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신윤복의 아기업은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배경이 없는 작은 화면에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오른쪽 아래에 혜원을 쓰고 臥看雲이라고 새긴 네모난 도장을 찍었다.
화면 여백에는 부설거사(扶辥居士)가 그림을 보고 쓴 긴 글이 쓰여 있으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부설거사의 글에서는 미인도를 즐겨 그린 당나라 화가 주방의 그림에 빗대면서도 어린아이를 업은 모습에서 평범하지 않은 솜씨를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坡翁見周昉畫背面欠伸內人, 心醉歸來, 賦續麗人行. 恨不今見此四首.
嫣然之態, 復作麗人行如昉畵也.
況又背上小兒, 昉畫之所無. 而風致幽婉, 有筆外神韻. 未知昉畵較此, 復如何.
扶辥居士觀
파옹(坡翁: 蘇東坡)이 주방(周昉)의 그림 ‘얼굴을 돌리고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는 궁녀'를 보고 심취해 집에 와서 ‘속여인행’을 지었으나 지금 이 네 수를 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는데...
아름다운 자태가 다시 제작되니 주방의 ‘여인행’과 같구나
아이가 등에 업힌 모습은 주방의 그림에도 없으니, 풍취가 깊고 그윽한 붓놀림이 있어 기품이 밖으로 드러나니 주방의 그림과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네~
부설거사(扶辥居士)
♡♡♡♡♡♡♡♡♡♡
조실부모하고 초가삼간에 남은 사람은 열두살짜리 혈혈단신 계집애 옹천이뿐이다.
동네부자인 오참봉네 안방마님이 불쌍히 여겨 자기집 부엌에서 찬모를 도와 일하라는 호의를 옹천이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웃여자들이 입던 옷을 가져다줘도 자기는 거지가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옹천이는 제 아비 어미가 목줄을 달았던 다섯마지기 밭뙈기를 혼자서 일궜다.
보리 심고 콩 심어 추수하고, 겨울이면 큰일 치르는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 주고 때로는 삯바느질도 해 주며 보릿고개에도 밥을 굶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열일곱살 땐 비록 화전 밭뙈기지만 농토를 늘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세고 능숙한 농부가 되어 매년 겨울이면 한마지기씩 논밭을 샀다.
바쁘게 일할 땐 거울 볼 사이도 없었지만 혼기가 차고 먹고 살만해지니 옹천이에게 바위같은 걱정거리가 어깨를 짓눌렀다.
옹천이는 윗입술이 갈라진 언청이였다.
스물넷이 되어도 매파 한번 찾아오는 법이 없고 노총각 머슴 하나도 집적대는 녀석이 없다.
스물다섯이 된 해 가을~
옹천이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꿈에 눈부신 황룡 한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옹천이 치마 속으로 꼬리를 감추더니 그녀 뱃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온몸에 서기가 충만해졌다.
동녘이 트기도 전에 우물가로 가서 옷을 벗고 목욕을 했는데도 추운 줄 몰랐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정화수를 떠놓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다.
황룡꿈은 천하가 우러러 받드는 귀한 아들을 잉태할 꿈이지만 절대로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되는 법이라 옹천이는 애가 탔다.
아무 남자의 손이라도 잡아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싶지만 그 누구도 언청이 옹천이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그날 하루가 지나가 버리면 황룡꿈은 수포가 된다.
옹천이는 고갯마루로 올라가 길가 바위 위에 모로 누워 치마를 벗어 얼굴을 덮고 자는 척했다.
터진 고쟁이 사이로 희멀건 두쪽 엉덩이가 드러났고, 그 사이로 거웃이 숲을 이뤘고 숲 속엔 볼그레한 숫처녀의 옥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손가락으로 옹천이의 허리를 찔렀다.
모르는 척 치마를 덮어쓴 채 쥐 죽은 듯 있다가 ‘욱’ 하고 옹천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묵직한 것이 그녀 옥문을 뚫고 들어와 방아를 찧었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간 뒤 한참 만에 일어난 옹천이는 치마를 입고 계속 누워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열달 후에 옥동자를 낳았다.
잘생기고 총명한 옹천이의 아들은 열다섯에 장원급제를 했다.
마흔이 된 옹천이는 15년 전~
고갯마루 그 바위에서 아들을 잉태할 때 새우젓 냄새가 났던 기억을 되살려 30리 밖에 사는 그를 찾았다.
상처를 한 후 홀아비가 된 그와 옹천이는 새살림을 차렸다.
첫댓글 즐감 이 요 ~ ^ ~
비피해 없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