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이슬람주의의 탄생에서 이슬람국가(IS)의 탄생까지 국제전문기자의 안내로 살펴보는 중동 분쟁의 미로. 세계는 지금 3차 대전 중일까? 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국가 간의 전면전은 아니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이슬람 대 서방 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띤 분쟁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를 후세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9.11 이후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전, 내전, 내란, 소요, 테러를 비롯해 최근 파리에서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 테러나 IS의 일본인 인질 살해 등을 보면 '비대칭적 장기 국제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이 '비대칭적 장기 국제전'의 속살을 본격적으로 보려면 1979년 아프가니스탄으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기점으로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부터 2014년 IS의 탄생까지 지난 35년간 이슬람권에서 벌어진 일들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5 | “이성은 개에게 던져줘라.” 탈레반이 자신들의 종교경찰 청사에 내붙인 표어이다. 이성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힘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알고 있다. 인간사와 인류사 발전의 동력으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성의 상실이나 모자람을 탓하지,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탈레반은 그 이성 자체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악으로 본다. 우리는 그런 세계관을 가진 탈레반 등 현대 이슬람주의 세력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
10 |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이후 중동과 이슬람권의 대중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당시 이집트 대통령으로 대변되던 세속주의 근대화 세력에 실망감을 느끼고, ‘이슬람이 해답’이라는 이슬람주의 세력에 끌리기 시작한다. 나세르 등 세속주의 근대화 세력은 애초의 건강한 개혁 성향을 상실하면서 독재정권화 되어갔다. 아랍 대 서방 및 이스라엘의 투쟁 구도에,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 권위주의 정권 대 민중이라는 투쟁 구도가 추가됐다. |
12-13 |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를 받은 단체들이 뉴욕 맨해튼 등에서 공공연히 무자헤딘을 모집했다는 주장도 있다. 무자헤딘 이슬람 전사들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가, ‘불경한’세속주의 정권과 미국 등의 외세를 이슬람 세계에서 축출하는 이슬람주의 무장 투쟁을 벌인다. 아프간 전쟁이 이슬람주의와 그 무장 투쟁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하고 키운 이슬람 전사들과 나중에 싸우게 되고, 소련은 이 아프간 전쟁으로 결국 붕괴의 단초를 보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국제 질서였던 미국과 소련 주도의 냉전이 붕괴되고, 그 대신에 이슬람권에서 새로운 분쟁 구도가 싹트게 된 것이다.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도 이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다. |
20 | 전쟁은 무기에 따라 1세대(창, 활, 칼 등), 2세대(총, 포 등), 3세대(전투기, 전차, 잠수함 등)로 구분하기도 한다. 3세대를 지나 지금은 기습·타격 등의 게릴라전과 해킹 등의 정보전, 통신교란 등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해 상대의 정치적 목적을 무력화하는 4세대 전쟁의 시대이다. 1948년 1차 중동 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슬람권 분쟁을 일관된 분쟁이라고 보면, 이는 전형적인 4세대 전쟁이다. 그 규모는 한 나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권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대칭적 장기 국제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이슬람주의 세력과 미국 등 서방 간의 분쟁은 이러한 성격이 짙다. |
49 | 콜로라도 주립 교육대학에서의 유학 생활은 쿠틉에게 이슬람의 주적이 미국임을 확인시켰다. 이슬람의 고난은 타락에서 비롯됐으며, 그 타락은 서구 현대화 문명에 오염됐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결벽 강박증 증세까지 보이는 쿠틉에게 킨제이 보고서로 대표되는 미국의 성 문화는 인간이 할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신을 경배하는 교회에서 남녀가 부둥켜안는 댄스파티를 벌이는 현실 앞에서 쿠틉은 신을 조롱하는 서구의 세속을 봤다. 그는 이집트와 이슬람 세계가 미국에서 만개한 이런 서방 자본주의 문명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이슬람이 겪는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
122 | 브레진스키는 아프간에서 소련의 퇴치를 위해서라면 파키스탄의 핵 개발도 용인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다. 이는 파키스탄을 핵무장으로 이끌었다.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그 후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 등 냉전 이후 미국의 최대 안보 현안이던 핵 확산 문제를 야기한 모델이었다. 현재 25년 가까이 계속되는 북한 핵 개발 위기도 따지고 보면, 그 근원의 하나는 아프간 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북한에 기술적 지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선례를 제공했다. |
138 |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이슬람 세계를 격동시켰다.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이슬람주의 세력이나, 이슬람주의 세력의 도전에 전전긍긍하던 이슬람 세계 각국 정부가 일제히 아프간으로 눈을 돌렸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자유롭게 성전을 펼칠 무대로서의 가능성을 봤다. |
149 |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지하드나 순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겨 전쟁으로 내몰린 이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슬람주의자나 지하드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땅과 나라를 되찾겠다는 실질적인 목표를 지니고 참전했다. 반면 아랍아프간들은 지하드나 순교라는 추상적인 자신들의 대의에 따랐다. 그들에게 소련군과의 전투는 지하드와 순교로 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
172-173 | 아프간 정책과 공작의 주무부인 CIA 입장에서는 소련군 철군 이후는 자신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CIA 역사상 가장 성공적 공작이 될 아프간 전쟁의 온전한 승리만을 남기고 싶어 했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굴욕적으로 도망치는 그 순간을 덧칠할 정치적 협상을 바라지 않았다. CIA 근동부는 아프간 공작이 소련의 힘과 침략에 맞서는 것이었다며, 소련군이 완전히 철군할 때 CIA도 아프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공작을 이제 재건 프로젝트로 바꾼다는 것은 실수라고 강조했다. 소련 철군 이후의 아프간은 파키스탄 정보부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파키스탄 정보부가 자신들이 지원하던 헤크마티아르 등 이슬람주의 세력의 정부를 세울지라도, 아프간에 대한 파키스탄의 헤게모니만 존재한다면 미국의 이익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논리의 결론은 무자헤딘, 특히 파키스탄 정보부가 선호하는 헤크마티아르 등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계속된 지원을 통해 나지불라 정권을 신속히 붕괴시켜 소련의 영향이 배제된 새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
258 | 이슬람주의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원해 인류의 절대적 가치가 된 인간 이성과 그 힘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신봉하는 이성이 빚어낸 사회와 그 현실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이슬람권의 현실은 더욱 그랬다. 그 속에서 절망한 대중이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신의 섭리와 의지로 회귀하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
318 | 왜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이미 현실화되고 전례가 있던 알 카에다 등 초국적 지하디스트 테러 그룹들의 위협에 무신경했을까? 버겐은 그 이유가 간단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냉전 시대의 안보관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라이스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위원회의 소련 전문가였다. 월 포위츠는 1970년대 국방부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는 ‘팀 비(Team B)’라는 작업을 주도하며 공직에 입문했다. 이 팀은 소련의 군사 위협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는 잘못된 결론을 입안했다. 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각각 비서실장과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 이들 모두의 견해는 국가 차원의 위협이라는 냉전 시대의 정신 상태에 고착되어 있었다. |
331 | 미군의 개전 초기 승리는 전술 승리이긴 하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게릴라 부대에 불과한 탈레반 병력이 정규전으로 미군에 맞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미군의 승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 하지만 탈레반이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다시 게릴라 부대로 돌아갔을 때 사정은 달라졌다. 이들은 소련이 침공한 아프간 전쟁 때 소련군을 공포에 떨게 하던 무자헤딘 게릴라로서 미군 앞에 나타난다. 미국과 미군은 초기 승리에 도취했다. 개전 초기의 승리가 자신들의 새로운 전쟁 개념의 개가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탈레반이 과거에 자신들이 키웠던 무자헤딘이라는 사실을, 그 무자헤딘 중에서도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전투 의지를 갖춘 무자헤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아프간 전쟁은 지독한 망각의 반복이다. 이 망각의 역사는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조성했던 소련의 처지를 자신들이 답습해 반복하게 한다. |
368 | 막무가내식 미국 침공 계획이 현실화되자, 이라크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며 침공을 피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후세인 정권은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 부총리까지 내세워 미국 내 이라크 전쟁의 기획자 중 한 명인 리처드 펄 국방정책위원장과 간접적으로 접촉했다. 이라크 쪽은 미국 회사들에 석유 등 자원 이권 제공, 유엔 감시하의 선거, 미국의 직접 사찰, 이라크가 수감 중이던 알 카에다 요원 인도, 아랍-이스라엘 평화 과정에 관한 미국 정책에의 전적인 협조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펄의 대답은 “우리는 바그다드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
427 | 이미 2006년에 미군의 폭격으로 자르카위가 숨진 뒤 방향성을 상실한 알 카에다 이라크 지부는 그 후‘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이름과 조직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놓고 지하디스트 진영이 내부 갈등을 빚었다.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당시 미군 사령관이 주도한 반폭동 전략은 주민과 부족 세력들의 협조를 얻어서, 이라크 내 알 카에다 등 극렬 이슬람주의 세력을 고립시켜나갔다. |
436-437 | 시리아 내전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지하디스트 세력에 또 하나의 성전 무대가 됐다. 이라크 내 알 카에다 세력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더 나아가 전 세계 지하디스트 세력이 이곳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무장 투쟁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금과 무기가 그들에게 제공됐다. 시리아 내전이 강대국과 중동 지역 국가 및 세력의 대리전쟁으로 격화됐기 때문이다. |
445-446 | 시리아와 이라크 내전에서 나란히 질주하던 누스라전선과 이라크이슬람국가의 관계는 2013년 4월 13일, 바그다디의 육성성명으로 완전히 새 국면으로 들어갔다. 그는 누스라전선이 이라크이슬람국가에서 파생된 조직이며, 이제 두 조직을 다시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바그다디의 발표는 폭탄이었다. 골라니는 즉각 이를 부인했지만, 중동 역내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들의 대개편이 시작됐다. |
454 | 6월 29일,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의 지도자 바그다디는 이슬람국가를 선포했다. 영국보다도 더 큰 영토, 모술 중앙은행에서 확보한 5억 달러의 현금, 최소한 매달 1,200만 달러의 세금과 석유 밀매를 통해 얻는 엄청난 수입, 정부군이 버리고 간 탱크와 헬기, 장갑차 등 첨단 미군 장비, 그리고 자신들의 영토로 밀려드는 외국의 이슬람주의 전사들이 이슬람국가의 기반이다. 이는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들의 네트워크 조직인 알 카에다, 아프간 주민들의 정권에 그친 탈레반 정부를 넘어서는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들의 신기원이었다. |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지금 21세기에 되살아난 제로니모와 싸우고 있다. 제로니모는 19세기의 실존인물로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한 백인들과 싸운 아파치 인디언들의 추장이었다. 그의 용맹과 리더쉽은 신대륙에서 명성을 떨쳤다. 아파치족의 터전을 빼앗기 위해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고 그 와중에 제로니모는 처자식을 모두 잃고 만다. 복수를 다짐하며 전쟁에 임한 그와 아파치족 전사들은 무려 30년동안 백인 침략자들을 괴롭혔다. 캐스린 비글로우의 영화 <제로 다크 서티>에서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명은 `제로니모'였다. 빈 라덴을 사살한 직후 네이비 실 대원은 '신과 조국의 이름으로 제로니모를 처단했다'고 무전 송신한다. 911 테러로 5천명의 미국 민간인이 희생됐다. 빈 라덴은 현대에 부활한 아랍 세계의 제로니모였던 것이다.
아파치 인디언 제로니모가 용맹했던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족의 죽음은 삶의 의미를 상실케 했고, 복수는 생의 목표가 되었다. 911은 잔혹한 테러였다. 빈 라덴의 기획에 따라 미국 국적기를 불법으로 탈취해 세계무역센터와 팬타곤을 공격한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아랍출신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중동 각국의 중산층 출신으로 부유한 부모의 후원을 받으며 유럽 대학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자 유망한 미래가 약속된 지식인이었다. 왜 그들은 극렬한 테러리스트의 길을 가야만 했을까. IS(이슬람 국가)는 왜 그토록 잔혹한 참수와 학살을 자행하는 걸까. 어느 순간 맥락이 빠진 국제뉴스를 보는 것은 고역이 되고 말았다. 이슬람과 중동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비단 유가 때문만은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매일 죽음이 생중계되는 이 세계는 인간 실존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양산한다. 인간이 도살장의 가축처럼 처분되고 있다. 매일 증오와 복수의 메세지가 들끓는다. 그 안에서 어떻게 한가하게 인간 존엄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리스트 라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토록 부유한 자산가이자 엘리트 출신이 테러리스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뉴스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IS의 참수동영상에는 호기심을 갖지만, IS의 기원과 잔혹함의 정체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정의길 한겨레신문 기자가 쓴 <이슬람 전사의 탄생>은 현대 중동 분쟁의 실상을 그 뿌리부터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1948년 전세계에 흩어져 2천년간 배회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중심부 시온이란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겠단 희망을 품었다. 유대민족주의를 표방한 시오니즘 운동이다. 팔레스타인의 주인은 여러번 바뀌었다. BC 6세기에는 유대인들의 땅이었지만 BC 1세기에 이르자 로마에 점령당했다. AD 636년에는 이슬람교를 추종하는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하고 1천년간 이곳을 지배했다. 12세기에 유럽 십자군이 잠시 점령해 통치한 것을 빼고는 줄곧 아랍인들의 땅이었다. 부유한 유대인들의 로비와 1,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미국 등의 지원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지만 이것은 현대 중동 분쟁의 발화점이 되고 만다.
팔레스타인은 3대 종교인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모두의 성지가 있는 곳이다. 민족과 종교의 이질성이 뒤섞인 이곳은 전쟁터가 될 숙명이었다. 1500년동안 삶의 터전이자 종교의 중심이 된 땅을 아랍인들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이곳을 점령한 직후,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주변 아랍국들과 3차에 이르는 중동 대전을 치르고 결국 승리한다. 그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보여준 강압적인 통치와 아랍인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그들이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이란 과거를 잊게 만들만큼 잔혹하고 냉정한 것이었다. 문제는 중동분규가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이질적인 종교와 민족에서만 기원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 내부로 들어가보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분쟁의 성격이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교 내부의 종교적 차이에서 기원한 다툼이다. 이슬람교의 대표적인 두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태생부터 극결하게 대립해 왔다. 무슬림을 양 파벌로 나뉘게 한 원인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 선출방법을 놓고 양 세력이 다툰것에 있다. 시아파는 후계자가 무함마드의 혈육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수니파는 핏줄에 상관없이 무슬림의 신앙 공동체인 움마에서 선출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양대 파벌은 내분속에서 반대 파벌 지도자 암살 사건에 관여하고 그 이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다. 오늘날 수니파의 대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수많은 아랍국가들 내부에서도 이 두 파벌간의 반목은 학살과 테러로 이어진다.
그외 아랍국가 내부의 기독교 대 이슬람간의 종교 분쟁이다. IS(이슬람국가)는 아랍의 소수종교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참수를 자행하고 있다. 또, 아랍 대 서방 및 이스라엘에 대한 반외세 분쟁이다.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도운 서방 세력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고, 그들을 추방하는 것은 이슬람교도로서 지하드(성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속주의 대 이슬람주의의 분쟁은 종교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세력과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현실주의 세력간의 싸움이다. 다수 민족 대 소수 민족의 민족 분쟁과 중동 역내 국가 사이의 국가 분쟁도 치열하다. 이란과 이라크는 1980년대 무려 8년간 재래식 장기전을 치뤘다. 마지막, 독재정권 등 권위주의 세력 대 민중들의 민주화 분쟁은 어떤가. 2012년 12월 튀니지의 한 노점상인의 분신에서 시작된 중동 민주화 운동은 이집트, 리비아 등 장기 독재권력을 무너뜨렸다.
저자는 이슬람권의 분쟁이 확산되는 이유를 이슬람권 전역의 저개발 상황이 그 배경이라 지목한다. 이슬람권이 석유자원을 등에 업고도 저개발된 이유는 과거 제국주의 통치 때의 착취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 등 서방 세력의 대외 정책이 그 원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가지 이유는 이렇다. 첫째, 이슬람권은 건조지대이자 현재 건조화가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지역이다. 이슬람권의 유일한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석유는 강대국의 착취를 끌어들였을 뿐, 대다수 이슬람권 대중은 척박한 환경의 희생양이 됐다. 둘째, 이슬람권은 가장 역동적인 인구 성장을 보인다. 자원과 인구의 불균형으로 젊은층에 실업이 만연하게 되고, 혈기방장한 젊은 인구층을 이슬람 분쟁과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끌어들인다는 설이다.
"이슬람주의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원해 인류의 절대적 가치가 된 인간 이성과 그 힘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신봉하는 이성이 빚어낸 사회와 그 현실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이슬람권의 현실은 더욱 그랬다. 그 속에서 절망한 대중이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신의 섭리와 의지로 회귀하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258쪽,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911 테러가 준 공포는 세계인들에게 오랜시간 각인됐다. 고층 건물이 두 대의 항공기와 충돌 후, 허망하게 내려 앉은 모습. 그 안에서 무고한 민간인 수천명이 일순간 운명을 달리한 그 순간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그 이후, 10년 넘는 시간동안 아프칸니스탄의 협곡을 거쳐 파키스탄의 은신처에서 이슬람근본주의에 경도된 무장단체 알카에다를 지휘하는 지도자로서 살아왔다. CIA의 오랜 추적끝에 미국은 자국민 5천명을 몰살시킨 이 테러리스트를 결국 응징하고야 만다. 미국은 곧바로 발표된 성명에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말한 `정의'에 수긍할 수 있었을까?
오사마 빈 라덴은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을 희생양 삼아 정치,종교적 목적을 달성코자 했기 때문에 나쁜 지도자다. 그의 신념의 뿌리인 이슬람은 이같은 학살을 허용하지 않았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해 무고한 민간인을 희생양 삼아 정권을 갈아치웠다. 만약 어떤 종교나 이념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살인을 허용하고 부추긴다면, 그것은 절대로 인간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신념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지금 세계인들을 경악시키는 IS와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알카에다, 이슬람 성전을 수행하는 무자헤딘의 만행은 이슬람이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가증스럽다. 그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이 실현되는 칼리프 국가가 되길 소망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반대의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어도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수성을 믿고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살육한 히틀러는 편협한 아리아인의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다. 미국이 대테러전을 빌미로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첨단 무기를 동원해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 역시, 종교와 민족의 이질성과 배타성 때문이다. 이 세계는 지금 종교와 민족으로 반목하고 있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생명과 인권은 경시되고, 이 세계는 거대한 도축장이며, 동물 농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상대적이다. 하여, 누구도 정의를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삶의 영역을 우주로 넓히고 모든 인간이 공존을 꿈꾸어야 한다. 종교, 민족간 증오의 사슬은 끊어야 마땅하다. 공생을 가르치는 종교는 진정 불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