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216FE74D55B260FC0D)
북비공 돈재 이석문의 공덕을 존숭하여 후손들과 후학들이 세운 신도비
이비는 1899 한말의 유학자이자 독립투쟁가(파리장서)이던 면우 곽종석 선생이 짓고 당대의 명필이던 해사 김성근 선생이 썼다고한다.
한개마을 입구(아래)
![](https://t1.daumcdn.net/cfile/cafe/2613594555B23B8E0C)
7.20 경북 성주를 갔다.날씨 :맑음
성주 1박2일 여행 목적은 영화 '명량'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와 명예훼손을 당한 '배설'장군의 문중회의를 참관하고자 일찍 갔고...가는 김에...독립투쟁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긴 '한주 이진상' 선생의 생몰지인 '한개마을'을 둘러보고자 함이었다.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한강 정구 선생이 경영한 '무흘구곡'을 답사할려고 계획햇으나 도보로는 무리인 것을 알고 포기했습니다.부산 동아대에서 치러지는 학술발표회 참관 일정도 바쁘기에..
성주 가볼만한곳은 세종대왕 왕자태실,한주종택(한개마을),무흘구곡,포천구곡,한강종택(한강 정구),동강종택(동강 김우옹과 심산 김창숙),임진란 선무원종공신 배설장군 묘역 등이 있다.
예천에서 12:00쯤 출발하여 대구로, 대구에서 성주로 시외버스를 타고 성주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4시다.성주군청 학예사를 찾아서 인사를 하였다.귀중한 자료 한권 얻고...문화원에 가서 인사좀 하고 자료집(관헌 도한기의 읍지잡기) 한권 구했다.
한주학파는 한주 이진상 선생님이 가르친 제자들과 재전제자들을 말한다
허유(南黎 許兪=혼천재기混泉齋記)-제강 이면순(고성출신,이규보 후손)
면우 곽종석(1919 유림단 파리장서운동)-이인재.이병헌
대계 이승희(한주의 子,만주항일투쟁)-심산 김창숙(성균관대 초대총장),정인하,이수인
관헌 도한기(성주,읍지잡기 저술)
회당 장석영(칠곡)-문암 손후익(심산 김창숙의 사돈,성주 사도실 동강 김우옹의 종손인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여사의 부친)
홍와 이두훈(고령)-남형우(상해임정 법무총장),김재열(금녕김씨,국권회복단-대한광복단),김상덕(동경 2.8독립선언 참가,상해망명후 극종민족대회와 민족혁명당등에 참여-6.25때 납북)
![](https://t1.daumcdn.net/cfile/cafe/2673BA3D55B3463A38)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0203D55B3463C05)
한개마을 인물은 아껴두고 우선 성주가 내세우는 인물을 들자면 성주 양강(兩岡)으로 불리는 동강(東岡) 김우옹(1540~1603)과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성주 사람이고,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다정가> 저자 이조년(1269~1343) 또한 성주가 고향이다. 동강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과 반독재 선봉에선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도 성주고을이 자랑 삼는 인물이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칠전량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전멸할 때 ,용케도 12척의 판옥선을 완전하게 피난시켜서 한산도 진영을 '청야작전'으로 불태우고 백성들을 피난시킨후,장흥 회령포(현재의 보성 회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경상우수사 배설'도 성주의 인물이다.안타깝게 죄를 입었다가....임란후 선무원종공신 1등 녹훈 을 받았다.
배설장군의 부(父) 배덕문(裵德文.1525~1602)는 문과급제하여 영덕,울산,고부등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임란때 의병장으로 활약을 했다.적장 흑전구침을 죽였고 ,금부채 1개와 대검 2자루를 노획했다.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이조판서 증직.
장남 장남 배설(1551~1599)은 경상우수사를 역임했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차남 배건(裵楗.1555~1592)의병활동을 하여 개산진 전투에서 승리후 여남현 전투에서 부부가 함께 전사하였다.
3남 배즙(裵楫.1564~1598)무과합격,선무사와 조방장을 역임했다.개산진전투와 한산도 청야작전을 수행했고,노량해전에서 34세로 전사했다.1610 광해2년에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엇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배설가문의 3형제는 나라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다.부친이신 배덕문은 살아생전에 아들 3형제를 자신보다 앞세웠다.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때 '천운'이란 말씀을 하셨는데....내생각은 배설장군이 12척을 구한 것이야 말로 '천운'이라 할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8AF4555B23B911A)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9B44555B23B943A)
![](https://t1.daumcdn.net/cfile/cafe/2220944555B23B9703)
성주 월항면 대산리의 진사댁의 장독대와 안채.위사진은 바깓채
원래 예안댁으로 불리웠다고 한다.예안 진성이씨(퇴계 이황)가 보통 양반이 아닌데....멀리까지 혼인을 서로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17FE4555B23B9A09)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A934555B23B9D10)
![](https://t1.daumcdn.net/cfile/cafe/2457EA4555B23BA031)
위의 천장은 한자로는 '외기'인데...우리말로는 '눈썹천장'이라고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673F3F55B23BA322)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4503F55B23BA81A)
![](https://t1.daumcdn.net/cfile/cafe/2217613F55B23BAA04)
성주 한개마을 '대산동 교리댁'입구
![](https://t1.daumcdn.net/cfile/cafe/2516CA3F55B23BAD04)
![](https://t1.daumcdn.net/cfile/cafe/264F1D3F55B23BB033)
교리댁에 있는 저 나무는 제주도 귤나무인데 육지로 와서 탱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북비고택은 응와종택으로 알려져 있다. 응와 이원조(1792~1871)는 돈재의 증손자로 이 집안을 가장 빛낸 인물. 벼슬이나 공적보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 유배 중이던 추사(秋史)와의 연(緣)에 더 마음이 간다. 조선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추사와 백파 논쟁'에 미치지 않지만 추사와 이원조의 '금고문(今古文) 논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귀양다리와 목사의 관계가 아니라 소위 '계급장을 떼고' 벌인 논쟁이어서 더 흥미롭다.
'북비' 아랫집이 교리댁이다. 두 집안의 연은 깊고도 기구하다. 남인 출신인 응와가 늦둥이인 막내아들, 귀상(龜相)을 노론 집안인 교리댁에 양자로 내준 것. 이 양자가 홍문관교리를 지내 교리댁이 되었다.
응와는 늦둥이 막내에 애틋한 정을 쏟은 것일까. 응와가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육지로 떠나올 때 촌로가 건네준 세 그루 밀감나무 가운데 한 그루를 교리댁에 심었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 했던가. 지금은 탱자나무가 돼 사랑채 앞마당에서 등이 굽어가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0BB43F55B23BB20C)
교리댁 사랑채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2528BC4F55B260DC32)
![](https://t1.daumcdn.net/cfile/cafe/2340E84F55B260E223)
사랑채 위에 걸린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전해지는데,根道核藝,'뿌리는 도에 있고,씨는 기예에 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잘하고 뒤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은 도(절도,도리,도덕)에 두어야하고,내적으로는 그 알맹이(핵)는 탁월한 재주(藝)를 갖추어야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4E64F55B260EB0F)
보통 양반가의 종갓집은 사당이 정면 3칸 정도 된다...그런데...이집은 정면 1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ECD4D55B260F120)
교리댁 안채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2730CC4D55B260F434)
![](https://t1.daumcdn.net/cfile/cafe/272AF94D55B260F637)
안채 옆 쪽문으로 나가니 공터가 있다.전에 다른 집터였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3BA54D55B260FA2D)
돌은 말을 탈 때 받침돌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0F064055B385D820)
한주종택 가는데 도랑을 돌로 축조해놓았다....참 보기 좋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1934055B385DC14)
한주종택 들어가는 입구
![](https://t1.daumcdn.net/cfile/cafe/2615B64055B385E01C)
후손도 ...지자체도....마을 주민들도...학교장도...선생도...지역시민들도 ...정말 문제다....무슨 헛간 앞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3F124055B385E302)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6054055B385E72E)
![](https://t1.daumcdn.net/cfile/cafe/2625634055B385EA12)
한주종택은 마을 맨 꼭대기에 있다. 종택 주인, 한주(寒州) 이진상(1818~1886)은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한 큰 학자로 응와 이원조의 조카다. 응와도 이 집안에서 '북비'에 양자로 들어갔으니 '북비'와 연은 깊다. (북비고택만 나중에 따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당시 천주교 전파와 서양과의 통상을 우려해 척사의 취지에서 ≪대학 大學≫과 ≪심경 心經≫을 자주 강론하였다. 그리고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가져오자 척사의 뜻으로 글을 지어 고을에 돌리기도 하였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67세에 나라에서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학덕이 있는 인물)로서 의금부도사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종택 사랑채 처마 밑에 '주리세가'와 함께 '한주(寒州)', '대계(大溪)', '삼주(三洲)'의 삼대 이름이 적힌 편액이 주렁주렁하다. '주리세가(主理世家)'는 주희와 퇴계의 이학(理學)을 계승한다는 의미고, 삼대 이름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해온 집안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
대계(大溪) 이승희(1847~1916)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제자 김창숙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고, 1908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구축하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한 인물. 대계의 두 아들, 삼주(三洲) 이기원(1885~1982)과 백계(白溪) 이기인(1894~1981) 또한 아버지 곁에서 독립운동을 하여 삼부자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8724055B385ED37)
![](https://t1.daumcdn.net/cfile/cafe/26125E4555B385F11D)
삼불로 읽었는데...삼주(三洲)라고 한다.삼주는 대계 이승희의 子인데,강암체의 대가인 강암 송성룡(창암 이성만의 제자) 선생이 쓴 편액이다.
락래헌(樂來軒)현판
![](https://t1.daumcdn.net/cfile/cafe/2732BC4555B385F307)
대계라는 현판은 아마도 족친인 이진락이란 분이 쓰신 것 같다.
이진락이란 분은 자료가 없다...거의 안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1BFB4555B385F617)
![](https://t1.daumcdn.net/cfile/cafe/2271754555B385FA30)
우거진 잡풀을 보니...눈물이 난다...옛성터는 의구한데...인걸은 간데없네...
아마도 내가 한시를 공부했다면...한주종택을 찾은 기쁨보다 우거진 잡초를 노래했으리라...
몇년전 겨울에 한주종택에 불이 났는데 아마도 복구공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34B74155B41F892B)
![](https://t1.daumcdn.net/cfile/cafe/251D764155B41F9001)
![](https://t1.daumcdn.net/cfile/cafe/23164F3F55B4206301)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1EA3F55B420660B)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4443F55B4206A0A)
한주종택 한주정사 옆 선비가 경영했던 계곡(연못)은 물이 없다.몇년전 공사를 했고...위에 구조물을 잘못건드려서 물이 안들어온다.이렇게 공사를 엉망으로 하다니...
통곡하고 싶다.우리나라 공사수준이 이렇게 밖에 안되다니...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5E43F55B4206D3D)
한수헌(寒水軒) 과 한주정사(寒洲精舍) 현판
정사(精舍)는 별서라는 뜻이다.예천 용문면 금당마을위에 있는 초간정사는 요기참고하시라.
http://cafe.daum.net/gaetuel/U479/5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9F33F55B420700E)
![](https://t1.daumcdn.net/cfile/cafe/257BAF3F55B420730D)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주자와 이황의 학문을 사숙하는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한주 이진상은 도산서원도 방문하고 퇴계의 사상과 학문을 이어 받았으나 '심즉리설'을 주장하였고...안동의 도산서원과 상주의 도남서원으로 부터 공박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주의 학맥은 퇴계-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 -입재 정종로-응와 이원조(한주의 숙부)-한주 이진상-곽종석,이승희(한주의 子),관헌 도한기,회당 장석영,홍와 이두훈 등으로 이어진다.
곽종석은 경북 봉화에서 10여년을 지내는데 여기서 정재선생의 영향도 받았고,권세연(봉화 닭실마을,구한말의병기때 1대 안동의병장),서산 김흥락(학봉 김성일 11대 종손,제자중에 독립유공서훈자가 20여명) 등과도 교류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0ACE3F55B4207607)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E514455B4207906)
![](https://t1.daumcdn.net/cfile/cafe/2379004455B4207F10)
완락실은 무슨 뜻이며, 현판은 누가 썼을까?이글을 읽는 분들이 자료추적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9004455B4208208)
조운헌도재명은 문인인 홍와 이두훈(고령출신) 선생이 쓰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9B84455B4208508)
만직당 현판-만직당은 만가지 모든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뜻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04024455B420880B)
지숙료(止宿료寮)는 동한(東翰)이란 분이 쓰셨는데.....인터넷에 자료가 거의없다...
자료추적을 왜 이리 안해 놨을까?
지숙료는 중국 주희가 경영한 서당의 응접실 같은 사랑채 이름이라고 한다.응접실겸 숙박을 하던 곳의 이름이다.안동 도산서원에가도 지숙료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자문=네이버에서 분당친구의 답사기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당친구님의 조언)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5E34455B4208B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