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게임 / 이환
공은 함부로 날뛰는 짐승 같아서
성질머리를 살살 달래주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 후려친다면
빗나가기 십상 이럴 땐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넘겨줘야 한다
아무 때나 라켓을 휘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슬쩍 커트만 찔러줘도 된다
있는 힘껏 스매시를 날리거나
과감한 드라이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고수의 테크닉이란 그런 것
공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와 코스를 생각하며
포핸드와 백핸드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공은 나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비틀거리는 순간 금방 알아차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승패를 가리는 게임의 세계에서
막판엔 누구나 한방에 주저앉는다
한방에 메달을 거머쥐는 자가 있고
한방에 낙향하는 자가 있다
뼈아픈 실책이 평생을 발목잡기도 한다
공이 날아온다
어떤 공은
너무 난폭하고 절망적이어서
라켓을 삼켜버린다
공은 라켓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해독되지 않는 문장』, 북인, 2022.
감상 –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겠지만 탁구에도 하수와 고수가 있다. 떨어지는 공 따라 몸을 옆으로 활처럼 휘게 한 다음에, 몸의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허리, 어깨, 팔, 손목의 회전과 직진하는 힘까지 보태어 공을 타격시킬 것 같으면 공은 거짓말처럼 탁구대 모서리에 맞고 상대방 라켓을 피해 지나간다. 포핸드 드라이브 고수의 아름다운 동작이다. 빠져나가는 공을 잰걸음으로 따라가서 커트로 속도를 줄여 보내거나 맞드라이브로 받아치는 이도 물론 고수다. 뜻대로 타격이 되지 않고 뜻대로 수비가 되지 않아서 머리를 쥐어짜고 자책의 탄성을 지르는 것도 고수의 품위를 해치진 않는다.
하수와 고수로 나누는 개인 기량의 절대적 기준점은 사실 없다. 본인 목표 지점에 조금씩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스스로 하수로 자처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이환 시인이 꼽는 고수의 기준도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다양한 기술을 장착하고 상대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해야 고수다.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게 또한 고수의 길이다.
이환 시인의 ‘핑퐁게임’은 고수와 하수의 구별보다는 “막판엔 누구나 한방에 주저앉는다”는 시구에 방점이 있는 걸로 보인다. 탁구 세계도, 탁구를 닮은 인생에서도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삶도 없다. 의욕만큼 되기도 하고 안 될 때는 더 많다. 당장의 승부는 치열하지만 내일은 기울 수 있다. 저마다의 인생이 죽음에 닿아 있듯이 몸의 반응 속도는 떨어지고 끝내 라켓을 놓아야 하는 날이 오는 것도 분명하다.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사람에게 고수의 향이 묻어날 것도 같다.
“공은 라켓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시구도 탁구 명언에 넣고 싶다. 사람 몸의 연장인 라켓은 마지막까지 주인을 따르려고 할지 모르지만 공은 그렇지 않다. 공은 뜻대로 되지 않는 운수와도 같다. 자신의 의지대로 공을 때리고 공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은 뜨거나, 가라앉거나, 맴돌거나, 깨지거나, 심지어 사라지기까지 한다. 때로 빗맞아 굴러가면서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그런 공을 원망할 바엔 경배하는 것이 탁구인의 정신 건강에 도움 될 것이다.
언어라는 공을 굴리는 이환 시인은 탁구도 즐기는 것으로 안다. 언제 일합을 겨룰 기회도 있었다. 대전역 인근에서 막걸리 두어 병 쓰러뜨린 후 탁구장을 찾아 헤매다가 다행히 탁구장을 찾지 못했다. 내가 다행이란 얘기는 아니다. 시집을 읽거나 감상글을 쓰는 중에도 내 왼손은 루프 드라이브를 연습하고 있다. 물론 나는 왼손잡이는 아니다. 오른손이 보고 익히라는 뜻이다. (이동훈)
첫댓글 탁구 엄청 좋아했는데
기발한 착상과 표현입니다.
멋진 시 잘 감상했습니다.
예, 나중에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재미난 해설 그리고 시!
잘 읽었어요. 동훈 시인,
나는 왼손이라서 어릴 적엔 무척 애를 먹곤하였다.
지금은 거의 양손잡이(탁구는 오른손?)가 되었지만...
왼손 컴플렉스!
이것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글과 더불어 살아간다.
컴플렉스도 때론 어떤 위안이 되는 구석이 있는가 보다...
왼손 탁구가 승률이 훨씬 높을 텐데요...양손 다 쓰는 것도 드문데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