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그 나라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퇴임하는 장면을 TV뉴스를 통해 지켜보았다. 그의 조국을 가난에서 탈출시키고자 그가 채택했던 근대화작업의 모델은 소위 ‘마하티르 동방정책’으로 바로 ‘박정희(朴正熙)식 경제개발’이었다. ‘동쪽기적을 배우자’로 풀이되는 이 정책을 펴면서 그는 솔직하게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에 감명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박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다.
중국은 그들의 경제개발 계획에 박정희 정부의 경험을 모델로 삼았다. 한국이 1960년대 초 GNP 82불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해내는 모습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지켜본 외국의 지도자가 어찌 중국이나 마하티르 총리뿐이겠는가. 한국과 비슷한 여건에 놓여있던 당시의 가난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친밀감과 선의의 경쟁자로 도전의 기회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말레이시아도 21세기 정보화 강국이 되었고, 국민소득 1만 5천불의 선진국 도약을 지표로 2020년까지 달성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성공적인 국가지도자로 알려진 싱가폴의 리콴유 총리도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1979년 10월 16일 한국을 방문하여 19일 청와대 만찬석상에서 말한 바,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고자 한다’는 것을 비유하면서, 박대통령은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지도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리콴유가 떠난 1주일 후, 한국은 김재규의 총에 의해 최후를 맞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충격적인 뉴스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에 맡겨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긍정적인 면이 압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때때로 행해진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이름은 역대 대통령 업적 평가에서 최근까지도 한결같이 1위를 차지한다. 「타임지」가 1998년 8월 16일자 기재한 「20C 아시아 인물 20걸」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박정희”였다. 일본 6명, 중국 3명, 인도 3명과 비교하여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그 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박정희 시대’ 또는 ‘박정희학’에 대한 연구서적이나 논문도 증가 일로에 있다. 그 시대 전반에 걸친 공과(功過)에 대한 분석, 역사의 어느 시대건 있기 마련인 명암(明暗)에 대한 고찰은 앞으로도 폭넓게 이루어질 것이며, 어느 학문처럼 개별적 이념과 성향 그리고 각기 경험에 근거한 주관적 견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편향되고 왜곡된 시각도 하나의 새로운 논쟁으로 수용되는 시대가 되었고, 박대통령에 대한 것도 마침내는 객관적이며 정당한 평가로 올바르게 역사에 정리되리라고 생각된다.
2003년 한 해가 저무는 이때, 정치권에 유입된 재계의 비자금 문제로 시작된 작금의 소란한 정국은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총선을 앞둔 각 당의 전략과 민생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혼미하기만 한 일반국민들의 정서는 또 한번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며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런 민심의 반영이다. 그럼 각종 조사에서 특히 어떤 항목에서 박대통령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는가를 간략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국정홍보처가 발표한 조사결과(2001. 12. 26)는 1위 : 박정희(21.1%), 2위 : 세종대왕(19.8%), 3위 : 이순신(12.7%), 4위 : 김구(10.5%)였다. 또한 한국갤럽조사(2002. 6. 27~7. 9, 전국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에서도 1위 : 박정희(20.1%) 그리고 2위 : 세종대왕(16.0%), 3위 : 이순신(15.3%)이였다.
아마도 이러한 결과 발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으리라. 왜냐 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존경하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들로 귀감으로 모셨던 분들이다.
물론 여론조사 자체가 곧 역사적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론이란 시대적 상황과 조사 목적 등에 따라 변동이 생기고, 참고사항은 되지만 절대가치의 증명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정서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 정치라면 그 현상을 애써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역사는 큰 흐름의 결과이며 어떤 기간도 삭제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21세기 초기부터 압도적으로 듣고 있는 핵심 정치권의 화두는 ‘개혁’이라는 말이다. 잘못된 일의 환골탈태는 있어야겠지만 이전시대의 치적(治績)까지 폄하 도외시하는 것은 역사의 단절이며 후퇴이다. 새 천년은 20세기보다 밝아야 한다. 국민들은 지난 세기의 격동의 역사에서 어느 만큼 판단의 기준을 터득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은 뚜렷하게 희망적인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세기는 어떠했는가. 과연 한반도에서 민족의 웅비를 가늠할 수 있던 세기의 시작이 있던가. 전반 반세기가 격동의 풍랑 속에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나라 잃은 청년들은 배움의 꿈도 충분히 갖지 못했다. 더구나 세기의 한가운데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초토화된 국토에서 초근목피의 삶을 경험한 세대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희망을 걸었다. 감히 세계 어느 나라도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공업입국을 이룩한 예는 찾기 어렵다. 서구의 산업화 과정은 200년에 걸쳐 이룩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에서 조국근대화의 역사를 만들어낸 일을 다른 인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은 편견 있는 논자 이외 그 시대를 아는 일반국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조국근대화 정책의 결과로 불과 반세기 전 세계 역사 조류에서 표류하고 버림받은 존재였던 한국이 후반에 들어서 세계무역 10대국의 반열에 들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국민을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시켰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국정의 우선순위인 빈곤의 극복과 경제개발은 정부를 믿고 따른 국민들의 힘과의 합작에서 이뤄진 것이다. 당면한 최대목표로서 경공업(輕工業)육성, 식량증대를 위한 비료생산, 수출산업육성을 통한 외화획득으로 국부(國富)의 기초를 단단히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방위력의 정예화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당시 국내외에서 대치적 상황이었던 남북관계에서 자력강화(自力强化)와 억제력 강화를 위해 방위산업(防衛産業)육성과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을 육성했다. 향토방위군 창설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적 결단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쓸 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필요하다. 박대통령의 성품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내면의 온화하고 소박함, 부드러운 서민적인 이해심, 그리고 소년 같은 순수성과 수줍음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일단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일은 확고부동하게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폈다. 정치권의 많은 반대에 부딪친 후 결단을 내린 것에는 고속도로 건설,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들을 들 수 있다.
연평균 10% 가까운 고속 경제성장과 수출을 세계 4위로까지 올리는 추진력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도전을 갖게 했다. 일반 국민들의 생활은 힘겨운 도전과 체험이었으나 인내와 신뢰감으로 따랐다. 1960년대의 산업화 우선 정책에는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 선행(先行)과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적 민주주의 토대 구축과 남북통일에 대한 구상은 오늘날 냉전 종식 후의 정책과 다를 수밖에 없다. 먼저 국가의 총력을 국력증강에 집결 통합하여 민족중흥(民族中興)의 길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 안에 경제개발, 과학기술의 창달, 자주국방과 외교의 힘, 교육문화의 발전을 도모한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가지 과제를 왜 병행시키지 못했는가의 비판도 있으나 실제로 서구국가들의 예에서 보듯이 초기단계에 정부주도형의 간섭과 규제를 받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정평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앞으로도 여론분석의 차원이 아닌 학술적 산업화 과정의 실체적 연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박대통령 통치기간 18년 동안 16년을 해외공관에서 일했다. 따라서 국내 정치적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멀리 떨어져있으면서 오히려 큰 궤도의 국가정책의 틀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었고, 국력신장에 대한 주재국과 외국사절단의 즉각적인 반응을 점검할 수 있었다.
한국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관심을 끌면서 점점 인지도가 높아감에 따라 우리 공관들의 외교활동의 폭은 넓혀졌다. 국력을 바탕으로 하는 외교는 실체적인 신뢰와 협력관계이며, 그 효과는 즉각적일 수도 예상 밖의 훗날 걷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일선 공관장이 자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존중하게 됨은, 주재국의 사정과 국제정세를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하면서 받게되는 대통령의 지시가 얼마나 애국적이며 국가이익에 대한 통찰력이 앞서있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교정책을 펼 때도 그의 성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당장의 인기영합으로 호감을 사거나 임기응변식 허세외교로 권위를 세우려하지 않았다. 진솔하고 당당하게 한국의 실체를 알리고 친선과 협력을 도모했다. 그러기에 독일에 간 한국의 광부들이나 간호원들과 눈물 진 애국가를 불렀고, 그 나라 대통령도 이해의 손수건을 건넸다. 그 후 잘사는 나라가 될 때까지 외국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았고, 1979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반도의 열사의 나라에서 땀흘려 일하는 한국인의 수가 13만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그들을 격려하고 중동진출의 지속적 증강을 다지기 위한 사우디방문 일자(12월 8일)가 정해진 불과 6주일을 앞두고 대통령 저격의 비보와 함께 방문은 취소되었다.
돌이켜보면 5․16혁명 후 첫 번째 미국 방문시의 일이 생각난다. 군사정부의 입장과 체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노스웨스트 항공기의 일등석 중 일부분만을 빌려 최소경비 14여만 불만 사용했다. 그래도 방미시의 정상회담은 극진한 환대와 이해 속에 성공적으로 치루어졌다. 이후에도 자신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사리사욕을 품지 않고 친인척 관리에도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긴축의 생활과 소박한 인간성의 자연스런 표출은 농부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진으로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오랫동안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발사는 박대통령의 낡은 셔츠와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구멍이 커진 낡은 가죽혁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병원에 실려온 그의 최후의 모습으로 군의관도 피로 가려진 얼굴과 평범한 손목시계의 주인공이 차마 대통령일 줄은 몰랐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한 인간의 일생에서 경험하고 시도한 일의 폭과 길이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능가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20세기의 제국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 이념의 시대를 경험했다. 빈농의 아들에서 태어나 번영의 공업국을 만드는 중추역할로 우뚝 역사에 기록되는 업적을 남겼다.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그는 인정과 결단력을 겸비하는 도량을 보였고 역사서를 탐독하며 내성적 자체 성찰을 통해 생활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그런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 5일, 중국방문 뒤 한국을 방문한 뮤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첫댓글이글을 읽으니 눈물이 날러고 하네요,,,,,,,,우리민초들에게 꿈과 희망을주시고,,,그리고 실지로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것만,,,,,,,,,저 뇌사모 일당은 ,,,,,,,,,,,,,,,,이글 우리 젊은 이들 많이 읽어 야 합니다,,,우리나라 어느분 보다도 자랑스러운 우리 민초들의 영웅이십니다.
첫댓글 이글을 읽으니 눈물이 날러고 하네요,,,,,,,,우리민초들에게 꿈과 희망을주시고,,,그리고 실지로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것만,,,,,,,,,저 뇌사모 일당은 ,,,,,,,,,,,,,,,,이글 우리 젊은 이들 많이 읽어 야 합니다,,,우리나라 어느분 보다도 자랑스러운 우리 민초들의 영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