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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선행
벧전 3:13-17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3-17 / 여러분이 착한 일을 행하려 애쓴다면 누가 감히 여러분을 해치려고 하겠습니까? 14) 혹시 ㄹ) 착한 일을 하다가 고난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대신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ㄹ. 사8:12-13) 15)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말고 여러분의 주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만일 누가 왜 그리스도를 믿느냐고 묻거든 언제든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가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십시오. 16) 늘 바르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헐뜯고 욕하던 자들도 결국에는 자기들의 거짓된 행동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17)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기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나그네이고 낯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베드로는 핍박자에 대한 성도의 대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라(13-15) 믿음의 사람에게 어떤 고난이 오면 그것이 육체를 상하게 할 수 있으나, 하나님 안에 있는 영혼은 결코 해할 수 없습니다(시 56:4; 118; 마 10:28; 롬 8:31). 때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일을 해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반대자들은 종종 성도들을 협박해서 성도들의 옳은 행위를 바꾸거나, 옳은 믿음을 부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포기하게 만드는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믿음을 버리거나,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주(Lord)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격적 이름 여호와를 대신하던 용어입니다. 신약 성경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우주 통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성도들은 불확실하고 모순된 일, 고난 중에도 계속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벧전 1:3, 21; 롬 4:18; 엡2:12). 그리고 성도들은 누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온유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딤후 2:24, 25)이며,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진리만을 말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16-17) 주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옳은 말이라도 양심이 선하지 않으면 복음을 올바로 증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도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들의 거짓이 드러나고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의를 위한 고난은 복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며,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복과 상급은 어떤 것입니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선거의 천재’로 불리는 참모 리 애트워터(Lee Atwater)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부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애트워터 전법’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상대방을 파괴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이를 이용해 적을 물리쳐라.” 애트워터는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의 선거운동을 총지휘하며 상대방의 약점을 무차별 공격해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서른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죽기 전 병실을 찾은 젊은이들에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파괴는 승리가 아니었다. 나는 실패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가 진정한 승리인 것을···”
< 설 교 >
의와 고난과 복
벧전 3장 13~17절 / 이수영목사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일 것입니다. 새해가 벌써 열흘도 더 지났지만 새해 들어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는 아직도 서로 복을 비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서로 복을 빌거나 덕담을 나누거나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에 관해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대하는 도리를 말하고, 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먼저 본문 8절에서 쓰기를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합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덕목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함”과 “동정”과 “형제사랑”과 “불쌍히 여김”과 “겸손”입니다. “마음을 같이함”은 마음의 조화를 이룰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꼭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가짐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조화로운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고 할 줄 아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은 다른 말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남의 어려운 사정을 섬세하게 이해할 줄 알며 돌볼 줄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진심으로 남을 칭찬해줄 줄 알고 남의 성공을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인간관계는 어긋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무한대로 복을 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을 이어받는다”는 말은 복을 유업으로 받는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일이겠지만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릴 백성은 세상에서 자기들에게 악을 행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복을 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쓰고 난 베드로는 그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하며 시편 34편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본문 10-12절에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본문 10-12절) 한 말씀입니다. 10절에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원히 복된 삶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원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본문 10-11절)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언행을 선하게 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화평을 유지하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그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이며, 그렇게 하다가는 손해만 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악한 자들은 여전히 변함없을 것 아닌가 염려에 대해서는 시편기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다 보고 계시고 의인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는 박해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서로 어떻게 행해야 할지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과 박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합니다.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본문 10-11절에서 권면하는 대로 언행을 선하게 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화평을 유지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는가?” 한 것은 우리가 정말 열심히 선을 행하기만 하면 우리가 두려워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할 것을 권면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적대적인 공격을 초래합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선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을 싫어하는 것이 악한 세상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 바로 주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본문 14절에서 상기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면 복이 있으며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에 힘입어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베드로는 뒤따르는 15절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히 계시다면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가 무엇이냐?”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늘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온전히 드린 이들은 그 믿음과 소망의 증거가 온유함과 두려움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본문 15절 말씀 전체를 다시 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온유”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하며,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온유는 강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진정 강한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히 계실 때 우리는 진정 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히 계실 때 우리는 진정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지 않은 사람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모시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모든 증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한 참된 경외도 없고 그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도 없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또 본문 16절에서 쓰기를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합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말과 행동만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의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기독교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한 행실과 함께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양심”으로부터 나와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본문 16절) 합니다. 이것은 이유 없이, 부당하게 우리를 핍박하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 승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그 비방하는 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말씀을 요약하며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은 악을 행하고 받는 것은 고난은 고난도 아니고 박해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악한 세상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뜻, 더 큰 뜻과 선한 계획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을 일시적으로 내버려 두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 무엇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를 행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행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행을 항상 선하게 하고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화평을 추구하며 화평을 유지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를 욕하고 비방하는 자들이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증표입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면 그 누구도 결코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해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를 해하는 자들의 죄가 드러나기 위한 것이며 그런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시적이고 작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욕하며 비방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선행을 하고도 칭찬은 적게 받습니다. 그런데 잘못은 작게 하고도 큰 욕을 먹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많은 욕을 먹었으면 이제는 더 이상 잘못해서 욕과 비방을 듣지는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욕을 먹어도 선을 행하고 욕을 먹어야 합니다.
화평을 도모하는 길
벧전 3장 10~13절 / 피종진목사
화평이란 말은 ‘평화, 평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화평하고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평안한 삶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제기구 즉 UN(국제연합)을 만들어 세계의 평화를 꾀하지만 아직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 오락이나 운동, 여행, 취미 생활 등을 즐겨보기도 하지만 여기에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화평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누릴 수 있습니다. 화평을 도모하는 길은
첫째, 악한 말을 삼가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10절) 악한 말을 그칠 때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을 택한 사람은 선한 일을, 악을 택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악한 일 중에 하나가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발로 악한 행위를 한 일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생각하지만 말로 악을 행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악한 말은 화평을 깨뜨립니다. 화평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한 말을 금해야 합니다.
‘악’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못쓰게 만든다, 타락시킨다, 파괴한다, 황폐케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한 말은 쓸모 있는 것을 못쓰게 만들고, 사람을 타락시키며, 삶을 파괴하고 황폐케 합니다.
에베소서 4:29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했고, 야고보서 3:2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악한 말을 삼가고, 말에 실수가 없기를 위해 노력하며, 선한 말을 하기를 힘써 화평을 도모해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는데 있습니다.
회개가 있을 때 그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뱃속이 편치 않듯이 우리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만일 악을 행하는데도 그 마음에 평안이 있다면 양심이 화인 맞은 자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한 양심을 주신 것이고, 또 그런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좌정하시고 역사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8:22에 보면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악한 것을 회개할 줄 알아야 됩니다. 회개는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부끄럽고 무서운 것이지만 회개는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 생활 중에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지 생각하고 회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18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悔改)란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회개한 죄를 계속 반복하여 범해서는 안됩니다.
시편 34:18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통회’란 말은 가슴을 치며 중심으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11절)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악한 것에 대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한 것에 대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취미를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37:27에 보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12:21에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했으며, 로마서 12:17에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12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잠언 11:19에도 보면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악 자체의 종말은 사망입니다. 선을 행하면 선한 일에 대한 보응이 있고, 악을 행하면 악한 일에 대한 보응이 있습니다. 신명기 20:11,12에 보면 화평을 깨뜨리고 악하게 사는 사람은 포로를 당하고, 예레미야 9:8,9에 보면 화평을 깨뜨리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엄한 벌을 내리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에도 보면 화평을 깨뜨린 역대 인물들치고 그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산 사람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5에 보면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평생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남을 구제하고 용서하며, 남을 높여주고 칭찬하며 선을 행하면 화평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넷째, 성령 충만의 생활을 지속하는데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 충만의 생활을 지속할 때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성령 충만의 생활을 지속하는 성도는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입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의 생활이 지속되지 못하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으로 화평을 깨뜨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갈 5:19~21).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의 생활을 지속하여 화평을 도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말을 삼가고, 죄를 범했을 때 즉시 회개하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성령 충만의 생활을 지속하여 화평을 도모하는 자가 되어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벧전 3장 10~13절 / 지태일목사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을 지냈고 현재 국무장관으로 재직 중인 콜린 파월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월은 뉴욕의 슬럼가인 사우드 브롱크스에서 자랐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범죄와 폭행과 가난 속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곳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그 지역은 가난과 범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한 교사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파월은 그의 후배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선생님은 편지를 들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학교에서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 나왔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절대 낙심하지 말고 중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시고 미래를 준비하시오. 여러분들 중에는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오고, 위대한 지도자 나올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의 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편지를 읽고 비록 힘든 처지에 있지만 자기들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 학교에서는 마약이 없어지고 폭행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슬럼가의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마음, 더 나은 인생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그 선생님이나 파월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우리도 현재보다 미래가 더 좋아지기를 원합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내일 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더 좋아지기를 원합니다. 지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내일에는 그래도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지금보다 못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개선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사회나 나라나 국가, 개인이나 가정, 자녀들, 더욱이 교회도 마찬가지 아님니까? 성도들의 삶이, 신앙이 과거보다, 지금보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고 복된 그런 삶을 기도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여러 가지고 애쓰고 노력을 하쟎습니까? 소망을 가지잖습니까? 오늘도 수고하고 땀흘리며 인내하며 참고 나가쟎습니까? 앞으로가 지금보다 더 못한 삶을 꿈꾸며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 꿈이 잇고, 계획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소원이 마음에 있다고 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행이나 운수를 바라고서 소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소원을 현실화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어려운 고난의 시대속에 디아스포라 되어 살아가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복으로 바꾸며 역경을 복으로 바꾸는 그런 능력의 삶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의 시대에 대해 어떻게 하면 왕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서 우리가 살아 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벧전3:10-12절은 시편 34:12-16절까지를 인용한 것인데, 베드로는 구약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제시하려는 교훈에 맞게 생략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3:10절을 보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그랬습니다. 시편에서의 '생명'과 '좋은 날'은 인간의 현세적인 축복, 즉 장수와 번영과 명성, 재해로부터의 해방 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생명과 좋은 날'이란 미래의 기업, 내세의 축복으로 그 의미를 종말론적인 차원까지 확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명을 사랑하고'는 불행과 고통에서 떠나 희열과 평안의 생활을 얻으려고 사모함을 의미하는 말이며, '좋은 날'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좋은 날 즉 장수를 의미하지만, 장차 올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결코 이 땅에서만의 삶이나 축복만을 국한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영적이고 내세적인 축복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서는 참된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소망의 닻을 내릴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짧고 유한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통해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영원한 영광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E-Mart 매장 입구나 벽에 보면 상업적이기는 하지만 "Have a nice day", 좋은 날이 되십시오, 라는 뜻을 가진 인사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그런 마음을 보여주는 인사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겪으면 말합니다. "언젠가 좋은 날이 곧 오겠지요", 또 상대방은 "이제 잘 참고 살아가노라면 좋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올 것입니다"라는 말로 서로 위로합니다.
지금 나라의 경제가 점점 어려워 서민들이 살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건설경기가 위축되어 부도가 나고 건설업체 수 십개가 수 천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경기 침체로 인해 수도권 인천지역에서만도 지금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해 경매되는 빌라들이 은행 대출금 상환도 못채우는 경매가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임자가 없어 낙찰이 못되는 그런 실정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서울에만 실업율이 4.7%로 23만 7000명이고, 전국적으로는 481만 2000명으로 집계 발표 되었습니다(중앙일보 04.8.21)
그런데 경제를 책임지고 정책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합니다. 수출도 둔화되고 내수경기도 살아날 기미가 안보이고 기업하는 분들은 내 나라에서 사업하고 내 나라에 세금을 내고 싶지만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할 수 없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기업인이나 부자는 모두 못된 악덕 기업인 취급이나 받고, 착취하는 노예상인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이 괴로움이라 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외국 노동자를 써도 130여만원, 중국은 임금이 10/1도 안되게 10만원만 주어도 노동력을 마음껏 산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은 안양에서 160평을 좁게 비싸게 쓰고 있는데 중국은 정부가 적은 임대료를 받고 10배 이상인 1700평 10배 이상을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 자리 창출이 됨니까? 오히려 실업율이 더 높아갑니다.
그런데도 올해 상반기에는 좀 나아지겠지요, 올 하반기에는 좀 나아지겠지요. 이제는 내년에 물가가 잡히고 잘 될 것입니다. 부동산값이 떨어지는데 이것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이 터져 나오는데도 거품이 빠진다고 안정적으로 보고 쓸데없는 것, 아니면 조금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과거사에 얽매였으니 어찌 나라가 여러 가지로 좋은 날이 오겠습니까?
왜 최근 중국 정부가 우리와의 외교적 마찰도 불사하면서도 고구려사를 왜곡합니까?
중국은 지난 2002년부터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온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로서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되었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사를 비롯하여 고조선사, 발해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하여 한반도와 중국 동북방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중국 변방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바꿀 수 없는 역사의 진리와 교훈을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그들의 프로젝트에 대해 아직도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그토록 선전해온 북한도 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별소리 못하고 입을 닫고 있습니까? 다 사정이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물음들은 현재 우리 내부의 결속력 약화와 무관치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국내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서로 반목질시하고 정치나 경제가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대미관계가 상당히 약화됨으로 상대적으로 주변의 모든 국가와의 깊은 유대와 굳건한 협력관계 구축에 그만큼 우리나라가 약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되었든, 가정이나 교회 모두 좋은 날을 빨리 맞아야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그야말로 신바람이 나는 그런 생명있는 좋은 날이 와야할 때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생명 얻기를 사모하십니까? 영원토록 즐거움을 누리는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이것들을 좋은 날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안에서만이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이고, 작게는 6가지입니다. 크게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1. 먼저 본문을 보면 소극적인 면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입니다(10-11절).
1)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혀는 우리 신체에서 가장 작은 지체 가운데 하나이지만 혀를 잘못 사용하므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능히 길들일 사람도 없고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입니다(약3:8-9).
혀를 잘 관리해야지 인생이 평탄 합니다. 망하는 것이 다 혀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 미워하는 것, 원수 맺는 것이 모두 다 혀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매일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잠언 18: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지체 중의 극히 작은 부분인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곧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혀를 잘 사용할 때는 그의 삶을 평탄하게 하며 번창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언어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 길림성 훈춘시에 김장로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교회에서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것은 지금의 목사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신분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화혁명 당시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각 도시나 마을의 청년들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폭행을 당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길림성 훈춘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중에 김장로와 함께 교회에서 사역했던 분이 있는데 이 분이 설교하는 가운데 공산당을 비방했다는 밀고가 공안에 접수되었습니다. 그 밀고자는 다름 아닌 그 교회의 김장로였습니다. 그의 밀고로 함께 사역했던 목회자가 붙잡혀 가게 되었고 심한 폭행으로 인하여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김장로의 밀고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 김장로가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김장로의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러 방에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만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김장로의 혀 바닥이 배꼽 있는데 까지 빠져서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어, 말'을 히브리어로는 '다발(dabar)'이라고 합니다. '다발'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어떤 힘과 의미와 영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한 번 외부적으로 발해지면 그것은 꼭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만큼 작용하게 됩니다. 의미 없는 말은 없습니다. 힘이 없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말을 할지언정 악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악한 말은 어떤 말입니까? 남을 헤치는 말입니다. 까닭 없이 저주하는 말입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절대로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화가 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스러울 때마다 부정적인 말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하던 사람들, 애굽에서 나온 세대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광야를 40년 동안 맴돌다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없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기와 함께 계시니 걱정 없습니다"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던 정탐꾼중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리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그들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
10절 하반절을 보면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시편 34:13에는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그랬습니다.
'궤사, 궤휼'이라는 말은 '속임, 기만, 배반, 변절, 술책, 계략, 간계'등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궤사를 '궤휼'이라는 말로 말하고 있는데 궤휼(돌로스)은 '미끼를 잡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활, 술책, 기만, 계략, 간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입에서는 죄를 회개하는 말과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과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말과 감사의 소리만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소리(phone)'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네'라고 합니다. 조랑말(또는 나귀)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포니'라는 자동차의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 조랑말이 막짐을 지고 가면 천한 나귀가 됨니다. 똥통을 지고 가면 똥을 지고 가는 조랑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조랑말 위에 임금이 타고 가면 임금을 태우는 조랑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길에 옷을 펴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을 봅니다. 같은 조랑말이라도 무엇을 태우느냐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말에 무엇을 싣느냐, 내 소리에다 무슨 말을 싣느냐?"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집니다. 좌우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복된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람니다. 복된 말이야말로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와 너는 하는 짓을 보니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의 미래는 현저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까? "꾸물대지 말고 빨리 하지 못해, 너는 도대체 애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이 돌대가리야", 그래서 돌대가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엄마들은 말합니다. "아직도 오줌 싸는 얘는 너 밖에 없을 거야, 누가 지아비 안 닮았다고 할 까봐 그러는지? 넌 몇 살인데 아직 인사도 못하니? 너는 끝까지 해내는 일이 하나도 없어, 너 같은 애는 필요 없어 내 자식도 아니냐"
이런 부정적이고 분노가 섞인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그렇게 말한 대로 되어 갑니다. 이런 잔소리는 돋아나는 새싹을 매일 매일 조금씩 짓밟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사랑과 축복과 칭찬과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와 매일 매일 욕을 먹고 상처를 받고 저주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천재 박사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다닐 때 열등생이었나 봅니다. 그의 학생기록부에는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네 부모님들 같으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가 남과 같으려고 하면 같을 수가 없단다. 너는 남과 다르단다. 남과 같은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나을 수 없지만 남과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훌륭할 수 있단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어머니의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용기를 주었고, 축복이 되어 아인슈타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금세기 최고의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되게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한 부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살한 청소년들 대부분이 저주의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합니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넌 보기도 싫어. 너 같은 아이는 낳지 말았어야 하는데. 넌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지질이도 못하니? 넌 이제 소망이 없다"
롯의 사위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서도 그 말을 농담처럼 여기다가 유황불에 멸망을 당합니다. 롯의 처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뒤를 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이 환경을 만든 것입니다.
어느 시인은 "1년을 생각하여 곡식을 심고, 10년을 생각하여 나무를 심고, 100년을 생각하여 사람을 심고, 영원을 생각하며 말씀을 심으라"고 했습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심니까? 항상 축복의 말을 심으십시오. 그러면 복을 거둘 것입니다. 심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말은 꼭 씨와 같아서 씨를 뿌린대로 거둘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까?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른 언어생활, 좋은 언어생활, 복된 언어생활 하시기 바람니다.
3) 악에서 떠나라!
11절을 보면 "악에서 떠나" 그랬습니다. 여기 "악에서 떠나"(엑클리노)라는 말은 "악에서 돌아서라"는 의미입니다. 사단의 영역인 악한 자리에서 떠나야 좋은 날이, 축복의 날이 옵니다. 계속 머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만을 쌓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언어 생활 뿐 아니라 그 삶이 악과는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본문 9절에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칼로 베는 감정에 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그의 변화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롬12: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은 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는 최선의 길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적극적인 면에서 지켜야하는 삶의 원칙들이 있습니다(11-12절).
1) 선을 행하라!
11절에 보면 "악을 떠나 선을 행하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악에서 떠난 것으로 만족해 버린다면 신앙의 전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악에서 떠나는 것은 소극적인 신앙의 행위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된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체휼,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갑니다.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아 몸으로 행하지 않고 아니면 진리를 너무 알아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고 대항하고 따지다 보면 어느새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미 믿을 때 주어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매우 율법적이고 동정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려운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지 아십니까? 그 형편을 아는 사람이 돕습니다. 가본 사람이 알고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예배당에서만 하고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돌보지 않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강퍅해집니다.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가보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은 어려운 사람과 자꾸 부딪힐 때 생깁니다.
선교도 아무나 합니까?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에 대해 순종하거나 선교지를 가보거나 아니면 선교사들을 만나보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생각이 바뀜니다. 러시아, 중국, 북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오지를 다녀오면 달라집니다. 가지 않는 사람은 주님 오실 때까지 가지 않고, 가는 사람은 계속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실업인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아더 미다스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미국의 10대 재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다스 장로님은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에 50만 달러를 기증했습니다. 또 7억 달러를 쾌척해 선교재단을 설립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많은 물질을 사용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한 기자로부터 신앙과 인생의 성공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아주 간단한 다섯 가지의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성수, 둘째는 온전한 십일조. 셋째는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 넷째는 내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셔들이는 것. 다섯째는 시간과 돈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본문 13절에서 "열심으로" 선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열심으로"라는 말은 "뜨겁게 하다",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열광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악에게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악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롬2:9-1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증거 함으로 두 부류의 결과를 비교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악에서 떠나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크게 누리시기 바람니다.
2)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1절에 다시 보면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평은 구약에 나타나는 샬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하였습니다. 또한 "구한다"는 말은 "열심으로 구하는 것"이며, "좇는다"는 말은 "강하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적극적으로 화평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을 구하고 좇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화평이신(엡2:16)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며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화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피스 메이커입니까? 트러블 메이커입니까?
가는 곳마다 화평을 추구하는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내 한마디 때문에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에 세계에 먹구름이 낄수 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갈 때 식구나, 아니면 멤버가운데 말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일정이 아주 힘들고 잡쳐버릴 수 도 있고 아주 기쁘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님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화평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참여하는 모든 모임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로서 내가 어떤 모임에 참여함으로 그 모임이 화목해지고 아름다운 모임으로 변화되어 간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자라고 자처하는 내가 들어가는 모임마다 시끄럽고, 다툼이 생기고, 그 모임이 분열되어진다면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분이 있는 사람과의 화평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나를 반대하는 사람과도 화평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모든 정치가 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한국교회가 교회들이 좀 이렇게 화평한 교회들,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심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화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좇으며 그 분을 닮아 감으로 그의 생활 속에서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도없이 선을 행할 수 있으며, 기도없이 화평을 구하고 이것을 좇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행하십니다. 그 분의 귀는 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시34:17에 보면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의인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환란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생명을 사랑하십니까? 장수하여 하늘의 복과 땅의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말씀드려 생명있는 좋은 날 보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악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시기 바람니다. 입술을 지켜 궤휼을 말하지 마십시오. 악에서 떠나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선을 행하시기 바람니다. 늘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힘 다해 좇아가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 앞에 간구 기도하시기 바람니다. 분명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우리 교회 가운데 생명있는 좋은 날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장 13~17절 / 김광일목사
이지선 자매는 오빠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을 하던 갤로퍼에게 추돌을 당한 후 트럭과 충돌을 하는 교통사고를 만나 얼굴과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화상을 입은 얼굴을 치료하기 위해 10년 동안 피부이식 수술만 30번도 넘게 했습니다. 타지 않은 다리 쪽 피부를 떼어다 이식하는데 더 이상 쓸 피부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얼굴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질문하였더니 그녀는 ‘본래 얼굴처럼 편하지 않지만 눈도 잘 감기고 입도 다물어지고 발음도 잘 나옵니다. 사고 나기 전에는 예쁜 것 좋아하고, 화장하고 거울 보는 거 좋아했던 자신이 사고 직후 일그러진 얼굴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 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부터가 기적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 자매는 자신의 불행보다 오히려 가해자인 운전자의 심적 고통을 염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고가 난 날이 일요일 밤입니다. 가족들과 따뜻하게 보내야 할 시간에 혼자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운전했을 그 사람의 곤고하고 마른 가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프고 불편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사람에 비하면 내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사고 당시 우리 가족은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처럼 사고를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미국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공부를 하는 그녀는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거나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사고로 마디가 짧아진 손으로도 불편 없이 요리를 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밥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한 위안에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감사의 표현이 지나치면 의심이 갑니다. 말끝마다 나오는 감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칫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지선 자매의 대답은 겸손하였습니다. “사람은 욕망의 동물입니다. 하나에 만족하면 더 좋고 큰 것을 원합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사도 하루 이틀 아닐까요.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별것 아닌 일에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씩 감사할 때마다 신기한 힘이 솟아납니다. 작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습관이 새 힘을 솟아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했다면 애초 이런 사고를 피하게 해줬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원망했습니다. 통증이 심할 땐 나를 살려주셨다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하루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자고 제안하셨습니다. 내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간 날, 내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춧구멍 하나를 채우게 된 날,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겨우 닿아 오빠를 오까라고 부르게 된 날 등 감사 찾기를 했더니 진통제가 줄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고난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보물들입니다. 즉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지, 절망이 얼마만큼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기쁨과 감사는 얼마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내가 앞으로 마음을 쏟고 시간을 바쳐야 할 영원한 가치는 무엇인지 지난 10년의 시간이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닙니까?
베드로전서의 핵심주제는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실제로 겪고 있던 상황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실재입니다. 고난의 주제는 성경이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경이 고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고난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고난을 당한 다해도 ‘누가 나를 해하리요’ 라는 당당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누가 나를 해하리요’ 의 고백이 가능한 것인가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의를 위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말씀을 처음에 대했을 때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헬라인의 관점처럼 그분의 공의로우신 성품과 관련해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수록, 루터는 도무지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519년에 이 구절을 다시 연구하면서 의가 관계적 의미라는 것,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를 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서 죄인이 그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을 만족시키는 의를 제공하셨다는 사실이 복음의 계시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루터는 비로소 모든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였습니다.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황과 황제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한다면 ‘누가 나를 해하리요’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두며 작은 일에도 감사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다가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받는 것보다 훨씬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거기에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안에 살며 고난을 받는 사람의 감사와 소망이 고난 속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희망과 삶의 목적을 선물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면 고난은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 큰 복이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해로움도 그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주로 삼으면
관계 전문가로 유명한 게리 스몰리(Gary Smalley)는 ‘관계 필터링’이란 저서에서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진솔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한동안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습니다. 사역은 커져갔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해 졌으며 명성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관계들이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대화가 끊기고, 자녀들과도 소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과도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조바심이 생겨나게 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으며, 특히 자신에게서도 별 문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작은 일을 결정할 때도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겼던 자신이 점차 큰 일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게 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중심의 삶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게리 스몰리는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고 아침마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삼는 기도입니다. “첫째, 모든 기대 수준을 가능한 제로까지 낮추면서 하루를 시작하기를. 둘째,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길. 셋째, 모든 당황스런 경험은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로 삼기를. 넷째,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를” 묻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주(主)로 인정하십니까?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라면 왜 염려하십니까? 주께서 배 안에 계신데 풍랑을 만나든 폭풍이 몰아치든 무엇이 두렵습니까? 주께서 내가 타고 있는 배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생의 배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항해하실 것이며 어떠한 해로부터 보호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것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소망의 이유를 변증하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변증은 삶에서 주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그 후에 구체적으로 변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삼을 때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삶의 이유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선을 행하면
인종차별 철폐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남아공화국의 투투(Desmond Mpilo Tutu) 대주교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성공회 주교가 되고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하게 되었냐?”의 질문을 받고 그는 어렸을 때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는데 성직자 차림의 훤칠한 백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철저한 인종차별 국가였기에 흑인들은 백인이 지나가면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백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투투와 어머니도 한쪽으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그 백인이 재빨리 먼저 한쪽으로 비키고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 뒤 투투와 어머니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놀란 어린 투투는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저 백인이 왜 저러는 거에요?” 이때 어머니의 대답은 투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 사람은 성공회 주교인데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거란다” 그때 어린 투투는 나중에 반드시 성공회 주교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한 사람의 선행이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그리고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나 한 사람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 하나 잘 한다고, 혼자 선행 베풀고, 사랑을 베푼다고 무엇이 바뀔까 생각하며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은 선행이 냉랭한 세상을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 때가 이르매 거두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일시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을 영원히 해롭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체적 고난이 영적 생활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시적 고난이 그리스도인이 상속할 하늘의 기업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이 세상 사람들의 적대감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핍박하며 해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신을 해할 수 없는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해서 성숙시키시고 삶의 폭을 확장시키시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물었습니다. “꾀꼬리야! 너 왜 요새 노래가 없니?” 꾀꼬리가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 그때 현자가 말했습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하거나 불평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누가 나를 해하리요’ 노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큰 것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대적들을 잠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는 믿음을 통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의를 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을 행하라
벧전 3장 13~17절 / 박봉수목사
세상 거의 모든 종교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불교,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착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거의 모든 도덕과 윤리도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보듯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동화에 담아 가르치기도 합니다. 물론 기독교 역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 모든 것들과는 구별됩니다. 기독교에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른 종교나 윤리 도덕에서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차이들 가운데 결정적인 것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선으로 인한 고난”의 문제입니다. 본문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게 되면 고난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종교와 윤리 도덕이 가르치는 대로 선을 행할 때와 달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선을 행할 때 고난이 따른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착하게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겠다는데 왜 고난이 따를 까요? 한마디로 “선”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와 윤리 도덕이 가르치는 선은 그야말로 현세적이고 육적인 차원의 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선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선입니다.
숭실 대학교 교목실장님과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숭실 대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몽골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해 왔답니다. 두 팀이 참여해 왔답니다. 하나는 교목실에서 파견한 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봉사 관할부서에서 파견한 팀이랍니다.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이 농촌 봉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그런데 그 결과가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목실에서 파견된 팀이 봉사한 곳에는 사람들이 변화하고 그들이 진심이로 고마워하더랍니다. 팀이 그렇게 의도하거나 강요하지 않더라도 교회가 세워지고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팀 학생들이 저녁이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자기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이 팀 학생들은 무릎 꿇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봉사 짬짬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현지에서 다른 팀과 달리 이 팀은 생각지 않은 방해를 받았답니다. 게다가 다른 팀이 이 팀을 흡수 통합하려고 갖가지 시도를 하더랍니다. 이 팀의 이런 봉사를 막기 위한 방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순종해서 선을 행하려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행하는 선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선이 단순히 윤리적이고 세상적인 착한 일이 아니고,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생각지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노골적인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은근히 시기하면서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오해해서 일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힘들고 골치 아프니까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의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4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며” 선을 행할 때 생겨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또 선을 행할 때 고난이 생길까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이 때 그 고난을 두려워해서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고난이 생길까 봐 걱정하면서 아예 피해서도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선으로 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고난을 극복하면서 계속해서 선을 행할 수 있을 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벧전 2:21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미 우리 주님께서 선한 일 중의 선한 일을 하셨는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본 받아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된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생각이 납니다. 청교도적 사상을 바탕으로 주옥같은 교훈을 주는 소설을 쓴 나다나엘 호손의 작품입니다.
어느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어니스트라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그 전설을 전해 듣고 늘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바라며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이라고 믿었던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업가로 돈을 많이 모은 부자, 정력적이며 의지가 강한 장군, 뛰어난 언변으로 명성을 얻은 정치가 등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을 만나 본 뒤에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한편 어니스트는 진실된 생활 속에서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기고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는 사이에 스스로 지혜와 덕을 갖춘 인물로 성장합니다.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른 그를 한 시인이 찾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백발의 어니스트를 바라보던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예언의 인물이 다름 아닌 어니스트임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본 받고 닮고 싶은 큰 바위 얼굴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그 얼굴을 묵상하며 기다리다 보면 내가 그 얼굴을 닮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그 얼굴이 된다는 지혜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할 큰 바위 얼굴로 우리 마음속에 담아야 합니다. 특히 고난당하신 주님,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극히 적은 자만이 그의 쓴 잔을 마신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은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그분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제 내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주님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 올 때 내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2.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확고하게 가지게 되면 고난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벧전 1:3) 소망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중국 사람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집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습니다. 아이가 다 자라면 그 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시집 장가보내기 위해서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오동나무가 한 두 그루씩은 다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나무와 함께 소망도 심었습니다. 아이가 튼튼하게 잘 자랄 소망을 심었습니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으로 커갈 소망을 심었습니다. 장성해서 좋은 배필 만나 결혼할 소망을 함께 심었습니다.
이번에 가 보니까 아직 오동나무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아마 한 달 뒤면 활짝 필 것입니다. 재작년 선교 여행을 갔을 때 마침 오동나무가 활짝 필 때였습니다. 중국 오동나무는 굉장히 큽니다. 어떤 것은 높이가 30-40미터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초록 이파리 사이사이 진분홍 꽃이 그 큰 나무 가득 피었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차를 타고 농촌 마을길을 달리는데 2시간을 달려도 3시간을 달려도 온통 온 천지가 오동나무 꽃 천지입니다. 집집마다 소망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온천지에 소망이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산 소망이란 작은 묘목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활짝 꽃을 피우고 큰 목재가 되는 바람처럼 장차 복되고 아름다운 날이 올 것을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장차 큰 거목이 될 것을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화초를 심지 않습니다. 봉숭아, 채송화, 사루비아, 해바라기 이런 것들을 심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기도 전에 다 시들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산 소망이 아니라 헛된 소망만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세상 명예는 산 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 명예라는 것이 이 땅에서만 족하기 때문입니다. 부귀도 산 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역시 이 땅에서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 역시 산 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권력 역시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화초와 같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산 소망이란 부활에 대한 소망이요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죽음 너머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의 기대와 바람이 되는 것 그것이 산 소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산 소망을 가지게 되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게 되면 고난이 다가 올 때 하나님의 심판대를 소망 중에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은 다 준엄한 심판을 받을 때 그 심판대를 무사히 통과하는 그 날을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게 되면 고난이 다가 올 때 저 천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저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을 바라보게 됩니다. 저 천국에서 주님께 큰 칭찬을 받으며 주님께 큰 상을 받는 그 날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산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3.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선한 양심을 가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선한 양심이 선을 행할 때 다가 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 사람이 타락한 뒤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감각해지고 무뎌졌습니다. 마치 화상을 입은 피부가 감각이 죽어서 바늘을 찔러도 아픈 줄을 모르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가서는 안 될 길로 접어들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도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이 양심이 되살아납니다. 마치 산불이 나 온 산이 다 잿더미가 된 후 한 두해가 흐른 뒤에 곳곳에서 새싹이 움트고 새순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무감각해지고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되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계속해서 그 양심을 일깨워주십니다. 롬 9:1-2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성령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셔서 제 기능을 잘 하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선한 양심이 이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되 살려주신 양심을 말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다시금 일깨워주셔서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신 양심을 말합니다.
이번에 중국 선교여행 중에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천신학교에 갔더니 수업 도중에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을 다 강당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특강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팽주라는 곳에 갔을 때 지역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훈련 받고 있는 곳에서 말씀을 전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지만 중국은 아직도 외국 목사들이 목사라는 타이틀로 공식적인 강의나 집회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정부 당국자가 특별히 저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담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해에 있는 전국 양회를 방문할 수 있었고 VIP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역시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이 일은 일개 교회의 담임목사로는 받을 수 없는 환대였습니다.
이분들이 이렇게 저를 대접하면서 그 이유로 드는 것이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오랜친구(老朋友)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금년으로 만 10년 동안 이분들을 찾았습니다. 이분들이 그 정성을 갸륵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 가득 감사한 마음으로 저를 맞아줍니다.
사실 10년 동안 중국에서 누구도 와 달라고 청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나 또 제 주변에서 가야 한다고 다그치거나 충고한 일이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늘 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1년 스케줄을 잡을 때 결코 뒤 순위를 밀리지 않게 됩니다.
저는 성령께서 저를 강권하신다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을 감동하시고 이끄신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한 양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선한 양심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 때 그 선한 양심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그 선한 양심을 붙잡으십시오. 그 선한 양심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그 선한 양심을 따르십시오. 그러면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끝내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고난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을 견디고 이기지 못하면 결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견디고 이기려면 우선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고난과 싸워 이기며 선을 행하는 우리를 칭찬하실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선한 양심을 간직하며 따라야 합니다.
소망에 관하여 묻는다면
벧전 3장 13~17절 / 이삼규목사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거센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노인은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딸은 몇 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작은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딸을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풍랑이 높이 이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때 소망의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절대절망의 장소로 지상의 지옥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함께 고난을 당했던 사람 중에 정신의학자요 의미요법의 발견자인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똑같은 고난의 현장에 있지만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살아남는가?"를 관찰했는데, "내 인생은 끝났다"고 소망을 끊어버린 자는 생명의 불씨가 점점 꺼져 결국은 죽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앞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소망의 불을 붙인 자는 자기도 살고 절망가운데 있는 동료도 붙들어 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과연 누구입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자는 그 일이 끝나고, 그것이 사라질 때 그 사람의 인생도 끝나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을 통해 인도하기 때문에 활력 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다"(골로새서1:27)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영광의 소망'이라는 의미는, 첫째로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지구촌에 사는 인생들의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확실한 소망'입니다. 다른 것에 소망을 두면 결국 그것에 속게 되지만 예수님께 소망을 둔자는 결코 속지 않으며, 오히려 이 소망은 점점 더 커져서 능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그토록 무서운 불 시험을 통과하는 성도들에게 소망에 관하여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한 확신과 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처럼 순교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이 믿음이 죽음과도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지?, 왜 내가 예수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소망에 관하여 누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소망을 가진 자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 할까요?
1.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삶으로(13절)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선을 행하되 "열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소극적으로 죄를 안 짓는 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 '죄를 안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행하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열심을 가져야 합니까?
1)서로 열심으로 사랑해야합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가정, 교회, 사회가 살벌해 집니다. 에베소교회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사랑은 '허다 한 허물'을 덮습니다. 예외 없이 인생을 살면 살수록 허물은 더 많아지는 법이기에 모두가 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눈에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씌웁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덮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2)여호와의 전을 사모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윗에게는 그런 열심히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열심은 바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인 줄 믿습니다. 우리인생에서 투자하고 투자해도 부족한 것이 하나님 사랑이요, 교회 사랑입니다.
3)주를 섬기는데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나 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일할 때 우리는 쉬는 날이 있습니다. 일 년이면 52일을 공식적으로 쉽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일 년에 며칠 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이 우리보다 잘 살지 못할까요? 쉬지 않고 일만 한다고 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열심히 해야 능률이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항상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큰 일물들은 항상 부지런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열심을 가지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말세를 대변하는 교회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들 수 있는데, 차지도 덥지도 않은 열심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19에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열심이 빠진 곳에는 소망도 없고 열매도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을 내는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 귀한 뜻을 이 루십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 수준에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능력을 받아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복음의 능력은 무미건조한 자를 불러서 뜨겁고 열심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께 소망을 둔 백성이라면 적극적인 선을 행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가진 소망에 대한 답변입니다.
2. 고난에 대해 당당하게 대처함으로(14절)
14절의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17절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고난에는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고난과, 주의 복음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 있는데 우리는 마땅히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의 대열에 동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에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처량하고 스스로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인지라 그 속에 소망이 있어 찬송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며 착고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을 봅니다. 핍박가운데서도 고난을 당당하게 대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태동되었고, 아름다운 교회의 전형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고난에서 면제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가족 중에도 고난을 당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남모르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의를 위한 것이며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거든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고난의 현장에서도 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1)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실 궁극적인 유익과 영적인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려는 자녀들에게 상을 주시려고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두고 계시는데, 우리 믿음이 부족하고 영적인 소망이 약하다 보니까 이것을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지, 바라보기만 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절대 사랑을 체험할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만, 오히려 가장 어려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느끼면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할 것 이 아니라 한 단계 높게 '고난 중에도 당당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당하는 고난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는 것이 바로 소망에 관하여 대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3. 선한 양심으로(16절)
이 시대는 양심불량의 시대, 양심마비의 시대, 양심을 팔아먹는 시대입니다. 이때에 세상의 풍조나 가치관에 우리 영혼이 물들지 않는 비결은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선한 양심을 보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계속해서 교육계의 비리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검사의 아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답안지를 대필해 주고, 어떤 선생님은 학생 임원을 시켜 준다고 돈 받고, 상장 준다고 돈 받았습니다. 그렇게 자녀들의 양심을 마비시켜 장차 어떤 인물이 되게 할 것인지 그 부모들과 선생님들의 사상이 의심스럽습니다. 좋은 대학가면 뭐합니까? 그렇게 해서 출세하면 뭐합니까? 사기꾼, 도적질하는 것 밖에 배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의 요령을 터득해서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는 것보다 영혼과 양심이 깨끗하게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 즉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양심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a)더러운 양심(딛 1:15)
b)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c)악한 양심(히10:22)
d)선한 양심(벧전3:16)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행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만일 영적인 지식에서 그리고 순종함에서 성장하지 못한다면 시련으로 말미암아 매우 쉽게 좌절하는 연약한 양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 생활 가운데 있는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즉 회개가 필요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양심은 창문과 같은 것입니다. 창문은 죄로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닦아냄으로 창문이 깨끗해짐과 같이 양심도 회개함으로 깨끗해집니다. 그때 창문을 통해서 빛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강한 양심은 지식에 근거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사무엘 존스는‘수치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데서 생기고 양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생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무엇보다 선한양심을 가진 자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 주님을 만날 소망이 있는 자는 양심문제에 대해 진지합니다(요일 3:3).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4. 인내하는 삶으로(15절)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당하는 많은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연단을 통해서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순금이 저절로 순금이 됩니까? 여러 번의 제련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됨으로 99.9%의 순금이 탄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어떤 시련과 환난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그 인내하는 삶이야말로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하는 중요한 답변입니다.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장작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섰습니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그는 자기의 화형 집행 형리를 감독하는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나는 곧 화형을 당할 몸입니다. 만약 내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내 종교를 믿지 마시고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
순교자의 말을 들은 판사는, 그렇지 않아도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표정이 너무도 담담하여 의아하던 참이었으므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만졌습니다. 그 순교자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치안판사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그의 가슴을 고요한 물결처럼 잠잠하게 하는 비범한 힘은 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불신자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특히 선한 싸움 다 싸운 다음의 죽음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답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잠자는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환난이 찾아와도 인내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와 "대답할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소망이 무 엇인가?'를 점검하는 점검표가 있는데 바로 '소망의 어머니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을 얼마나 붙잡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인내를 낳는데 소망은 '인내'라는 별명으로 나타납니다. 정말로 실현될 것을 믿는다면 값을 치루고 인내할 수 있습니 다. 소망의 형제는 '사랑'입니다. 소망이 있는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소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행동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간증이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 가슴에 지워질 수 없는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분명히 소망에 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소망에 관하여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말로써도 훌륭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극적인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서 해야 하는 대답입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함으로, 고난에 당당하게 대처함으로, 선한 양심으로, 인내함으로 소망에 관하여 대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의를 위한 고난과 유익
벧전 3장 13~17절 / 이상호목사
베드로전서의 핵심주제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실제로 겪고 있던 상황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가정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고난의 주제는 성경이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욥기입니다. 욥기는 욥이라는 한 인물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 세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근본적인 고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여러 곳에서 고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우리가 육신의 제한을 입고 있는 동안은 고난을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분명히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고난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그 고난에 임하는 사람의 삶의 자세에 따라서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라고 가르칩니까? 오늘 본문은 특별히 고난을 대하는 내면의 자세에 대해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연합군들이 독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가스실에 들어갔을 때 한 병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This is hell! (이곳은 지옥이다!)"
그가 다른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한 벽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This is unbelievable! (이것은 믿을 수 없다!)"
그 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God is good!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런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분명히 여건이나 환경의 차이는 아닙니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내면의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를 갖고 그런 어려움을 대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로 그런 고난을 대해야 합니까?
1. 두려워하지 말고 하늘의 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3-14절)
베드로는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좀 더 정확히 문자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복은 과연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면,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롭게 하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어떤 순진한 사람이 한 말처럼 생각됩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데 단지 열심히 선을 행하기만 하면 해롭게 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오늘날 세상이 어떤 곳입니까? 열심히 선을 행하면 오히려 우습게 보고 무시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이런 순진하고 원칙적인 말씀을 늘어놓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꿰뚫어 보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13절에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들은 박해나 고난을 당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장에 있는 현재적 상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누릴 영원의 관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이 땅에서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1장 6절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일시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원히 해롭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난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전서 1장 4절에 있는 것처럼 그런 일시적 고난이 그리스도인이 상속할 하늘의 기업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선을 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보다는 호의적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의 적대감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쉽게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보리의 언덕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양편에 있던 강도입니다. 그들은 평균이하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도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두 부류를 모두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해서 고난을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그런 사람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런 적대적인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선행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다!' 이것이 바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중요한 근거이고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으로 돌아가 봅시다. 원문으로 된 산상수훈 중에서 팔복은 '복이 있도다'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결코 이 땅에서 혼자 남겨진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지키시고 특별한 관심을 갖고 바라보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그들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가장 고통당하는 자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늘의 복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함께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의 평강이 고난 중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2. 고난 당할 때에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 그 분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전서는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쓴 편지인데,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왜 다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으라고 합니까? 언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아니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마음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 분을 높여드리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늘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인이시므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물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갖고 사는 비결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럴 때 성경은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답한다'는 말은 원래 변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소망을 갖고 사는 비결을 묻는 것만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 상황에서 변증할 것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소망의 이유를 변증하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변증은 우리 삶에서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후에 구체적으로 변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우리 삶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우리 삶의 이유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변증할까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증거하는 내용보다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온유'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말로 번역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절제된 부드러움을 가리킵니다. 낮은 자리에서 상대방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겸손'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기도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말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경외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존경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동시에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복음증거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 중에 살고 있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겸손한 태도로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날카로운 논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겸손한 태도에 굴복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전도하면서 경험을 합니다. 전도하러 나가서 논쟁을 벌이고 싸울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논쟁에서 이기면 그 사람이 굴복하고 예수님을 믿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한 논쟁을 벌여서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면 상대방은 논쟁에서 진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겸손한 태도로 따뜻하게 상대방을 위로할 때 그의 영혼이 무너집니다.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의 태도는 더욱 중요합니다. 절제되고 겸손한 태도로 진심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 그 영혼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고 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인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고난이 닥쳐도 그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서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원망과 불평을 일삼다가 자포자기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임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고난 당할 때에도 선한 양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16절)
16절에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양심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도덕적, 영적 의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을 '영혼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양심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했습니다. 양심이 맑으면 우리 영혼의 창이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그 깨끗한 창을 통해 진리의 빛이 우리 안에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선한 양심 혹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자주 권면하는 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그 만큼 이 양심은 중요하면서도 타락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쉽게 약해지고 또한 쉽게 더러워집니다. 고전 8장 7절은 우리의 양심이 약해질 수 있다고 했고, 디도서 1장 15절은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삶의 위기에 몰리면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양심의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양심의 소리는 희미해져 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양심은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할 때에도 선한 양심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양심의 소리가 들려도 개의치 않고 결국은 양심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에서는 양심을 행동과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먼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한 후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이라고 합니다. '너희의 선한 양심을'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의 선행'이라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선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선한 행동을 하라고 권면하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양심만 있으면 선한 행동은 뒤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하다는 것의 기준은 과연 무엇입니까? 16절을 주의해서 보시면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과 선한 행동의 판단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의 선한 양심이 유지되고 따라서 선한 행동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양심과 선한 행동을 유지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늘 머물면 그 말씀이 우리의 양심을 울리는 내면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양심을 가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본문에 의하면,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이 금방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들의 거짓이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이 고난을 요구하신다면 이 고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만일 이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봉천동에서 병원을 개업중인 윤주홍 장로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봉천동 사람들은 그 분을 '봉천동의 슈바이처'로 부릅니다. 봉천동이 빈민촌이던 시절부터 그 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아이가 없고 그 분의 신세를 지지 않은 어른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분을 '슈바이처'라고 부르면서 친부모 형제 같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분도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1973년에 그 분은 사랑하는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아이를 친 택시 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뛰어든 병원이 공교롭게도 그 분의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기 아이에게 사망진단을 내린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한동안 밤잠을 설치는 고통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신의 자식을 데려가신 것은 자신을 슬픔 속에 버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는 모든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그는 단 한 명의 자식을 잃고 수많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을 통해 그는 그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학교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학교는 고난의 학교입니다. 하나님의 학교에서 고난을 통과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학위입니다. 세상에서는 논문을 쓰면 박사학위를 주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하나님의 학교에서는 고난을 통과해야 학위를 줍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결코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모양과 종류로 다가오지만 누구든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고난에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고난이 다가오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결코 버려두지 않고 지키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복을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은혜가 나를 위해 예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난이 다가올수록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관자가 되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두려움없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난이 다가와도 늘 선한 양심을 잃지 마십시오. 오히려 고난이 닥칠수록 더욱 더 선한 양심을 지키십시오. 우리가 선한 양심을 지키면 선한 양심은 선한 행위를 낳고 결국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된 내면의 자세로 살면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소망
벧전 3장 13~17절 / 오정호목사
인간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칠흙같이 어둡기 때문에 소망가운데 살아야 참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아우쉬비취 수용소는 절대절망의 장소로 지상의 지옥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함께 고난을 당했던 사람중에 정신의학자요 의미요법의 발견자인 빅터 프랭 클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왜 똑같은 고난의 현장에 있지만 어떤자는 죽고 어떤자는 살아남는가?"를 관찰했는데, "내 인생은 끝났다"고 소망을 끊어버린자는 생명의 불씨가 점점 꺼져 결국은 죽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앞길을 인 도해 주신다"는 소망의 불을 붙인자는 자기도 살고 절망가운데 있는 동료도 붙들어 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과연 누구입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반 면에 세상의 다른것에 소망을 두는자는 그 일이 끝나고, 그것이 사라질 때 그 사람 의 인생도 끝나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자는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을 통해 인도하기 때문에 활력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다"(골로새서1:27)고 했습니 다. 여기에서 '영광의 소망'이라는 의미는, 첫째로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지구촌에 사는 인생들의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확실한 소망'입니다. 다른것에 소망을 두면 결국 그것에 속게 되지만 예수님께 소망을 둔자는 결코 속지 않으며, 오히려 이 소망은 점점 더 커져서 능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 주게 됩니다.
*믿는자가 불신자와 다른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1)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13절)입니다.
선을 행하되 "열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소극적으로 죄를 안짓는 선에 머 무르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 '죄를 안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행하며 살 게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에 면에서 열심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로,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합니다(베드로전서 4:8).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 고,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가정, 교회, 사회가 살벌해 집니다. 그리고 사랑은 '허다 한 허물'을 덮습니다. 예외없이 인생을 살면 살수록 허물은 더 많아지는 법이기에 모두가 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서로 사랑하는데 열심을 내기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요한복음 2:17).우리인생에서 투자하고 투자해도 부족한 것이 하나님 사랑이요 교회사랑입니 다.
셋째, 주를 섬기는데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로마서12:11). 주의 백성들이 열심을 가 지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말세를 대변하는 교회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들수 있는데,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열심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19에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열심이 빠진 곳에는 소망도 없고 열매도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을 내는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 귀한 뜻을 이 루십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 수준에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능력을 받 아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복음의 능력은 무미건조한 자를 불러서 뜨 겁고 열심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2)고난에 대해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14절).
14절의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것"은 17절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것"과 같 은 의미입니다. 고난에는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고난과, 주의 복음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 있는데 우리는 마땅히 선을행하다가 받는 고난의 대열에 동 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당당해질수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4:12,13에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상 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 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처량하고 스스로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 의 사람인지라 그 속에 소망이 있어 찬송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당하게 극 복해 냅니다. 결국 핍박가운데서도 고난을 당당하게 대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태동되었고, 아름다운 교회의 전형으로 쓰임을 받을수 있었습 니다. 고난에서 면제된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가족중에도 고난을 당 하는자가 있을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남모르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이 주 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의를 위한 것이며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거든 물러서 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고난의 현장에서도 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합니까?
첫째,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실 궁극적인 유익과 영적인 은헤를 바라볼수 있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려는 자녀들에게 상을 주실려고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두고 계시는데, 우리 믿음이 부족하고 영적인 소망이 약하다 보니 까 이것을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지, 바라보기만 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실 절대 사 랑을 체험할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현장에서도 하 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있지면, 오히려 가장 어려운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 의 손길을 실감나게 느낄수 있습니다. 이것을 느끼면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수 있 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면케해달라'고 기도할것 이 아니라 한단계 높게 '고난중에도 당당하게 해주실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3)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16절).
이 시대는 양심불량의 시대, 양심마비의 시대, 양심을 팔아먹는 시대입니다. 이때에 세상의 풍조나 가치관에 우리 영혼이 물들지 않는 비결은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입 니다. 신앙가운데 양심을 보존할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의 요령을 터득해서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는 것보다 영혼과 양심이 깨끗하게 보존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새로남교회가 이런 선한양심을 가진자 들을 많이 키워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자, 주님을 만날 소망이 있는자는 양심문제 에 대해 진지합니다(요한일서 3:3).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4)소망을 삶으로 드러냅니다 (15절).
"소망에 관한 이유"와 "대답할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소망이 무 엇인가?'를 점검하는 점검표가 있는데 바로 '소망의 어머니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을 얼마나 붙잡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인내를 낳는데 소망은 '인내'라는 별명으로 나타납니다. 정말로 실현될 것을 믿는다면 값을 치루고 인내할수 있습니 다. 소망의 형제는 '사랑'입니다. 소망이 있는만큼 사랑할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소 망을 지닐수 있습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행동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간 증이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진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 리 가슴에 지워질수 없는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속에 섞여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자에게는 분명히 소망에 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일시적으로 어렵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 이 하나님을 만나고 소망을 재확인케 되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벧전 3장 13~17절 / 변한규목사
봉독해드린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쓴 사랑의 서신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격려하는 내용
이 많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격려의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나그
네"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그네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당한 성도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의 서신이라고도합니다. 격려, 나그네,
위로의 서신 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당한 나그네
인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서신이다고 말입니다. 질병으로 고난당한 성도가 있습
니까? 환경 때문에 환난을 당한 성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위로가 함께하
시는 이시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이시간 메시
지의 주제입니다. 세 가지 내용을 생각하며 은혜를 사모코자합니다.
첫째, 고난의 세상
인생은 고난이고 세상도 고난입니다. 고난은 괴롭다, 어렵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
사랑갈 때에 괴롭고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지 않습니까. 욥은 고난당한 사람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을 만큼 고난의 사람입니다. 재산을 몽땅 잃어 버렸고 건강도 잃어 버렸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기왓장으로 그의 몸의 부스럼을 긁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 하나
님을 욕하고 죽어 버리시오. 욕설을 퍼부었고 사랑하는 친구들도 그를 경멸하며 그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난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어찌했
습니까? 욥1:21을 보면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
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모습이어야합
니다. 세상은 고난투성이입니다. 고난 때문에 근심이고 눈물입니다. 고난 때문에 넘어지
는 인생이 많습니다. 고난의 종류도 많습니다. 그래서 "내 사전에서는 불가능을 빼라" 이
렇게 말한 나폴레옹도 마지막 인생의 고배를 마시면서 센터헤르나에서 한탄을 한바있습니
다. "인생의 입에서 나오는 후유 소리가 모아서 바닷바람이 되었고 인생이 흘린 눈물이 모
아서 저 바닷물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한 백만장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돈으
로 행복을 살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에 불가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날은 배
틀의 북보다도 빠르고 그 육체는 시드는 풀과 같고 영화는 떨어지는 풀의 꽃과 같습니다.
어느 인생에게도 가을나무 낙엽처럼 떨어지는 실망이 있습니다. 바람만 불면 바다에 풍랑
일 듯 바람없는 인생없고, 풍랑없는 가정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
다. 예수님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질병으로 고생하며 낙망한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고쳐주리라" 하신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무엇입니까?
"파라독스" 역설입니다. 진통없이 옥동자를 낳을 수 없음과 같고 자갈이 없이 시냇물이 노
래할 수 없음과도 같습니다. 가시없는 장미가 있습니까? 십자가 없는 부활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을 믿으시기바랍니다.
둘쨰, 성도의 고통
성도의 고난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성도의 고난에 색깔이 있는 것 아니고 훈장이 있
는 것 아닙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고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1세기 사람들이 겪어왔던
고난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
냐에 따라서 고통일 수 있고 훈장일 수 있습니다. 벧전2:19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
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무엇입니까?
보편적입니다.
벧전5:9에 보면 "동일한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믿음이 좋은 장로, 권사에게도 찾
아옵니다. 모세, 예수님도 고난의 종입니다. 욥도 고난을 받았고 베드로, 바울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차이는 있지만 고난은 성도 누구도 다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작가 길
모어가 노래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일시적입니다.
벧전5:10에 보면 "잠깐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오래토록 계속될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배후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운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폭풍우 지난 뒤 맑은 날씨 고난입니다. 아무리 심한 폭풍우도 한 달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당한 성도마다 롬8:35 말씀을 붙들고 외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고난당한 성도여, 환난당한 성도여 낙망나시지 말기 바랍니다. 믿음의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고난당한 성도가 들을 떄
에 주님의 음성은 누구에게 보다도 사랑의 음성인 것을 체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유익입니다.
시119:71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어떤 유익입니까?
우선 도덕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합니다. 고난은 인생으로 하여금 반성하도록 하
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허물, 실수, 잘못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평안할 때
는 이러한 것들을 깨닫지 못합니다. 허물이 없다, 잘못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
을 당하면 그 고난이 오만한 비대증을 치료하는 담방약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영적으로도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게 합니다. 고난 자체는 힘들고 고통이지만 고난은 결코 악은 아닙니
다. 고난은 잘 다루면 신령한 유익을 가져옵니다. 시50:15이 무엇입니까. "환난 날에 나
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이 기도케합니다. 고난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고난당한 성도를 건져주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함께 따라서 하십시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고난은 우리를 철들게 한다. 고난은 우리로 깨닫게 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다." 지
난주간에 우리교회 새가족부 교사들을 실은 차량에 브레이크 고장으로 불상사를 입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고난중에서 감사하며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격
스럽고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목사님, 퇴원하는대로 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하겠어요." 헌신을 다짐하기도 했습
니다. 또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교회에 봉사할 일이 많은데 누워 있는 것이 죄송합니
다" "전도하는 일에 게으름 피운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고 했습니다. 고통이 심할 때 예
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한 성도끼리 서로 위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남편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도 보았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이 지극한
것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기관별로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권사님은
권사님대로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고난당한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고난의 침상에서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 우리 모두를 감격시키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금번에 고난당한 성도 모두가 시121:7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여
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셋째, 고난의 축복
본문 14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고난에도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의 축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
가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위로의 축복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의를 위한 고난이기 때
문입니다. 여기 의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위하다 당한 고난인데 어
찌 그 예수님이 그 성도를 위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 위로는 헬라어도 '팔라칼레오'
인데 그 뜻은 "가까이 부른다, 초청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 때문에 실의
에 빠져있으면 고난 때문에 넘어져 있으면 주님께서 고난당한 성도곁에 오셔서 다정한 음성
으로 불러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고난당
한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어느때 보다도 부드러운 음성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66:13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고난 곁에는 예수님의 위로가 있습니
다. 예수님은 우리 당한 고난을 위하여 위로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위로는 세상 부귀로
살 수 없는 위로입니다. 미국의 한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돈
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단 천국은 빼놓고" 라는 짤막한 기사입니다. 그렇습니
다. 황금만능을 노래하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
으로 침대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음식
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식욕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집을 살 수 있
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돈으로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세계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천국은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기게 하는 위로요 천국으
로 인도하는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요16:33 말씀으로 위
로하십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틴 루
터는 이 말씀을 읽고서 무릎을 치면서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위로의 말씀인
가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무릎을 꿇고 가면서라도 전파해야 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심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에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도
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약5:5이 말합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
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여기 보니까 심판의 날을 도살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돼
지나 소를 잡는 도살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꼬마가 보니 한 아저씨가 돼지를 도살장으
로 끌고 가는데 돼지떼들이 잘 따라갑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주먹안에 있는 콩을 보이면서 여기에 비결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면서 콩알을 땅에 떨어뜨
리면 그것을 먹기 위해 졸졸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돈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눈 앞에는 도살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쾌락을 보면서 졸졸 잘 따라
갑니다. 그러나 도살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이 무엇입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수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믿음으
로 그 고난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 믿음이 이깁니다. 모세는 쫓
기는 몸이었으나 그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영도자 되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의 웅덩이
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학교를 거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
니엘은 사자굴에 떨어져 그 뼈가 바스러질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고난을 통해서 바
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문호 뮐터를 보십시오. 42세에 한 눈이 멀었습니다.
얼마나 슬픔의 고난입니까. 그런데 43세때에 남은 눈까지 멀어 온전한 소경이 되고 말았습
니다. 두 눈을 잃은 고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소경 뮐터는 그것 때문에
영안이 열렸습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가 가진 눈으로 글을 썼습니다. 역사
에 불의의 걸작을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는 실낙원을 통해서 지금도 감격하고 있지 않습니
까. 본문 17절을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성도들
이 받는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것 아닙니다. 그 자체는 고통이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비
밀하신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고난당한 성도여, 고난당한 욥에게서 배우시기 바랍
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
니이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는 감사합니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 취
하실 때에는 고난이라고 하면서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하나님께서 취하신 것 원
망할 이유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 한 가지가 있는지 헤아려보셨습
니까? 참으로 귀한 것, 너무도 소중한 것들 모두가 공짜로 얻고 은혜로 얻은 하나님의 선
물입니다. 내 심장, 눈, 몸, 시간, 청춘, 아내, 남편, 자녀.. 나의 모든 것 다 공짜로 주
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까. 주신 것을 감사할진대 취하실 떄도 감사한 것 이것이 믿음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으로 내가 당한 고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
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이 있다는 말인가? 사랑만 있고 미소만 있으면 좋을텐데 견디기 힘든
고난은 왜 있는 것인가? 성경이 답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함이요, 우리의 영
혼이 영글어 가기를 위함입니다. 롬5:3-4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
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욥23:10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열매는 늦은 가을에 있고 뿌리는
추운겨울에 굳어집니다. 낮에도 깊은 웅덩이속에서는 하늘에 있는 별을 볼 수 있다고 합니
다. 온실에서 팔자좋게만 산 사람은 깊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더 크게 쓰실 사람
에게는 우선 고난의 학교에 입학을 시켜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
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뒤에 예비되어있는 하나님
의 비밀한 축복 찾아낼 수 있어야 될것입니다. 오늘 당한 고난은 내일 행복을 담기 위하여
우선 비워놓은 항아리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당한 성도여, 담대하시기를 바
랍니다. 주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많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이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양인국목사 / 벧전 3:18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구속의 역사다. 왜냐하면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3장 16절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주신 것은 그 사랑만이 죄로 인하여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알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바로 그 사랑을 아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주님을 통하여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 사랑을 계시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이 사랑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삶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정리하면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사신 삶은 이 세 가지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빌립보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3:6.7)”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체 되심을 포기 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야 했다. 이것은 가장 존귀하신 분이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이야 말로 주심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어째서 이렇게 하셔야만 했는가? 하나님과 인간인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청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아시고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처럼 되신 것이다.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처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욥이 재물과 자녀들과 건강을 잃고 고통당하고 있었을 때 그를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러주며 격려해 주었다면 욥기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 계속되는 지루한 논쟁도 없었을 것이고, 욥이 친구들에 대하여 분노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들 가운데서도 큰 고통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고통이었음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하나씩 놓아야 한다면 그것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자아일 것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우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여 평생 욥처럼 분노하고 이웃과 논쟁하며 싸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일 남편이 아내처럼 되기 위하여, 아내가 남편처럼 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한다면 부부 싸움이 성립되겠는가?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처럼 되기 위하여, 부하직원이 상사처럼 되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한다면 직장에서 직위로 인한 갈등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고자 자신을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본문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대신”이라는 말을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신”이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대치(代置)할 수 있는 언어들 가운데 가장 합당한 것은 “담당(擔當)”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2:24절의 말씀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져야 할 모든 “연약함”이라는 짐을 주님께서 대신 져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것을 안다면 “대신 해 주는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여기 “유한하다”는 것은 생존을 위하여 또는 삶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식물은 자리를 이동할 수 없다. 특히 작물들은 누군가가 작물들이 필요로 하는 물과 양분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는 스스로 생존해 갈 수 없다. 그래서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 또는 구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 식물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또는 어린 아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때 이것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신해 주는 은혜는 유한한 피조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에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라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대신해 주셨다는 의미다. 선지자 이사야는 “담당”이라는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4,5)” 이 말씀에서 질고, 슬픔, 징벌, 허물, 상함 등은 우리가 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짐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짐들을 담당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고, 나음을 입게 되었다. 이처럼 “대신해 주는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세워진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이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 가운데 마지막은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이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1)” 이 말씀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하심을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라 가노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거처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그것은 삶의 보장과 자유였다. 그러므로 이 말을 오늘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복된 삶,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주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은 우리의 복된 삶을 보장해 주신 것이라는 의미다. 모세에게 약속의 땅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바로와의 싸움을 싸울 수 있었겠는가? 그 지난한 광야 40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이 보장 되어 있지 않았다면 선교의 여정에서 직면해야 했던 고난들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복된 삶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장내에 대한 보장은 이처럼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고난의 장(場)인 세상 이후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된 삶을 보장해 주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주님을 통하여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삶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신 것을 통하여, 유한한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연약함을 대신해 주신 것을 통하여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우리의 장래를 보장해 주신 것을 통하여 그 사랑의 어떠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어떠함을 아는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담긴 의미
벧전 3장 18절 / 문기태목사
기독교의 심벌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의 교회마다 십자가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집안에다 십자가를 붙여 놓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중에는 십자가를 목걸이나 귀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본래 십자가는 사형수를 죽이는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십자가는 복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찬송에도, 기도에도 십자가를 말하며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 1:23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말합니다.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말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어달려 죽으심으로 십자가에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들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비참하고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셨을까요? 본문에서 보면 성경은 주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우리로 그분을 통해 살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14) 대신하여 죽으셨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이를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뿐만아니라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양심적인 사람이 있고 타락한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발자국 더 떨어져 있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결국 다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수양을 많이 쌓은 사람이든 종교적인 사람이든, 찰학적인 사람이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 해서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미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죽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벧전3:18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불의한 자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대신 죽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 길을 열어 주실려고 대표로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담대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한 사업가가 오래된 공장을 팔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몇달째 비어있었으므로 몹시 황폐한 상태였습니다. 파괴자들이 유리창들을 많이 깨뜨렸고 여러문들을 걷어차서 부숴 놓았습니다. 쓰레기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그는 공장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곳을 보여 주면서 "당신이 이 공장을 인수하기 전에 깨어진 유리창과 부숴진 문들을 수리하고 지붕과 난방시설을 점검하고 깨끗이 청소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공장을 사려는 사람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곳에 새로운 상점을 지으려고 합니다. 저는 이 낡은 건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장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는 우리의 노력도 건물 철거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낡은 건물의 창문을 갈아 끼우고 건물 안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최상의 선행도 거룩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조건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고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할 수 없습니다.
공장건물을 사서 헐고 새 건물을 지으려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전의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다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 새롭게 다시 지으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그분을 통해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길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심령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2. 우리로 그분과 함께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17) 그리스도안에서 살게 하려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 5:10)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예수님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깨끗함을 얻기 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원수로 잘못 살았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기때문에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잠시 잠간도 떨어지기를 싫어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면서 천국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더러워졌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부패했습니다. 영혼이 죄로 가득찼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살고 싶은데 너무나 추해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인생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새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다시 창조하실 수 없어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여러분을 다시 창조하셨습니다. 이전에 탐욕으로 가득찼던 사람을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이전에 이기심으로 가득찼던 사람을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게으름때문에 늘 핑계만 대고 멈칫 거리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가능합니다. 어떤 무섭게 생기고 막무가내인 사람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기만 하면 누구든지 새롭게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권세가 힘을 잃어가고 사단의 영향력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싸우면 아무리 강한 대적도 쉽게 이길 수 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천국으로 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풍성한 사랑을 받아 누리게 되고 누구를 만나도 사랑스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언제까지나 함께 살고 싶어서 주님과 여러분과의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살고자 죄의 습관에서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며 십자가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와 사랑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로 그분을 위해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15) 자신을 위해 살지않고 대신 죽으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고 ...
불신자들중에도 이타심을 가지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심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각색 정욕에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선을 베풀때에도 그 속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계산하고 자신의 손해와 유익을 저울질하는 이기심과 자기 만족을 앞세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고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나쁜 주인들을 모두 패배시키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금 사단은 우리의 이기심과 정욕을 자극하여 죄의 노예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최선의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 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죄의 권세를 계속 깨뜨려버리고 흠없고 점없는 순전한 자로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젊은 생명을 구하고 그 가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길 갈망한 한 권사의 신앙의 힘으로. 그것도 한 동네에 살다 20년만에 만난 옆집 아주머니의 외아들, 신부전증 환자인 그 아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신장을 떼내줘 한 생명을 살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21일 서울 고대부속병원.
"정남아,앞으로 네가 건강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어""너무 감사해요. 구해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리구요""아우님,고마워요.이젠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열심히 나갈 겁니다"
고영님권사(56.서울미아4동.성암중앙교회)와 신장기증을 받은 김정남군(23.배재대무기재료공학),김군 어머니 방화자씨(66.수유6동)는 신장이식수술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해 6월.남편과 함께 조그마한 철물점을 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유지해온 고권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동네 옆집에 살다 수유동으로 이사한 방씨가 20년만에 걸어온 전화였습니다.고권사는 방씨와 얘기하면서 한달전 제대한 그녀의 아들이 신부전증으로 입원해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같은 혈액형임을 확인한 고권사는 그때 바로 결심했습니다."내가 신장을 떼줄게".그러나 방씨는 농담으로 생각했습니다.부모형제,동기간에도 쉽지 않은데 남남인 자기 아들에게 신장을 떼주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남이네는 연립주택 지하에 전세를 살고 있었어요.게다가 이혼후 파출부 생활로 생계를 유지해온 정남이 어머니는 최근 관절염과 골다공증 등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파출부도 그만둔 상태라 형편이 말이 아니었어요.이북출신이라 친척도 없었구요.내가 신장을 주지 않으면 정남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고권사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수술이 잘못될 경우를 우려한 남편과 아들,딸들이 극력 반대했던 것입니다.하지만 그것이 고권사의 "신앙의 고집"을 꺾을 수 는 없었습니다.
그해 가을, 신장이식을 위한 검사를 한 결과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셨는지 이식조건이 꼭 들어맞았습니다. 이어 지난달 24일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정남은 건강을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반면 고권사는 후유증 때문인지 숨이 차고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등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지금도 출가한 막내 딸이 찾아와 보살펴줄 정도입니다.
고권사는 "후회하지 않아요.오히려 기뻐요.그동안 재물로는 봉사를 못했어도 내가 가진 몸으로 봉사했으니까요.또 정남이가 앞으로 나보다 더 많은사람을 전도할테니까요"라고 말한답니다.
지난 19일 퇴원한후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왔다가 고권사를 만난 정남군도 "불교집안이었지만 저는 대학에 들어간 뒤 기독서클을 다녔어요.믿음은 부족하나 권사님과의 약속대로 목사가 될 거예요"라고 다짐하였답니다.
이처럼 몸의 아주 일부분인 작은 신장 하나만 떼어 주어도 감격하고 그를 위해 살려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온 몸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여러분도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날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서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참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며 풍성한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며 인생을 낭비 하지않고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며 살아 존귀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벧전 3장 15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내과 의사이자 정신의학자이며 유명한 저술가인데 그가 쓴 책 중에 "듣는 귀"라고 하는 제목의 신앙 간증집에 이런 내용이 있다합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남편과 아내로 소문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쳐다보며 숨을 거두기 전, 남편에게 말했다합니다.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그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합니다.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합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다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세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미리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 물들지 말고 슬기로운 생활을 하며 선행을 열심히 하라고 권면하는 가운데 무서운 박해에 대처하면서도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안에서 확고한 태도를 가질 것과 열심으로 선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지려고 하기보다 남에게 나눠주기 좋아하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보다는 양보하기를 즐겨하고, 스스로 절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핍박하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하며 “무엇 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 그렇게 사는 이유가 뭐냐?”며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어보는 이유는 힘들 때나 고난 받을 때,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편하게 살지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믿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이 마음을 훑고 지나가면서 “글쎄 말이에요. 내가 뭐 하러 이러나…….” 하는 말이 튀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흔들리지 말고 소망에 대해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처럼 논리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불신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엘피도스)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들을 명확히 구분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을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엡2:12)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불신자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내할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내세의 소망에 대해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자기 조상들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따르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 1:18)라고 합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았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합니다.
이런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전혀 다른 삶을 산다면 당연히 주위 불신자들의 호기심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악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라고 합니다.(벧전 3:14-15)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사는 것과 관계없이 착한 사람도 고난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 혹은 핍박은 착하게 또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일을 하면서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복 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상당히 익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말씀 그대로 베드로가 듣고 배운 대로 다시 강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주님을 주인 즉 푯대로 삼고 살아갈 때 성도들은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위를 걸었을 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물결, 즉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지 않고 살면 세상 유혹에 빠져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살면 우리 마음속에 늘 잠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이 믿음을 타락시키고 세상의 환난과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합니다.
의를 행하다 고난을 받으신 주님, 고난을 당하시되 고난에 매몰 당하지 아니하시고 승리하신 주님, 승리하여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으며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선행을 포기하지 않는 힘과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선을 열심히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라고 말씀했습니다.
능력의 주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일을 하는데 두려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주님이 명하신 것을 지키는데 우리를 위협할 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기 때문에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어 주님만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복 주시고 굳은 믿음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룩함이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세상의 모든 시험과 환난을 견디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15-16)고 합니다.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한 대답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온유’(프라우테토흐)는 ‘친절함'‘부드러움’’겸손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라고 말합니다.
온유는 베드로가 새삼스럽게 갑자기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 때부터 온유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그런 성품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민수기에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고 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했을 때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했습니다. 건전하게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마구 비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만 이 야기하시느냐고 말하면서 모세가 뭐 특별할 것 있느냐는 식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런 공격을 당하자 모세가 나설 것도 없이 하나님이 직접 미리암을 피부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런 터무니없는 공격이 있을 때도 온유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미리암을 위해서 간절하게 중보기도해서 그 병을 낫게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 즉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컸던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한 자에게 돌아갈 상급에 대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그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비록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는 온유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광야에서 깎이고 깎여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았을 때 불같은 성질은 다 타버리고 온유한 마음이 그 중심에서 반짝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바로에게 보내셨을 때 바로는 핍박하고 압박을 했지만 모세가 결국 바로를 이겼습니다. 무엇으로 이겼는가요? 온유함으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 때 그 기간이 무려 사십 년이었습니다. 일이년이었으면 어쩌면 박력 있는 지도자가 더 효율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삼사년이었으면 머리 좋고 똑똑한 지도자가 백성들을 관리해서 일을 쉽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단의 기간이 사십 년이었는데 그 기간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성품이 바로 온유함이었습니다. 그 성품이 있었기 때문에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폴 에크먼 박사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구별하고 싶다면 표정을 살펴보라고 자신의 저서 『텔링 라이즈』에서 주장했다합니다. 특히 미소를 주시하라고 조언했다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표정에는 3~5가지 근육이 필요한데, 미소는 단 한 가지 근육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솔직하게 말할 때 ‘진정한 미소’를 짓고, 거짓말을 할 때는 ‘거짓 미소’를 짓는다고 그는 주장했다합니다. 특히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구분하는 결정적 단서는 눈썹인데, 저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대방을 속이려는 거짓 미소를 지을 때는 눈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표정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를 봐도 거짓말을 알아낼 수 있다합니다. 얼굴에 5초 이상, 길게는 10초 이상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거짓 표정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무아지경이거나 폭발적인 분노를 느낄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표정 은 몇 초만 나타나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합니다. 세상이 점점 험해져서 상대방의 표정에서까지 마음을 읽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도 상대방이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부지런히 탐색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된 미소 진짜 미소로 대하며 온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하고의 ‘두려움’(포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2)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자기주장이나 감정이 배제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되 논쟁적으로 하지 말고,조심스러운 태도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서는 온유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지도에도 표시하기 힘든 아주 작은 마을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직하다 합니다. 그곳에 사는 보이드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한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어 놓는다 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갔는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 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한다 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당한 일이 없었다 합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소망에 대해 묻는 자들에게 대답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의 양심은 원래 ‘함께’라는 말과 ‘인식하다’ 혹은 ‘보다’라는 말을 함께 붙여놓은 말로 함께 보는 것, 공통되게 아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선행을 행한다면 비웃고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마저 언젠가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고 언젠가 그것을 인해서 자기들이 부끄럼을 당하게 되는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는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 결국 이기게 되는가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집니다. 지금은 비록 상대방의 거짓말에 의해서 내가 그 일들을 다 뒤집어쓰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 일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믿고, 참고, 기다리다보면 알아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보다는 선이 강하며,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써 이 세상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이 세상 불의한 자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행에 대한 의지가 꺾여서는 안 되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력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맹렬하게 타오르는 신앙의 불길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같이 진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선행을 삶의 기본 원리로 우리에게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선을 행하는 자는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될 것인즉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힘으로 악한 사탄의 무리를 무릎 꿇릴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철학으로도 그들에게 죄악의 부끄러움을 깨우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선행은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선행이 비록 극히 미미해 보일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악한 자로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선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소망을 품고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소망 가운데 착하게 사는 사람은 함부로 해를 받지 않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와 같아서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망이 무엇이냐? 도대체 그렇게 힘들게 살 것이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고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할지라도 그렇게 지나가면 될 것이지만 이 세상이 지나간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그때가 오면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순간을 맞겠지만,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됨(16절)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원리를 베드로 사도가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온유해야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온유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는데 내 안에 그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들이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는 그런 마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는 사명 감당하되 소망의 가르침을 행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