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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의正義 실현을 위해 새로운 정의定義를”
은폐와 회피를 넘어 제노사이드를 묻다
이 책은 제노사이드의 정의를 새롭게 구성하고, 이를 현대 사회의 극단적 대량 폭력 문제와 연결한 중요한 연구서다. 지은이는 다양한 이론과 사례 분석을 바탕으로 제노사이드는 단순히 물리적 대량 학살을 의미하지 않으며, 민간인 집단에 대한 폭력적 파괴 행위가 사회적ㆍ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제노사이드의 정의와 범위, 그리고 메커니즘을 법적 차원을 넘어 사회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즉, 제노사이드의 복합적 성격을 분석하여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고 방지 방안을 종합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저자 소개
강성현
역사사회학자.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사회융합학부 사회학전공 부교수.
한국과 동아시아의 사상통제와 전향, 공안, 법과 폭력, 한국전쟁, 과거청산,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전쟁범죄, 글로벌 냉전문화와 ‘냉전 아시아’, 그리고 국내외 제노사이드 이론과 사례에 대해 연구해왔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연구센터장,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회 회장, 한국냉전학회 이사, 《황해문화》 편집위원 등을 맡고 연구와 학문적 실천에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작은 ‘한국전쟁’들: 평화를 위한 비주얼 히스토리》(2021),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2020, 임종국상 수상),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공저, 2016),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2020)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삶과 죽음을 위한 연구》(2009)가 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폭력 비판에서 제노사이드 연구로
1. 폭력과 제노사이드
폭력이란|합법적 폭력과 정당한 폭력|법의 폭력성|반-폭력의 상상력|극단적 대량 폭력으로서 제노사이드
2. 폭력 연구의 계보
베버와 폭력 독점체로서 국가|갈퉁과 구조적·문화적 폭력|부르디외와 상징적 폭력|폭력의 사회학|현대성과 폭력
3. 망각에서 응답으로: 제노사이드 연구의 확장과 사회학
제노사이드 연구의 선구자들|사회과학과 제노사이드 연구|법학과 제노사이드 연구|제노사이드 연구가 봉착한 한계들
제2장 제노사이드의 탄생
1. ‘이름 없는 범죄’를 대면하고 응답하다: 라파엘 렘킨의 활동과 연구
생존을 넘어 운명을 자각하다|법과 언어로 미국과 유엔을 설득하다|“삶의 본질적인 토대들에 대한 파괴”
2. 국제법상의 범죄로 이를 방지·처벌해야 한다: 협약의 내용과 한계
3. 밀고 당기다가 타협하다: 협약의 쟁점과 논쟁
정치적 집단 포함 여부|제노사이드의 범위와 규모|‘의도’의 입증|제노사이드 방지와 처벌 방법|협약 논쟁의 의미
제3장 학계의 제노사이드 논쟁과 비판
1. 물리적인 대량 학살로 축소되다: 제노사이드 정의 논쟁의 쟁점과 비판
제노사이드를 정의한 첫 사회학자, 대드리안|협약 정의의 활용과 극복 사이에서, 페인과 초크·조나슨|초크·조나슨과 차니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들
2. 어디까지가 제노사이드인가: 제노사이드 범위 논쟁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유일무이한 홀로코스트|홀로코스트 유일무이성의 상대화|‘민족 청소’|‘민족 청소’의 국제법 용법과 제노사이드|‘민족 청소’와 제노사이드에 대한 학술 논쟁|제노사이드와 ‘사이드’들|폴리티사이드|에쓰노사이드|젠더사이드|‘사이드’들
3. 제노사이드 메커니즘 연구로
구조적 접근과 메커니즘 연구|사회심리적 메커니즘 연구|단계적 메커니즘 연구
제4장 제노사이드 이론의 사회학적 재구성
1. 의도: 제노사이드 행위 의도와 사회적 관계의 사회학
의도에 대한 법적 접근의 한계|제노사이드 행위의 ‘의도’에서 사회적 갈등의 ‘구조’ 이해로
2. 집단: 민간인 사회 집단과 사회학적 접근의 가능성
집단에 대한 법적 접근의 한계|“국민·민족·인종·종교 집단”에서 민간인 사회 집단으로
3. 파괴: 사회적 파괴이자 전쟁의 한 형태
집단의 사회적 파괴|제노사이드와 전쟁 간의 관계
제5장 제노사이드와 한국전쟁 전후 대량 학살
1. 제노사이드 정의와 메커니즘의 재구성
다시, 제노사이드란 무엇인가|제노사이드 메커니즘의 재구성
2. 제노사이드로 구성한 한국전쟁 전후 대량 학살
정부 수립 및 한국전쟁 전후 대량 학살|무장 권력 조직들의 조직화|민간인 사회 집단들의 타자화|파괴와 부정
에필로그
“전시에는 사람을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뉴라이트 김광동’|진실 규명이 아닌 부역자 심판기관?|제노사이드 범죄로 기소당한 이스라엘|76년 추방, 57년 점령, 17년 봉쇄|제노사이드 범죄에 대한 국가 책임과 가해자 처벌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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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합법적인 것의 폭력성은 저항권의 행사나 시민 불복종이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혁명적인 상황에서는 더 강렬하게 드러난다. 혁명은 기존 법질서를 총체적으로 전복하고 새로운 헌법을 수립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26쪽)
진압과 학살이 단지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폭력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법과 결합되어 전개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28쪽)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지구 계엄 선포에 관한 건’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대통령령 제31호로 시행됐다. 놀라운 점은 당시 계엄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 절차의 기본이 없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 공간에서 군대는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킨 채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30쪽)
한국의 기존 연구에서는 제노사이드를 국가폭력(범죄)에 의한 대량 학살로 논의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일반적인 집단 학살 (대량 학살)과 구분되는 제노사이드의 핵심적인 특징을 ‘국가 범죄’라는 점에서 찾는다.(35쪽)
제노사이드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의 결의 이후 “문명세계가 정죄하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확인된 이래 반인륜적인 ‘핵심 범죄core crime’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49쪽)
현재 제노사이드 정의에 대한 이해도 법적인 해석만이 유효한 상황이다. 1990년대 초반 역사학, 정치과학, 사회과학, 법학 등 여러 분과의 학자들이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의 정의와 법적인 용법을 비판하는 ‘정의 논쟁definition debate’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 과정에서 제노사이드 개념이 명확해졌다기보다는 서로를 설득시키지 못한 채 군웅할거식 주장들만 남게 되었다.(57쪽)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 불리는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을 때‘ 제노사이드’라는 용어가 존재한 건 아니었다. 후대에 그렇게 붙여진 것이었다.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라파엘 렘킨이라는 법률가에 의해 만들어졌다.(63쪽)
그는 만행 범죄crimes of barbarity와 반달리즘 범죄crimes of vandalism를 국제법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새로운 국제 규정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야만적 행위는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정치적·종교적 동기 등) 민족·종교·사회 집단에 대한 미리 계획된 파괴를, 반달리즘은 이들 집단의 독특한 특성을 담은 예술과 문화의 파괴”를 의미한다.(69쪽)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뉘른베르크 검사들은…논고에서 제노사이드 용어가 간혹 등장하기는 했지만, 전쟁 중의 행위에만 제한되는 분위기로 쏠렸다.(79쪽)
제노사이드 용어를 문자 그대로 인종 학살 혹은 종족 학살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렘킨은 제노사이드가 한 국민이나 민족 집단에 대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제노사이드는 “국민이나 민족 집단 자체를 절멸할 목적으로 그 집단 구성원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토대들을 파괴하기 위해 시도되는 다양한 행위들로 이루어진 공조 가능한 계획”을 의미한다.(88쪽)
렘킨의 제노사이드 개념은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토대들에 대한 파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렘킨은 제노사이드를 통해 집단의 모든 성원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같은 물리적 파괴만이 아니라 집단의 삶의 토대들과 사회적 양식들에 대한 사회적 파괴를 포함해 정의했다.(91쪽)
제노사이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실정법이 만들어지면, 이를 집행할 수있는 효과적이고 중립적인 집행기관이 설립되는 것이 논리적이다. 제노사이드 협약은 각국의 국내 법정, 국제형사법정, 국제사법재판소의 3개 사법 기관과 유엔의 관련 기관 등 4개 기관을 집행기관으로 상정하고 있다.(97쪽)
안전보장이 사회가 제노사이드를 방지하는 기관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정치적 의지에 달려있다.…문제는 그 전제로 체약국의 청원(요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국가만이 청원할 수 있고, 개인이나 국내·국제 NGO에게는 청원권이 없다.(100쪽)
협약하에서 제노사이드 범죄는 파괴 결과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반드시 파괴하려는 의도가 입증되어야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 집단에 대한 절멸조차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할 경우 제노사이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107쪽)
차니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적으로 보이는 군사력에 대한 군사행동 중이 아닐 때 상당수의 인간이 대량 학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일반적이고 범용적인” 서술을 통해 ‘집단에 대한 파괴 행위’라는 렘킨의 시각을 반영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제노사이드를 더욱 물리적인 폭력으로 축소시켰다.(122쪽)
라파엘 렘킨이 나치의‘ 이름 없는 범죄’를 목도하면서‘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코스트는 제노사이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즉, 홀로코스트의 파괴적 특성이 보여준 다양한 과정, 기술, 방법들이 매우 특수하고 전례가 없다는 의미에서 홀로코스트는 제노사이드 연속체의 최대치이다.(134쪽)
강성현에 따르면 국가 건설과 전쟁(내전), 억압적 국가기구의 형성이라는 정치사회적 구조의 여러 조건들 속에서 제주도 지역 주민이 ‘빨갱이 종자’(인종화)로 비인간화·젠더화되었고, 그들에 대한 공격성 투사로 인해 ‘복종 범죄’의 시스템 안에서 학살 심성이 내면화된 결과 5개월 동안 초토화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165쪽)
제노사이드를 의도적 행위로 정의하는 접근들, 특히 법적인 접근은 행위의 의도를 판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의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객관적인 증거로 입증하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결국 현실에서 펼쳐진 명백한 제노사이드적 결과를 두고도 의도를 입증하지 못해 면죄부를 주게 된다.(180쪽)
법적 접근은 집단 그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그것에 선행하는 네 개의 형용사, 즉 “국민적·민족적·인종적·종교적”이라는 목록을 확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피해자가 명확해야 한다는 법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191쪽)
가해자들은 특정 국적, 민족성, 계급, 정치 집단, 종교 집단, 여타의 사회적 범주들을 그들의 적으로 확인한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과정은 이런 특정 범주들의 목록에 의해 단순히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195쪽)
한 집단을 파괴하고 학살한다는 것은 집단 성원들의 생명을 생물학적으로 앗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집단의 힘, 공통의 삶의 방식과 제도의 파괴를 포함하는 것이다.(203쪽)
제노사이드 행위는 무장 권력 조직들이 민간인 사회 집단들을 적으로 다루거나, 무장 권력 조직들이 그 집단들의 성원으로 간주한 개인들에 대해 살해와 폭력, 강제력을 이용해 그 집단들이 실제 가지고 있거나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회적 힘을 파괴하려는 행위이다.(214쪽)
최호근은 “국가나 그에 준하는 권력체의 대리인들이 국민·민족·인종·종교의 차이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 또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성·건강·지역상의 차이를 이유로 특정 집단을 절멸하려는 의도에서 그 구성원 가운데 상당 부분 이상을 계획적·조직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정의한다. 이에 입각해 그는…제주 4·3 학살이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한다.(224쪽)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그들 편인지 구분하고 분류하는 것이 타자화의 시작이다. 제노사이드의 경우 타자화는 단순히 배제하고 표적 집단을 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적 의무의 세계’에 대한 경계를 규정한다.(243쪽)
제노사이드 범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는 1994년 르완다 투치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선동하고 학살을 지시한 타바 시장 장 폴 아카예수였다.(313쪽)
제노사이드 협약이 만들어지면서 제노사이드 정의는 법적 틀에 갇혀버렸다. 이를 비판하는 학술적인 논쟁도 결과적으로 제노사이드를 물리적인 대량 학살로 축소시켜버렸다. 어디까지가 제노사이드인지 극심한 범위 논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이드’들로 분할되기까지 했다.(320쪽)
출판사 서평
국제협약의 한계와 새로운 정의를 향한 도전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개념은 라파엘 렘킨이 처음 정의한 것으로, 1948년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을 통해 국제법상 금지되고 처벌 가능한 범죄로 자리 잡았다. 한국 정부는 1950년 한국전쟁 중 이 협약에 가입하였고, 외교부는 이를 ‘집단살해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으로 번역했다. 당시에는 이승만 정권이 ‘부역자 학살’과 같은 극단적 대량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것이 협약에서 정의하는 제노사이드에 해당할 수 있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협약 제2조는 제노사이드를 특정 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행해지는 다양한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의도성’ 입증에 있다. 가해자는 전쟁 상황이나 비상사태를 이유로 자신들의 의도를 부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국제사회는 제노사이드 범죄를 처벌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이 책은 라파엘 렘킨의 연구와 활동,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의 탄생 과정, 그리고 그 한계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제노사이드의 정의를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국내외 제노사이드 이론과 다양한 사례를 깊이 연구해온 지은이는 제노사이드가 단순히 법적 틀에 갇혀서는 안 되며, 사회적 파괴와 그에 따른 폭력의 구조적 맥락에서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이후 서구 학계에서 이루어진 정의 논쟁definition debate은 제노사이드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민족 청소’ 같은 개념이나 폴리티사이드, 에쓰노사이드, 젠더사이드 등 다양한 하위 개념들이 등장하면서 학문적으로 제노사이드의 정의는 혼란스러워졌다. 이 책은 이러한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단순 대량 학살이 아닌 사회적 파괴”
제노사이드는 단순히 살해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문화, 제도, 생활 방식을 파괴하는 사회적 파괴의 의미를 지닌다. 유엔 협약이 제노사이드를 물리적 파괴로만 규정하는 한계 때문에, 지은이는 협약을 넘어선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제노사이드는 단순한 전쟁범죄가 아니라, 폭력과 파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현상임을 지은이는 설명하며, 그 폭력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지은이는 마틴 쇼를 따라 제노사이드가 민간인 사회 집단을 파괴하려는 무장 권력 조직과 이에 저항하는 사회 집단 간의 폭력적 사회 갈등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노사이드 행위가 무장 권력 조직들이 민간인 사회 집단들을 적으로 다루거나, 무장 권력 조직들이 그 집단들의 성원으로 간주한 개인들에 대해 살해와 폭력, 강제력을 이용해 그 집단들이 실제 가지고 있거나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회적 힘을 파괴하려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제노사이드 메커니즘 연구를 통해서 사회적 파괴와 물리적 폭력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제노사이드는 단순히 살해 행위 이상의 것을 포함하며, 이는 사회적 파괴를 통해 집단의 정체성과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 4·3 사건 등 한국의 대량 학살 다시 보기
지은이는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전후의 대량 학살을 새로운 제노사이드 정의와 메커니즘의 차원에서 재해석한다. 한국에서는 제노사이드를 ‘국가폭력에 의한 대량 학살’로 인식하고 논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일반적인 집단 학살’과 구분되는 제노사이드의 핵심적인 특징을 ‘국가 범죄’라는 점에서 찾았다.
지은이는 앞선 논의들과 차별적으로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예비검속 사건, 형무소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부역 혐의 사건, 군경토벌 관련 사건, 미군 사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으로 범주화된 작전·처형·보복의 성격을 갖는 대량 죽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연속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대량 학살 사건들은 국가 및 전쟁 형성이라는 두 국면과 맞물려 발생했던 하나의 제노사이드 내 여러 ‘에피소드적 사건’들이라 주장하고 있다.
지은이는 가해 무장 권력 집단들의 조직화, 표적이 된 민간인 사회 집단들에 대한 타자화, 그리고 총체적 파괴와 부정 단계에서 작동한 정치·사회심리적 메커니즘들로 구분해 한국의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구체적으로는 무장 권력 집단들의 조직화에서 이데올로기, 내부집단의 조직화, 상호 보복과 광기화라는 단계로, 민간인 사회 집단들의 타자화에서 분류와 낙인, 상징화, 비인간화와 젠더 단계로, 파괴와 부정에서는 내전 상태와 국지적 학살, 전면전 개시와 ‘불순분자’ 처리, 미군의 피란민 인식과 대량 폭력, ‘부역자 처리’와 극단적인 대량 폭력, 부정으로 구분해 역사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의도’ 입증 여부, 폭력과 ‘학살’의 의미를 꼼꼼히 따지며 이 과정에서 이러한 폭력이 발생하기 전 사회적 갈등이 어떻게 폭력으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전시 민간인 학살은 불가피하다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제노사이드 범죄의 현대적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는 하마스와 연결된 잠재적 부역자라는 인식을 퍼뜨리거나 타자화해왔다. 그리고 현 군사작전이 대테러 진압 작전이고, 그에 따른 팔레스타인 민간인·피란민 대량 학살과 대규모 사회적 파괴를 ‘부수적 피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지은이는 제노사이드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고, 이러한 상황이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앞으로 빈번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은이는 뉴라이트인 김광동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법 취지와 상반되게 전시에 민간인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발언하는 것은 불법성 차원을 넘어서 국가 및 국가 후원에 의한 가해자 단체들의 부역자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의 책임을 회피하고, 폭력적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시도와 유사하다고 강조한다. 이 두 사례는 모두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며, 제노사이드 범죄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가 제노사이드 발생을 막기 위해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모색한다.
지은이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으며, “우리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에 응답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