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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 봉화산 정토원(烽火山 淨土苑)을 찾아서 ①
-수광전(壽光殿)과 정토원의 이모저모-
지난 1월 6일, 그러니까 꼭 한 달 전에 해인사에서 있었던 지관대종사 영결식과 다비식을 마치고 해인사 홍제암과 해인사 경내를 두루 참배하고 난 다음 처가인 산청군 신안면 중촌 리로 돌아가 2박을 했습니다. 1월 5일 밤에 내려가서 1박하고 다시 2박을 한 것입니다. 내려오기 전에 머릿속 계산으로는 토요일에는 김해로 가서 그 동안 벼르던 봉화산 정토원 과 바로 그 옆에 자리한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지관스님이 쓰셨다는 묘비명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김수로왕릉과 허 황후릉도 찾고 인근에 있는 사찰인 장유사도 찾아 보려 했습니다.
1월 7일, 노무현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峰下)마을에 간다고 하니 장인ㆍ장모님께서도 가 고 싶어도 못 가보셨다며 동행을 기꺼워 하셨습니다. 봉하마을은 처갓집에서 69.7Km 떨 어져 있어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 거리는 해인사까지의 거리와 비슷했습니다.
10시에 출반한 백우거가 정확히 1시간 반 만인 11시 32분 봉하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봉하마을 봉화산이 보입니다.
여기가 봉하마을입니다. 좌측에 고노무현대통령 생가와 대통령 사저가 있고 산 아래에는 노무현 대통령 묘소가 있고 우측엔 노무현대통령 기념관이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봉화산(烽火山)인데 우측의 봉우리는 봉수대가 있던 사자바위입니다. 그리고 이 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수시로 찾았다는 사찰 정토원(淨土苑)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마 지막을 결행한 부엉이 바위와는 250m 떨어진 지척지간입니다. 그리고 이 정토원에는 저 유명한 호미 든 관세음보살 성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성상은 봉화산 정상에 세워져 있 는데 사진 좌측에 살짝 보입니다.
그런데 우선 정토원부터 찾아 부처님께 예배하고자 했는데 언덕길을 오르기엔 두 분이 힘 들 것 같아 차량으로 갈 수 있느냐고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멀지만 빙 돌아 가면 갈 수 있 다고 하여 빙 돌아서 가기로 했습니다. 이곳에 주차장이 있지만 회차하여 정토원으로 향 했습니다.
정상에 세워진 호미 든 관세음개발성상이 보입니다.
봉하마을에서 정토원으로 향하다가 정토원 근처에서 잠시 내려 찍은 정상의 모습입니다.
청소년수련원
11시 41분, 봉하마을에서 빙 돌아 산길을 타고 아미타불 신행도량인 정토원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41분이었습니다. 우선 보이는 건물은 현대식 콘크리이트 건물인 청소년 수련 원이 맞이합니다. 본당인 수광전은 여기서 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야 합니다.
정토원에 왔으니 정토원에 대하여 알아 볼 차례입니다. 정토원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 산리 3번지에 소재한 사찰입니다. 이 절은 어떤 종단이나 스님이 세운 절이 아니라 불자 들이 세운 절입니다. 홈페이지 글을 옮겨 봅니다.
봉화산 정토원(烽火山 淨土苑)에 대하여
『오늘의 봉화산 정토원은 지금부처 약 90여년 전인 1920년 한림면에 거주한 지방유지 이진일의 발의에 의하여 자암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지역 유일의 신앙도량으로 자리하였 다.
이후 1953년 화일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58년 당시 동국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선진규가 백성욱 총장에게 고향 봉화산을 중심으로 농촌 계몽을 하고자 하니 도와달라 하 여 사찰터 등 35,000평에 대한 계약금 35만원을 지원 받아 진영읍 신용리에 있던 신용사 를 병합하고 절 이름을 봉화사라 개명함으로 명실공히 사찰의 터밭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1959년 4월 5일 황폐된 산야, 가난의 농촌, 부정과 독재의 자유당 말기 불교학도 31명에 의하여 봉화산 정상에 개발을 상징하는 호미 든 관음상을 봉안하고 선진규는 이곳에서 식 목과 개간 그리고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들 의 도움으로 5차에 걸쳐 주변 민둥성이 산을 24만평 확보하고, 1967년 사명대사상, 만해 한용운상을 세워 위대한 선각자의 길을 현재의 불교도들이 귀감으로 간직하고자 했다.
1972년 선진규는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 발탁 조계종 총무원에 근무하게 되고 1975년 어떤 스님에 의탁 운영케 했으나 2차에 걸쳐 화재가 발생, 법당과 요사채가 전소했다. 1983년 선진규법사는 아무 것도 없는 봉화산을 서울 나들이 하면서 천막을 쳐서 부처님을 모시고 1984년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이 건물을 법당과 청소년회관으로 사용하면서 다시 사찰명을 봉화산 정토원이라 개칭한 후 믿음의 바탕을 정토신행(淨土信行)에 근거하여 포 교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특히 청소년 인성교육장으로서의 봉화산 여름ㆍ겨울방학 기간에 실시하는 한문서당은 전 국수련시설의 정신교육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1969년 현재의 법당과 청소년수련원 건 립을 시작 1992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반세기 가까이 이곳은 주민에게 만남의 장으로서 휴식과 문화공간으로 자리하게 되 었으며 특히 청소년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으로 봉화산 한문서당프로그램, 찾아온 예절서당 은 문화관광부 최우수상을 수상, 지금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있다.』
청소년 수련원 옆에 있는 포대화상이 보입니다.
포대화상을 돌아 올라가면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미륵의 후신이라는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중국 후량(後梁)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라 합니다. 명주(明州) 봉화현 사람이라고 합니다.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 습을 하였으며, 말이 일정치 않았고, 아무데서나 눕고 자고 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지팡 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거리로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여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 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 어 사람들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 하여 많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기이한 행적을 수없이 남겼으며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예언하여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916년 3월 명주 약림사 동쪽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입 적했다고 합니다.
彌勒眞彌勒(미륵진미륵) 미륵불 진실로 미륵불로서 分身百千億(분신백천억) 백천억 분신으로 몸을 나투어 時時示時人(시시시시인) 때때로 세인에게 보이었건만 時人自不識(시인자불식)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했네.
그때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화현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살아 생전에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고 실덕 (失德)한 자에게 덕을 쌓도록 인도하셨다 하여 인덕불(引德佛), 시복불(施福佛), 포대화상 (布袋和尙)이라 불렀으며,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의 현신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후에 이 포대화상의 실천적 사상이 서구로 넘어가 산타할아버지 출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 포대화상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님 주변 모습
맨 앞에 장인어른, 비니초님, 허리가 굽은 장모님 모습입니다.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觀音開發聖像)
관세음보살님 뒤로는 대나무가 빽빽합니다.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觀音開發聖像) 안내문
안내문을 전문을 옮겨 봅니다.
호미 든 관음개발성상(觀音開發聖像)
『6.25의 민족동란이 갓 지난 1959년 국토는 황폐화되고, 사회는 혼란, 정치는 자유당의 독재, 경제는 보리고개를 넘지 못하는 가난의 슬픔 속에 이를 보살펴야 할 불교계는 내부 가 대처ㆍ비구의 피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젊은 불교학도 31명이 4대개발(심신 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을 상징하는 뜻을 지닌 이 시대에 요구되는 호미를 든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이 봉화산 정상에 모시고 민족 생존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적 횃불 을 올렸던 것입니다.
40여년이 지나면서 그때의 원형인 보살상의 재료가 인조석이라 풍화작용으로 마멸됨으로 인하여 다시 FRP자재로 크게 조성하였으나, 여러 차례 태풍으로 넘어지는 아픔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최초 3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인 불자가 이 소식을 듣고 앞장서서 석재로 기 단 포함 24척 크기로 다시 조성하여 4년 전에 본래의 그 자리에 모셔 놓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이곳에 봉안(奉安)한 이 관음개발성상은 우리 고장에서 서민의 힘에 의하여 탄생한 대통령의 국정 수행이 원만성취되기를 기원하고 앞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의 통일과 승승장 구를 발원하는 원불(願佛)을 삼고자 하여 최초의 서민적 모습 그대로 이렇게 이 자리에 모 시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단장한 이 야외의 법당에 큰 뜻으로 모셨으니 누구나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이 원불(願佛) 앞에서 나라와 중생을 위하고 각자의 소구소망을 간절히 발원기도하여 그 뜻이 성취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불기 2548년(2004) 12월 27일 봉화산 정토원』
여기에 모신 호미든 관세음보살님은 정상에 세웠던 보살님인데 봉화산 정상에는 24척의 석조 관음개발성상이 새로 조성되어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모셨다고 합니다.
수광전 오르는 계단
수광전 입구. 계단 옆 길 대나무가 울창합니다.
수광전(壽光殿) 모습이 보입니다.
어휴 올라오기 힘드시네요.
수광전과 배롱나무
배롱나무. 일명 백일홍나무, 간지럼나무.
상식으로 알아 둘 필요가 있어서 설명을 옮겨 봅니다.
『이 나무를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속을 벗어 버리길 바라는 마음이며, 선비들이 기거처 앞에 심는 것은 청렴(淸廉)을 상징 하는 때문이라 합니다. 특히 이 나무는 용틀임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며 돌연변이가 생겼 을 때 이런 모양을 띄고 있다고 합니다. 』
배롱나무의 전설
『옛날 어느 어촌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식을 받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한 장사가 나타나서 제물로 선정된 처녀 대신 그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습니다.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으니 죽을 때까지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직은 이르오. 아직 이무기의 남아 있는 목 하나 마저 더 베어야 하오. 내가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내가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니 그리 아시오." 하였답니다. 하여 처녀는 백일간 기도를 들었습니다.
백일 후 처녀가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이 걸려 오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그만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장사는 이무기가 죽을 때 뿜은 붉은 피가 깃발에 묻은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백일간 기도를 들인 정성의 꽃, 바로 백일홍입니다.』
수광전(壽光殿)
수광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흔히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極樂殿)' 혹은 '극락보전(極樂寶殿),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 줄여서 '미 타전(彌陀殿)'이라 하기도 하고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서는 '수광전(壽光殿')이라 했음을 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범어 Amitā Buddha를 음역한 말입니다. Amitā Buddh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Amitāyus Buddha와 Amitābha Buddha입니다. Amitāyus는 한 없는 수명(壽命) 을 말하므로 Amitāyus Buddha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번역하고, Amitābha는 한 없는 광 명(光明, 지혜)을 뜻하므로 Amitābha Buddha는 무량광불(無量光佛)로 번역합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 Buddha)은 한없는 수명의 부처님이요,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ābha Buddha)은 한없는 광명의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한 없는 생명이요, 빛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 오랜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 佛)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비구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 상국을 건설하기를 기원하며 48원(願)을 세워 한량없는 수행 끝에 성불(成佛)하여 아미타 불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량수불(無量壽佛) 과 무량광불(無量光佛)의 뜻이 담긴 것을 동시에 나타내려 고 수광전(壽光殿)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광전에 들 때는 막 천도재가 끝나고 있었습니다. ^^
우보처 지장보살 본존 아미타불 좌보처 관세음보살
우선 법당에 들어 예배를 드리고 보니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광전의 주불은 분명 아미불인데 존상을 우러러 뵈니 흔히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의 전매특허인 항 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구별은 흔히 수인(手印)을 보 고 구별하기도 하는데 아미타불의 수인인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을 하지 않고 항마촉지 인이라니... 그러나 아미타불이라고 항마촉지인 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니... ^^
두 번째는 후불탱화가 없고 대신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써서 봉안한 점입니다. 간혹 경 전을 후불탱화 대신 모시는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합니다.
세 번째는 우협시보살로 지장보살을 모신 점입니다. 이는 흔히 있는 일로 새삼스러울 것 도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좌우협시보살로는 좌보처 관세음보살, 우보처 대세지보살을 모 시는 것이 통상의 예인데 요즘은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사찰의 편리를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49재 등 천도재를 올릴 때 지장헌공(地藏 獻供)이 있어 필요하기 때문일 터입니다.
신중탱화
부처님 좌우엔 원불(願佛)을 법당 가득히 모셨습니다.
영단의 두 대통령.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대통령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삼배를 올리고 나서 이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무우세계(無憂世界)에서 법락을 누리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두 분 어른도 예를 표하시고 앉아 계십니다.
기념사진이라 찍었는데...
문에 산신각(山神閣)이라 써 있습니다.
여기는 다용도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종무소이기도 하고 공양간이기도 합니다. 저 우측 방은 원장실입니다. 산신각이라 했는데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공양시간이라 마침 천 도재를 마친 가족들이 공양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합류했습니다. 덕분에 공양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천도재 덕분에 떡과 과일도 함께 먹으니 족히 위장이 위로되었습니다. ^^
이곳에서 원장님을 뵐 수 있었지만 마침 손님이 들어 있었고 또 외출이 계획된 터라 간단 히 인사만 드리고 공양을 들었습니다.
봉화산 정토원이란?
알립니다. 무엇을 알릴까요?
여기는 쉼터 겸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매점인데 차도 무료로 나누어 주십니다. 글씨가 작으니 옮겨 봅니다.
『1. 여기 부처님삼대선언은 노무현대통령께서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라고 한 책입 니다. 많은 불교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이곳 정토원 선진규원장께서 집필한 것으로 20~30분만 읽으면 불교의 큰 뜻을 즉시에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 번 읽으시고 불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 주시기 바라며 이웃에 불교를 알리는데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이곳 쉼터에서 보급하고 있는 염주는 월남산 흑단주(黑丹珠)입니다. 아주 질이 좋은 것이라 산지 직송으로 염가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적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흑단목임.
3. 특별히 전할 말씀은 2003년 이곳 선진규원장께서 독립 운동가이시며 시인이신 만해 (卍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 사용하시던 단주를 새롭게 창안하여 행운의 불이만해 염주(不二卍海念珠)라 이름하여 특허를 취득한 것이 이번에 햇빛을 보게 되었사오니 한 번 감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토원에 왔으니 선진규 원장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선진규 원장은 1934년 4월 김해 한림면 장방마을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봉화산 남쪽 기슭이 노 전 대통령 생가터고, 선 원장 고향집은 봉화산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합니다. 홈페이지 글을 옮겨 봅니다.
『선진규(宣晋圭)법사 1934년생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동대학원수학, 국립창원대학교(환경공학) 대학원졸업, 동국대학교 총학생의장, 전국대학생회장단의장, 대한불교조계종 상임포교사, 대한불교청년회장, 봉화산 정토원 개설, 88올림픽 10만유등기획 홍보실장, 봉화산 청소년수련원 원장, 청소년 수련시설협회 회장, 경상남도 도의원, 대한불교조계종신도회 회장,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동국대학교 대학한 겸임교수, 한민족평화통일전국노인회 회장, 한국불교문인협회 고문.
저서 : 「불교 포교론」,「청소년 환경윤리관 확립의 연구」,「부처님의 삼대선언」. 수상내역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종정) 수상, 청소년 지도자 표창(문화관광부장관), 전국 청소년 수련 프로그램 경진대회 최우수상(문화관광부장관) 수상, 대한민국 국민 훈장 목련장(대통령) 수훈.』
선진규 원장에 대해서는 일찍이 남산의 대원정사에 다닐 때 여러 번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친숙한 분입니다. 그래서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었습니다.
☞ 다음은 2부 '호미 든 관세음보살을 찾는 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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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봉화산 정토원 상세한 설명에 편안하게 잘 보았습니다. _()_
다음 2부가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가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 같아 소상히 소개하고자 했는데 여건상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내일 2부와 3부를 올리겠습니다. _()_
봉화마을, 정토원 모두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도 모셨군요.
잘 둘러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부도 기다려지는군요. _()_
정수님, 봉화마을이 아니라 봉하(峰下)마을입니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봉화산 봉우리 아래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 봉화산 정토원은 노대통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서 성지가 되었습니다. _()_
나무 아미 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하시고, 사용료 드리고, 최고의 효 거움 이모두가 아미타불 부처님의 자비 수행 이겠지요. _()()()_ 화엄찰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불 (국보 18 호)은 동쪽을 향해 앉아 계시고, 남문으로 들어가 서쪽을 향해 예를 올림니다. 돼지띠를 아미타불로 도선사에서 본것 같 습니다.
훌류한 일을 하셨 군요 ,. 모시고 오시고 가시고 절
사용료 드리고... 예 사용료를 두둑히 드리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호미 든 관세음보살님도 기해생 돼지띠입니다. 2부, 3부를 보시면 아실 터이지만 기해생을 을해생이라고 엉뚱하게 비석에 글을 새겼으니 어찌하리요. _()_
두 분 어르신과 함께하신 정토원 순례 잘 봤습니다. _()_
늘 농번기에만 찾아가서 야외에 나갈 기회가 없었는데 일손이 없는 겨울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 사드리려 했는데 절에서 배고픈 찰나 배부르게 먹는 바람에 그만... _()_
여기에 오신 분들은 가지 마시고 발자국 남기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_()_
친정부모님은 마을 분들과 김해를 다녀오셨는데, 봉화마을도 가자 하니, 마을 분들이 모두 고개를 흔드셔서 못 가 보셨다고 합니다.
김해에 가서 왕릉만 보고 오셨나 보죠 다음에 갈 때는 왕릉과 사찰도 보고 싶습니다. 허황후와 관련한 여러 절이 있던데 장유사를 비롯하여... 이 번에 원을 푸셨으니 다행입니다. _()_
부모님 모시고... 부럽습니다..걍 갈수가 없네요_()_
마음을 내면 되지요. 아마도 기회는 있을 겁니다. 저는 처가가 산청이라 간 김에 들를 곳이 많은데 늘 농번기에 가서 모시고 나갈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농한기에 가면 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네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