것입니다.
도봉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중에서 믿음생활하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의 일과 교회 일을 하기 때문에 손해가 오고 고난이 따릅니까? 필요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을 위한 값있는 고난으로 믿고 그 고난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직장에서 밀려나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고 집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현명한 아내가 펜과 종이로 바빠서 글을 못썼으니 글을 쓰라고 아내의 격려로 다시 글을 썼는데 그가 바로 「주홍글씨」명작을 쓴 나다니엘 호손이었습니다.(실직의 고난을 참음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뚜렷한 이유없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도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아름답게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를 위해서 의와 선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도 더 값진 고난인 줄 믿고 그 고난을 잘 이기면 더 풍성한 결실로 우리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어떤 목사님의 간증 고백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3대 독자인데 이 목사님에게 아들하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4대 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이제 4학년이 되었는데 졸업 한 학기를 남겨놓고 여름방학 때 강에 가서 수영하는 도중에 그만 불행하게도 빠져 죽었습니다. 목사님이라도 너무나 엄청난 비극이 닥친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찢어지는 듯한 슬픔속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다시 일어나서 교인들 앞에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이런 말씀입니다. "평소에 늘 말하고 외치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뜻이 정말 무슨 뜻인지 이제 내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사랑하셨다는 그 뜻을 목사인내가 이제 알았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는 말씀을 할 때 온 교우가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고난을 잘 참고 나가면 아름다운 결과가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고난은 필수적 과정입니다. 애매한 고난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십시다. 내 실수와 잘못으로 당한 고난은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이겨나갑시다. 그리고 주를 위한 선한 고난도 달게 받고 참고 견디면 우리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값진 포상을 축복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벧전 2장 19~25절 / 김태환목사
벌써 4월이 되었습니다. T. S. 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1888~1965)는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장시(長詩) 1편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 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Memory and desire, stirring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었나니 /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목숨을 대어 주었다. /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또 우리 나라의 모윤숙(毛允淑, 1909~1990) 시인은「4월의 본능」이라는 수필에서 4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부활의 달이다. 자유가 꽃잎술을 내미는 매혹의 아침이요,
수줍은 꿈이 터지는 젊음의 아침이다. 천만 풀이 머리를 들고
만개의 꽃부리가 물을 채워 생명의 개가를 부른다.
4월은 인생의 아가씨요, 신(神)의 피리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서곡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4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4월이고, 부활하신 것도 4월입니다. 해마다 우리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요약(要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세계 역사가 달라졌고, 인류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만약(if)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쓴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13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1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없으면(17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감격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4절).”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A.D. 64년 경에 로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때는 네로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베드로전서 1:1)” 디아스포라(diaspora) 형제들에게 썼습니다. 아이로닉 하게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력하게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 8:33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분명하게(plainly)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했다”고 했습니다만, NIV 영어 성경에는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데리고 가서 비난했다(rebuke)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도 베드로를 “rebuke” 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이 말씀을 하시고 남기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4-35절).”
어쩌면 베드로에게는 끝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건 베드로 뿐만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否認)했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옆에서 목격했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고린도전서 1:24)”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성령께서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실 때,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실 때, 제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요? 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속 시원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계속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 영화에서 왜 예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맞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평을 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예수의 육체적인 아픔은 지나칠 정도로 잘 그려냈지만, 그가 느꼈을 고뇌와 아픔은 잘 그려내지 못했다.”
물론 한 영화를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한 정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는 왜 그렇게 맞아야 했는가? 그의 고난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경은 일관되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우리는 이미 배워서 잘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덕분에 우리는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그런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어떻게 나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로 깨닫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9-10, 12에 있는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과 같으신 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구원해 달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토록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것을 눈으로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알게 하셨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의 갑작스런 박해로 카타콤, 지하 교회로 들어간 형제들에게 베드로가 쓴 격려와 위로와 소망의 편지 속에는 뜻 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환난과 박해를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들려 줄 유일한 최상의 메시지는 십자가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 그는 과거에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십자가를 긍정(肯定)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했던 사람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도로 변화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사람의 일(the things of men)만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일(the things of God)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개인적으로(personally)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그를 3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 시켜 주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생의 사명(使命)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가 성령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 곳에 모였던 제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When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베드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설교했을 때, 그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사도행전 2:22-24).”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because Christ suffered for us)”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있는 환난과 박해와 핍박,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두려움도 아니고 생의 위기(危機)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狀況)은 낙심하거나 절망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example)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걸으셨던 발자취대로(in his steps) 그가 남기신 본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도전(挑戰)을 줍니까? 우리는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다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우리들의 삶도 고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난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락한 삶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누가복음 9:58).”
전부 그런 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마저도 재자됨(discipleship)의 의미를 모릅니다. 마치 자격증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 discipleship이라는 자격증을 하나 더 얻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많은 돈과, 지위와, 성경 교육과, 이 위에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永生)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전부 이런 식입니다. 제가 사순절 새벽 기도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사고, 자녀 교육 잘 시키고, 비지네스 잘 되고, 남편은 교회 장로이고, 부인은 권사이고,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전부 이런 식이라면, 과연 이 땅에 참 그리스도의 제자는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어떤 엉터리 같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가리켰는지, 처음부터 어떤 엉터리 같은 사람에게서 이런 식으로 배웠는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전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리킨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이런 식으로 배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과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안함과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편안과 안락함은 세상적인 가치(價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축복을 받은 사람은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가 성경 말씀 하나 읽어 드릴까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생활을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 여겨 보십시오. 내가 이처럼 전에도 여러 번 당부한 일을 지금 다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as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 일에만 마음을 씁니다(빌립보서 3:17-19).”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한 주간 내내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자동차도 제 때 점검을 해 주면 문제 없이 오래 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가? “ “지금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런 고난이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구별된(distinguished)삶을 삽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이란 자기가 이유 없이 받는 불이익을 말합니다.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고 해도 그것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서 내 권리를 찾기 보다는 공의(公義)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삽니다. 죄의 유혹에 대하여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일이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혼의 목자(Overseer of souls)를 모시고 삽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나누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삽니다. 그의 생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목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입니다. 그의 생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영혼의 목자이신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의 생에 행복이 있다면 그의 영혼의 목자 되시는 그분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A.D. 64년경에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선명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이렇다고 하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후 그 이미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되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베드로가 그렸던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렸던 선명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대번에 구별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애매모호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목사의 정체성은 더 혼란스럽습니다. 도대체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혼란스럽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이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
벧전 2장 21~25절 / 성홍모목사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종려주일이며,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베다니와 벳바게 근처에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의 등에 겉옷을 얹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주님을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여기 저기서 찬송하면서 소리치니까 바리새인들이 시기나 나서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평화의 왕이요, 겸손하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을 종려주일로, 그리고 고난주일로 지키면서 성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라는 C. S. 루이스라는 분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C. S 루이스(1898-1963)는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을 가르쳤던 교수로 금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기독교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분의 글들이 모두가 깊이가 있고,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루이스는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의 글을 연구하면서 "하늘의 영광"이라는 말은 "명성"이나 "명예"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말하는데 "명성"이나 "명예"로 보는 것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아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는 중에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은 결국은 명성이나 명예라는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명성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부여해주는 그런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아버지가 인정하시는 것, 하나님이 진가를 알아주시는 것으로 영광은 곧 명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7)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칭찬을 들으면 정말 좋아하는데 그것도 아무런 꾸밈없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지금까지 겸손한 즐거움을 몰랐다고 합니다. 가장 동심 같은 즐거움, 가장 피조물다운 즐거움, 작은 자가 되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가 된 즐거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사람 앞에서 짐승이 되는 즐거움이요, 아버지 앞에서 자식이 되는 즐거움이요, 스승 앞에서 제자가 되는 즐거움이며,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되는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순수하다면 얼마나 좋을 것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이런 순수한 갈망이 인간적인 야심으로 돌변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아버지에게 드려야 하는 마땅한 영광인데, 자기도취라는 치명적인 죄악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허영심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랑에 빠져들고 자기 이기주의에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겸손을 말할 때 우리 주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주님이 겸손하십니다. 낮아지셨습니다. 말로만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셨습니다. 겸손을 말하는데 완전한 겸손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겸손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잘하였다고 등을 두드려주실 때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고 못마땅해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노여움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기뻐하듯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받아주시는 것인데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조금 천박스럽고 저급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8:3에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욥이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고 하셨고 또 같은 말씀으로 칭찬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현대교회의 성도들보다 참으로 어려운 역경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보면 이러한 성도들을 말하는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에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한 말씀에 당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좋았는지 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숙한 제자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고난의 의미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 주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지만, 신앙인의 본으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셨는데 "이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라는 말입니까?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애매한 고난을 받고도 잘 참으라는 것입니다. 18절 말씀부터 종들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인데, 종들로 시작하여 모든 성도에게 대한 권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 죄가 있어 매를 맞거나 억지로 참아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칭찬 받을만한 일이 될 것입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지나가야 한다면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섬기는 자로 세상에 오셨고, 심지어는 당신은 종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이라는 말은 "휘포그람모스- ' 라고 하여 글씨본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에 영어글씨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점선으로 된 알파벳 글씨를 따라 쓰게 되어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들이 빠짐없이 다 닮아가야 하고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우리 주님은 애매하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가 있어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입으로 하신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었지, 거짓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욕을 받으실 때에 맞대어 욕하신 적이 없었고, 고난을 받으실 때에도 누구를 시켜서 갚아주는 그런 일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부탁하셨습니다.
2.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라(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수난의 종 메시아를 말씀하시면서 사53:12에서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법을 근거로 하여 희생의 제물, 속죄의 제물, 화목의 제물이 되시는 어린 양으로 죽으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불리하게 만들던 율법의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위에 그 모든 선고문을 당신이 달린 십자가에 함께 다 못박아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에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의에 대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라고 하셨고, 사도바울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대신하여 죽었다고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죄가 고개를 들어 일어나려고 하면 죄에 단호하게 말씀해야 합니다. "죄 짓는 나는 죽었고, 죄에 대하여는 나는 죽은 자로 있고, 의에 대하여 살아가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갈 뿐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죄 가운에 살던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고 이제부터 육체의 남은 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의를 목표로 하여 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3. 주님은 영혼의 목자요, 감독이십니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53:6절을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前)이라고 하면 구원받기 이전(以前)을 말하는 것으로 죄에 매어 살던 때를 말합니다. "이제는"이란 말은 구원받은 이후를 말하는 것으로 의에 사는 때요,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오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기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십니다.
(요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감독이 되십니다. 감독이라는 용어가 목자와 거의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간역자라는 뜻이지만, 교회의 용어로 정착되면서 방문하는 자, 돌보는 자, 감독, 권고하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의 눈치는 보지 않아도 좋으나 우리의 영혼의 감독이신 주님의 얼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루마니니아가 1945년 공산국가가 될 때에 침략자 러시아를 상대로 지하교회를 이끌어가다가 1948년 아내 샤바인과 함께 체포되어 아내는 3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목사님은 3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고, 다시 5년 동안 집단 감옥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8년 후 국제 사회와 세계교회 협의회의 끈질긴 요청으로 석방되었으나 다시금 지하교회를 끌어가다가 2년 후 1959년에 다시 체포되어 5년 간 감옥에 들어가 있다가 1964년에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세 번째 감옥에 들어갈 때에 노르웨이 교회에서는 그를 정치범으로 사려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의 가격으로 정치범 한 사람이 1900불이었는데, 범브란트 목사님은 10,000불에 사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1966년 미국 상원에서 증언할 때 온 몸을 보여주었는데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상처로 온 몸이 흉터로 가득하였습니다. 수 없는 채찍 자국, 불에 지진 자리, 고문에 고문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철의 장막 속의 바울"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을 위한 고난]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14년 간 감옥에 있으면서도 매를 맞으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그의 고난이 현재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들 대부분이 집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럼브란트 목사님은 그들 공산당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문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환상을 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공산주의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였는데, 자기 앞에 수많은 사람이 변화되어 핍박하던 이들이 함께 핍박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가족을 죽인 사람들이 목사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공산당원들은 참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교리를 암송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것만이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성찬에 참여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생 주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벧전 2장 18~25절 / 민경설목사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되며, 그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복은 철저히 주님의 고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었고 주님의 저주가 믿는 자의 축복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러나 고난을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 고난을 피하고 싶고, 즐겁고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무조건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하여 바르게 극복할 때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영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의 이유는 죄의 삯입니다. 그 사망이 현재화 된 것이 고난으로 우리 삶 속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 그러나 내가 직접 죄를 범하여 온 고난도 있을 수 있지만 직접 죄를 짓지 않아도 고난은 올 수 있습니다. 단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반드시 고난을 감당할 때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큰 뜻이 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고난을 당하셨기에 인류를 죄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 속에서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난이 있기에 우리가 애매히 받는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고난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우리를 죄에서 의롭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인해 우리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의 고난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 고난을 믿고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구원을 누려야 합니다.
두 번째, 병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영적으로만 구원이 아니라 육적인 구원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건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 의사를 통해서 건강할 수 있지만 모두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믿는 자들을 부유하게 하십니다.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남에게 꾸러 다니지는 않게 하십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네 번째, 사망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두려움이 인간이 죄를 짓게 합니다. 시기, 미움, 전쟁, 살인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마음에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병이 든 사람입니다. 평강을 누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남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구속의 은총을 누리고 남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때부터 가정이 편해지고 남편, 자녀, 이웃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평강은 축복입니다. 평안은 우주의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평안으로 마음의 구원이 일어나서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수난이 내게는 축복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이 땅에서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내게 있어서 애매한 고난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감당할 때 다른 사람이 구원받고 나는 하늘 보좌에 앉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교회에는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로, 교사로, 직분으로 감당할 고난이 있습니다. 이러한 애매한 고난을 감당할 때 축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난이 있습니다. 남은 고난을 감당하지 않으면 구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가정, 자녀를 위한 남은 고난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아직도 당신은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신 고난을 축복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의미있는 고난에 삶을 걸라
벧전 2장 18~25절 / 황광민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지난 월요일 <고난모임>에서 인권상을 수여하였습니다.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입니다. 고난모임은 감리교 목사님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운영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고난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금번에는 인권상을 수여하는 일은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로 후원해 달라고 하여 약간의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그곳에서 일하는 간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후원하는 사람들중에는 미전향 간첩으로 장기복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양심수로 보는 것 같은데 문제가 없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간상의 대답니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후원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권차원에서 돕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후원할 사람들이 없어서 대신 도와주고 있다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구별없이 양심수와 미전향간첩을 같은 테두리에 놓고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고난 나름입니다. 명분이 있는 고난이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베드로전서2장18∼25절은 이러한 고난 문제에 대하여 명쾌한 대답을 줍니다. 본문은 고난에 관한 한 모델이요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취할 고난에 대한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의미있는 고난에 삶을 걸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의미있는 고난
우선 첫째로 의미있는 고난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 당하는 고난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다 당하는 고난이라야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떳떳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있는 고난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세상에는 의미없는 고난이 더 많습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의미없는 고난입니다. 그러한 고난은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부득이 하여 원치 않는 고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살아가는 삶 자체를 고난이라고 볼 수 있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어느 왕의 주문을 받고 역사학자들이 모여 역사를 요약하고, 요약하고, 또 요약하였더니 <고난>이라고 하였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고난 중에 정말 의미있는 고난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옛날에는 흥부가 칭찬을 받았지만 요즈음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전에는 착한 사람의 대명사가 흥부였습니다. 그리고 흥부를 도와주지 않는 놀부는 저주받은 인불로 평가됐었습니다. 그러나 짚어보면 흥부의 고난이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갈 궁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할 일 없이 애만 잔뜩 낳아서 거지?를 만든 흥부가 칭찬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자기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 명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 의미있는 고난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의미있는 고난에 부름받은 성도
그런데 성도는 이러한 의미있는 고난에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를 위하여"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선을 행하기 위하여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길에는 고난이 따름니다. 시편기자도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고 하였습니다(시34:19). 그러므로 베드로는 고난을 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19절의 말씀처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운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여 참으면 더욱 아름답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때 스토아적인 체념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삶은 성도에게 있어 소명이지 운명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고난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주팔자라고 생각하고 체념적으로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자세는 잃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체념철학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운명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의미있는 고난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미있는 고난에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성도들도 그러한 고난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삶이 운명이 아니라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미있는 고난에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여 그 길을 가셨습니다. 인내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마태16:24). 바로 이 길이 성도가 걸어가도록 부름받은 길입니다. 이 길은 소명이기 때문에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도 인내로서 이겨나가야 합니다.
고난에의 모범인 예수그리스도
그러면 이제는 고난에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그가 겪으신 고난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21∼25절까지의 내용이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선을 위한 고난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는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궤사는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말을 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것이 벗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 분이 당하신 고난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이것이 여기서 고난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그 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 중의 하나로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가장 참혹한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봐도 죄인 괴수 중의 괴수같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십자가를 지실 때 좌우편에는 강도와 같이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누가 볼 때 강도 중의 강도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죄의 대가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에 의한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섭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불행한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참혹하고 비열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노예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에 신경이 가장 예민한 곳을 뚫습니다. 그리고 몸은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은 가중됩니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몸을 가눌 여지가 없습니다. 오래 매어 달려 있을수록 상처가 심해지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옵니다. 몸 안에서는 혈액 순환이 방해를 받고 특히 머리에 있는 혈관이 팽창하여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행히 일찍 운명하였고 아리마대 부자 요셉에 의하여 장례 지내졌습니다. 그러나 보통 관습에 따르면 시체가 다 썩을 때까지 그냥 놔 두어서 공중의 새들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주고라도 빨리 죽게 해 달라고 하였을 정도입니다. 또 뇌물을 주고 시신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십자가의 고통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 구원의 길을 이루시려는 자발적인 순종의 고난입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의미있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선을 이루려고 당하신 고난이므로 가치가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백성들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희생적인 고난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백성들을 위한 희생적인 고난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대신 지신 고난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2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목자없는 양같이 방황하였습니다. 이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정처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이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품안에서 평안과 위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독일 히틀러 통치 당시 고백교회를 이끌며 히틀러의 폭정에 항거했던 본 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애석하게도 뜻을 펴지 못하고 체포되어 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독론에는 두 가지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해 계시는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으로의 초월"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으로 초월해 오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고난당하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엄연한 초월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실 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온유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23절의 말씀을 같이 봉독하십시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온유하심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온유는 침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심문하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가14:61). 또 빌라도가 물을 때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가15:5). 그리고 헤롯왕 앞에서도, 십자가 위에서 그의 원수들이 조롱할 때도 잠잠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진 강도가 조롱할 때에도 침묵하였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53:7).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성도들에게 글을 본이 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본을 따라 온유함으로 참아 이겨야 하겠습니다. 당장 갚아주고 싶고, 당장 되돌려주고 싶은 충동이 왜 없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감정이 없겠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인데 누군들 잠잠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길은 온유함으로 참아 이기는 길입니다. 이러한 것이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고 억울해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과 모욕을 감당하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좌 우편으로 인도하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천하에 가장 귀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을 당할 때 온유함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이기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의미있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19절의 말씀에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과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원래의 의미가 "하나님의 양심을 인하여"또는 "하나님의 의식을 인하여"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모두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라는 것입니다(풀핏주석). 즉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의 아픔과 슬픔을 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고난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잠잠히 고난을 당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온유함으로 고난을 참아 이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의미있는 고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의미있는 고난에 삶을 거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믿습니까? 믿음안에서 고난도 이기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억울한 소리도 듣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이려니 생각하고 참고 이겨냅니다. 성도님들도 더러 그런 일을 당하지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기지는 못하고 시험 들었느니, 기분 나빠 못 다니겠다느니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여러 번 당하면서 이기다보니 이제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분명한 것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면 하나님이 보상하여 주십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니라"고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창15:1).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그 분을 믿고 의미있는 고난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을 이겨 나갑시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벧전 2장 18~25절 / 최승윤목사
고난을 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합니다.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난이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언제나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작은 어려움부터 큰 재난에 이르기까지 고난은 우리들 인생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의 부족과 무지 때문에, 우리들의 실수와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 스스로 자책을 합니다. 자신의 무지함과 실수, 무능력에 가슴을 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아이티와 칠레에서 일어났던 지진의 경우, 사람들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당하는 재난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합니다. 또 이번에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침몰한 천안함의 경우 군 당국이 빠른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럴 경우 유가족들은 가슴에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정부와 군 당국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애매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차가 그냥 뒤에서 들이 박는 경우도 있고, 그것 때문에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우리를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사고, 비난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답답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욕해주고 싶고, 받은 만큼 갚아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난 가운데는 이런 고난도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억지로, 마지 못해서, 떠밀려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에 의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을 먹을 것을 각오하고,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던져서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과 괴로움과 번민과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방황과 번민과 혼란스러움을 겪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기 전, 그 길을 가겠다고 결정하기 전,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모습을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번민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이 심하고 번민이 크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고난의 길을 가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갑니다. 그 길이 의로운 길이요, 사명의 길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도중에 그 길에서 이탈해서 딴 길로 가는 것을 변절이라고 합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는 것을 불충,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의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변절과 불충은 불명예입니다. 불명예는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불명예스럽게 죽기 보다 할복하는 것을 택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심리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변절과 불충과 불명예의 길을 택했다면 그 길을 택하게 된 더 큰 의로움을 깨닫고 그것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사기]]를 쓴 사마천이 사약을 받겠는가? 궁형<거세를 당하는 형벌>을 당하겠는가? 라고 했을 때 사약을 받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형벌인 궁형을 선택한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이고, 치욕스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역사를 통해서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정치가들을 비롯한 소인배들은 자신이 선택한 변절과 불충을 역사의 대의명분을 위해서 용감하게 선택한 의로운 결단이라고 말을 하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선택이었는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또한 역사가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판단으로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 나의 선택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내린 선택이었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가 다루고 있는 “고난”은 두 가지 입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과 “스스로 의롭고 참다운 길,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해서 선택한 고난”입니다. “애매하고 억울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경우 아프고 슬프지만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것을 참고 견디게 하시는 마음과 힘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싸움입니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라면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서 정당하게 저항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조목조목 따져서 옳고 그름을 가리고,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혼내주든가, 부끄럽게 만들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나 단체를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해서 보복을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이런 가르침을 보면서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도덕은 노예 도덕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그런 일들을 수없이 보아왔던 모양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모든 근거, 모든 행동을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에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에 근거해서 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은 세상의 어떤 철학과 사상과 가르침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보다 가장 의롭고, 지혜로운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싸인을 할 때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나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베드로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열 두 사단 병력보다 더 많은 천사들로 저 사람들을 모두 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만약 내가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이루겠느냐?”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능력이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십 분 발휘하여서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능력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선택할 줄 아는 힘입니다. 무능력하게 보일지라도, 고난을 당할지라도,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요 능력이요, 의로움이요, 충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용감하게 폼 잡고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심문을 받으실 때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비겁한 자, 변절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같은 뼈아픈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주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교훈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경우 분노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억울해하지 말고 그 모든 것들 것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에 맡겨라”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경우 분노하고, 원수를 갚고, 여러분 스스로 억울함을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늘에 계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는다면 그 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악 간에 분별해서 판단하실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과정 가운데 보여주셨던 모습이 무엇이었습니까?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부탁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부탁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살기와 분노와 폭력으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법을 집행해서 이단의 괴수인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 진정한 의인인가? 누가 옳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살기와 분노와 폭력으로 예수를 죽이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잔인하고 대담한 외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 의롭고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지에서 나오는 대담함.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과신하는 데서 나오는 오만함이 아닙니까?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습니까? .A. 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역사가들이 그 사건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언하신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이 역사 가운데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을 믿는다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보복하고, 되받아 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운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미워할 것도 없고, 마음 끓일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갈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받게 될 것이요, 그들이 외면하고 고집하고 완고하고 오만하고 무자비한 길을 걸어간다면 그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다루고 있습니다. “의롭고 참다운 길,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선택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경우”입니다. 이런 고난은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것입니다. 능동적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서 이 길을 가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나는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다. 짧은 인생 무엇 때문에 고민하며, 고생하며, 어려운 길을 가겠는가? 즐기면서 살기도 시간이 모자라는 인생인데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는가? 만약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면 그 길을 가지 않으면 됩니다. 누가 가라고 떠미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을 안 가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영생, 영원한 생명은 의로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좋아합니다. 죄악 된 본성은 불의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의로움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욕을 먹으면 참지 못합니다. 5개를 받았으면 10개를 되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세상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지 못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울함을 풀어야 합니다. 세상은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불의한 방법도 서슴없이 감행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라는 말 때문에 로마 시대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오리라고 미리부터 걱정하고 불안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고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갈채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자신의 몸을 맡깁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의 무관심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연예인들의 가십거리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에 착념합니다. 세상은 누가 돈을 얼마 갖고 있고, 어떤 집에 살고, 무슨 차를 타고 다니고,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가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자존심 상해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 땅에서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쏟고 주께서 보여주시고 알려 주실 때 기쁨으로 사용하는 일에 힘을 냅니다.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과 시간과 가진 것을 사용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바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너만 믿냐? 너만 잘 났냐? 왜 너만 그렇게 유별나게 믿느냐?”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요, 그리스도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서 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가다가 중단하지 않습니다. 묵묵하게 주님을 향해서 뚜벅뚜벅 끝까지 걸어갑니다. 남이 욕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한 보상이 없다고 하여도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나만 일하는 것이 억울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셨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노라”이것이 바로 스스로 선택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삶의 핵심입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그 길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자신을 통해서 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 목적임과 동시에 그들도 자신처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복된 축복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절).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누군가는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털끝 하나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고,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보이고,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도와줄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일 때 우리는 과연 저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저 사람을 위해서 오래 참아야 하는가? 저런 친구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복잡하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망성이 있어서, 우리 안에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란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죄인이었던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야유와 회유와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 길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시니까 그렇게 사셨지 평범한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랐던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정도와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스스로 택한 고난의 길에서 이탈하거나 변절하거나 불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한 바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라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겠다는 결심이 있다면, 그 결심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은 의롭고 바른 것을 분별해서 선택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큰 의롭고 명예로운 길은 없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든” “스스로 선택해서 고난의 길을 가든” 그 모든 현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는 것이 은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듯이,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가장 높은 뛰어난 자리에 그리스도를 앉히시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라 고백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주간을 지낼 것이 아니라,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분”이 있다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십시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해서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주를 의지하고 그 길을 당당하게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웃에게, 세상에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은 담대한 삶이요, 구별된 삶이요, 매력적인 삶입니다. 그런 삶은 모든 경계와 구분을 허무는 삶이요, 의롭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삶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셔서 여러분들을 도우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고 이 땅 위에서 즐겨 고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선택적 고난의 의미
벧전 2장 18~25절 / 곽선희목사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저서 "Man for Himself"라고 하는 그 책에서 건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의 특징을 논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 요새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성격, 건강하지 못한 인격으로 인해서 많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성격은 네가지 특성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생산적 성향을 가졌다. 생산적 성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생산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 자체가 남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죽이는 것이 많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얼마나 남을 괴롭히는지... 이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려움에 내가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책임을 같이 지면서 특별히 상대방을 높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존경해서 그를 높이고 동시에 결과로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생산적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생산적 사고입니다. 생각이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볼 줄 알고 과거와 현재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줄 알고 또 주관적인 생각, 자기 생각에 집착을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에. 객관적 시각을 넉넉하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산적 사고이고, 또 하나는 생산적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행복 그 자체가 바로 창조력입니다. 요새는 창의력으로 산다는 말을 합니다. 창의력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마음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 창의력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산적 양심, 저는 오늘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양심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양심에 고통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당장 얼굴이 썩습니다. 몸도 비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정말 본의 아니게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양심이 훨훨 나는 것처럼 항상 자유로워야 합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 초연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바로 그러한 양심이 바로 생산적 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고통은 같은데 전혀 다른 두 가지 사람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을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는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는 이 책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비슷한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한 5개월 동안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제 노동 수용소는 땅에 있는 지옥입니다.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참 하나님께서 어찌하던 간에 그걸 한 번 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서 그냥 죽었으면 여러분을 못 볼 뻔하였는데... 어쨌든 참 기적 중의 기적으로 제가 살아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통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십시오.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여러분, 두고두고 생각할만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합니다. 오로지 고난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 또 하나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 그리고 의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고난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어떤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원칙적으로 기본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시장에 가보면 어머니들께서 아이들을 집에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겨우 걸어 다니는 세,네살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나와서 고생하는 것을 봅니다. '집에 떨어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 복잡한 곳에서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들고 그 복잡한 시장을 다니려니까... 가끔 보면 어머니가 또 쥐어박더라구요, 징징거린다고. 그래도 그냥 울면서 어머니를 쫓아다니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이 믿음이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어머니가 쥐어박아도 나를 사랑한다. 절대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저 어머니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끝까지 믿고 따라가면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여러분, Meaningful, Dispensational 그리고 Scenario의. 반드시 해피엔드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엄청난 아들을 나를 위하여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그래서 죄 사함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은사입니다. 모든 것들이 축복입니다. 철저하게 그렇게 믿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해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아디코스"라는 말은 unjust라는 뜻입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나의 실수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서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옆집 사람이 불조심하지 않아서 불이 붙으니까 그 집 붙으면서 우리 집까지 타버렸잖아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어서 뜻도 모르는,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로 맹랑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더구나 사업하시는 분들은 연쇄부도가 나서 어렵게 되는 분들이 참 많더라구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우니라.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원문대로는 카리스, 은혜롭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가?' 보지도 마십시오.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더 이상 묻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으십시오. 그리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또, '죄악이 있어서 고난 당하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인생은 추수입니다. 가만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도 심고 또 한편으로 거둡니다. 어제 심고 오늘 거두고, 오늘 심고 내일 거둡니다. 부모가 심고 자식이 거두고 여러분이 심고 자식이 거둡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까? 당신 눈에 피가 날 것입니다. 남을 속이셨습니까? 근사하게 속이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속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말 잘못 한 것, 말로 인한 실수, 부덕한 말, 부덕한 행동, 내가 심고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회개가 있을 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죄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은 가장 저질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른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제라도 회개의 길을 찾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니까 '의를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면'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를 대개 다 보셨을 것입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이래서 정말 애매하지 않습니까?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바로 그 말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로마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한번씩 서봅니다. 여기 서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베드로의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선택적입니다. 온전히 선택적입니다.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선택적으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죄 없이, 죄 없이 당하였고 둘째, 입에 괘사가 없었습니다. 아무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이 없어야 됩니다. 한마디 변명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신 욕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당하되 대신 욕하지도 않고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짓궂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하나, "이놈들 두고보자. 심판 날에 지옥으로 보내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뜻이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고 괘사를 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고 오직 공의로운 하나님께 다 맡기고 즐겁게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입니다.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고난의 결과도 압니다. 고난의 필요도 압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을 어떤 의미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를 통해서 날마다 새로운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람도 아니오 손이 짧음도 아니오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 오직 사랑 가운데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쳐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고난을 주시고, 은사로 주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주님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새롭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확인하면서 늘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인생에 홈런을 쳐라
벧전 2장 18~25절 / 오정호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삼진아웃(三振아웃/Struck out)아웃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에 홈런(home run)을 치기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존게임(Survival game)의 현장으로 부름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흥게임(Revival Game)의 현장으로 부름받은 택함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이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대로 홈런의 인생을 살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지, 동료들과 이웃 역시 영광스런 홈런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먼저 허락하신 놀라운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홈런을 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홈런을 쳐야 합니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갈 때에 투수가 직구만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씩은 변화구를 던집니다. 그때에도 공에서 시선을 집중하고 타이밍에 맞게 공을 쳐야 합니다. 만약 직구로 오는 것은 직구라서 쳐 내지 못하고, 변화구는 변화구라서 쳐내지 못하고, 빠른 공은 빨라서, 느리면 느린공이라서 못치고, 그것은 올바른 선수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하므로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 뿐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고 했습니다. 관용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지시를 받을 때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평탄한 길만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웅덩이가 있기도 하고, 깊은 계곡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햇볕이 쨍쨍 쬐는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따뜻한 날도 있고, 폭풍이 몰아치는 그런 날들도 전개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봄날 같은 좋은 날만 예수 믿는 자답게 살아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위협을 가한 사람을 만날 때도 예수 믿는 자의 품격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살아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어려울 때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는 주님을 더 잘 바라보고, 주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순경(順境)만 아니라 역경(逆境)에서도 우리는 홈런을 치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홈런치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서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을 따르므로 홈런을 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승리자이신 주님을 따르므로 홈런을 칠 수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모범을 깊이 생각할 때 말할 수 없는 용기와 담력을 얻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예수님께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서 절대로 공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적당히 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어떠한 순간이든지 주님께 내 마음의 초점을 계속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앞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 주님의 손자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창으로 찔리신 허리의 사랑의 자국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길을 묵묵히 걷게 하기 위해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기만 하면 짐이 좀 무겁다고 할지라도 그 짐의 무게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목적과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고난을 남김없이 당하신 것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에 우리가 마음껏 반응하는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내 마음에, 내 삶에 새겨내는 작업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특권이며, 영광스런 상급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고전11:1) 십자가의 사랑은 승리의 증표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은 우리 모두를 오늘도 강건하게 세우는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 삶에 충만하게 부은바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을 성실하게 따르기로 결단하십니까?
주님께 온전히 위탁하십시오.
승리자이신 주님께 위탁함으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영원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절) 우리 인생은 연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적지를 잡거나 스스로 우리 삶을 개척해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의로운 삶에 우리는 무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사랑의 영성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와 양은 관계를 규정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인생방황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우리 영혼의 목자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고백하는 자는 치명적인 방황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감독(Seer)이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감독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죄의 화살을 주님은 온몸으로 막아 내셨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행복을 주시려고, 용서를 주시려고 감독되신 주님은 온몸을 던져서 갈보리를 오르시고 십자가위에서 못 박힌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감독이 되셔서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고, 우리의 과거의 슬픔과 아픔을 아시고, 몸을 던져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로 삼으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신 영원한 감독이신 우리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시간을 맡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내 인생의 핸들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
주님을 따르는 올바른 태도
가장 근본적인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안에 머물러(Stay, dwell, live)야 합니다. 이탈하지 마십시오. 의도적으로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궤도를 이탈하는 사람은 주의 보호하심을 덧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 능력 안에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파이프라인을 펼쳐서 우리의 목자와 감독되시는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fellowship)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언제 묵상했는지? 개인적으로 경건의 생활을 언제 가졌는지? 삶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오직 주님의 능력을 갈구 했는지 우리자신을 재조직(Reorganization)해야 합니다.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또 다른 홈런인생이 많이 나타나도록 섬겨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통해,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통해 우리 주위에서 아직까지도 방황하는 많은 이웃들. 삼진 아웃이라고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인생에 낙이 없다고, 미래가 없다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 좌절과 포기를 다시 역전을 시키셔서 홈런인생으로 만드시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새힘과 결단을 공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홈런인생으로 영광스럽게 주님께 쓰임받읍시다!
아름다운 순종
벧전 2장 18~25절 / 반태효목사
살아가다보면 꿈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사건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50년이라는 희년의 해에 남북의 화해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일을 그동안 못해왔던 것에 대해서 허탈한 기분도 듭니다. 그동안 막혀있던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막혀있는 것이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회적인 장벽, 신분의 장벽이 높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노예제도는 당시의 성도들이 견디기 힘들어 하던 큰 문제였습니다. 당시 노예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던 로마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때문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무려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구의 1/3이 노예였던 셈입니다. 노예는 노동을 해서 로마를 먹여 살려야 했던 계급이었지만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말하는 노새가 있고, 말하지 못하는 노새가 있다’라며 노예를 ‘말하는 노새’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런 권리 없이 살아야 했던 노예에게는 주인의 생각이 곧 법으로 통용되었습니다.
2천년 전 로마의 노예제도
초대교회에도 노예출신이 많았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성도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노예거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이 성경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때문에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전도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주인은 바울이 잘 아는 사람 빌레몬이었습니다. 이 빌레몬의 가정은 골로새교회가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되었다. 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다. 이 사람이 당신을 대신해서 나를 잘 섬겨주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20절부터 24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했습니다.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제는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종살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종으로서 그 자리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노예나 종은 일을 아무리 잘해도 칭찬을 받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잘못할 때는 큰일날듯이 혼나게 되지만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특별히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2천년 전에도 어떤 주인들은 노예를 잘 돌보고, 자녀의 교육을 맡기기도 하고, 때가 되면 자유를 주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까다로운 주인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주인의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종이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나아와서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종이 병들었다고 찾아온 이 백부장에게 감동하며 병을 고쳐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주인은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 종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많은 날을 누군가를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인을 만났을 때 성경은 ‘두려운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말합니다. 잘해주는 주인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합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하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항의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항거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지 않을 때에도 곱게 순종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의 이 사환에 대한 교훈은 우리를 향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형편 없는 사람을 만날 때도 많고,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맞서고 싶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좋은 마음으로 순복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주로 일 때문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비롯됩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에서는 곧잘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고도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는 아픔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섬겨야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까다로운 주인을 섬길 때 애매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미워하고, 비난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미워하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대접받고 공정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서는 안됩니다.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에 있어서도 순복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것은 상황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방이 까다롭든지 관용이 있는 사람이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대우하는 것에 대해서 일일이 반응하면 결국에 망가지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나쁘게 대우하는 사람에게 우리 또한 나쁘게 대우하고 좋은 사람에게 좋게 반응하면 공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렇게 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이 망가지게 됩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비록 타락한 제사장일지라도 순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불의한 권력이라할지라도 끝까지 순복합니다. 다윗이 순복해야 했던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고 세움받은 사울을 대신할 왕이었지만 끝까지 사울에게 순복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주인의 자리에 있을 때도 아래 사람에게 관용하고 잘 대해야 하고, 종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순복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아름답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3종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가 ‘죄로 인한 고난’입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이것에 해당합니다. 고난의 대부분은 우리의 죄나 연약함 때문에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미움받는 것은 자기 탓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옛말에 ‘매도 벌어서 맞고, 욕도 벌어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질병도 그렇다고 합니다. 병의 대부분은 환자 본인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바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다 먹는 그런 절제 없는 생활에서 질병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난을 철저하게 회개하면 이 고난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죄로인한 고난과 애매한 고난
두번째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매한 고난의 실상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뿐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억울하고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구 소련의 유명한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유년시절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반체제 인사로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유대교 의사로부터 병으로 고생할 때 정성껏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저항감과 억울함에 젖어있던 솔제니친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온 의사는 ‘이 세상에서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의식속에 있는 그의 일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에게 원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상대방에게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정결케 하십시오.
세번째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을 받기는 커녕 고난으로 돌아오는 경우입니다. 사랑과 선을 베풀었는데 배신과 부당함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경우도 자녀로부터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는 것은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고난은 자진해서 당하는 고난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렇게 당하는 고난이 어리석은 고난은 아닙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됨이며 복을 쌓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사랑한 것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상으로 복주십니다.
우리가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순복할 때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견고하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 때문에 고난당하는 일, 믿음을 지키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이 필요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 특별히 어려워 보이는 길을 가려는데 누군가 앞서 간 사람이 있으면 안심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간 발자취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일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을 좇아가면 그 길이 좁고, 어렵고, 불가능한 길처럼 보여도 그곳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주를 따라 섬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난받고 특별히 어려울 때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사실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라고는 없으셨습니다. 정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며 아름답게 사셨던 분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그는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입으로조차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힘이 없다면 입술로라도 죄를 짓고맙니다. 주인한테 맞서지는 못해도 욕설을 퍼붓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입술로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매맞는 일보다 더 힘든 것이 모욕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은 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대놓고도 말고 뒤에서 그러지도 마십시오. 또 위협하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두고 보자’라고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두고 보자’라고 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때까지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실 때 욕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범
유대인들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너무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자 ‘하나님 제발 저들을 보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력적인 기도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공의의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날 그날이 올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고난 당할 때 믿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는 순종하고 믿는 것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진정한 순종과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억울하고 고난당한 일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도 죄인이었습니다. 남에게 억울한 일을 가하고, 부당한 일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치유하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시켜서도 아니고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해서 고난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고난을 택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믿음을 지키는 데도 고난을 당하는 것에는 선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난은 주님 앞에 갈 때 상급과 축복이 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우리도 전에는 죄를 짓고 남에게 억울한 일을 했지만 주께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고 십자가 옆에 있던 백부장은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메달렸던 죄수는 ‘주여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복수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며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를 대적하던 이들이 돌아와 주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십니다. 원망과 복수와 저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목자되고 감독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