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동상
조각가 故 김세중씨 아내 김남조 시인에게서 듣는다.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
청동의 녹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
" 이순신 장군 동상과의 대화
…"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
이정도면 문화유산" 입니다.
장군이 왼손잡이일 지라도,
왼손에 칼을 쥐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이 한마디로 세종로에 세종이 아닌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동상에는 노산 이은상(李殷相),
월탄 박종화(朴鍾和),
팔봉 김기진(金基鎭) 같은 원로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石宙善)의 고증을 받았다.
신이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조각을 했다는 의미이다.
신과 조각가가 만난 상황을 꾸민 이야기가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인간의 삶이 궁금하여 모든 이를 불러 모아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하나?”
농부, 어부, 상인, 법관 등등의 직업이 답으로 돌아왔다.
한참 후 “네, 저는 조각가입니다” 하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뭐, 조각가라니 그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네, 조각은 입체로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아니, 나는 너희에게 창조하는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그럼 너희가 나와 똑같이 창조를 한단 말이냐?” 하고 신이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님의 수업 중 어떤 여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우유와 빵을 가져와 여학생에게 건네시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에 감격했다.
선생님은 학생들 작품에 일일이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지나간 뒤면 우리들의 조각은 이루어졌다
. 그분의 카리스마는 바로 조각 교육 방법론이었다.
즉 선생님은 표정으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또 선생님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해,
많은 학생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각인되었다.
조각이 한 국가의 대표 브랜드가 된 예는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등 몇 안 되는데,
우리에게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다.
릴케가 쓴 ‘로댕 어록’을 읽고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김세중 선생님은 신의 부름을 받은 조각가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로댕의 글귀를 들려주신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
박원순 시장이 이순신 장군 동상을 옮기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를 촛불을 형상한 조각을 깔겠다고 했다.
우리 역사에 촛불이 얼마나 중요할까?
지나가는 바람이다.
또 을지면옥과 국밥집 맛이 전보다 떨어졌다고 했다.
주인은 옛 맛 그대로 라고 했다. 박시장이 변한 것이다.
세월이 가면 사람들도 바뀐다.
새로 바뀐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환경도 바꾸어야 한다.
정말 그럴까?
溫故而知新이라고 했다. 옛것의 가치도 소중하다.
광화문 광장
광화문광장의 기본 방향 ‘Deep Surface’(과거와 미래를 깨우다)
▲광화문의 600년 역사성
▲3·1운동부터 촛불민주제까지 광장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시민성
▲지상·지하 네트워크 확대를 통한 보행성 회복
주작대로(육조거리) 복원을 통한 국가상징축(북악산-광화문광장-숭례문-용산-한강) 완성,
지상·지하광장 입체적 연결을 통해
시민이 주인인 다층적 기억의 공간을 형성, 자연과 도시를 아우르는 한국적 경관의 재구성(북악산-경복궁-광화문)
공간구상의 경우 지상은 ‘비움’ 지하는 ‘채움’이다.
경복궁 전면의 ‘역사광장’(약 3만6000㎡)과 역사광장 남측으로는 ‘시민광장’(약 2만4000㎡)의 조성
지상광장은 질서 없는 구조물과 배치를 정리하여,
경복궁과 그 뒤 북악산의 원경을 광장 어디서든 막힘없이 볼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대형 이벤트가 열릴 수 있도록 비움의 공간으로 조성된다.
지상광장 바닥에는 종묘마당의 박석포장과
촛불시민혁명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원형 패턴이 적용된다
. 여기에 일부 바닥표면에는 조명을 설치해 독특한 야간경관이 연출된다.
또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을 세종문화회관 옆과 정부종합청사 앞으로 각각 이전하는 방안이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첫댓글 이순신 장군 동상
조각가 故 김세중씨 아내 김남조 시인에게서 듣는다.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
청동의 녹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우라
" 이순신 장군 동상과의 대화
…"40년 넘게 서울의 랜드마크…
이정도면 문화유산" 입니다.
장군이 왼손잡이일 지라도,
왼손에 칼을 쥐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콘셉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이 한마디로 세종로에 세종이 아닌 장군의 동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동상에는 노산 이은상(李殷相),
월탄 박종화(朴鍾和),
팔봉 김기진(金基鎭) 같은 원로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石宙善)의 고증을 받았다.
신이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조각을 했다는 의미이다.
신과 조각가가 만난 상황을 꾸민 이야기가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인간의 삶이 궁금하여 모든 이를 불러 모아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하나?”
농부, 어부, 상인, 법관 등등의 직업이 답으로 돌아왔다.
한참 후 “네, 저는 조각가입니다” 하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
“자네는 무엇을 하나?”
농부, 어부, 상인, 법관 등등의 직업이 답으로 돌아왔다.
한참 후 “네, 저는 조각가입니다” 하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뭐, 조각가라니 그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네, 조각은 입체로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아니, 나는 너희에게 창조하는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그럼 너희가 나와 똑같이 창조를 한단 말이냐?” 하고 신이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님의 수업 중 어떤 여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우유와 빵을 가져와 여학생에게 건네시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각인되었다.
조각이 한 국가의 대표 브랜드가 된 예는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등 몇 안 되는데,
우리에게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다.
릴케가 쓴 ‘로댕 어록’을 읽고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김세중 선생님은 신의 부름을 받은 조각가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로댕의 글귀를 들려주신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