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의 용연사를 찾다
일요일과 구정이 겹쳤다, 코로나 때문에 큰집에 사람이 모여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서울의 아이들이 대구로 와서 세배하고, 부산의 작은 아이가 새집을 마련하였으므로 집들이를 가자고 하였다. 몹시 차가운 날씨가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절집 답사, 아니 걷기운동을 2주나 뻬 먹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날씨도 많이 풀렸다. 절집을 다녀와야 할텐데,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녀올 절을 찾아보니 옥포의 용연사가 나온다. 용연사도 젊은 날부터 여러 차례 다녀왔다. 지난해 봄에도 다녀왔다. 절 아래에는 예전의 용연지를 송해공원으로 조성해두어서 이곳도 여러 번 다녀왔다. 어쨌거나 오늘은 용연사를 다녀오기로 정했다.
지하철로 1번 선의 종점인 설화명곡 역에 내려 택시를 타면 택시비도 많이 나오지 않으리라. 집으로 올 때는 용연지 부근까지 걸어와서,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해 둔 버스를 타자. 그러면 본래 목적인 걷기운동의 량도 적당하다. 집사람과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준비하여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탔다. 송해공원을 지나는 길가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기사 아저씨가 가수 이찬원의 부모가 커피집을 열어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는 얘기를 해준다 절에 닿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 아이들에게 절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봄맞이를 나왔다고 하였다. 용연사는 여러 번이나 다녀온 절이어서 눈에 익어 굳이 둘러 볼 곳도 없다. 법당에서 기도나 올리면 된다. 집사람은 극락전의 현판을 단 법당에 들어갔다. 절의 경제는 절 아래의 고을이 얼마나 풍족하냐에 달렸다고 하였다. 낙동강이 젖줄이 되어 흐르는 옥포의 들은 무척 너르다. 부자 동네가 즐비하니 그들의 기도처인 용연사가 번창한 것은 당연하다. 요사체가 여럿이지만, 다른 부자절처러 새로 지은 건축물의 냄새가 거의 없다.
나는 절의 안내판을 믿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소개는 해야겠다. 선덕여왕 3년인 617년에 창건했다고 하나-------, 세종1년(1419)에 천일대사가 중건하였다는 기록은, 절 마당의 고려 탑이 있으므로 신빙성이 있다.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가 승려들을 시켜 중창하게 했다는 것도 믿음이 간다. 사명대사가 승군을 이끌고 왜군과 싸울 때 이 절에도 머물렀기 때문이다. 효종 1년인 1650년에 불이 나서 절이 소실되자 다음 해에 건립하였다. 조선시대에 절이 소실되면 폐사가 되는 것이 보통인데, 당장 중창한 것을 보면 아랫 마을 주민들의 불심이 대단히 높았던 것 같다. 이후에 절집을 중수하고, 법고 등을 마련한 기록이 주욱 이어진다. 생략하겠다.
이 절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과 적멸보궁이 있다. 절집을 다녀보면 최근에 금강계단을 만든 절이 많아서 절이 장삿속을 드러낸다고 싫어하였다. 용연사의 금강계단도 마땅찮아 하였는데, 안내문을 읽으니 수긍이 갔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통도사에서 모시던 진신사리를 옮기면서, 한 과를 이 절에 남겼다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승군을 이끌고 이 절에 머물렀으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1673년에 이 진신사리를 모시는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이 절의 주불전을 극락전으로 한 이유도, 진신사리는 적멸하신 석가님의 상징이고, 석가님이 머무는 곳이 극락이니 극락전으로 하였다는 설명도 납득이 되었다. 불이문인 누각의 이름이 안양루라는 것도, 안양이 중국어로 극락의 의미를 가진 발음이라고 하였다.
절 마당에 자그마한 3층 석탑은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건립했다고 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한다.
절의 역사를 짚어보니 조선시대를 힘들게 견뎌 온 다른 고찰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절이었던 같다. 영조 4년(1728)에 중건을 마친 이래로 2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조선시대에도 이 절을 찾아 온 대중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오늘도 이 절의 마당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그들은 집사람처럼 법당에 들렸다 나온다. 부모를 모시고 온 젊은 부부도, 아이들이 데리고 온 가족들의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극락전에 들려보면 절의 역사만큼이나. 고색이 풍기는 후불탱화, 삼장탱화 등등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극락전 건물과 탱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용연사라면 또 하나 챙겨보아야 할 유물이 있다. 극락전에 계시는 목조아미타여래 좌상이다. 1655년에 조상되었고, 년기가 적힌 복장유물이 나와서 17세기 불상연구의 기준작이 되었다.
어느 절이든 산신각을 비롯한 우리의 토속신을 모신 전각이 있다. 우리의 절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절 이름이 용연사(龍淵寺)이니 절의 바로 아래에 있는 용연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절의 이름에 토속신인 龍이 들어간 것도 특이하다. 그래서 아래 마을 사람에게 전승되는 전설을 보기로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고을을 덮치자 옥포면의 청년 7명이 왜군과 싸우면서 마을을 지켰다. 그러나 그들은 장렬하게 전사하여 옥연지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그들이 일곱 용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몇 년 뒤에 용연지의 물이 핏빛이 되면서 물이 마르고, 고을은 흉년과 역병이 겹쳤다. 이에 마을 사람이 제사를 지내서 이들의 영혼을 맑게 해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용연지에 사는 일곱 마리 용이 승천을 위해 다투느라 흉년이 들어어 용이 승천하도록 제사를 지내니 풍년이 왔다는 전설도 있다.
지금도 5월 5일 단오날에는 마을 사람이 용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용을 위해 절을 짓고 용연사라고 하였다. 이런 전설은 마을 사람들이 용연사를 단순한 불교의 성지로 찾아온 것이 아니고, 토속신앙으로 단장을 하였기 때문에 대중이 많이 찾았고 나름대로 번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본 절을 둘러보고,법당에 가서 기원도 하고, 절의 맞은 편에 있는 적멸보궁에서도 절을 하였다. 그리고 산바람을 맞으면서 준비해간 샌드위치와 커피로 배를 채웠다.
안내판을 보니 용연지까지는 5.8km 이다. 그곳에 가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 걷기로 했다. 내리막길이니 힘들지는 않는데, 용연지의 코 앞까지 와서 집사람이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가기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중 늙은이쯤 되어 보이는 마을 사람이 버스를 기다린다. 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울 건너의 야트막한 산을 가르키면서, 이 산 너머에 상계리가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오기로 한 마을이라고 하였다. 유가사 가는 길의 도중에서 갈린 길로 가면, 달성군 주민이라는 이 사람의 말에는 박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하다. 나도 그제께 텔레비전 뉴스에서 박대통령이 머무실 집까지 보았다.
다음 주의 답사절을 유가사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