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광윤, 그를 만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광양에서 급히 서울로 인터뷰 장소가 바뀌었고, 교통사정으로 인해 1시간가량 인터뷰 시간이 지연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치고 만난 그의 모습은 참 반가웠다. 미소로 다가오는 그로 인해 기다림의 시간은 씻은 듯 날아가 버렸다.
ⓒ 정선녀
12월이 시작되는 첫날,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어둠 사이로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걸어오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FA컵 결승전 이틀 전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시작한 인터뷰는 바쁜 시간을 쪼개 나타난 선수에 대한 배려로 진행되었다.
12월이 시작되는 첫날,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어둠 사이로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걸어오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FA컵 결승전 이틀 전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시작한 인터뷰는 바쁜 시간을 쪼개 나타난 선수에 대한 배려로 진행되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 ‘가족은 나에게 1순위예요.’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 이지만 그는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운동에 무척이나 소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에 새로 생긴 축구부에 들어갔다. 뛰는 게 좋았고, 공을 차는 게 좋았다. 공차는 시간은 그에게 행복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참 좋아했어요. 특히 축구를 좋아했죠. 초등학교를 다니다 학교에 축구부가 생겨서 제가 축구부에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솔직히 축구를 안했어도 다른 운동을 했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유난히도 빨랐거든요.”
“아버지가 많이 반대를 하셨죠. 아버지도 운동을 했고, 삼촌도 야구를 해서 힘든걸 알다보니까 그길로 저를 들이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 힘든걸 뭐하러하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걸 원했고, 많이 응원해주셨어요. 지금도 통화하면 항상 ‘너를 키워오면서 축구를 참 잘 시킨 것 같다, 네가 좋아하는 걸 정말 잘 시켰다.’라는 말을 항상 하세요.”
ⓒ 정선녀
축구가 그저 좋았던 그, 가족은 그런 그를 배려했다. 힘들어 할 모습을 그리며 미리부터 반대를 했던 아버지는 현재 그의 제일 큰 팬이자 스승이자 가족이다.
“난 다시 태어나도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제 위로 6살차이 나는 형이 있어요. 형이 있는데도 온통 관심은 저였어요. 저를 많이 챙기셨죠. 부모님은 제가 운동하는데 만 신경을 쓰고, 뒷바라지는 모두 부모님이 하길 원하셨잖아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이죠.”
그는 부모님들 덕에 행복을 유지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 부모님의 자식으로 또 태어나고 싶다는 그에게 가족은 소중한 첫 번째 보물이다.
자신감이 가득했던 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공부가 아닌 운동을 하던 그는 힘든 줄 몰랐다. 그저 그때를 회상하면 힘들다는 말보다 즐거웠다는 말을 먼저 내 뱉는 그이다.
“어릴 때 공부는 거의 등한시 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에 운동을 했으니까, 수업을 거의 다 했어요.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잘 안나갔어요. 하지만 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웃음)”
그 시절의 그는 유명했다. 이름만큼이나 외모도 유명했고, 실력 또한 출중했기에 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최고를 달렸다.
어릴 적, 게임을 뛰었던 에피소드를 묻는 질문에 “이기면 다같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거고, 지면 말없이 사라지는 거죠. 그게 에피소드인데요.”라는 허망한 대답을 해온 그는 동료들에게 있어 썰렁맨으로 통한다.
“정말 유난히도 웃긴 동료들이 진짜 많은 것 같아요. 운동을 하다보면 분위기 메이커가 꼭 한 두 명씩 있잖아요. 나도 웃기고 싶은데, 친구들은 다 썰렁하다고 해요. 대학때도 (최)성국이랑 (김)정우랑 같이 다니며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너는 웃기려고 하지마. 너는 항상 썰렁해.’라고 했어요. 친구들이 저보다 웃기다 보니 정말 많이 듣는 소리였죠.(웃음)”
웃음을 주기보다 많이 웃었던 어린 시절, 그는 청소년 대표로 활약하며 학교의 떠오르는 영웅이었다. 인생이 좌우되는 대학과 프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 그의 결정에 힘을 보태준 은사님이 한분 계셨다. 은사님은 그에게 있어 아직도 힘을 주는 존재이다.
ⓒ 서영창
“김일섭 선생님은 제게 너무 힘이 되어주는 분이세요. 지금 초당대학교 감독을 하고 계세요. 제가 전화를 먼저 못해도 먼저 전화 해주셔서는 ‘넌 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해라.’ 라고 지금도 매일같이 그런 말씀을 해주세요. 고등학교 때부터 참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고등학교 때는 감독이 아니라 코치 선생님이었어요. 감독 선생님은 프로가라고 했는데, 코치선생님이 감독 선생님이랑 싸우면서까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도록 도와주셨어요. 정말 내 편에 서주셨죠. 김일섭 선생님을 만난 게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칭찬에 제가 더 잘해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해, 그는 프로가 아닌 대학을 택했다. 고려대학교라는 명문대에 입학하고 그는 또 축구계에 이름을 알렸다. 주광윤이라는 세 글자를.
고려대학교, 무의식속에 세겨진 이름.
왜 고려대학교냐고 묻는다면 그는 무조건 당연했다고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고려대학교를 오는 건 스스로 어릴적부터 당연하게 여겨온 마인드였다. 그 마인드가 그를 고려대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대에서 뛰고 있었어요. 아마 한참 선배들과 이란에서 게임을 할 때였죠. 이란에서 수능도 보고 그렇게 지내면서, (이)천수형한테 고려대학교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중학교 은사님도 고려대학교를 나오신 분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고려대학교라는 게 뇌리에 박혀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내가 머릿속에 고려대학교를 담고 있었죠. 그리고 축구하면 무조건 고대 가야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 권민정
“하지만 아버님은 프로로 가길 원하셨어요. 어른들은 대학이라는 걸 우선시한다는 풍토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미래를 봐주신 거죠. 하지만 아들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 주셨어요. 그래서 결국 저는 프로가 아닌 대학을 택했어요.”
그에게 있어 고려대학교는 운명이었다. 가고 싶은 대학이 아닌, 무조건 함께 할 이름이었다. 고려대학교 주광윤, 그는 그렇게 고려대학교 학생이 되었다.
대학에 대한 추억을 만들기 전부터 그는 대학생으로서의 학교생활을 만끽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고려대학교라는 존재는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었다.
“고려대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커요. 고려대학교는 내가 축구를 더 알 수 있게 해준 곳이에요. 선후배들 잘하는 선수가 많았지만 특히 (이)천수형이나 (박)동혁이형을 보면서 더 자부심을 갖고 뛰었어요.”
그에게 있어 선배들은 그의 축구인생의 모티브가 되었다. 빛나는 그들을 따라 한발 한발 발을 내딛었다.
ⓒ 권민정
“2001년도에 신입생임에도 주전으로 게임을 뛰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김)정우랑 (박)병규도 청소년 대표를 하던 시절이었고, 그렇게 다 같이 뛰게 되었죠. 우리가 어렸지만 선생님이 우리를 믿고 필드에 넣었으니까 형들을 따라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열심히 뛰었어요. 그런데 정말 아까웠어요. 전반에 저희 팀이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후반전에 내가 들어가서 게임을 계속 밀어붙였는데 골이 안 들어갔어요. 그날의 게임은 제가 게임을 해오면서 정말 아까운 게임 중에 하나에요.”
1982년생 중 최고의 선수로 주광윤, 최성국, 김영삼, 박병규 등이 거론된 기사가 있었다. 그들은 한배를 타고 온 동료들이자 ?드에서는 싸워야할 라이벌이다.
“다 친한 친구들이에요. 그런데 필드에서 만나면 말 안하고 있다가 게임 끝나고 나서 얘기를 해요. 겨울마다 만나서 술을 마시는데, 정우랑 제가 제일 주당이에요. 그런데 아직 저랑 (김)정우랑 누가 더 잘 마시는지는 우열을 못 가렸어요.”
ⓒ 전남드래곤즈
함께 했던 동료들이 저 높은 자리에 있고, 아직 그 자리에 맴도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한없이 힘들었다. 함께 했던 그들이지만 현재의 위치는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저 높은 자리에 있고, 아직 그 자리에 맴도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한없이 힘들었다. 함께 했던 그들이지만 현재의 위치는 다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화도 많이 나고 그래요. (최)성국이랑 (김)정우는 저 위에서 날고 있잖아요. 동료들은 다 잘되었는데 나만 너무 적응을 못한 것 같고 힘들었어요. 만약 같이 적응을 했다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같은 팀에서 같이 운동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다른 팀에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정말 많이 외로웠어요. 그때는 학교 선배가 없을뿐더러 또래 친구들도 없었거든요. 성국이 경우에는 울산에 대학 선배들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적응을 되게 잘한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잘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항상 그 마음을 갖고 뛰고 있죠. 아직도 제가 그 친구들의 위치에 설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시기하고, 현재 자신의 자리를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을 깨닫고 더욱 더 노력을 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반환점이 되는 곳, 프로로 그가 발을 내딛었다. 아직 대학생의 신분으로 졸업을 하지 않고 프로 행을 택했다.
“그때 흐름이 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나가는 때였어요. (이)천수형도 그렇게 울산에 갔고, 그 축구 흐름이었죠. 어느 날, (김)정우랑 (최)성국이랑 나를 2학년 때 내보낸다는 말이 돌았어요. 고려대학교에는 좋은 선수들도 많고, 후배들도 많이 들어오다 보니까 우리를 일찍 프로로 보낸 것 같아요. 지금 대학교는 휴학한 상태에요. 곧 다시 복학을 해서 졸업하려고요.”
그의 눈에선 고려대학교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의 빛나는 두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태극마크.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에이스 코스를 밟아온 그. U-16, U-18, U-20, 덴소컵, 올림픽 상비군까지 꾸준히 그는 대표팀에서 활약을 해왔다.
“2000년에 세계청소년대표로 게임을 뛰었는데, 우리가 18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패배를 했어요. 꼭 세계대회 나가고 싶었고, 우리나라가 세계대회 못 나간 적이 거의 없었는데 왜 하필 우리 때 발목이 잡혔는지 모르겠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천수형, (조)재진이형 다 아쉬워했죠.”
그에게 있어 대표팀 시절은 아쉬움과 함께 시련을 겪게 만든 원인으로 기억된다. 좌절의 순간 그에게 갑작스러운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는 너무 힘들었다.
ⓒ 서영창
“너무 에이스 코스를 밟다가 좌절을 맛보니깐 제가 겪는 시련이 너무 컸어요. 아테네 올림픽에서 탈락한건 정말 큰 충격이었거든요. 그래서 거의 1년을 운동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어요.”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태극마크를 가슴에 담고, 그때의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 분명 그의 노력에 따라 또 다시 기회는 그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아직 국가대표에 대한 꿈을 갖고 있어요.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다 있을 거예요. 때가 되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내가 판단할게 아니잖아요. 제가 판단할게 아니라 주위에서 판단해야하는 문제 같아요.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더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죠.”
자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마인드 컨트롤하면서 다시 과거의 모습을 찾아간다. 어느새 성숙해져버린 외모만큼 생각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는 프로에서 무언가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프로팀, 나의 전남드래곤즈.
프로로 향하는 그는 전남을 택했다. 좋아하는 팀에 가게 되서 정말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전남으로 온 그는 둥지를 튼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전남은 좋아하는 팀이었어요. 하지만 전남에 와서 처음엔 너무 외로웠고, 적응을 못하면서 슬럼프가 왔죠. 제가 있는 동안 감독이 세 번이나 바뀌었어요. (이회택-이장수-허정무) 이회택 선생님이 뽑아서 왔는데, 정말 좋았어요. 2003년에 게임은 많이 못 뛰었지만 원정을 많이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어요. 그런데 2004년 올림픽 탈락하면서 시련을 많이 겪고 많이 힘들어서 정신을 못 차렸죠.”
ⓒ 전남드래곤즈
“프로에 적응을 못하던 차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떨어지고 슬럼프가 왔어요. 하지만 프로이기에 포기라는 건 없고, 무조건 ‘해야지’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축구를 관두려고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모든 게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도, 대학갈 때도, 대학가서도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이랑 너무 잘 맞아서 게임 뛰는 것도 정말 너무 좋았어요.”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고 그걸 견뎌낼 만한 강한 심신을 갖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는 시련들을 극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힘든 시기는 또 한번 그에게 모습을 내비췄다.
“지금까지 큰 부상은 거의 없었는데 저번 동계훈련 때 아킬레스건이 많이 아팠어요. 훈련도 못하고 아르헨티나에서도 거의 일주일 운동 못하고, 브라질에 가서 운동 좀 시작했어요.”
다시 일어서는 그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부상. 하지만 다시 잡은 마음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또 한번 슬럼프에 빠졌을 수도 있던 상황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올해는 정말 다른 마음가짐으로 나섰어요. 동계 때 너무 아팠는데, 내가 아파도 이렇게 쉴 때가 아니다 싶었거든요. 그리고 내년에 FA라 조금이라도 노력을 더 해야 내가 전남에 있던 다른 곳으로 가게 되건 지금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발전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하자라는 마음을 가지니까 더 좋은 결과도 있고 게임 나가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 전남드래곤즈
그는 이제 알고 있다.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반드시 무언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는 차근차근 처음부터 그걸 느껴가고 있다. 그리고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배이자 선생님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황선홍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황선홍 선생님이 혼낼 때는 무섭게 혼내고 아낄 때는 한없이 아껴주는 분이세요. 내가 정말로 잘못하면 진짜 나에게 심한 말도 많이 하세요. 하지만 잘할 때는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그런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항상 잘했다고 칭찬하고, 못했는데 잘했다고 하는 것 보다 못할 때 알려주고 고치라고 말해주고 그런 게 참 좋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에요.”
전남에서의 적응은 많은 동료들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했다. 마음이 맞는 선수를 묻자 전남 선수들의 이름이 거의 거론 되었다. 그 정도로 전남에서 함께하는 동료들은 그에게 가족과 같은, 함께하는 편한 동료들이다.
“팀 내에서 2003년 같이 입단한 김호유 선수랑 마음이 잘 맞아요. 그때 함께 한 선수들이 지금은 팀에서 많이 나갔어요. 주장 (김)효일이 형이나 제대하고 온 (박)종우형이랑도 친해요. 그땐 친구가 없었으니까 형들이랑 놀았죠. 지금은 이준기, 구현서같은 친구들이 있지만요.”
그에게 플레이가 잘 맞는 선수를 물었다. “플레이는 산드로 히로시랑 볼을 차면 되게 편해요. 미드필더에서는 효일이 형이 제가 플레이 할 때 편하게 해주고요. 전체적으로 저희 팀이 플레이를 다 편하게 하도록 잘 도와주는 것 같아요.” 라며 팀플레이를 강조했다.
예전의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자.
자신감이 많았다는 그.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다시 자신감을 되찾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는 자신감에서 뭐든지 다 나왔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요. 프로에 와서 슬럼프 겪고 나서 자신감까지 많이 잃었어요, ‘아 이러면 안 된다. 자신감을 갖고 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지단과 박지성, 뜬금없이 이들을 뽑은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고 싶은 부분이 많다며 선배든 후배든 배울 점이 있으면 보고 배워야 한다는 그였다.
“저는 정말 좋아하는 선수가 지단이에요. 내 위치는 아니지만 플레이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드리블이며 패스 하나하나까지 정말 배울 게 참 많아요. 그리고 지성이형도 본받고 싶어요. 지성이 형은 같이 청소년대표를 했는데 정말 운동선수 중에서도 바른생활 사나이에요. 그때당시 일본 교토퍼플상가에 있었는데 정말 저돌적이고 그런 게 너무 본받고 싶었어요.”
지금의 그에게 최고의 고민거리가 있다. 그건 바로 ‘조커’라는 것. 조커라는 팀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주전이 아니라는 점은 그에게 스트레스다. 베스트11로 경기장에 나서고 싶지만 그를 찾는 위치는 교체투입이다.
“항상 저는 게임에 조커로 나가요. 근데 솔직히 그건 정말 자존심 상하고 싫어요. 하지만 게임 못 뛰는 사람도 있는데 조금이라도 뛰어서 팀에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하고 있어요. 항상 게임에 지고 있으면 빨리 교체 투입돼요. 비기고 있을 때도 들어가는데, 이기고 있는 상황이면 수비를 교체하기 때문에 잘 못 들어가죠.”
주전으로 나서기위해 그는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동계훈련을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할 생각이다.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 시켜 주전으로 나설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
“정확한 패싱과 빠른 스피드를 살려 플레이를 해요. 하지만 슈팅력과 골 결정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올해 6골 넣었는데, 주위에서 넣었음 10골 넘게 넣었을 거라고 해요. 그만큼 골을 잘 못 넣었다는 말이죠. 그런 부분을 이번 시즌이 끝나고 보완해서 내년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해야죠.”
6골이라는 기록은 그가 프로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성적을 일궈낸 것이지만 그는 이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FA컵의 사나이라는 이름과 함께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 전남드래곤즈
‘컵 대회에서 그의 골 결정력이 전남에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셀미르와 산드로C를 영입하면서 주광윤과 형성한 공격라인의 파괴력이 후기리그 판도에서 전남의 성적을 가늠하는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 정효웅 해설위원
그에게 FA컵 준결승전 인천과의 경기.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승부차기의 순간을 회상하고자 했다. 가슴 떨리던 그 순간.
“승부차기 할 때 저는 키커로 못나가겠다고 버텼어요. 원래 일곱 번째 키커로 나가라고 형들이 그랬는데, 안나간다고 했어요. 서로 다 안 나간다고 그러다가 맨 뒤에서 상민이보고 나가라고 했어요. 난 다행이다 싶었고 상민이가 꼭 넣어주길 바랬죠. 그날 경기가 끝나고 목이 다 쉬었어요.”
키커로 나선 이보다 보는 이들이 더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끝에서 팀이 승리를 할 수 있음에도 다른 이들에게 그 기회를 넘겼다. 그 정도로 그에게는 너무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지나고 그는 웃음을 되찾았다. 서포터석으로 향해 기쁨을 만끽했다.
“컵 대회 때 골을 많이 넣었는데, 후기리그 때는 한골도 못 넣었어요. 컵대회때는 한번 골 넣으면 그다음 못 넣고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넣었어요. 정말 그때는 컵대회가 안 끝났으면 좋았을 걸 싶었어요, 흐름이 끊기는 게 싫었거든요. 마지막게임 제주랑 할 때 골을 넣고 휴가 갔다 와서 제대로 흐름이 끊겼죠. 제주랑 할 때 게임 끝나고 너무 울었어요. 게임 끝난지 몇 초전에 골을 먹혀서 너무 분해서 엉엉 울었어요.“
그에게 컵대회의 기량은 후기리그 때까지 함께하지 않았다. 그래서 되돌아보면 그 흐름이 깨진 게 무척이나 아쉽다.
2006년 모든 걸 건다.
그의 미니홈피에는 ‘2006년에 모든 걸 건다. 내 전부다’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올해에 많은 걸 걸고, 목표로 했다. 만족하진 않지만 그만큼의 승산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올해는 다시 태어나는 시점이었다.
“초반 시작할 때, 정말 2006년에는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서 목표를 세웠어요. 솔직히 그렇게 만족은 못하지만 내가 프로에 와서 올해 골도 많이 넣었어요. 목표를 세우고 온 것이 골도 많이 넣을 수 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내년에는 또 ‘2007년에 모든 걸 건다.’ 가 아니라 지금보다 뭔가를 더 일궈야한다고 생각해요. 올해는 당연히 승부를 봐야하는 25살 나이고, 내년엔 이제 한살 더 먹으니까 뭔가 해놔야죠.”
이제 미래를 보는 그. 하지만 아직도 과거를 회상하면 “정말 말뿐이겠지만 다시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다시 해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그때의 행복이 그리운 것이 아닐까? 앞으로 그에게는 길이 있고, 그는 그 길을 달릴 것이다.
그는 “예전의 자신감을 갖고 다시 노력해서 열심히 할 거예요. ‘이 선수가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구나’ 라는 생각으로 지켜봐줬으면 좋겠어요.”라며 그의 포부를 밝혔다.
그에게 있어 축구는 즐거운 것이다. 축구를 빼고 인생을 논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이제 축구는 두 글자의 분신이다.
“축구가 정말 재밌고 힘들다고는 생각은 안 해요. 물론 힘든 것도 있지만 못 견디게 힘들면 운동 그만 해야죠. 정말 재밌고 신나는 것 같아요. 운동할 때 마다 신나요. 골 넣으면 다같이 좋아하듯.”
올해 그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한해를 마무리 하지만 다가오는 동계훈련부터 또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도전할 것이다. 내년에 더 날아오를 주광윤, 그를 기대해 본다.
‘미리 크리스마스~’ ⓒ 정선녀
내 인생 축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포기 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축구를 위해, 최고를 위해 다시 시작하자. Go Go !!
- 주광윤
K-리그 명예기자 정선녀
첫댓글 개인적으로 이 선수도 매우 좋은 선수인것 같아여..K리그의 숨은 진주라고 생각합니다..
주광윤 FM에서 잘하던데ㅋㅋ
우리 전남의 슈퍼서브죠 ㅋ 산드로-셀미르 (주광윤, 이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