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업을 일으킨 3희(熙)
5월 20일 방한(訪韓)한 조 바이든(Joe Biden, 1942, 미국 제46대 대통령)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尹錫悅, 1960,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대통령과 함께 제일 처음 찾은 곳은 경기도 평택(京畿道 平澤)에 있는 삼성전자(三星電子) 반도체(半導體) 공장(工場)이었습니다.
한미(韓美) 양국(兩國) 대통령과 나란히 선 이재용(李在鎔, 1968,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 수료, 삼성그룹회장) 삼성그룹 부회장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유(石油)를 비롯해 이렇다 할 전략자원(戰略資源)이 없는 나라(國)에 반도체(半導體)가 있어서 미국 대통령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붙잡으려고(想要抓住你) 몸이 달아 있구나!”
“그런 소중(所重)한 회사(會社)를 이끄는
CEO(Chief Executive Officer, 最高 經營者)를 지난 5년 간 이 나라(國)는 어떻게 대접( 待接)했나?
못 잡아먹어서 걸핏하면 감옥(監獄)에 보내고, 삥 뜯어낼 호구(虎口)로만 생각하고..”
그러면서 또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정희(朴正熙‧1917 ~ 1979) 대통령과
김완희(金玩熙‧1926 ~ 2011) 박사였습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1953~1955년 미국 유타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때 그는 ‘전자공학계의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불리는 ‘브루니 정리’의 예외를 발견해 발표했습니다.
김 박사가 발견한 이론은 전자회로 설계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것으로, 이 발견으로 김 박사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됐습니다.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11월 박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한국전 참전 장성들이 마련한 자리에 초대받아 갔던 김 박사 눈에 비친 박정희(朴正熙) 장군과 그 일행은 ‘시골티가 줄줄 흐르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1965년 5월 박 대통령이 두 번째로 방미(訪美)했을 때, 김 박사는 뉴욕시장이 베푼 만찬에 참석해서 박 대통령을 지켜보았다.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967년 9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으면서였습니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전기기계공업’ 육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전자공업’ 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전자공업 (electronics industry)’ 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김완희(金玩熙) 박사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전자공업’ ‘전자산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 했고, 이 말은 곧 일본이 만들어낸 ‘전기기계공업’이라는 용어를 대체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공학 관련 용어들이 대부분 일본인 들이 만들어낸 용어임을 생각하면, 매우 희귀한 사례인 셈입니다.
1967년 9월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전자공업은 라디오나 TV를 조립생산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금성사조차도 홍콩 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역설계(逆設計)으로 흉내(模仿) 내서 국산(國産) 라디오(radio)를 만들려고 몸부림치던 (曾挣扎过的) 상황(狀況)이었습니다.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후일 이렇게 회고(回顧)했습니다.
“상공부 이철승 차관과 함께 한국전력, 대한전선, 전파연구소, 중앙공업 연구소, 부산 동래에 있던 금성사 등을 돌아보았죠.
그게 전부였어요. 다 보고 나니 짐작이 가더군요.
한 마디로 서구와 비교하면 원시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생산되는 전자제품은 지독하게 조잡했어요.”
이렇게 한국 전자업계 현황을 돌아본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상공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9월 13일 청와대에서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상공부 장관, 청와대 비서관 몇 명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이 시작됐습니다. 브리핑은 2시간 반 동안 진행됐습니다.
김 박사의 회고(回顧)입니다.
“박 대통령은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차트에서 눈을 뗀 적도 없었습니다.
교단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박 대통령만큼 집중해서 듣는 학생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보고를 하면서 보니 다소 전문적인 내용까지도 박 대통령은 이해하는 듯 했어요.”
브리핑이 끝난 후,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박 대통령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김완희(金玩熙) 박사의 숟가락 위로 깻잎을 얹어 주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김완희(金玩熙) 박사를 데리고 서재로 갔습니다.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김 박사, 미국 모토롤라사가 한국에서 이걸 만들겠다고 하면서 공장부지 매입을 허가해 달라고 합니다.”
김 박사가 보니 탁자 위에 올려 진 것은 작은 트랜지스터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요 쪼매난 것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 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도 못하니..
내 이래서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잠시 생각해 본 후
“저 혼자 힘으로는 벅차고 미국에 돌아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김 박사는 “어림잡아 20만 달러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10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라고 답했다.
그해 9월말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뉴욕으로 돌아갔을 때 상공부에서 보낸 10만 달러가 이미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한국 정부가 거액의 돈을 부친 것을 보니 그만큼 박 대통령이 전자공업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재촉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본격적으로 보고서 구상을 하기 시작했지요.”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한국형 전자공업’ 육성을 위해 미국 내 전문가들에게 각국의 전자공업 육성 사례 조사 용역을,
한국의 KIST에게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조사 용역을 맡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1968년 1월 ‘전자공업센터 설립 계획안 - 국가의 기초산업과 수출산업으로서의 전자공업 중점 육성책의 근거’라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968년 3월 7일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전자공업 관련 미국 학자들과 기업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해 7월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다시 귀국했습니다.
7월 15일 박 대통령은 김 박사를 청와대로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박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김 박사를 배웅했습니다.
“우리들이 차에 탈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박 대통령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습니다. 말끝마다 ‘가난한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도와 드려야겠다고 그때 차 중에서 결심했던 것입니다.”
1968년 8월 1일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청와대 집무실에서 전자공업 육성 방안에 대한 공식 보고를 했습니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 신범식 대변인, 신동식 경제 제2수석(과학기술담당) 비서관 등이 배석했습니다.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처럼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국내에서 진득하게 독자 기술을 개발해서는 이미 늦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의 전자공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김완희(金玩熙) 박사를 “우리 김 박사” 라면서 예우했고,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이 돌아가실 때까지 13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박근혜(朴槿惠,1952,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서강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전 대통령이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한 것도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열망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1960년대 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어요. 우리는 그 막차 맨 끝을 타려고 했던 겁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그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지금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3개월 뒤엔 다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런 판에 후진국들이 제 아무리 흉내 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린 그때 참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 면에서 박정희(朴正熙)란 분을 대통령(大統領)으로 만난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에게 행운(幸運)이었다고 봐요.”
이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전자공업(電子工業) 육성(育成)을 향해 조금씩 전진(前進)하기 시작(始作)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 12월, 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1910 ~ 1987)회장의 차남 이건희(李健熙‧1942 ~2020) 당시 동양방송 이사는 사재(私財)를 털어 한국반도체주식회사(韓國半導體株式會社, 1974년 1월 설립된 손목시계용 IC칩과 트랜지스터칩 등을 개발, 대량생산한 기업)지분 50%를 획득했습니다.
한국반도체주식회사는 그해 1월 강기동 박사( 姜起東, 1934 ~ 서울대공과대학 전기공학과 11회 졸업, 모토로라 반도체 연구소 근무, 오하이오 주립대 반도체 박사.)에 의해 설립된 작은 반도체 회사였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흔드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3년 뒤인 1977년 12월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 50%를 인수한 후, 이듬해 3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바꾸었습니다. 1980년 1월 삼성반도체 는 삼성전자[三星電子(株)]에 흡수(吸收) 합병(合倂) 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김완희(金玩熙) 박사가 1968년 8월 1일 전자공업 육성방안에 대해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하기 10여일 전인 7월 20일《중앙일보》에 김완희(金玩熙) 박사 인터뷰 기사가 크게 실렸다는 점입니다.
이 인터뷰에서 김 박사는 대기업이 전자공업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역설(力說) 했습니다.
당시 삼성 주력 기업이 아닌 중앙일보-동양방송을 맡고 있던 이건희(李健熙) 전 삼성그룹 회장은 분명 이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大統領),
김완희(金玩熙),박사(博士),
이건희(李健熙),회장(會長),
‘3희(熙)’가 대한민국 전자공업(電子工業)을 만들어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자공학 분야의 석학 김완희(金玩熙) 박사를 불러들여 모터롤라의 트랜지스터를 앞에 놓고 “요 쪼매 난 것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도 못하니..
내 이래서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사실 그때 한국은 가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경공업 제품 수출은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후의 먹 거리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김완희(金玩熙) 박사는 그 호소에 마음이 움직여 박 대통령을 열심히 도와 한국 전자공업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건희(李健熙) 전 삼성그룹 회장은 반도체의 무궁한 가능성을 내다보고 사재를 털어 반도체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삼성전자[三星電子(株)]는 세계 탑 클래스( top class, 최상위 부류)의 전자회사(電子会社)를 넘어서 한미동맹(韓美同盟)의 핵심적(核心的)인 연결(連結)고리가 되었습니다.
“가난(家難)한 한국(韓國)을 부강(富强)하게 만들어야한다” 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미국 대통령을 달려오게 한, 전자공업을 일으킨 3희(熙), 박정희(朴正熙), 김완희(金玩熙), 이건희(李健熙)....
♠ 삼성전자 [ 三星電子(株) ] 시가 총액 353조 4,000억 원,
브랜드(brand) 가치 124조원 3년 연속 세계 5위,
옮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