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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
벧전 3:8-12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벧전 3:8-12 / [의를 위한 고난]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한 식구처럼 서로 융화를 이루십시오.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9) 손해를 입었다고 해서 보복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친절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기를 기도하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0) ㄷ) `장수하며 복된 나날을 살고 싶으냐? 혀를 함부로 놀려 악을 짓지 말며, 입을 벌려 거짓을 꾸미지 말아라. (ㄷ. 시34:12-16) 11) 악을 멀리하고 선을 쌓으며 평화를 이루는 데 힘을 다하여라. 12) 여호와의 눈은 바르게 살려는 이들을 향하고 살려 달라 외치는 소리에 귀기울이신다. 여호와께서는 못된 것들이 벌이는 짓 다 헤아리시어 그 이름 기억하지 못하게 끊어 버리신다.'
본문은 임박한 종말에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할 때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악과 욕으로 갚지 말라(8-10) 외부의 박해에 대응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안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하나 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사랑과 동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낮은 마음을 갖는 것으로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의 모습입니다. 겸손의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빌 2:6-11). 베드로는 외부의 박해자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스스로 복수하는 것을 금합니다(레 19:18; 신 32:35; 잠 20:22, 24; 24:29).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형제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 같이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한 참 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복을 빌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한 가지 동기는 이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가져올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는 은총을 베푸시는 그분의 의로운 백성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좋은 날은 장래의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11-12) 화평은 모욕을 당했을 때라도 적극적으로 축복을 빌어주어 얻어집니다. 이것이 불의와 타협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화평을 원할지라도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평을 간절히 따라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살피시고, 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시 34:15). 이것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이 보시며, 기도를 들으시며, 적당한 때에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떠맡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적용: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사람은 기쁨의 눈으로 보시고, 악한 사람은 진노의 눈으로 보시고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링컨은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신앙의 도를 지켜나간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의 국민을 위한 정치는 사망 이후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가 죽은 지 150여 년이 흘렀지만 링컨은 전 세계인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가진 신앙은 불신자들과 타 종교인들로부터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의 성찬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행위로서 자신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링컨은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듦으로서 하나님께 합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 설 교 >
사랑을 만들어 가는 사람
벧전03장 8~12절 / 오정호목사
지난주에 구원의 확신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자는 믿지않는자와 똑같이 살수 없습니다. 삶의 양식이 달라야 하는데 바로 "복을 빌며" 사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가 될 때 가능합니다. 사랑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산시켜 가는 것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사랑의 선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복을 비는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9절). 그런데 이 말씀이 특별한 영적체험을 받은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1:1). 유명한 기독교 상담심리학자인 게리 콜린스는 그 의 저서 [당신도 변화 시킬수 있다]는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자들 대부분은 연구결과 보통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태생이 특별한 자는 그야 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통 사람을 부르셔서 주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변화의 동역자로 삼으시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수 있을까?"라고 스 스로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을 얕잡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결단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을 만드는 자로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품성을 잘 가꾸라고 말하는데, 8절에서 그 다섯가지를 보면,
(1)마음을 같이하라 즉 생각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신 공통분모외에는 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 다. 다르기 때문에 조화의 아름다움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누릴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비록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지만 거기에서 믿음 과 소망,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이 세상을 사랑으로 변 화 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실 겁니다. 마음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 고 나와 다른 것 때문에 시비를 거는게 아니라 그 다른 것 때문에 감사할 때 가능 한 것입니다. 이럴 때 더 큰은혜와 축복이 나와 우리 교회와 가정을 통해 흘러 나 가는 것입니다.
(2)체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2:15에서는 "함께 즐거워 하고, 함께 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울 때 함께 울려면 먼저 마음이 공감되는 감정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 다. 그리고 감정의 일치를 위해서는 입보다 귀를 먼저 사용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19). 내가 하고싶은 말을 접어두고 먼저 잘 들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이된 후 말을 해야 그 말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특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은 내 할말을 막 하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 먼저 상대 방을 듣는 올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3)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경쟁자나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료로 보는 성숙한 눈이 필요합니다. 형제사랑은 예수 믿는 사람의 상표이며 가장 중심되는 덕인데, 로 마서15:7에 의하면 "서로 용납 할 때" 형제 사랑이 가능하고, 요한일서 4:20에 의하 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주님 사랑을 표현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곳에는 형제사랑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 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끼 리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4)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대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에베소서 4:32에 의하면 "부드러운 마 음의 상태로 타인의 필요에 애정을 가지고 민감하게 대하는것"입니다. 이 당시 로 마제국은 칼로 다스리고, 힘이 센 것을 존중히 여기는 시대였는데, 그렇지만 믿는자 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합 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5)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고 자기한계를 고백할줄 아는게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낮 은 포복을 하는 것이 겸손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자원하여 순복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녀가 부모의 권위에 순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은혜받는 지름길이고(야고보서4:6,10), 은혜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죄이고(잠언21:4), 패망의 선봉입니다(잠언16:8).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위 해 은혜를 예비하시고, 이런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져 가는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의 마음의 자세는 밖으로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1)'복을 빌어주는 삶'으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9절).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베풀 어야 합니다. 이번 휴가때 고향이나 타 지역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교회를 위해 간절히 복을 빌고, 그 곳 목회자를 격려하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 들을 위해 복을 빎으로이번 방학에 자녀들이 용기를 얻도록 하십시다.
(2)언어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10절).
입술의 표현은 그 인격 전체의 표현이기에 우리의 입술에 파숫꾼을 세워 주님 앞에 서 깨끗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3)주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나눠 줄려면(11절),
①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중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죄가 떠오르 거든 결단하시고, 그 길에서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②선을 행해야 합니다. 악을 떠나는 수준에 머무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읗 행해 야 합니다. ③공동체적인 면에서는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즉 가는곳마다 화평을 추구하는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내 한마디 때문에 가족의 나들이가 먹구름이 낄수 도 있고, 즐거울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 준비하기 이전에 먼저 마음의 준비 를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지내는 몇일동안에 가지고 있는 은혜를 서로 누리 며 서로 축복하면서 1997년의 휴가는 참으로 복되고 영적으로 유익했다는 고백이 있는 휴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만들어 가는 사람, 복을 나누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12절), ①"감찰하시는 눈"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②그리고 그 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해 여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응답하심을 마 음껏 체험하셔서 영적으로 열린 축복의 나날들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사랑하며 축복하며
벧전 3장 8~12절 / 반태효목사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시대에 사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 고난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고난을 복으로 바꾸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신앙은 역경을 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은 능력입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향해서 성도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영원한 처소가 예비된 존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장11,12절에서는 이런 고난의 시대에 대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시대에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를 핍박하고 부당한 대접을 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선한 행실을 가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성도로서, 직장과 가정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좋은 날을 기대하십시오’
오늘 본문 3장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마지막으로”라는 말씀은 결론이 아니라 요약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시대에서 고난을 복으로 이기는 삶을 1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시오. 우리 속에서 고난을 좋은 날이 되도록 만드는 힘은 이것입니다. 서양 인사에 “좋은 날이 되십시오”라는 뜻을 가진 인사가 있습니다. 좋은 날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겪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곧 오겠지요”, “좋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좋은 날, 좋은 때’는 만들어져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날이 있다는 기대를 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믿음 없이 인생을 걸어가면 결코 좋은 날은 없습니다. 좋은 날은 절대로 그냥 오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내일이면 좋아지겠지, 내년이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좋은 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날은 믿음으로 창조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땅은 타락한 땅입니다. 사단이 역사하는 땅입니다. 죄악과 고난과 여러 가지 역경이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좋은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신앙의 힘으로 고난과 역경을 좋은 날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이것들을 좋은 날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고난을 이기고 축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9절을 읽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마디로, 고난을 이기고 고난을 복으로 바꾸는 비결은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권을 사용하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오히려 우리가 복을 빌면서 축복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을 비는 것, 즉 축복권은 세상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복을 비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조금 못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되면 약오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형제라도, 가까운 친구라도 정말 잘 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축복할 수 있는 사람, 오히려 나를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접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5세가 넘었지만, 그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4000년 전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이 없는, 죽은 자와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이, 소망 없이,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복의 근원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축복의 사람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축복권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두벌 옷도, 전대도, 여행에 필요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빈손으로 가는 그들에게,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먼저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1~13)
그래서 복을 빌면 무조건 수지 맞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축복하면 그것이 모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축복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구에게 축복을 하나? 나도 힘든데, 복은 내가 받아야 하고, 도움은 내가 받아야 하는데, 지금 내 사정과 상황 속에서 한가하게 내가 누구에게 복을 비는가?”
고난의 때에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망하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오히려 고난과 역경 앞에서, 우리를 부당하게 대접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복을 빌라”.
복된 사람
고난 속에서 복을 빌라는 말씀에 형식적으로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고 험담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욕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을 빌려면 내 마음에 복이 있어야 합니다. 복된 마음이 있어야 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복 있는 사람, 복된 사람이 되어야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복을 빌 수 있습니다. 복 있는 마음이 있을 때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복을 빌기 위해서는 복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복된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체휼, 사랑, 불쌍히 여김, 겸손을 복된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와 무정함과 냉정함과 엄격함을 가진 사람이 복되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껍데기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속이 바뀝니다.
하지만 예수 믿으면 껍데기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없던 사람들이 돈이 생기고, 집이 없던 사람들이 집이 생기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겉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속이 바뀝니다. 냉정하던 내 마음이, 강퍅하던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냉정하던 내 마음이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동참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 파워웨이브 학생들이 광주에서 양로원과, 장애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수련회 회비를 받아서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운 날에 집에서도 시키지 않는 봉사를 시키다니. 이게 교회가 할 일입니까?’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학생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서 섬기면 긍휼한 마음이 생기고, 선하고 깨끗한 마음, 주님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체휼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계발해야 합니다. 계발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몰라서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 마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을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면 복이 옵니다.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체휼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마음. 그래서 다른 사람이 울 때 함께 울고, 다른 사람이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있는 마음, 다른 사람의 문제에 내 문제보다 더 관심을 갖는 이러한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미 이 마음이 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 앞에서 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마음이 요즘 너무 약해졌습니다.” “왜요?” “자꾸 눈물이 납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 소식만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워지고 선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을 외면할수록 이미 주어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매우 율법적이고 동정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서만 신앙생활하고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강퍅해집니다.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보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은 어려운 사람과 자꾸 부딪힐 때 생깁니다. 누가 어려운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지 아십니까? 돕는 사람이 돕습니다. 그 형편을 아는 사람이 돕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곳에 가면 감동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가지 않는 사람은 주님 오실 때까지 가지 않고, 가는 사람은 계속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여러분, 정말 겸손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마음 중에 가장 중요한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5번째 복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능력입니다. 이 마음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이 마음은 계발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알고, 그래서 그 가난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애통할 줄 아는 사람, 그 애통함을 통해서 온유해진 사람. 온유함을 통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하나님의 의를 찾는 사람, 그리고 그 의를 넘어서 긍휼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이 의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의의 자리에 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를 넘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의 자리에 있으면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대하면,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이라도, 하나님이 공의로 우리를 대하시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선 저부터도 설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공의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은 긍휼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제 아픔에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왜 제 고통을 외면하십니까?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난과 어려움, 눈물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흘릴 때 우리 옆에서 함께 우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보다 더 마음아파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신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 큰 사랑을 베푸셨을까요?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3,4절은 우리가 원래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긍휼히 여길 줄 알까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정말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긍휼이 없으면서 겸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위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내 아픔으로 아는 사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얕잡아보고 우월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 앞에서 힘을 발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어려운 사람 앞에 서면 내 우월감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은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인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이 겸손해야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영혼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를 계발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선으로 악을 대적하라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악한 일을 할 때, 나는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다못해 혼자서 소리라도 질러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내 마음이 더 복잡해지고 괴로워집니다. 더 힘들어집니다.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는 순간 우리는 사단의 종이 됩니다. 사단에게 힘을 더 부여해 줍니다. 악은 선으로 갚을 때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에게 악으로 맞서고 싶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욕하는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할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여러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문제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을 유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축복할 때, 그 복이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축복권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속 복을 주십니다.
복을 비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복을 빈 사람이 그 입술로 저주를 하거나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거나 뒤에서 이야기하지 않겠다”라고 결단하십시오. 남의 말 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험담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십시오. 듣기 좋은 말도 많은데 왜 험담을 듣습니까? 그리고, 남의 말 하는 사람은 남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내 말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 부정적인 말이 나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분, 성공한 사람들과 존경할 만한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모습 속에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하고 존경받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긍정적인 말을 하고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격려하는 말을 하십시오.
시편 141편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여러분이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의 운명이 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구하고 화평을 구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12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복을 비는 그 모든 모습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으십시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십시오. 좋은 날은 여러분이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때라도, 이 날은 주가 지으신 좋은 날로 창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을 빌고, 악에서 떠나고, 입술을 금하면서 주를 찬양할 때, 지금 여러분이 가진 고난을 좋은 날로 바꿀 수 있습니다.
도리어 복을 빌라
벧전 3장 8~12절 / 엄기호목사
외국 선교를 나가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God bless you!” ‘하나님이 당신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타인에게 복을 빌어주는 그들의 문화처럼 우리도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 격려하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이란 생각을 담는 그릇이요,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입니다. 또한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말 속에는 개인의 뜻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진실한 말은 인간을 움직이고 힘을 줍니다. 사랑의 말은 때로 눈시울을 적십니다. 위로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지혜의 말은 밝은 빛을 주고, 격려와 칭찬의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무시의 말은 마음을 분노케 하며, 원망의 말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저주의 말은 복수의 마음이 일게 합니다.
베드로가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박해가 가속화 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따라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는 베드로의 가르침은 고난 중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핍박하며, 미워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고, 축복의 말을 하라는 권면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 원한 것일까요?
축복의 말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위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이삭에게는“에서와 야곱”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진 이삭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 에서를 축복하기 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브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얼른 에서로 변장시킨 후, 이삭 앞에 나아가게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이삭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야곱을 맘껏 축복해 주었숩니다.
성경은 이삭의 축복으로 인해 모든 하나님의 축복이 야곱에게 임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속임수를 쓰는 줄 알았지만, 자나 깨나 축복을 희망하는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 이삭의 입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을 기억하시고 그대로 이뤄주셨습니다.
이렇게 축복의 말, 칭찬의 말 한마디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역시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속을 썩인다고 해서 너무나 쉽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바보라느니, 멍청이라느니, 혹은 그 이상의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말에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을 때 그의 삶이 축복의 삶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가 자녀를 축복할 때 자녀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창 49:10).
창세기 1장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운명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환경은 물론 우리의 삶과 타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긍정적인 말, 축복의 말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축복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본문 9절 하반절에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것은 누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복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복을 상속받기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상속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며, 복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약속받은 사람입니다(창 12:2, 3).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받은 복은 물질의 복, 그 이상의 영적 축복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가 유업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갈 3:29).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어 놓으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유업으로 받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타인에게 복을 빌어주고, 나눠주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그렇게 행할 때, 더 큰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복 받은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면 결국 그 시기와 질투가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갑절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축복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송축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은 누구보다 많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능력의 근원이 되시며, 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그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시 103:1-5).
찬송가 489장을 쓴 에드윈 오델로 엑셀은“인생의 소용돌이에서 폭풍우에 시달렸을 때, 모든 것을 다 잃고 낙망할 때, 너의 축복을 하나 하나 들어가며 세어보아라. 주께서 네게 베푸신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축복은 하늘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예비 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련한 우리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인생의 축복이 이 땅위에 있는 줄 알고, 생존 경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땅 만을 바라보며 복을 분주히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감사할 때, 그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때 이전 보다 더 큰 축복이 임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다윗이 찬양한 것처럼 우리의 온 맘과 영혼을 다해 야웨의 그 성호를 송축합시다.
베드로는 본문 10절 이하에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악한 말을 하기 위해서, 혹은 궤휼을 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분께 영광 돌림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날마다 체험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듯이 우리의 말에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또 말에는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누에가 그가 거할 고치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실로 짓는 것처럼 사람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자기라는 존재를 굴레 씌우게 됩니다.
올 한해를 살아가면서 속상한 일이 있었습니까? 섭섭한 일이 있었습니까?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일에 도리어 복을 빌어봅시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에게 복을 빌어줌으로써 생활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화되며, 인격이 달라지는 체험을 하는, 복된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는 성도가 됩시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
벧전 3:8~12 / 오창우목사
하나님의 목적대로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간에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인생!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다섯 주에 걸쳐서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말로 하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복을 빌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복을 빌어주는 것! 이것은 말로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과학전문매체 라이브사이언스 최근호는 바다, 육지, 하늘 등 지구상의 동물중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 ‘탑 10’을 선정 발표했는데, 제일 무서운 것은 연간 200만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기라고 합니다. 이 모기는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일으켜 사람을 가장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2위가 매년 50,000명 이상의 사람을 죽게 하는 코브라라는 뱀이고, 3위는 60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독을 지닌 호주산 박스 해파리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북극곰, 독 개구리, 백상어, 코끼리, 아프리카 물소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 무섭습니다. 바로 말(언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이 죽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말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8,9절에 있는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면, 불쌍히 여겨지면, 복을 빌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복을 빌어 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은 곧 내가 복을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면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혀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혀가 욕도 할 수 있고 복도 빌어 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잘 사용해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하는 것입니까? 어떤 말을 하시겠어요? 욕하면 욕이 돌아옵니다. 복을 빌면 복이 돌아옵니다. 오늘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은 첫번째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0,11절의 말씀을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엄마아빠가 자녀들에게 "아이구 착하네~" 라는 말씀을 어떤 경우에 하십니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순종하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그것이 착한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얌전히 앉아서 밥 잘 먹어도 "참! 착하네"하시잖아요.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착하다고 합니다.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착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는 것은 ‘인정해 주는, 있는 그대로 보는’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돈을 드려서 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해 주면 힘이 납니다. 반면에 무시당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이 바보야, 멍청아 그것도 못해!” 그러는데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그러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지!” 하면서 의욕이 생깁니다.
요셉은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을 때도, 반대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인정해 주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
교육심리학에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 줄 때, 나타나는 교육적인 효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로 인해서 바보로 불리던 온달이 용기를 얻어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이라도 인정을 해주면 이것 또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 홀어머니가 아들 6명을 모두 박사학위를 받게 교육을 시켜 장한 어머니상을 받게 되는데 이 어머니는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도 욕하지 않고 “너희들은 훌륭하다.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을 믿는다.”하고 인정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정과 칭찬의 미학"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 마돈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했습니다. 마돈나가 초등학교 시절에 무용반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은 마돈나가 키도 작고 말도 잘 할 줄도 모른다고 놀려대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선생님은 마돈나에게 "마돈나, 너는 참으로 예쁘구나! 노래도 잘하고, 무용도 잘하고 너는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될거다!"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마돈나는 친구들의 말에 낙심을 했지만 선생님의 이 말씀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무용과 노래와 춤 등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시며 "참 잘 하는 구나"라고 칭찬해 주셨고 마돈나는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것은 돈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한마로 천량 빚을 갚는 것처럼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후 세계적인 가수로 성공한 마돈나는 "지금 나의 성공은 그 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선생님을 못 잊고, 가난한 선생님의 생활비와 병들었을 때에 병원비 일체를 책임져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며 가장 슬프게 끝까지 울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정해 주신 그 말 한 마디가 놀림의 대상이었던 한 소녀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선생님의 생활도 책임져 주는 제자가 생긴 것입니다. 이건 복입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호빙'이란 사람도 퇴학을 받을 정도로 부족한 학생이었지만 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힘을 얻어 예술품을 평가하는 인정받는 감정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호빙의 이펙트라는 말은 인정해 줌으로 생기는 교육적인 효과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호빙 이펙트의 교육적인 효과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충성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를 처음 만나는 순간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하셨습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는 뜻으로 '반석'이란 뜻입니다. '시몬'은 '갈대'라는 뜻으로 조석으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장차는 그가 변하여 반석 같은 성품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갈대였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자 자신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도 저 예수와 한패지요?”라는 말에 “아니다!”고 3번이나 부인합니다. 한마디로 배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더니 예수님을 뒤로 하고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시몬아 너는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시고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에 예수님은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은 한번 인정하시면 끝까지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변덕스럽던 베드로는 주님의 인정해 주심으로, 처음 만났을 때에는 베드로라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시고 인정해 주시더니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에도 찾아오셔서 “사랑한다!,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인 것처럼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 인정해주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베드로는 다시 돌아와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이라 책망하실 수도 있지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이 같은 선을 행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목동 다윗이 왕이 되게 하셔서 간음이나 살인죄를 범했음에도 수 천대까지 복을 받는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을 하는 사도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그 선하신 일을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재능에 있어 그 누구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그 무엇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신을 과소평가 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인정받으면 인생을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믿음이 적어도 하나님은 나를 믿어주시고 내 부족함을 있는 대로 봐주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려 주시면서 사랑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잠언3장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해 드려 보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인정을 받으시면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내 자신이나 남을 인정해 주는데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무시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면 그것이 복으로 돌아옵니다.
특히 사람들은 짝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도 아내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도 자녀에게, 종업원은 고용주에게, 고용주도 종업원에게, 여기 서있는 오목사는요?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짝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고 힘이 생깁니다.
잠31장에서는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을 귀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여인을 현숙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합니다. 인정해 줌이 좋은 남편을 만들고 아내를 만들고, 자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인정에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나도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좋은 점, 착한 점, 훌륭한 점을 찾아서 인정을 해 줄 때, 기쁨이 있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가정사역 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하다.”, “난 너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어.”, “너만 보면 하나님께 감사해.”, “언제나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네가 자랑스럽다. 엄만 행복해.” 라는 말이었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저희가 전도사 시절에 같이 계셨는데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뵈러 동기 전도사들하고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과자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도 과자 좋아하세요? 과자를 드세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노인도 좋아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이 좋아 하는 칭찬은 어른들도 좋아 한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사랑 받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엄마가 최고야. 엄마, 아빠랑 있으면 행복해",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엄마 사랑해요.”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말은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인정해 주고 감사해야 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식구들에게 부모님 손을 꼭 잡으시고, 부부끼리, 자식들 손을 잡으시고 "나는 당신 때문에(엄마아빠 때문에, 너 때문에 )행복해"라고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 아동부 학생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이 자원봉사학교를 했습니다. 토요일에는 행사 마지막으로 자원봉사학교를 하는 동안 만든 포푸리와 도시락, 그리고 과일 바구니를 가지고 사랑의 집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 곳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과 환자분들이 계시거든요. 그곳에서 아이들이 노래도 하고 바이올린도 연주해 드렸습니다. 또 우리 학생들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식사하는 것도 도와 드렸다는 말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변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불평을 하지 말고 감사하고 늘 사랑으로 감싸서 하나님의 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은 두 번째로 화평을 구하는 말입니다.
10,11절을 보게 되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화평을 구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관계의 언어를 말합니다.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화평을 구하는 것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을 할 때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연예할 때 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다보면 더 사랑해 집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화평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부부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의 이유를 보면 부시의 경제정책이나 6자회담이 어떻고 대북관계가 어떻고 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갓 결혼한 아내가 식사 시간이 되어서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국시 드세요.” 이 말을 들은
남편: “이것은 국시가 아니라, 국수라고 하는거요!”
아내: “그게 국수예요? 국시지.”
둘은 팽팽하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옆집에 사는 국문학자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국문학자는 대답합니다. “국시와 국수는 서로 다릅니다.” “국시와 국수가 왜 다르지요?” “국시는 밀가리로 만들고,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밀가리와 밀가루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네,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있고, 밀가루는 봉투에 담겨 있습니다.”
“봉다리와 봉투는 어떻게 다릅니까?”
“봉다리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고 봉투는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국문학자의 해석의의미를 아시지요?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는 싸우는 관계가 아닙니다. 화평의 관계입니다.
하루는 아내가 통감자를 삶아서 소금과 함께 내놓으며 남편에게 먹으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니, 누가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어? 설탕에 찍어먹어야지. 빨리 설탕을 가져와.” “아니, 어떤 집에서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요? 우리 집에서는 항상 소금에 찍어 먹어요.” “그거 이상한 집이네. 우리는 대대로 설탕에 찍어먹는다니까!”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가 양쪽 집안싸움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까지 말하게 되자 그 싸움에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합세하여서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은 어떻게 드십니까? 우리 집에서는 통감자를 먹을 때 아무 것도 안 찍고 그냥 먹는데 말입니다. 감자는 그냥 먹는 것도 맛이 참 좋습니다.
사실 국수냐 국시냐의 문제가 아니고, 설탕과 소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화평이냐? 분쟁이냐? 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겸손하셨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비하하고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탕위에 행하는 태도입니다. 나만 옳다고 하는 것은 화평을 깨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결국 싸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묻기 보다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어떤 잘못도 지적하지 않으시잖아요?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해 주시는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온유함으로 말입니다.
엡4:29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화평을 구하는 대화 방법 5가지가 있습니다.
1) 기대를 낮춰라.
'내 남편은 그래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규정을 정해 놓고 그 규정에 맞추려고 하니까 상대가 안 맞으면 비난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기준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화평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듣는 사람이 은혜 받아야 합니다. 덕을 세워줘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잘 될 겁니다!” “하나님 믿으면 반드시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2) 잘 들어라.
'그래서 당신은 문제예요'하고 중간에 비난하려 들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주목하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군요.” 응답을 하면서 경청해야 합니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상대방의 의견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줄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상대가 하는 말을 평가하지 마라.
'그랬겠구나'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달될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잘 해봅시다!”
4) '나 전달법'으로 말을 하라.
'왜 또 늦었느냐?' 하는 비난이나 책망대신에 '당신이 전화도 없이 늦어서 나를 생각하지도 않았나? 해서 서운해요'하는 식으로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 밖에 없어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요?”“당신 때문에 든든합니다.”
5) 상대에 대한 요구나 바람을 말하지 말라.
듣는 이는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저항감을 갖습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해 주었을 때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감사 합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뜻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실망하지 맙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능력 주실 것입니다.” “지혜 주실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덕을 세워주는 말입니다. 은혜를 끼치는 말입니다.
골4:6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으면 - 교회공동체를 해칠만한 일이면, 내 마음에 묻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려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하세요! 미소 짓는 것이 화평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27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요, 한번도 당신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신 약속입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복을 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복을 빌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그리고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녀와 이웃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웃을 위하여 빌던 복이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화니 크로스비'라는 미국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나의 갈 길 다 가도록'등 약 2천여 편의 은혜롭고 감동적인 찬송시를 쓴 분입니다. 이 분이 생후 6개월 만에 병으로 시력을 잃고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92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은혜로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는지 물었더니 "나는 늘 만나는 사람에게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이라고 복을 빌어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줬던 것이 다 내게 와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방법 첫 번째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12절을 보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주간 동안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여러분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시면서 복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한주간 동안 선을 행하시고 화평함을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인의 경건생활
벧전 3장 8~17절 / 김광선목사
며칠 전 구르가온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하루 8 시간 기도한다’는 책이 나왔는데 하루 8시간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고 있습니까?
교단 신문 광고란에 언제부터인가 담임목사가 은퇴하고 새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자격 조건에 꼭 빠지지 않고 감초처럼 들어가는 항목이 하나 있는데 ‘하루 두 시간 이상 기도하시는 목사님’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조건이 없었거든요.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무슨 조건이 추가될지, 그리고 두 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증명하라고 할지 몹시 궁금할 지경입니다.
그만큼 이 땅에 진정한 경건이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마치 개인의 경건과 축복이 기도 시간의 길이와 비례한다는 이런 착각이 한국교회 전반에 깔려 있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 복음이 이렇게도 왜곡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루 8 시간 기도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즉석에서 두 가지를 답변해 주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에서 그 책을 출판하게 되었는지 기회가 되면 질문을 한 집사님에게 부탁해서 그 책을 읽어 보고 평가하는 것이 순서지만 오늘의 만연된 기독교 복음의 왜곡된 현실 속에서 책의 제목이 주는 느낌만으로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하루 8시간 기도하면 일은 언제 합니까?
노동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반성경적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신령한 것이고 노동은 세속적인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하루 8시간 기도할 수 없습니다.
8시간 기도하려면 새벽 4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10시에 마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을 받아 줄 대한민국 직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별 보고 나가 밤 별 보고 들어올 정도로 일을 해도 현상 유지하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 그럼 밤 시간을 이용해 8시간 기도한다고 하면 밤 10시에 기도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기도하고 몇 시간이니 눈 부치고 또 전쟁터 같은 사업 현장에 나가 경쟁하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대로 8 시간 기도할 대한민국 남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혹 가정주부들 가운데 하루 8시간 기도할 수 있는 성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마저 흔치 않을 것으로 압니다.
한국 목사님들 요즘 낮에 심방 안합니다.
낮에 주부들이 집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직장 생활 하든지 아니면 무슨 모임이 그렇게 많아 남자들 못지않게 바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루 8시간 기도한다‘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모든 그리스찬들은 기가 질리든지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감이 들게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루 8 시간 기도 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책의 저자가 책 이름을 ‘나는 하루 여덟 시간 기도한다’로 정한 것은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기도를 한 결과 남들이 받지 못한 큰 은혜를 받았다거나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만큼 기도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이고 ‘여덟 시간 기도’라는 인간적 공로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다 자기가 잘 해서 받은 결과인 것을 말하면서 양념 정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이 요즘 은혜 받고, 축복 받았다는 성도들의 간증 패턴입니다.
우리 교회도 십년 넘게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새벽에 운전할 사람은 담임목사와 운전기사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 준비하고 4시에 집을 나서 델리 시내 바산트 비하르에서 시작해서 칼카지에 이르기까지 한 바퀴를 돌면서 교인들을 태워 교회 도착하면 새벽 4시 50분 정도 됩니다.
십분 만에 불 켜고 마이크 준비하고 새벽 5시에 예배를 시작해서 기도시간까지 하면 5시 45분 정도 교회를 출발해 다시 시내 전역을 돌면서 내려 주고 집에 오면 거의 7시가 됩니다.
아이들 밥 먹여 학교 보내기가 바쁩니다.
새벽에 시내 80키로 정도 뜁니다.
그렇게 십 년 이상을 했습니다.
한 여름에 모기에 뜯기면서, 한 겨울에 불과 몇 미터 앞이 안 보이는 안개를 헤쳐가면서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6시 전에는 전 시내에 교통질서가 실종됩니다.
신호등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새벽을 운전수가 졸면서 운전하기 때문에 운전수 옆에 앉는 집사님의 역할은 운전수 조나 안조나 계속 보면서 깨우는 것입니다.
교통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새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한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부터 체력이 소진되어 새벽에 일어나 델리 시내를 돌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새벽기도를 중단했습니다.
새벽기도를 중단했다고 해서 교회에 문제 생긴 것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 불같이 부흥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섰습니다.
선교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하루 8시간을 기도하고, 새벽기도를 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고 교회가 부흥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십자가 복음에 찬 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이 아니라 힌두교도나 불교도들이 자기들 신 앞에 지극 정성했더니 복 받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다고 새벽에 기도하지 말라는 말로 잘못 들으면 곤란합니다.
얼마든지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합니까?
저는 하루 24시간 기도합니다.
그 책의 저자보다 3배 더 기도 많이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밤에 자기 전에 기도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식사할 때 기도합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찬송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시로 하나님 생각이 납니다.
교회 생각이 납니다.
성도들 생각이 납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병든 성도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늘 생각이 납니다.
천국 생각도 합니다.
자다가 개꿈을 꿀 때도 많지만 가끔은 신령한 꿈도 꿉니다.
24시간의 삶이 기도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도 기도고, 일하는 것도 기도고, 생각하는 것도 기도고, 쉬는 것도 기도입니다.
잠자는 것도 기도의 연속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왜 따로 따로 생각하려는 것입니까?
크리스찬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가 안에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성령과 함께 살고, 성령께서 내재하시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존재들입니다.
물고기가 물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듯이, 새가 하늘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듯이 성도는 성령이라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찬 삶 자체가 기도며 예배입니다.
무릎 끓고 있는 시간만 기도시간이고,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니라 사는 것 전체가 기도며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기도며 예배의 정의입니다.
여덟 시간 앉아서 기도하는 시간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고 그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채 세상일을 하는 시간입니까?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비복음적인 그리스찬들이 많기 때문에 거짓된 경건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강남의 어떤 교회는 특별새벽기도를 하는 40일 기간은 새벽 두 시부터 자리 잡기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
새벽 3 시만 되면 벌써 자리가 없데요.
그래서 그 일대는 새벽 2 시부터 교통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엄청난 성령의 역사라고 선전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현상인지 감이 오지 않나요?
진정한 경건이 사라질 때 이런 거짓된 경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준 것이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50년간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운동입니다.
그 당시 경건주의가 걸어갔던 길과 오늘의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이런 모습이 어쩌면 이리 똑 같은지 놀랄 지경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출발했습니다.
타락된 교회를 갱신한다는 의도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냉랭한 루터 교회의 정통적 교리를 버리고 개인적 신비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뭔가 형식을 탈피한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앞 세웠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백화점 세일 하듯이 성령세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유행처럼 번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형식을 탈피하기 위해 강단에 티셔츠 입고, 찢어 진 청바지 입고, 문신 새긴 몸으로, 남자 목회자들이 귀걸이, 코걸이 하고 설교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지금 잘 따라 가고 있습니다.
큰 교회들이 앞 장 서서 그런 예배 문화를 주도해 가고 있습니다.
독일 경건주의와 아주 흡사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경건한 외적 모습이 보여져야기 때문에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후에 이런 경건의 모습은 점차 의식화, 제도화되어 속은 무덤처럼 부패하고 겉은 거룩한 바리새인들로 변했습니다.
결국 경건주의의 본산지인 할레대학은 비평적 성경연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주관주의(主觀主義)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탄생케 만들었고, 이것은 현대 기독교를 망치는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거짓된 경건은 망해가는 마지막 코스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개인의 경건생활’입니다.
‘개인의 경건생활’이라고 하니까 언뜻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경건생활이라는 개념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 생활은 놀라우리만큼 초대교회 교인들에 의해 실천된 경건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성도들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고도의 경건과 윤리생활입니다.
그들은 경건생활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겠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겠다’ ‘무엇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름 받은 성도들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심을 믿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산 것 뿐입니다.
컨셉을 바꾸어야 합니다.
경건한 생활은 하루 8시간 기도하는 힘겨운 자기 싸움도 아니고, 새벽 두시에 나가 새벽기도 자리 확보하는 전쟁도 아닙니다.
거룩한 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의지로, 나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게 하시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깨달은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기뻐하게 합니다.
그 감사와 기쁨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성도는 성령 하나님의 환경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더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이고, 감당할 수 있을만 하니까 더 연단하게 큰 일 맡기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줄 알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올라 갈 때도 신나게 올라가면서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이고 내려 갈 때도 또 올라갈 줄 믿고 신나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생활입니다.
모양만 하루 8 시간 기도하고, 새벽 2 시에 일어나 자리 전쟁하면서 내적으로 이런 감사와 기쁨과 믿음이 없다면 그런 경건은 거짓된 경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건생활을 보십시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결과 하게 하신 은혜로 자연스럽게 한 것뿐입니다.
베드로전서 서두에 저들이 이런 고도의 경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기초가 무엇이었는지를 이미 말씀했습니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감사와 기쁨이 자연스럽게 경건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 기쁨과 감사로,
I. 형제를 사랑했습니다
1.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본문 8절에, “너희가 마음을 같이 하여”
사랑하니까 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한인교회처럼 단일민족이 모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 이방인, 자유인, 노예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전혀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이 모습을 사도행전 2장 43-47절에 나타난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2장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것이 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결과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 다른 교우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체휼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 “체휼하며”라고 했습니다.
‘체휼’이라는 말은 ‘동고동락’입니다.
피차간의 입장을 내 입장으로 알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3-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동산과 부동산까지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될 수가 없습니다.
3. 불쌍히 여기며 겸손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겸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제가 중단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결점이 발견되기 시작하면 교제가 중단이 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죽고 못 살다가도 차츰 본질이 파악되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교제가 중단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너 그것 밖에 안 되는구나”
“수준이 전혀 안 맞는구나”
그러면 교제가 중단이 됩니다.
교회에서, 전도회에서, 구역에서 나이가 달라도, 신분이 달라도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며 겸손한 은헤를 받기 때문입니다.
4.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었습니다.
본문 9절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데모도 하지 않고, 반정부 운동도 하지 않고, 정권 퇴진 운동도 하지 않고 그냥 복종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도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임을 알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결과입니다.
하게 하시는 은혜가 그렇게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교회 법령이 그랬기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선교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하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면서 기쁜 것입니다.
내가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5. 혀를 금했습니다.
본문 10절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악한 말’이란 남을 해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궤휼’이라는 것은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악한 말,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입에서 악한 말과 궤휼 대신에 찬송이 나온다면 얼마나 큰 은혜 받고 사는 것입니까?
II. 신전의식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12절에,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보고 계신다고 시편 139편에 말씀했습니다.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라고 어머니가 말하니까 애는,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경건이 상실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개혁의 모토가 ‘코람데오’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이런 신전의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성령님과 동행할 때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전의식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III. 선을 행했습니다(13-17)
13절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이 따라 갈 수 없는 고도의 윤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선을 열심히 행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IV. 의를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14절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좋다고 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V. 소망을 가졌습니다
15절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 분명한 대답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왜 교회에 다니는가?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은혜입니다.
VI. 선한 양심을 가졌습니다
16절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고도의 윤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실천이 되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명이 그랬기 때문에, 교회법이 그랬기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믿고, 진리대로 살게 하셔서 이런 경건의 모습이 나타난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거룩해졌기 때문에 이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고 했습니다.
이 원문의 뜻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즉 거룩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거룩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감사와 기쁨과 믿음으로 노력이 아닌 자연스런 내적 경건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을 이기는 생활
벧전 3장 8~17절 / 박조준목사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8∼12절 말씀을 살펴보면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 리의 마음이 얼어붙기 쉽습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미움의 화신이 되기 쉽 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계속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어떻게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려면 마음을 같이 하라 했습니다. 헬라 원어 에는 호모 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질적인 일치, 동질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로 일치될 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 적어도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형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방법의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한 시비를 가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원칙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 왜 라는 데 관해서 절대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 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문제가 있으면 안됩니다. 정말 구원받은 그 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불일치는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꼭같은 생각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 고 말할 때 이것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근원적인 것에 관해서는 마음을 모을 수 있 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에 관해서는 서 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것, 결코 양보할 수 없 는 기독교 교리의 근본인 성경이 큰 소리로 강조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절대로 마음이 갈라질 수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것에 관해서 마음을 모으면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 선교의 공동 목표를 향해서 똑같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사랑이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체휼하라 했습니다. 체휼 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두 가지 낱말이 결합된 것입니다. 같 이 라는 말과 느낀다 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느낀다 는 뜻입니다. 체휼이란 이웃의 기쁨과 이웃의 슬픔, 이웃의 모든 삶의 장에 동참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정 말 형제를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 있는 이웃들의 기분에 동참하고 이웃들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 로 함께 울라 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 워할 수 있습니까? 출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성공해서 즐거워하 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약자를 동정하는 것은 다소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 제가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손뼉 치며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 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지체 의 식을 가지고 슬픔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같이 느끼 는 것입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보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제일 강조된 것이 바로 이 불쌍히 여기시는 속성입니 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성 경은 하나님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방황하는 수많은 무리를 바라보실 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더라 했습니다. 여 러분,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이 사람들을 보시던 그 눈으 로 사람들을 지켜보십니까? 그리스도 없이 무작정 걸어가고 있는 저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서 불 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 없지만 불쌍히 여기는 일이 우리 믿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 때 상 대방의 약점이나 잘못이나 허물을 용납하면서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의 약점을 비난 하기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모든 교회의 모습은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실수 하나 하지 않고 허물 하나 없이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쌍히 여기는 삶의 태도가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 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다음엔 겸손하라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 사이에 형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겸손 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 겸손의 문제를 우리에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겸손의 가장 훌륭한 모본으로 예수 님을 말씀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을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겸손이란 어떤 태도를 말합니 까? 골로새서 2장에서 겸손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 보면 그리 스도인들이 절대로 갖지 않아야 할 태도를 말씀했는데, 그 말씀 가운데 하나가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꾸미는 겸손,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정신, 겸손한 영성의 핵심은 한마디로 종의 정신입니다.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서 섬기는 태도를 가지는 그 순간 나는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 구보다도 겸손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 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대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섬기 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종의 정신 을 되찾아야 합니다. 언제 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이 계급처럼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지도자,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섬 기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데 있 습니다. 우리 모두가 받으려고 하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 러나 주려고 하고, 섬기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섬기고자 하는 마음, 곧 겸손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까지 사랑하 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보세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했습니다. 나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 나에게 욕을 하고 험담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될까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참으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태도로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고 주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월권 행 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주 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우리가 원수를 갚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 는다는 사실만으로 원수에 대한 태도가 정립된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행한 일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한다고 말 은 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했 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했다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 신다고 선언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잊으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다 옮기셨고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 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로 던지시리이다 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발로 밟 으시고 다음에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 다에 우리 죄를 던져 주시는 주님은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십니까? 이사야 38장 17절을 보세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 나이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죄를 등 뒤로 던지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디 있 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죄는 주님의 등 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은 내 죄를 보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등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이런 성경구절은 신구약 성경에 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을 잊었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르게 정립된 것은 아닙니 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원수를 갚 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의 잘못을 잊어야 할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리어 복을 빌라 고 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 생각만 해도 괴로운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람을 축복해 보세요. 그러면 내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놀랍게 치료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합니다. 기도해 보세요. 축복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 후에 하나님이 그 상황 을 주장하사 놀랍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에게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한 후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이를 위하 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 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 이고, 이런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에게 이런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 운 복을 준비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유업의 복은 물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풍성한 축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 다. 그 다음의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 복은 미래적인 복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누리는 복 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축복하는 삶 을 살 때, 그 복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원수를 미워해 보세요. 이를 갈아 보세요. 점점 더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굳어지고 혈압이 오릅니다. 식사도 안되고 해도 소화 가 안됩니다. 결국 누구의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제일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에 뭐랬어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했는데 여기서 생명을 사랑하라 는 것은 한 영혼을 사랑하라 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을 즐기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한 번밖에 못 사는 이 삶을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 있게 살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했습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살기 위 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웃과의 바른 관계 없이 우리는 절대로 행복 한 날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깨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인간 관계의 균열과 갈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인간관계가 금이 가면 우 리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름 답기를 원하십니까? 바른 인간관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먼저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10절 하반절을 보세요.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 지체 중에 제일 먼저 활동하는 것은 혀입니다. 그래서 성경 은 혀를 금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의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 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세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했습니다. 처 음에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지만 잘못한 사람을 인하여 이를 갈다보면 얼마 후에 나도 잘못을 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떠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세요.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화 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저들이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라고 감탄할 때가 언제 일까요? 우리가 화평의 삶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화평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 저들은 무엇인가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 고 이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살면 어떻게 하신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까? 오늘 주 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며 주의 낯 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들을 의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눈과 낯 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주님의 눈과 주님의 얼굴에 대한 추억이 많을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 을 부인하던 자기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감회가 있겠습 니까? 주님의 얼굴에 관해서도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익숙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입 니다. 주의 낯은(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람을 사랑하 는 삶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 13∼1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 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 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서 두려움 이라는 말 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조금 전에 읽은 13∼15절 말씀은 구약 성경 이사야의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앗수르나 수리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두려워하게 되며, 두려워한 나머지 그 두려움을 면키 위해 서 쉽게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올 때 먼저 기억할 것은 거룩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 게 하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이 되는데 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고난을 받을 때 위기에 직면하면 사람과 타협하기 쉽고 그러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14절 말 씀을 보세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했어요.무슨 말입니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할 때에도 타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죄를 짓기보다는, 오히려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뭐랬어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말씀했습니 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으로 삼기 쉽습니다. 나를 위협하고 나에게 두려움 을 가져다주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그 대상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 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도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주님 이라는 말은 역사를 통해서 두 가지로 쓰여 왔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여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과 두려움이 직면해 오는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거룩함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내 삶을 구별해서 나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일생에 한번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분을 위해서 내 삶을 온전히 바친 체험이 있습니까? 성경은 바로 이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 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인기 있는 사람을 따라가는,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나의 삶의 주권자 로 삼은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것만큼 전도를 용감하게 할 수 있고, 타협하는 것만큼 전도의 능력은 상실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난이 와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는 이 분명한 삶 위에 서게 되면 그 고난은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위대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언제 복음의 영광이 제일 많이 드 러났습니까? 순교 시대, 박해를 받을 때였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지 않아 결국 핍박을 받게 될 때처럼 복음의 영광이 많이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면서도 고민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들이 죽으면서도 찬양하며 기뻐할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면 그만큼 우리의 복음 전 도는 빛과 영광을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온유와 두려움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양심이란 함 께 본다 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를 따라 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어떤 이는 양심 을 영혼의 창 이라고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목 소리 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이 맑으면 영혼의 창이 맑아집니다. 이 맑은 창을 통해서 진리의 빛 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고 권면했습니 다. 양심은 귀하면서도 흔들릴 수 있고 더러워질 수 있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화인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선한 양심을 가지라 고 말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그 결 과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1. 죄가 들어오면 즉각 죄를 토해버려야 합니다.2. 성경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3. 내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벧전 3장 10-12절 / 주택규목사
1. 혀 관리(10)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 관리를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좋은 날 보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혀의 중요함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숭례문(남대문)은 일회용나이타로 불탔습니다. 다시 복원하려면 8,000만 달러가 소요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혀는 이렇게 모든 것을 삽시간에 망칠 수 있는 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우리는 덕이 되는 말 좋은 말만 하고, 나쁜 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구원받은 기쁨의 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회개의 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귀하신 여러분,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시 34:12-13).
그리스도의의 입에서는 죄를 회개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혀 관리를 잘 하여 반드시 좋은날 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손 관리(11상)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여기서 '떠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리나토'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라'를 의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악에서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상).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 선한 행실, 즉 좋은 일을 하는 착한 손이 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은 아무도 선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렇게 사람은 악하기에 성경은 악에서 먼저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하려하심이라"(벧전 3:9).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는 성급하고 감정에 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룻다에서 가까운 욥바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한 착한 다비다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다비다는 평생 남을 돕는 선한 일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베드로를 그 가정으로 초대했습니다. 동네 과부들은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입고 그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많은 선행을 한 여자가 죽었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내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다비다는 선을 행하고 마지막 날에 좋은 날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때 일을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귀하신 여러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손 관리 잘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셔서 정말 좋은 날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음 관리(11하)
"11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시 34:14하).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화평을 구하고 그 평화를 좇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말로만 평화를 구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말로나 생각으로만 평화를 말하고 구한다면 그것이 세상에서 무슨 가치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화를 구하고 그 구한 평화를 좇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평화를 어떻게 좇아야 하겠습니까.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7-18).
우리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려면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평화를 구하고 평화를 쫓아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세 가지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1) 혀 관리 (악한 말, 거짓말을 안 하는 혀).
2) 손 관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손).
3) 마음 관리(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는 마음).
이 세 가지를 잘 관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15-16).어떤 큰 축복입니까?
1) 하나님이 항상 저와 여러분들을 보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2) 하나님이 항상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 귀 기우리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귀하신 여러분, 여러분께서 혀 관리, 손 관리, 마음 관리를 잘 하시면 정말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여러분께서 부디 이 세 가지 잘 관리하셔서 참 좋은 날 더 좋은 날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벧전 3장 10~12절 /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여러분, 살아오면서 좋은 날이 많았습니까? 나쁜 날이 많았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흉한 날과 좋은 날을 많이 믿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날에 결혼하고 싶어하고 이왕이면 손 없는 좋은 날에 이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좋은 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예비 신혼부부들은 예식장을 비싸게 예약하여 그런 날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좋은 날에 이사한다고 몰려서 그런 날은 이삿짐 차를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 경쟁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따로 어느 달 어느 날이 좋은 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좋은 날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돈을 주고 물어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좋은 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고, 우리가 소망하던 일들이 다 이루어지는 좋은 날이 매일매일 계속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이라고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어쩌다가 좋은 날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의 연속이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대로 실천하여 매일매일 좋은 날이 여러분 앞에 활짝 전개되기 바랍니다.
1,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10)
10절에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복 받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놀랍게도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정말 안됩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 죽습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우리 입에서 떠난 말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습니다. 겨냥한대로 꽂힙니다. 말에는 엄청난 힘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좋은 날을 보기 위해서는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진실만을 말하라고 말씀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경제 위기도 정직하지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실이 없어서 문제고, 정직하지 않아서 문제를 키웠습니다.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말 한 번 해본 것인데' 하고 거짓말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거짓말은 굉장히 큰 죄입니다 위증죄는 아주 큰 죄로 여깁니다. 그 어떤 사람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것도 정적들에 대해서 도청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청한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서 거짓말한 것 때문에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복된 날이 찾아옵니다. 남을 속여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진실해야 잘산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말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좋은 말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입술에는 악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악한 말을 그치고 남을 넘어뜨리고 해하기 위한 거짓의 말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 원하고 생명을 사랑한다면 나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혀에 자갈을 물리고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좋은 말을 가려 해야 합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험담을 하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는데 있다."
말은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정다운 인사 한마디가 하루를 멋지게 열어줍니다. 짧지만 이런 한마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참 잘했어." "기도 할께." "넌 잘 될거야!" "네가 참 좋아."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오늘 당장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말을 해봅시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행복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행복한 날을 열어주십니다.
2.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11)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불행하고, 남들보다 더 수입이 적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 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비싼 명품으로 치장을 하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허무함을 맛보게 될 뿐입니다.
본문에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게 사는 삶, 화평을 따르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날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원래 이웃이라는 말은 '이' 라는 말과 '웃' 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이' 라는 말은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웃' 이라는 말은 위라는 말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윗사람으로 높이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가장 기초적인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악에서 떠나고 선한 일을 열심히 찾아서 하고 그리고 서로 화목하고 화평을 구하여야 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래에 안타까운 소식이 뉴스에 많이 등장합니다. 부부간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도 있습니다. 형제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살인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웃간에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투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살인 사건의 7-80%는 가족 또는 친구 등 아주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잘 대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이웃, 친구와 동료들과 관계를 악화시키지 말고 좋은 관계로 개선해야 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다투지 마십시오. 기분이 상할 때 특히 악한 생각, 악한 감정, 악한 언어를 다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화를 내는 것,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늘 선하게 대하십시오. 적극적으로 화평을 구하고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화목한 관계로 화해시키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이웃과도 화해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웃 중에서 사이가 나쁜 사람이 있다면 속히 화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섭섭함을 풀고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좋은 날을 불러오는 열쇠입니다.
3.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12)
눅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를 다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해진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탕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좋은 날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자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합니다. 잔치를 크게 열고 사람들에게 돌아온 자식을 자랑하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좋은 날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성공을 위하여 정신 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채 세상적으로도 성공한다고 해도 나쁜 날을 계속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은 기도입니다. 부모자녀 사이에도 대화가 중단되면 저절로 관계가 멀어집니다. 날마다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은 행복합니다.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좋은 날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 이어집니다.
어느 날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전 목사가 화단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집의 강아지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화단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꽃을 무척 좋아했던 스펄전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강아지를 향해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강아지를 내쫓기 위해 나무토막을 집어 던졌습니다. 얼마 후 그 강아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나무토막을 물고와 스펄전의 발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전은 자신을 믿어준 강아지를 향해 더 이상 고함을 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습니다. "강아지야, 화단에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들어오렴. 내가 네게 졌다"
그 순간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크고 작은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할지라도 염치없는 강아지처럼 계속 매달리는 사람이 결국 큰 사랑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며 사랑을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신앙이란 '눈치'보지 말고 '간구'하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에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화 「불의 전차」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소개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 에릭 리들은 중국에서 20년 동안을 선교사로 사역하였는데, 마지막 2년은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일본군 수용소에 갇혀 지냈습니다. 참기 힘든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룹들 간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끓어오를 때마다 그들 사이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그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리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어느 날 리들이 점호에 나타나지 않자 일본군 경비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에릭이 몇 시간 전에 갑자기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경비는 잠깐 주춤하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리들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었나? 그렇지?"
리들은 일본어를 전혀 몰랐고 경비병도 영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직접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은 하루에 두 차례 의무적인 점호시간 뿐이었습니다. 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경비병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수용소 안에서 싸움을 해결하던 에릭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날입니까? 질병이 없는 날인가요? 환난이 없는 날인가요? 고통이 없는 날인가요? 실패가 없는 날인가요? 본 절은 시편 34에서 인용한 노래 가사입니다. 거기에 나타난 의인은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환난 속에서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뼈마디 하나하나를 걱정할 정도로 아픈 사람입니다. 그런데 풍파 속에서 피할 피난처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기 때문에 나쁜 날이 좋은 날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쁜 날이 좋은 날로 바뀌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좋은 날이 연속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은혜가 넘쳐 은혜로운 말만 가득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화평의 길을 쫓음으로 더 좋은 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기도에 힘써서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마음이 밝아지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벧전 3장 10~11절 / 이용효목사
어느 분이 책에서 이른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발명한 수많은 고성능 무기 중 가장 무시무시하고 비겁한 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칼과 총은 핏자국을 남긴다. 폭탄은 건물과 도시를 파괴한다.
하지만 말은 아무런 신호 없이 악을 키우고 선과 생명과 행복을 파괴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상처를 받고 반항하거나 풀이 죽거나 타락한다.
아내들은 반복되는 남편의 폭언에 상처를 받고 죽어간다”
부정적이 말이 가져다주는 파괴력에 대한 글인 줄 압니다.
1.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악한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금해야 합니다.
본문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하였습니다.
원어에 보면 <조엔 아가판 카이 이데인 헤메라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과 좋은 날은 <사는 날 동안 즐겁고 만족하며 땅에서 번영하는 현세의 복>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거듭된 부정부사를 사용하여 언어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말은 원어로 <카쿠>인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말과 부정적인 모든 언어를 가르키고, 궤휼은 원어로<돌론> 인데 거짓말을 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말을 버리고 언어를 고치면 생명과 좋은 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버피>박사는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항상 마음을 담아서 말을 하라 말은 하나님 자체다 항상 내 마음에 있는 귀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되 가벼운 말은 절대로 하지마라 좋은 말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결가가 나온다.”
말을 잘 쓰면 대단히 유익하지만 잘 못쓰면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 박사님이 연구를 했는데 결과가 놀랍습니다.
두 개의 유리병 속에 각각 똑같은 밥을 넣었는데 한쪽 병에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했더니 누룩이 되었고, 한 쪽 병에는“망할 자식 뒤질 놈” 욕을 했더니 다 썩어 버렸습니다.
옛날 유대인 중에 <시락>이란 사람은 “나무나 돌이나 칼에 맞은 몸의 상처는 쉽게 나을 수가 있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서 총과 칼에 죽은 사람이 많으나 이 혀, 독설에 죽은 사람과는 비길 바가 못 된다” 고 말했습니다.
휴스 의과대학의 심장병 전문의 <스미스> 박사님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의 영혼은 곧 몸 밖으로 나와 자신의 제자들이 쓰러진 자기 몸을 마사지하는 것을 보다가 주님의 심판대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심판하시는 분이 질문을 하더랍니다.
“네가 살면서 상처 준 사람들을 보아라.” 상처 준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자기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심판하시는 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하며 다시 세상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깨어나 보니 영안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의사를 그만두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와서 세미나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은 “말로 서로 상처 주지 말고 상처를 주었으면 최대한 회개를 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해야 됩니다. 부정적인 말속에 언제나 마귀가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은 성령님이 역사합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른 건 참을 수 있는데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이 주인들이 하는 욕이라고 합니다.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도 그곳에 와있는 한국사람 보면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업주로 부터 무지 막지한 욕을 자꾸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3:13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절) “그 입술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잠10:11절)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15:4절)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침례교 목사인 심슨은 “나는 어느 누구든 그리스도의 종을 비난하거나 혹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중상모략의 화살을 무책임하게 쏘아 댐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상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번쩍이는 번개와 놀거나 아니면 불과 같은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손으로 붙들겠다.”
남을 험담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전달하거나, 남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남을 저주하거나, 더러운 말을 하거나, 논쟁의 말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고 악한 말을 우리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2. 좋은 말은 좋은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움베르트 마트라> 라는 신경과학자는 이렇게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고 있다.”
말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고, 말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 간다는 뜻입니다.
의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모릅니다.
고치기 어려운 병도 의사가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며 함께 협조를 구할 때 그 사람은 회복될 가능성을 훨씬 더 가지게 됩니다.
예전부터 우리에게 전해오는 민간설화에 약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해서 위약효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왔을 때 특별히 먹일 약이 없어 의사가 밀가루를 반죽해서 주면서 이것이 특효약이니 이것 먹으면 두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그 것을 주면 그 밀가루를 먹은 사람들 중에 40%는 깨끗이 두통이 사라진다고 하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병이 낫는 것은 약효 때문이 아니라 이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을 얻어 우리 몸에 건강의 청신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의사가 부정적으로 한 마디 하기를 “힘들겠습니다.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 그 때부터 환자는 급속도록 병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잠18: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미국 테네시주 루이스 빌의 한 레스토랑에 오클라호마주에서 온 신학교 교수 부부가 식사를 하는데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다가와 제가 좋은 말을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 저기 보이는 산자락 밑에 작은 동네가 있습니다. 오래 전 그 동네에 한 미혼모가 사내 아기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동내 사람들에게 너 아버지가 누구냐? 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아이는 우울하였고 사람들을 피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12살 되었을 때 출석하는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그 소년이 어른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담임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인사하며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도 어른들 틈에 섞여 나올 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애야 너 아버지가 누구시냐?” 사람들은 순간 긴장하며 그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분위기를 알아챈 목사님은 재빨리 “아 알겠어. 난 너 아버지를 알고 있어 바로 그분이 너의 아버지야” 순간 모든 사람들은 놀라서 목사님을 바라보았어요. 그때 목사님은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야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법이지 넌 하나님의 아들이야 너 하나님 아들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된다. 알았지” 그 말을 들은 후 그 소년은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오. 그리고는 웃으며 레스토랑을 나갔습니다. 얼마 후 옆 테이블의 손님이 “그 분이 누군지 아시나요? 그분이 바로 그 유명한 테네시주의 주지사인 <벤 후퍼> 씨입니다.” 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젊은 목사의 말 한마디가 위축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한 소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파스칼>이 말하기를
<친절한 말은 사람의 마음에 그 말의 형상 즉 아름다운 형상을 심는다.
그 말은 듣는 이를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하며 편안하게 해 준다. 또한 심술궂고 까다로우며 불친절한 감정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 말들은 진즉에 충분히 사용되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폴란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소년은 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교수로부터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네 손가락은 너무 짧고 굵다. 유연성도 부족하다. 다른 악기를 택하도록 하라”
소년은 낙심이 되고 마음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만찬회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 한 신사가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너는 피아노에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라” 소년은 중년신사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 노신사의 이름은 <안톤 루빈스타인>이었습니다.
소년은 그날부터 하루에 일곱 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피아노의 천재'로 불리는 <잔 파데레우스키>입니다.
격려의 말 한마디가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루이스 피티>가 쓴 황금동전 에 나오는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싶은 돈의 액수는 얼마입니까?
그 돈보다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살 수 있는 많은 돈을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 많은 돈이 어디에 있느냐 구요?
그 돈은 은행에 있지 않고 여러분에 입에 있습니다.
그 돈의 이름은 "사랑의 한마디"입니다."
"칭찬의 말"이라고 하는 황금 동전은 쓰면 쓸수록 부자가 되고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말입니다.
3.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복된 말을 해야만 합니다.
(잠18:20절)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왕이면 축복의 말,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 무엇입니까?
“아들아! 나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너무 좋아!” 이렇게 말한다면 자녀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야 이놈아! 네가 도대체 잘 하는 것이 뭐가 있어?”라고 말하면 자녀의 의욕을 꺾고 그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자녀들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아빠! 나는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엄마 너무 너무 사랑해요!” 그러면 부모들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녀들은 “나를 낳은 엄마가 원망스러워요. 엄마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요. 아빠는 나를 낳고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그런 말을 들은 부모들은 매우 섭섭함을 느낍니다.
미국 인디에나 주 헤몬드침례교회를 담임하신 <잭 하일즈> 목사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일년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어릴 때부터 그의 어머니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이 말을 따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가 군에 가기 전 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어머니가 이 말을 따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신앙과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위대한 종이 만들어 졌던 것입니다.
<황수관>박사의 글을 신문에서 읽어보니 그 분의 아버지는 평생을 살면서 항상 재미있고 유익한 말만 하셨다고 하였고, 그분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기도를 해 주시면서 “나는 널 임신 하였을 때 태몽으로 사자 꿈을 꾸었단다. 너는 큰 인물이 될 거야.” 항상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말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배우자를 칭찬하고 자녀들을 칭찬하여야 합니다.
<게리 체프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은 영혼에 떨어지는 부드럽고 따스한 빗물과 같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내면적으로 가치와 안정감을 느낀다. 설사 그런 말은 짧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는 평생 그 말의 열매를 추수한다.”
실재로 칭찬의 말은 쉽게 잊어지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에 어느 분이 제 코를 보면서 예수님 코를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닌 줄 알지만 정말 내 코가 예수님을 닮았나? 그 분의 그 말이 늘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처한 형편이 어렵고 골치 아픈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까? 하지만 부정적인 상황을 골똘히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말 복된 말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난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날도와 주신다. 나는 이미 복을 받았어. 그러므로 내가 손을 대는 건 무엇이든 성공하고 번창할 거야.”
꿈만 꾸지 말고 요셉처럼 복된 말을 선언하여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루어진 것처럼 말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11:23,24절)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 왔다고 할지라도 느낌이나 증상을 말하지 말고 믿음으로 건강을 선포하십시오. “지금 느낌은 좋지 않지만 하나님이 날 치료하고 계셔 난 더 강해지고 더 젊어지고 있어 내 인생 최고의 날이 오고 있어”
피곤하다고 말하고 힘들다고 말하고 병들었다고 증상을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항상 그렇게 피곤에 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 요엘서 3:10절에는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가난하다면 부요를 말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병들었다면 건강을 말하십시오. 지금 당신이 골드 미스라면 배우자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십시오. 당신이 말한 그대로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에 최근에 낸 책 <최고의 삶>이란 책에 보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여성 암 환자 중에 자신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환자가 부정적으로 표현한 환자보다 회복 가능성이 높았다고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말하고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막11:23절)
반면에 신앙의 세계에서 의심의 말, 불신의 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할 수 있습니다.(마12:31,32절)
주 예수님은 평상시 우리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관심 있게 듣고 계십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할지라도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혀를 금하여야 하겠고,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복된 말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새 방언을 말하여 우리 입술에 복된 말이 익숙하도록 훈련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충만하여 늘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 찬송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할 때 마다 혀를 잡아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입
벧전 3장 10~11절, 잠 18:20-21 / 최종원목사
지난 금요일에 20년 동안이나 교회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정지현양의 결혼주례를 하면서 가슴이 뭉클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철무지 꼬마가 성년이 되어서 신랑과 함께 웨딩카를 타고 등장했을 때 그 옛날의 꼬마가 아닌 아름다운 신부를 본 것입니다.
어느 결혼식장에서든지 아름답지 않은 신부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운 신부였습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연속해서 말씀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가장 아름다운 입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의 말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내뱉은 것으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은 그의 말하는 대로 환경이 조성되어 복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0-21)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 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장 아름다운 입'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식어 지고 마귀의 시험에 들면 우리 입은 긍정적인 말 대신에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입술을 지켜서 긍정적인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를 지나 호르산에 이르렀을 매 음식이 마음에 안든다고 원망하고 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을 복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려고 하시는데, 더욱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서 마시게 해 주시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며 부정적인 말을 했을 때, 하나님은 불 뱀들을 보내서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모세의 간곡한 기도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고,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치료받고 낫게 하셨습니다.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화가 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스러울 때마다 부정적인 말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하던 사람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면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없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기와 함께 계시니 걱정 없습니다"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리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그들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공적인 사람, 복 받은 사람은 그 말이 긍정적입니다. 항상 입에서 "아이구 죽겠다", "죽지 못해 삽니다", "큰일 났습니다"하고 탄식의 말, 불평의 말을 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잘사는 법이 없고, 성공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감사하는 대신 불만의 조건 만 찾습니다. 밝은 면을 보지 않고, 굳이 어두운 면만 찾아내서 투정을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다닐 때 열등생이었나 봅니다. 그의 학생기록부에는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슴."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네 부모님들 같으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가 남과 같으려고 하면 같을 수가 없단다. 너는 남과 다르단다. 남과 같은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나을 수 없지만 남과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훌륭할 수 있단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어머니의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용기를 주었고, 축복이 되어 아인슈타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금세기 최고의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되게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한 부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항상 부정적인 말을 하며 불평과 탄식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①진정한 믿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②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은 그 심리상태가 바르지 못하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요하고 맑은 호수에 아름다운 그림자가 비치듯이 긍정적이고 안정된 마음에만 하나님의 뜻이 비취는 것입니다. ③ 부정적인 말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음에 마귀가 침입해 들어오면 우리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이 의인 욥의 재산을 빼앗아 가고, 자녀를 죽게 하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을 당하게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려 했으나, 욥은 끝까지 그 입을 마귀에게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 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고 그 입으로 마귀가 좋아하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욥은 마침내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독일군은 불평의 말을 그 자리에서 하지 못하게 하고 하룻밤 지난 다음에 말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복된 입은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2. 비판의 말 대신 칭찬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과 2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거니와,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가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거나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결점을 들춰내기 좋아하고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점을 말하면 곧 방어상태를 취하거나 반항하려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1865년 4월 15일 부으드라는 사람의 흉탄에 맞아 싸구려 여관방에 눕혀졌을 때, 스텐턴장군이 내려다보면서 "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만큼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스텐턴은 전에 링컨대통령 보고 고릴라, 침팬치라고 놀려대며 악평하던 사람인데, 링컨은 그것을 알면서도 국방상의 요직에 스텐턴을 앉힐만큼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도 젊어서 인디애나주의 시골에 살 때에는 남의 잘못을 들춰내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편지나 시를 써서 길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고 신문지상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제임스 실즈라는 사치하고 싸움 잘하는 사람을 '스프링 필드 저널'이란 신문에 풍자적으로 공박했습니다. 이 필자를 알아낸 그는 당장 말을 타고 링컨에 게 달려가 결투를 요청했습니다. 결투방법은 링컨이 선택하게 했는데,그는 키가 크고 팔이 길어 기병대가 쓰는 날이 넓은 긴 칼로 싸우기로 결정하고 들판에 나가 결투를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때 다행히 쌍방의 입회자들의 중재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링컨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고 난 뒤부터 남의 결점을 꼬집고 비난하는 버릇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링컨은 측근자들이 남부사람들을 욕하면 "너무 나쁘게 말하지 말라구. 입장이 바뀌면 우리도 틀림없이 남부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될꺼야"라고 하면서 말렸다고 합니다.
남의 결점을 고치려 들기 전에 우선 자기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사람은 대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동물이며, 편견과 허영심에 가득차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행동해야만 됩니다. "하나님도 한 인간을 심판하시되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다"라고 영국의 존슨(Johnson) 박사가 말했습니다. 상대방을 칭찬해 주는 사람이 남에게 호감을 사고 성공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호올 케인이라는 사람은 대장쟁이의 아들로서 유명한 작가가 되어, 그의 저택은 관광객들의 성지가 되고, 그의 재산은 그 옛날에 250만불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출세하게 되었는가 하면, 당시 영국의 유명한 시인 로세티를 좋아한 나머지 그의 예술적 공적을 찬양하는 논문을 써서 그 논문을 복사해서 로세티에게 보낸 것이 발단이 되어 비서로 등용되었다가 그렇게 출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두쇠로 유명한 자기 숙모한테 가서 1890년도에 지은 낡아빠진 집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정딸 고전미가 있고 꿈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이라고 칭찬했더니, 그만 숙모가 흥분이 되어 집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더니 마침내 많은 사람이 탐내도 주지 않던, 남편이 죽은 후 한번도 타지 않던, 피카드 승용차까지 줘서 받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아담슨(Adamson)이란 사람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스트맨(Eastman)이란 푸 빌딩의 주인에게 의자주문을 받으러 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5분 안에 말을 끝내지 않으면 쫓겨나게 되니까 잘 알아서 하라고 하더랍니다. 아담슨은 방에 들어가자 한참 주위를 살펴본 후 감탄하면서, "이 방의 훌륭한 치장에 탄복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방은 전에 본 적이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까다로운 양반이 얼굴에 기쁨이 가득해서 친히 일어나 말하기를 "이 벽은 영국산 떡갈나무가 아니라 이태리산 떡갈나무로 만든 것입니다"하며 방에 관해 온갖 설명을 다 해 주고 융숭한 식사대접까지 하더랍니다. 5분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사람과 두 시간이상 같이 담소하고, 당시 9만불(오늘날에는 몇억원에 상당하는 금액)에 상당하는 두 건물의 의자주문을 거뜬히 받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꼬집고, 결점을 들춰내며 비판하는 일은 조금도 유익하지 않고 성공적인 삯에 지장만 주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타인의 훌륭한 점과 좋은 업적을 발견해서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입에 발린 말이나, 진실이 없는 아첨의 말을 하면 도리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게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함과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약3:2)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 살펴 경건한 신앙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언어를 구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불 신앙적인 말 대신 신앙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찬들이 참으로 훌륭한 신앙을 갖기 원한다면, 생각하고 말하는데 있어서 트집을 잡거나 지나치게 변론적인 불 신앙의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신앙적인 고백을 하도록 힘써야 됩니다.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할 때에 믿음의 위력이 나타나며, 입으로 고백할 때에 없던 믿음도 생겨납니다. 캐니온(E.W. Can-ion) 은 "믿음은 고백하는데 용기를 주고, 고백은 믿음에 용기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넌(David O. Nun)은 "믿음이 당신을 지배하기에 이르고, 그 믿음이란 당신의 고백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 대신 신앙적인 말을 하고, 신앙적인 고백을 하도록 힘써야 됩니다. 교회에 10년을 다녀도 신앙의 고백은 하지 않고 의심을 품고 회의적인 말만 하면, 생전 믿음이 안 생기고 안 자랍니다.
① 구원받는 것도 고백행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영생을 얻고 천당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 내리는 것같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8-10)고 말씀한 바와 같이 간단한 것입니다.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로 마음에 결심하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오늘 이 시간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기도를 따라하게 하고, "믿습니다" "아멘"을 복창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믿고 입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며 구원도 못받습니다.
② 병 고침도 신앙고백에서 이루어집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한 마가복음 11장24절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한 다음에는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낫게 해 주셨음을 믿고 기도하고, 믿고 고백해야 됩니다.
③ 마귀를 이기는 것도 시인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사탄 마귀와 싸워 이기는 법을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의 피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사탄 마귀는 이빠진 사자요, 이 빠진 독사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마귀를 이긴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신앙을 고백해야 됩니다.
에덴교회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입을 소유했다면 그것처럼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무심코 내 뱉는 한 마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한 말 때문에 마음 아파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유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제부터 우리의 입을 통하여 타인에게 용기만 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입을 소유한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벧전 3장 10~12절 / 이삼규목사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을 지냈고 현재 국무장관으로 재직 중인 콜린 파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웰은 뉴욕의 슬럼가인 사우드 브롱크스에서 자랐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범죄와 폭행과 가난 속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그 지역은 가난과 범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한 교사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파웰은 그의 후배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선생님은 편지를 들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학교에서 콜린 파웰 합참의장이 나왔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절대 낙심하지 말고 중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시고 미래를 준비하시오. 여러분들 중에는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오고 위대한 지도자 나올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의 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편지를 읽고 비록 힘든 처지에 있지만 자기들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 학교에서는 마약이 없어지고 폭행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좋아지기를 원합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내일 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내일에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지금보다 못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개선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이 오늘보다 더 못한 것이라면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든지 아니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대한 소망이든지 내일은 오늘 보다 더 좋은 날이 되기를 말입니다.
벙어리요, 귀머거리요, 장님이었던 헬렌 켈러는 "소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소망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으며 소망이 없이는 인간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소망처럼 그는 삼 중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류의 참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소원이 마음에 있다고 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행이나 운수를 바라고서 소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소원이 현실화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12절은 시편 34편 12절에서부터 16절까지를 인용한 것인데, 구약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제시하려는 교훈에 맞게 생략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의 '생명'과 '좋은 날'은 인간의 현세적인 축복, 즉 장수와 번영과 명성, 재해로부터의 해방 등을 나타내는 말씀이지만,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미래의 기업, 내세의 축복으로 그 의미를 종말론적인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명을 사랑하고'는 불행과 고통에서 떠나 희열과 평안의 생활을 얻으려고 사모함을 의미하는 말이며, '좋은 날'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좋은 날 즉 장수를 의미하지만, 장차 올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 땅의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항상 영적이고 내세의 축복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서는 참된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소망의 닻을 내릴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세를 바라보는 자,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자는 그가 취해야 될 삶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생명 얻기를 사모하십니까? 영원토록 즐거움을 누리는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1.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소극적인 면에서 지켜야 할 삶의 원칙들이 있습니다(10-11절).
1)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지체 중의 극히 작은 부분인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곧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참된 경건은 자기 혀를 재갈먹여 그 혀를 통제하는 것입니다(약1:26). 혀의 올바른 관리는 그의 삶을 평탄하게 하며 번창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언어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중국 길림성 훈춘시에 김장로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교회에서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것은 지금의 목사와 같은 신분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화혁명 당시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각 도시나 마을의 청년들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폭행을 당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길림성 훈춘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중에 김장로와 함께 교회에서 사역했던 분이 있는데 이분이 설교하는 가운데 공산당을 비방했다는 밀고가 공안에 접수되었습니다. 그 밀고자는 다름 아닌 그 교회의 김장로였습니다. 그의 밀고로 함께 사역했던 목회자가 붙잡혀 가게 되었고 심한 폭행으로 인하여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김장로의 밀고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 김장로가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김장로의 며느리가 김장로를 부르러 김장로의 방에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만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장로의 혀 바닥이 배꼽 있는데 까지 빠져서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잠4:24)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잠12:19)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잠24:28)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히브리어에 언어를 '다발(dabar)'이라고 합니다. 다발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어떤 힘과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한 번 외부적으로 발해지면 그것은 꼭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만큼 작용하게 됩니다. 의미 없는 말은 없습니다. 힘이 없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말을 할지언정 악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악한 말은 어떤 말입니까? 남을 헤치는 말입니다. 까닭 없이 저주하는 말입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절대로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여집사가 있었습니다. 이간질시키기는 데 천재요, 말을 만드는 데는 수재요, 말을 보태는 데는 귀재였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그 집사 입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본인도 자신을 잘 알기에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자기 자신을 미워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집사라 기도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근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가 혀를 잘라서 제단에 바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혀는 제물로 바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집으로 돌아와서 혀를 잘라 자기 집 개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자기 개가 자기 혀를 씹어 먹는 모습을 본 후 평생 벙어리로 살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여집사는 그 후 습관화된 자기 죄를 이겨보려는 처절한 결단으로 자기 습관을 고쳤습니다.
2)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궤사'라는 말은 '속임, 기만, 배반, 변절'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궤사를 '궤휼'이라는 말로 말하고 있는데 궤휼(돌로스)은 '미끼를 잡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활, 술책, 기만, 계략, 간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 거듭난 신자라면 취할 것은 취할 줄 알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결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과 5장에서 성도가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라고 하였고, 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31절에서는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5장 3절과 4절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입에서는 죄를 회개하는 말과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과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말과 감사의 소리만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까?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른 언어생활을 하십시오. 소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네'라고 합니다. 조랑말(또는 나귀)이라는 뜻입니다. 포니라는 자동차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 조랑말이 똥통을 지고 가면 똥을 지고 가는 조랑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조랑말 위에 임금이 타고 가면 임금을 태우는 조랑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길에 옷을 펴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을 봅니다. 같은 조랑말이라도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말에 무엇을 싣느냐, 내 소리에다 무슨 말을 싣느냐?"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삶을 좌우해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악에서 떠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언어 생활 뿐 아니라 그 삶이 악과는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 "악에서 떠나"(엑클리노)는 "악에서 돌아서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9절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베는 감정에 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그의 변화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은 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는 최선의 길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왜 악에서 떠나야 합니까?
악은 사단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그늘 아래 있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즐겨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에 쌓게 됩니다. 사단은 항상 신자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틈만 보이면 여지없이 공격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악에게 지지 않도록 적극적인 삶이 요구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야쿠자 사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한국인 여인들이 있습니다. 야쿠자는 일본의 유명한 조폭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니 악에서 떠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적극적인 면에서 지켜야하는 삶의 원칙들이 있습니다(11-12절).
1)선을 행하라!
우리가 악에서 떠난 것으로 만족해 버린다면 신앙의 전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버리는 것이 있다면 찾아야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은 소극적인 신앙의 행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실업인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아더 미다스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미국의 10대 재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다스 장로님은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에 50만 달러를 기증했습니다. 또 7억 달러를 쾌척해 선교재단을 설립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많은 물질을 사용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한 기자로부터 신앙과 인생의 성공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아주 간단한 다섯 가지의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성수, 둘째는 온전한 십일조. 셋째는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 넷째는 내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셔들이는 것. 다섯째는 시간과 돈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본문 13절에서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열심으로"라는 말은 "뜨겁게 하다",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열광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악에게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둘 것이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하였고, 2장 10절에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증거 하므로 두 부류의 결과를 비교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악에서 떠나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여기에서 말하는 화평은 구약에 나타나는 샬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라고 말씀합니다(엡2:14).
여기 "구함"은 "열심으로 구하는 것"이며, "좇음"은 "강하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적극적으로 화평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구하고 좇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며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적극적으로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화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맺음을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엡2:16, 골1:20).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화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피스 메이커입니까? 트러블 메이커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화평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참여하는 모든 모임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로서 내가 어떤 모임에 참여함으로 그 모임이 화목해지고 아름다운 모임으로 변화되어 간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자라고 자처하는 내가 들어가는 모임마다 시끄럽고, 다툼이 생기고, 그 모임이 분열되어진다면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분이 있는 사람과의 화평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나를 반대하는 사람과도 화평을 유지해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화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좇으며 그 분을 닮아 감으로 그의 생활 속에서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3)기도하라!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기도 없이 선을 행할 수 있으며, 기도 없이 화평을 구하고 이것을 좇을 수 있을 까요?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행하십니다. 그분의 귀는 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십니다.
시 34: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의인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위기 상황에 놓였었는데 그의 외침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명을 사랑하십니까?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말씀드려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십시오. 입술을 지켜 궤휼을 말하지 마십시오. 악에서 떠나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을 행하십시오.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좇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분명 여러분은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벧전 3장 10~12절 / 문기태목사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일 즉 좋은 날을 많이 믿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날에 결혼하고 싶어하고 이왕이면 손없는 좋은 날에 이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몇년에 한번씩 찾아온다는 길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예비 신혼부부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예식장 수색작전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따로 어느 달 어느 날이 좋은 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좋은 날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가서 돈을 주고 물어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좋은 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고, 우리가 소망하던 일들이 다 이루어지는 좋은 날이 매일 매일 계속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이라고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면 오늘 말씀에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대로 실천하여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여러분앞에 활짝 전개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10)
10절에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복 받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놀랍게도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안된다, 안된다 하면 정말 안됩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 죽습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우리 입에서 떠난 말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습니다. 겨냥한대로 꽂힙니다. 말에는 엄청난 힘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좋은 날을 보기 위해서는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진실만을 말하라고 말씀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경제 위기도 정직하지 않은데서 온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실이 없어서 문제고, 정직하지 않아서 문제를 키웠습니다.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말 한 번 해본 것인데' 하고 거짓말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거짓말은 굉장히 큰 죄입니다 위증죄는 아주 큰 죄로 여깁니다. 그 어떤 사람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것도 정적들에 대해서 도청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청한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서 거짓말한 것 때문에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복된 날이 찾아옵니다. 남을 속여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진실해야 잘산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말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좋은 말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입술에는 악독이 가득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악한 말을 그치고 남을 넘어뜨리고 해하기 위한 거짓의 말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 원하고 생명을 사랑한다면 나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혀에 자갈을 물리고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좋은 말을 가려 해야 합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험담을 하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는데 있다."
말은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정다운 인사 한마디가 하루를 멋지게 열어줍니다. 짧지만 이런 한마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참 잘했어." "기도할께." "넌 잘 될거야!" "네가 참 좋아."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오늘 당장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말을 해봅시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행복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행복한 날을 열어주십니다.
2.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11)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불행하고, 남들보다 더 수입이 적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 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비싼 명품으로 치장을 하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허무함을 맛보게 될 뿐입니다.
본문에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게 사는 삶, 화평을 따르는 삶이 진정 복 있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날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원래 이웃이라는 말은 '이' 라는 말과 '웃' 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이' 라는 말은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웃' 이라는 말은 위라는 말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윗사람으로 높이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가장 기초적인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악에서 떠나고 선한 일을 열심히 찾아서 하고 그리고 서로 화목하고 화평을 구하여야 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슴하십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 주간 쯤 전에 우리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부간에 다투다가 남편이 아내를 찔러 죽인 무서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오남매가 하루 아침에 부모없이 살게 되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살인 사건의 7-80%는 이처럼 가족 또는 친구 등 아주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잘 대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이웃, 친구와 동료들과 관계를 악화시키지 말고 좋은 관계로 개선해야 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다투지 마십시오. 본문에 악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분이 상할 때 특히 악한 생각, 악한 감정, 악한 언어를 다 제하시기 바랍니다. 화를 내는 것,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늘 선하게 대하십시오. 적극적으로 화평을 구하고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이웃중에서 사이가 나쁜 사람이 있다면 속히 화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섭섭함을 풀고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좋은 날을 불러오는 열쇠입니다.
3. 좋은 날을 보려면 좋은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12)
눅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를 다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해진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후에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좋은 날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자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합니다. 잔치를 크게 열고 사람들에게 돌아온 자식을 자랑하며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없이도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좋은 날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성공을 위하여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채 세상적으로도 성공한다고해도 나쁜 날을 계속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은 기도입니다. 부모자녀사이에도 대화가 중단되면 저절로 관계가 멀어집니다. 날마다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은 행복합니다.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좋은 날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 이어집니다.
어느날 세계적인 설교자 스펄전 목사가 화단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집의 강아지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화단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꽃을 무척 좋아했던 스펄전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강아지를 향해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강아지를 내쫓기 위해 나무토막을 집어던졌습니다. 얼마 후 그 강아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나무토막을 물고와 스펄전의 발앞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전은 자신을 믿어준 강아지를 향해 더이상 고함을 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습니다. "강아지야, 화단에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들어오렴. 내가 네게 졌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옳다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허물이 있어도 염치없는 강아지처럼 계속 매달리는 사람이 결국 큰 사랑을 얻습니다. 신앙이란 '눈치'보다 '간구'가 더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노예를 팔고 사던 시절 어느 집에 주인의 신임을 받는 '조'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몇 명의 노예를 더 사려고 조와 함께 노예시장을 갔습니다. 그 때 조는 유난히 늙고 힘없어 보이는 노예를 보더니 그를 사자고 했습니다. 주인은 "저 노예는 너무 늙어서 쓸모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네게 짐만 될 것이다"고 거절하였지만 사랑하고 신뢰하는 조의 간절한 청원 때문에 할 수 없이 늙은 노예를 샀습니다. 집에 돌아온 조는 그 늙은 노예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며 유별나게 보살폈습니다. 그러한 조를 이상히 여긴 주인이 그를 불러 "혹시 네 아비가 아니냐?"하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가 나를 유괴해 노예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노예시장에서 뜻밖에 그를 보게 되었고 순간 '너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제 신분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 매일을 좋은 날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의 언어에서 악을 제거하며 은혜로운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수관계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시고 피차 화해하고 화평의 길을 쫓으시기 바랍니다. 화평의 길을 쫓음으로 더 좋은 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 더,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면 하나님게 의롭게 보리고 기도에 힘써서 귀기울여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감정이 밝아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