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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박정희 평전(42)]저도 바갓가에 혼자 않아
[2012년 1월호]
[다시쓰는 박정희(朴正熙) 평전(42)]
불굴의 혼
저도 바갓가에 혼자 않아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박정희를 울린 여인
1971년 6월부터 79년 9월까지 박정희는 매달 한 번씩 모두 134회에 달하는 경제동향보고회의를 주재하면서 빠짐없이 새마을사업을 챙겼을 뿐 아니라, 연말이 되면 전국각지에서 선발된 새마을유공자들을 청와대로 특별히 초대해서 치하하는 연례행사를 벌이곤 했다.
1974년 12월 17일에도 박정희는 다음날 장충체육관에서 열릴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앞서 새마을유공자 66명을 청와대로 초대했는데, 그날 그는 특히 한 여성유공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다.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의 여성 새마을지도자 홍영매. 부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사회사업전문교육원 과정을 이수한 다음 부산의 고아원 보모(保姆)로 근무하던 홍영애는 어느 날 먼저 결혼한 친구의 시댁이 산다는 현리마을에 ‘고아보다 불쌍한 5남매’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가 일찍 죽고 아버지는 외팔이에다 절름발이 상이군인으로서 매일 술에 절어 있어 집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라는 것. 가장이 노동력이 없는데다 다른 벌이도 없어 마을사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끼니를 이어가는데, 이웃들이 두 번이나 새 여자를 들여줬으나 얼마 못 견디고 도망쳐버려, 마을에서도 이제는 포기한 포기상태라고 했다.
“아이가 다섯이면 엄마가 있어야 하잖아?”
“제정신 가지고서 그런 집에 들어가 살 여자가 어디 있어.”
“그렇다면 내가 그 집에 들어가 살아볼까?”
홍영매가 불쑥 던지는 한마디에 친구가 “너 미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
홍영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엄마 없이 버려진 5남매의 측은한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마침내 ‘그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내 한 몸을 희생하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가족들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한다. 궁벽한 시골마을 현리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찾아가 무조건 집안청소를 하고는, 뒤미처 나타난 불구의 중년남자 박정수에게 호소한다.
“댁의 아이들과 살려고 왔으니 제발 허락해 주세요.”
“누굴 놀리는 거요? 허튼 소리 말고 돌아가시오.”
박정수는 눈이 휘둥그레진 나머지 하고 버럭 화를 냈으나, 홍영매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지고 만다. 그때 그녀의 나이 23살, 꽃다운 처녀였다.
당시만 해도 현리는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춘 ‘신이 버린 마을’이었다. 남자들은 허구한 날 노름과 술과 싸움질로 보내고, 보릿고개에는 산나물로 겨우 끼니를 이을 정도로 가난했다. 감정이 메마른 주민들은 외지사람들에 대한 배타심이 강해, 홍영매도 도시에서 막 굴러먹던 전력의 소유자거나 북한간첩일는지 모른다는 별의별 험담의 쑤군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는 아이가 울며 밖에서 돌아와 홍영매한테 말했다.
“사람들이 한 달도 못가서 엄마가 도망칠 거래. 정말 갈 거야, 엄마?”
“아냐! 엄만 절대 가지 않아. 너희들 두고 가긴 어딜 가.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 거야.”
홍영매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아이들은 새엄마를 기쁘게 해 붙들어놓으려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집안일도 적극 도왔다. 홍영매는 그런 아이들을 사랑으로 정성껏 돌볼 뿐 아니라, 손바닥만한 농토일망정 경작에 필요한 퇴비를 만들고자 난생 처음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다.
직장생활하며 저축한 돈과 퇴직금으로 돼지·닭·토끼 등을 사육해 살림을 불려나갔다. 한편으로 일자무식 남편에게 글을 가르쳐 신문 읽고 아이들 공부참견도 할 수 있게 끌어올렸다. 그녀가 기둥이 되어줌으로써 아이들은 밝고 올곧게 자라났으며, 남편은 술 담배 끊고 불편한 몸으로나마 농사일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살림에 윤기가 돌고 마을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녀는 자연히 중심인물로 떠올랐고, 절미저축운동·마을구판장 운영·공동 영농작업, 거기에다 공동우물과 빨래터 조성, 담장·부엌·변소 개량까지 그녀의 제안은 마을부녀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 무렵 새마을운동이 도입되면서 홍영매는 새마을지도자가 되었고, 술과 노름밖에 모르던 마을 남자들도 그녀의 설득에 따라 화투를 모두 태워버리고 새마을운동에 동참했다.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정부가 지원해준 시멘트로 블록 수만 장을 찍어 마을 집들을 수리하거나 신축하고, 고샅길을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넓히며, 하수구와 동네 하천을 말끔하게 정비해 개천에는 다리를 놓았다. 집집마다 상수도를 설치하고, 지붕을 개량하고, 등잔불을 전등불로 바꾸었다.
환경개선사업이 마무리되자, 홍영매가 잇달아 추진한 것이 소득증대 사업이었다. 누에를 치고, 다른 마을보다 앞서 비닐하우스 재배법을 도입하고, 유실수 중에도 지역 기후에 알맞고 잘 자라는 감나무 재배단지를 조성하고, 한우 사육에도 손을 댔다. 마을이 생긴 이래 그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 ‘우리 함께 잘 살아보자’고 모두가 열정을 쏟으며 자신감에 넘쳐보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은 아니어도 정성으로 키운 큰딸이 시집가면서 새어머니 홍영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우리 엄마! 버려진 5남매를 잘 키워주시고 불쌍한 우리 아빠를 살려주신 천사 엄마의 은공에 엎드려 감사해요.’
홍영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새마을지도자 체험담 발표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고, 박정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홍영매의 꺼칠한 손과 악수한 박정희는 왼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칭찬했다.
“홍영매 씨 같은 훌륭한 사람이 곳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추진하는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홍영매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몸은 비록 힘들었어도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열심히 살다 보니 보람이 있었고, 몰라보게 달라진 남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이 있어 행복했어요.”
대학입시 장애자 차별을 시정하다
1976년 1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사(新年辭)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낭비를 배격하고 자립체제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의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서로 돕는 사회기풍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날 하루 쓴 신년휘호 ‘증산절약(增産節約)’‘자조자립(自助自立)’‘자주국방태세확립(自主國防態勢確立)’‘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는 그가 1년 동안 추진하고자 하는 국정지표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가를 웅변해주었다.
1월 20일부터 중앙관서에 대한 연두순시에 나선 박정희는 오전 10시 맨 처음 경제기획원을 방문해 브리핑을 받았다. 이어서 오후 1시 30분 재무부를 찾아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안내원에게 봉급을 얼마나 받느냐고 물었다.
“작년 12월에는 4만4천 원을 받았는데, 올 1월달부터는 7만7천 원을 받게 되고, 보너스를 합치면 월평균 8만 원 정도가 됩니다.”
안내원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고, 박정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희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 이런 사람에게 현재 물가표준으로 배(倍)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보았다. 앞으로 4〜5년 내에 그러한 수준까지 향상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월 22일 상공부 순시에서는 “한국경제가 1백억 달러 수출고지를 넘어서게 되면 경제자립의 기초를 확립하여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1976년의 수출목표를 1백억 달러로 책정하고 있었다.
2월 2일, 재일거류민단본부에 ‘국정의 기본방침을 뚜렷이 드러냄’이란 뜻의 ‘국시현양(國是顯揚)’이란 휘호를 써 보낸 박정희는 그날 밤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오늘 오후 3시부터 국립극장에서 구정(舊正)에 모국을 방문한 약 3천 명의 재일교포를 위한 서울시 주최 환영대회가 베풀어졌다. 그 장면이 밤 9시부터 각 TV방송국에서 일제히 재방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실감날 감격적인 정경이 두 시간 동안 방송되었다. 조국·고향·동포·혈육이라는 낱말을 이번처럼 사무칠 정도로 전국민에게 깨닫게 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조국은 곧 나의 집이요, 나의 부모요, 형제요, 나 자신이다. 즉 대아(大我)다.
조국을 위한다는 것,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조상과 부모와 나의 형제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요,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조국의 넓고 따뜻한 품이란 부모의 따뜻한 품속과 똑같은 것이다.
이국 타향에서 수십 년 동안 조국을 등지고 조국을 욕하던 3천 명의 조총련계 동포들도 이번에 조국에 다시 돌아와서 부모 말을 듣지 않고 가향(家鄕)을 뛰쳐나가 방랑하던 탕아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고향과 부모형제의 사랑에 다시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참으로 민족적인 일대경사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는 유신시대에 와서 국정 방향의 큰 틀을 제시하고 실무적인 사항은 상당부분 아랫사람들한테 위임한 다음 감리감독에 치중하는 스타일로 바꾸었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쓴 일기도 내용이 보다 구체적일 뿐 아니라 소박한 인간성을 그대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2월 24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금년도 각 대학 입학시험에 학과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신체부자유라는 이유로 불합격된 학생들의 억울하다는 호소소리가 작금 보도를 통하여 알려짐으로써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교부장관을 통하여 관계 각 대학총장에게 권유하여 이들을 구제해주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체부자유 학생과 그들의 학부모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참으로 흐뭇하기 그지없다.
중국고사에 한무제(漢武帝) 때 사마천(司馬遷)은 신체불구가 되어 더욱 분발하여 《사기(史記)》 1백30권을 저술하여 고대중국사를 남겼다고 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후세에 남긴 손무(孫武)도 두 다리가 없는 불구였다고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명저를 남긴 공자의 제자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었던 실명자였다고 한다.
신체 일부가 불구하고 하여 사회에서 버림을 받거나 폐인 취급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에 굳은 의지로써 훌륭한 일을 성취하여 후세까지 빛을 남긴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학이 이들 불구한 사람들을 차등 대우하였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명색 지성(知性)의 전당인 우리나라 대학들이 신체장애자들에게 입학을 허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겨우 30년 남짓하고, 그것도 박정희의 특명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되어야 할 부분이다.
‘유엔은 뭣하는 곳이야!’
1976년 4월 들어서 한국과 미국 사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재미동포 사업가 박동선이 한국정부를 위해 미국 정계를 상대로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벌였다는 소위 ‘코리아게이트 스캔들’을 조사하느라 워싱턴 정가가 시끌벅적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담당자는 프레이저 하원의원이었고, 그는 박정희정부를 민권탄압의 독재정권으로 깎아내림과 동시에 “한반도가 적화(赤化)되더라도 미국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 작자의 본색이 드러난 거야. 한국의 민권을 위해 투쟁했다는 기록을 남겨서 선거 때 표를 더 얻자는 속셈이겠지.”
4월 13일, 박정희가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점심을 먹으면서 불쾌한 듯이 한 말이었다. 이어서 미국의 군사원조에 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내년에 받게 될 2억3천만 달러로 미국의 군사원조는 종결됩니다. 그건 원래 전에 닉슨이 국군현대화를 위해 주겠다고 약속한 15억 달러의 마지막분인데, 처음 조건은 무상(無償)이던 것이 쩨쩨하게 이 조건 저 핑계를 대는 바람에 부득이 이자 8%의 유상(有償)으로 바뀐 겁니다. 이자 8%면 그게 무슨 원조야. 상업차관하고 다를 바 없지. 당신들, 미국의 이런 군사원조 실태를 우리 국민들한테 똑바로 좀 알려주시오. 미군 철수? 할 테면 하라지. 이제는 우리 국군만으로도 북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미군이 가고 나서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에 지상군 파병을 요청할 생각은 없어요. 공군과 병참(兵站) 지원만 적기(適期)에 해주면 돼.”
그러면서도 그 얼마 앞서 미국의회가 반한적(反韓的)인 내용의 ‘딜럼스 수정안(修正案)’을 압도적 다수로 부결시킨 사실을 예로 들며 “미국이 주한미군을 함부로 빼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희망 섞인 여운을 남겼다.
4월 24일.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작금의 지상(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 보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만〜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전인류가, 특히 툭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인도(人道)니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 종교단체, 무슨무슨 옹호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위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의 하급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자기들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 본국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주의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똑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6월 25일 일기는 당연히 6.25동란에 관한 내용이었다.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나 된다.
조국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 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자들의 이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길은 꼭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 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전몰군경·반공 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연수원장 관사의 호화 물의
1976년 봄을 지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석유파동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우리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선 끝에 어느덧 거의 완전한 정상화를 되찾아 생산과 유통, 수출 등 모든 부문에서 성장세가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각별히 챙기는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7%나 신장되었고, 수지면에서도 흑자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정부가 보유한 외화도 20억 달러를 초과했다.
‘이 정도로 나가기만 하면 되겠어. 금년 농사만 제발 큰 가뭄이나 장마 피해 없이 순조롭게 되어만 준다면…….’
박정희가 이처럼 부푼 기분으로 수원 새마을연수원 시찰을 비롯해 경기도 일원의 모내기 상황을 시찰하고자 정무와 공보 두 비서관만 데리고 청와대를 출발한 것은 7월 6일 화요일이었다.
새마을연수원에서 신임이 두터운 김준 연수원장과 정상천 정무제2비서관을 상대로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관해 환담할 때만 해도 분위기는 밝았다. 그러던 것이 경기도청에 잠시 들러 조병규 경기지사로부터 간략한 브리핑을 받고 나와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음 시찰하기로 된 곳이 건설공사가 한창인 청소년지도자연수원이었는데, 경부고속도로 양지터미널에서 구도로(舊道路)로 빠져나가 시작되는 연수원 진입로가 아직 포장도 되지 않아 노면이 울퉁불퉁하고 흙먼지가 풀썩풀썩 나는 길을 한 시간 이상이나 힘들게 달려가야 했다.
박정희는 면구스러워 쩔쩔매는 조병규 지사 등 아랫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막상 청소년지도자연수원 공사현장에 도착해 한 바퀴 둘러보고는 ‘이런 엉터리 같은 놈들이 다 있나’ 하는 심정이었다.
“저기 저 집은 뭐요?”
박정희는 높은 지대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양옥건물을 가리키며 조병규에게 물었다.
“연수원장 관사입니다.”
“아니, 연수원 건물을 먼저 지어 하루빨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우선이지, 어떻게 원장 관사부터 지었소?”
조병규는 얼굴이 금방 벌게지며 대답을 못했다.
“아까 그 길은 또 그게 뭐야. 여기다 연수원을 지으려면 모름지기 진출입 도로부터 정비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 아니오? 그리고 저 원장 관사인지 뭔지 너무 사치스러워. 교관 숙소 건물도 그렇고. 방금 둘러보니까 식당이 연수원 건물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데, 음식냄새 풍기는 걸 고려해서라도 식당은 가장자리 쪽에다 배치하는 게 상식 아닌가? 아무튼 연수원 건물을 짓기도 전에 원장 관사와 교관 숙소부터 떡 지어놓고, 그것도 우리가 보통 보는 건물과 달리 너무 사치스러우니, 청소년들 연수는커녕 청년들과 주민들로부터 빈축이나 사기 꼭 알맞겠구먼.”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연수원 자리가 교통조건이 열악하니 공사를 중단하고 여건이 더 양호한 곳을 물색해서 순서대로 다시 지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가늠한 수행원들은 가슴이 졸아든 나머지 한마디도 못했다.
박정희는 모내기 현황 시찰을 포기하고 곧장 청와대로 돌아가자고 했다.
청소년지도자연수원 공사현장을 보고 기분이 틀어지기는 했으나, 정작 그 불쾌감의 진원(震源)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가뭄이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늦어졌고, 이미 모내기를 마친 논도 일부 모포기가 말라 시들어간다고 농민들의 시름이 상당했다.
누구보다도 농심(農心)에 가장 근접한 정서(情緖)를 갖고 있는 지도자가 박정희였다. 몸은 국정의 한가운데, 청와대 안에 있을지언정 마음은 민초들 속에, 국민들 속에 있었다. 그가 밀짚모자 쓰고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논에 들어가서 모를 심거나 논두렁에 앉아 농민을 상대로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절대 의도적인 연출이 아니었다. 농민들의 슬픔이 그의 슬픔이었고, 농민들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었다. 그런 박정희였으므로, 계속되는 가뭄에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수원에 다녀온 다음날 밤부터 장마전선 북상으로 전국에 비가 내리기 시작함으로써 박정희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다.
8월 5일, 여름휴가로 저도 별장에 내려간 박정희는 아내를 추모하며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란 시를 지었다.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지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 멀리 수평선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불현듯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 속에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를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一群)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뭇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 건너 섬 쪽으로 날아간다.
비몽(非夢)? 사몽(似夢)?
수백 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 속으로 사라져간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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