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이라 불린 고구려 11세 동천태왕의 죽음에 수 많은 충신들이 자발적 죽음(순장)을 택하였다.
혼란한 삼국지 시대를 맞이하여착실하게 동아시아의 패자로 위치를 잡고 있던 고구려와 달리 중원은 광무제 유수의 후한이 약화되면서 위·촉·오 세 나라가 각축하는 이른바 삼국시대(220~280)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요동 지역은 단군 고토 회복을 꿈꾸는 고구려와 조조의 위나라, 그리고 독립 왕국을 만들려는 공손씨 일가 사이에서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에 북방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와 탁발씨拓跋氏 등이 새롭게 흥기하였습니다. 선비족은 동호東胡의 후예로서 단씨段氏, 모용씨, 탁발씨, 독발씨禿發氏, 걸복씨乞伏氏, 우문씨宇文氏 등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입니다.
단군 동천제공손씨의 요동 장악을 용납할 수 없었던 고구려 11세 동천열제東川烈帝는 재위 12년에 위나라와 손잡고 공손씨를 협공해 무너뜨렸습니다. 동천열제는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을 뿐 아니라, 힘이 세고 용감하며 사냥과 활쏘기도 잘했다고 합니다. 『조대기』에서는 “동천제東川帝를 단군이라고도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한맹寒盟(동맹東盟)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 하나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재위 16년에 동천제는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였습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요동 서안평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이고, 지금도 거대한 고구려 토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에 위나라는 244년 북경 지역을 다스리는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고구려가 승기를 가졌지만,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제는 남옥저로 퇴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밀우密友와 뉴유紐由의 분전으로 관구검의 위군을 겨우 쫓아냈고, 관구검은 요동의 낙랑으로 물러갔습니다.
전란을 겪은 후 동천제는 환도성이 전란으로 다시 도읍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평양성을 쌓고, 종묘 사직과 백성을 옮겼습니다(築平壤城 移民及廟社 -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 기사). 이때 평양은 고구려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만주의 평양입니다. 설령 이때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즉 강단사학계에서는 미천열제 때인 313년 축출됐다고 하는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전인 동천제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말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낙랑군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일까요?
재위 22년에 동천제가 세상을 떠나자 근신近臣들 중에 따라 죽으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새로 즉위한 중천제中川帝는 순장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장례일에 많은 이들이 순장을 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 열제와 이를 따르는 조의선인을 비롯한 지배층이 생사를 함께 하는 전사戰士 집단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