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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미22 원문보기 글쓴이: 옹데이
이원종 선배님!
나는 기질은 부드러워도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끝까지 고집을 하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도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해 주지만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성취해야 직성이 풀린다.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공부에 몰두하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도서관을 나서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때 쌍쌍이 되어 등산을 갔다 오던 사람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면 그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외쳤다.
너희들은 오늘 하루를 소비했지만 나는 내일을 위한 성(城)을 쌓았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 나한테 지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희망이 달성되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리면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똑 같은 소아마비 출신인데 한 사람은 지하도에서 동전을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되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천시 봉양읍 미당리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서울시장까지 역임한 이원종 충북도지사(62). 그는 인생을 선택이라 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기에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탓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갖고, 희망이 달성됐을 때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힘이 샘솟는다고 했다.
가난, 그리고 폐결핵과의 처절한 싸움을 극복하고, 넘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언제나 새 출발의 시발점으로 삼으며 주경야독을 한 끝에 마침내 행정고시의 관문을 통과하여 1천1백만 수도 서울의 시장이 되고, 충북 도민의 수장(首長)이 되기까지의 그의 인생 역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아닐 수 없다.
우체국장이 되고픈 소년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우체국장이 되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빨간 자전거를 탄 집배원아저씨를 보면서 그런 꿈을 키웠다.
어린 눈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은 드넓은 세상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보였다. 우체국장은 그런 집배원 보다 훨씬 높은 직급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미당리에서 농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내게 [알쫑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다. 할머니 눈에는 당신의 외손자가 알토란처럼 보였을 터이니 별명 속에는 세상을 알차게, 야무지게 살아가라는 축복의 의미를 담았음이 분명하다.
내가 다닌 봉양초등학교 왕미 분교는 한 학년이 26명뿐인 아주 작은 학교였다.
집에서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는 10 리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 곳 분위기는 미당리 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6.25 직전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국어 책을 펴놓고 읽어보라고 하셨다. 마침 다섯 살 위에 형의 어깨 너머로 한글은 깨우친 터라 수월하게 교과서를 읽자 나를 바로 2학년에 편입해 주셨다.
그러나 국어 읽기는 잘 했지만, 산수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예를 들어 5+2= 7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했지만 12-5=7이라는 답은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10을 넘어선 숫자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12는 1과 2를 합쳐 3인데 더 큰 수인 5를 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민족의 최대비극인 6.25 사변이 터졌다. 그 바람에 학교의 학습기자재를 포함한 비품들이 모두 불타 버려 우리는 개울가에서 종이도 없이 시멘트 부대를 뜯어 글씨를 쓰며 수업을 받았다.
농촌 마을이다 보니 모내기철에는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모를 심곤 했는데 그 대가로 받은 품삯을 모아 학교에서는 풍금을 샀다.
그때 도레미파솔라시도의 풍금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노래도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악보의 높낮이에 맞추어서 부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음악에 소질이 없었던 나는 풍금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주 틀렸고 그 횟수가 잦아지자 나중에는 음악시간이 싫어졌는데 지금도 그런 편린(片麟)들이 남아 노래방 가기를 꺼린다.
초등학교 시절엔 몸이 허약했다. 배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려 결석도 자주 했고, 여름에도 비가 오면 한기(寒氣)를 느꼈다. 그러다 보니 힘든 농사일을 하는 게 두려웠고, 솔직히 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공부는 잘한 편이었다. 봉양초등학교 왕미 분교 시절의 성적은 2학년 첫 해를 제외하고는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반장도 줄곧 내 차지였다.
나는 기질은 부드러웠어도 내가 필요한 것은 끝까지 고집을 하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도 웬만한 것은 양보해 주지만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성취해야 직성이 풀린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골에서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 담임이었던 서창규 선생님은 얼마 전 충북경찰청장을 거쳐 해양경찰청장을 지낸 서재관씨의 부친인데, 우리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방과 후면 시커먼 그을음과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석유램프 밑에 모아 놓고 늦도록 공부를 시켰다.
선생님의 열성적인 지도 덕분에 왕미 분교에서는 나를 포함한 11명이 제천중학교에 시험을 치러 그중 8명이 합격하였는데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선생님은 지금도 건강하시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나는 간단한 선물로 그 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 바쁜 사람이 내게까지 신경을 쓸 시간이 있어? 하시며 흐뭇해하신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차령산맥 줄기에 자리한 내 고향 미당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우리 집은 1.4후퇴 때 불타 버린 후, 산자락 끝 언덕 위에 흙벽돌로 새로 지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언덕 위의 집이라 불렀다.
언덕의 가장자리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줄지어 서 있고, 이어지는 숲에는 산새 소리가 끊이지 않는 등 언제나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된 일만 했던 나로서는 마음의 여유를 갖거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낭만에 취할 겨를이 없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우리 농촌은 절대 빈곤에 시달려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마을을 온통 드리우던 시절이다.
당시 마을에서 농토를 가진 몇몇 부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민들의 경제생활은 최저 수준을 밑돌았다. 덮는 이불은 있어도 깔고 잘 요가 없었고, 입는 옷도 한두 벌에 불과했다.
춘궁기가 시작되면 먹을 게 없어 보릿고개를 넘기는 일이 너나 할 것 없는 걱정거리였다.
우리 집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보리개떡과 소나무 껍질, 칡뿌리를 캐다먹고, 쑥을 뜯어 버무려 먹으면서도 고생스럽고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불만을 품을 겨를이 없이 하루하루를 주어진 현실로 인정하며 살았다.
나 또한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허기를 잊은 채 소꼴을 베거나 농사일을 거들며 집안일을 도왔다.
힘든 일과를 마친 후 저녁시간 석유등잔불 아래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려면 왜 그리도 눈꺼풀은 무거워지는지, 밤늦도록 옆에서 새끼를 꼬시던 아버님은 꾸벅꾸벅 조는 나를 보고 저것도 지게귀신 면하기는 글렀구나! 하면서 혀를 차셨다. 아버님의 이러한 독백을 듣노라면 나 역시 반항심만 싹텄다.
읍내 아이들은 부모들이 잘 먹이고 일도 시키지 않는데, 왕복 삼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온 나는 집안일까지 해야 하니 졸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노골적인 불만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도 차마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 삼켜야 했다. 이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생활은 힘들고 지루했지만 더욱 답답한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좌절의 깊은 나락(奈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토론습관은 학창시절에 다져라
고달프고 속상한 나날이 이어지던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 방과 후에 보자."
무슨 일인데."
만나서 이야기하자. 수업 끝나고 교사 뒤쪽 큰 나무 밑으로 와라.
하루는 얼굴에 윤기가 제법 흐르는 녀석이 무게를 잔뜩 잡고 촌놈인 내게 말을 걸어왔다. 수업이 종료되어 곧바로 숲 속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리 학년에서 대체로 모범적인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 모임에 참여하기를 제의하는 것이었다. [청운] 모임에 가입하면서 시골뜨기였던 나는 읍내 출신의 아이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는 것도 많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었으며, 항상 성숙한 논리를 전개해 나를 압도했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살 뿐 모든 면에서 뒤졌던 나는 이들과의 만남이 행운이라 여겨졌다.
그들은 내게 신선한 바람이자 충격이었으며,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의기투합이 된 우리는 자주 만났고, 토론은 일주일에 한두 번 진행됐다.
그러나 당시의 토론은 지금처럼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심도 있게 연구해서 격론을 벌이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저 신문에 이슈가 될 만한 기사가 나면 이를 토대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신문을 구독할 여력도 못되어서 처음엔 그들의 입만 쳐다보며 이곳저곳 시선을 돌리기에 바빴고, 그러다가 전체적인 흐름이 감지될 즈음이면 뒤늦게 대화에 뛰어들 곤 했다.
우리는 한방에 둘러앉아 이런 식으로 토론을 시작했지만 어떤 때에는 천하를 논하며 인생을 음미했고, 객기를 부리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짧은 지식으로 정치를 논하며 나라를 근심 걱정했고, 인생의 본질을 규명이라도 하듯, 대화의 주제가 철학에서 문학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들다 보면 시침(時針)은 어느새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토론의 결론은 항상 진로와 인생설계로 이어졌지만 종착역은 언제나 염세주의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우리들 눈에 비친 세상은 거대한 절벽과도 같았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를 들먹이며 좌절도 숱하게 했다.
오늘날 나의 사고체계와 화술(話術)의 기본 골격은 그 무렵에 형성된 것이며, 그들과 토론을 하면서 논리적 사고의 전개와 표현의 기법 등 트레이닝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주변 환경을 탓하지 말라,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며 여행비용을 내라고 했다. 나는 가정형편상 따라갈 입장이 못 되어서 일찌감치 여행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 내 몫까지 내고 함께 가자고 했다. 훗날 학교 선생님이 된 이상구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여 번 돈을 내놓기도 했다.
친구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수학여행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중간에 대구역에서 내려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맵고 짠 시골 음식에 길들여진 나는 그때 나온 반찬 중에 달착지근하게 조려진 중간이 뻥뻥 뚫린 연근을 보고 공장에서 꽃 모양으로 구멍을 뚫었나. 하며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부산 해운대에서 처음 보았을 때 종이처럼 평평하리라 생각했던 바다는 상상과 달리 언덕처럼 보였다.
바닷물이 저렇게 높은가 생각하면서 손으로 한 움큼을 떠서 맛을 보고 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던 경험도 내게는 경이(驚異)와 신비(神秘) 그 자체였다.
수학여행과 청운클럽 모임을 계기로 도시의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소중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읍내 아이들도 그들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고민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가족문제로 고민하는 친구, 집이 없어 단칸방에서 셋방살이하는 아이, 가난을 극복하려고 신문배달을 하는 학생 등..
이들도 각자가 처한 어려움이 있고, 극복해야 할 인생역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 마음속을 온통 휘젓고 다녔던 좌절과 불만도 자연스러운 카타르시스 과정을 거쳐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가난하긴 해도 내 집이 행복한 가정임을 인식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우리 집은 5형제와 누님 한 분 등 대가족이 한집에 살았다. 형제들은 인근에서 알아줄 정도로 우애가 좋았고, 위계질서도 분명했다.
맏형인 기종(箕鍾) 형님은 열다섯 살 위였는데 어린 나를 어깨 위에 무동(舞童)을 태워 주거나 무릎에 앉혀 놓고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 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곤 했다.
맏형은 소년시절 읍내 사람의 소개로 서울의 변호사 사무실 급사로 한동안 일했는데 그때 접했던 판사 변호사 등 고등고시 합격자들에 대한 동경심을 어린 나에게 전이(轉移)시켜 주며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그 후 형님은 가업을 일으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손아래 3형제를 교육시킴으로써 모두 공직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6남매를 건강하고 반듯하게 키워 주신 강인한 분이셨다. 봄철이면 뒷산에서 산나물을 뜯어 읍내 저자거리에 내다 팔아 마련한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새 모양의 과자도 사오곤 하셨다.
먹을 것이 있으면 당신 몫까지 모두 우리에게 주셨기에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님은 안 드셔도 항상 배부른 것으로 착각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한 일은 반드시 짚고, 교훈을 일깨워 준 뒤에야 넘어가는 철저함이 몸에 배여 있었다.
관선시절인 92년 충북도지사로 부임하여 보름이 지난 뒤 비로소 고향 어머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때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고 말씀드리자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관찰사(지사를 지칭)로 보냈는데 어미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며 기다려라. 하시더니 새 옷으로 갈아입으신 뒤 근엄한 자세로 내 절을 받으셨다.
아버님은 과묵한 분이셨는데 선비는 희로애락의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 면서 내게 항상 덕망을 키울 것을 주문하셨다.
선친께서는 한학을 공부하셨는데 조부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봉양면 마곡리를 떠나 미당리로 이주하신 후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비극의 시대를 사셨다.
특히 6.25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흙벽돌로 집을 짓고 잔솔밭 산비탈을 개간하고자 달밤에도 돌 더미를 나르고 한 평의 경지라도 더 일구려고 노력하면서 가업의 기틀을 다진 분이셨다.
이처럼 가난하긴 해도 우리 집은 소중한 것을 많이 가진 행복한 [언덕 위의 집]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도 청운클럽 친구들 덕분이었다.
나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이렇게 달라지면서 일을 시키는 것이 원망스러웠던 아버님이었지만 검게 그을린 모습에 딱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졌고, 혀를 차며 내뱉던 독백의 나무람 속에도 자식에게만큼은 찌든 가난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한 맺힌 염원이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심신이 지칠 만큼 힘든 일상생활 속에서도 밤늦도록 서책을 탐독하시며 지필묵을 손에서 떼지 않고, 선비의 품격(品格)을 지키셨던 아버님의 참모습을 알게 되자 어느덧 경외감이 느껴졌다.
그래,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저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시는 날을 만들어 드리자.
나는 이후 수없이 이를 되뇌고 또한 다짐했다.
공자는 일찍이 훌륭한 친구와 함께 지내는 것은 난초 꽃이 핀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오래 있으면 느낄 수 없을 지라도 은연중에 향기가 몸에 배이게 된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에 향기를 채워 주고, 절망을 용기로 승화시켜 준 고교시절은 무척 소중한 세월이었다.
궁하면 통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학창 시절 나의 꿈은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 마루 끝에 앉아 하늘을 보아도 구름은 서울로 흘러가고 있었고, 멀리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철마도 서울로 향해 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들으며, 서울로 가야 꿈을 이루고, 행복한 미래가 열린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 3이 되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제천고교를 졸업하던 해에도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은 불가능했기에 서울로 가는 꿈을 일단 접어야 했다.
서울에서 먹고 잘 곳과,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시골에 남아 소도 기르고 특수작물이나 해야겠다 생각하고는 온상을 하면서 농사일에 전념했다.
그 사이에 4.19 혁명이 일어났고, 모든 대학들이 휴교를 하자 서울로 진학한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 왔다가 내게 몰려왔다.
대학 교복을 입고 우리 집을 찾은 친구들은 새로 배운 학문과 서울생활의 이모저모 등 내가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흙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농사를 짓느라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내게 감당키 어려운 열등감이 엄습해 왔다.
같이 학교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보자 갑작스럽게 좌절감이 몰려들었다. 친구들이 돌아간 그 날 결심을 했다.
그래. 나도 반드시 대학을 가고야 말리라.
먼지 묻은 책을 꺼내 공부는 시작했지만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달력은 마지막 장을 남기고 있었으나 집안형편은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민하던 내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국립체신대학의 학생모집 요강(要綱)이었다.
당시 체신대학은 2년제였는데 성적 우수자는 등록금 면제와 함께 장학금 지급과, 기숙사까지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게다가 졸업 후 체신부에 근무하는 일석사조(一石四鳥)의 신바람 나는 의무(?)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생각에 곧바로 입학원서를 냈다. 드디어 서울로 갈 수 있게 됐다며 꿈에 부풀었던 나는 시험 당일 구름처럼 몰려든 수험생들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고사장 배치 표를 보니 장학생은 20명을 뽑는데 수험생은 8백 명이 넘게 몰려 경쟁률은 40대 1을 넘어서 있었다.
첫 시간 국어시험 문제를 받아 펼쳤다. 비교적 자신이 있던 과목이었는데 보도 듣지도 못한 몇 가지 문제가 나왔다. 게다가 다음시간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수학시간이 아닌가. 중도에 포기하려니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기왕에 비싼 기차표를 끊어서 서울까지 왔으니 최선은 다하자. 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두 번째 시간 수학문제를 차분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풀어 갔다. 집에 내려와 확인해 보니 자신이 없었던 수학은 오히려 백점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발표 일이 며칠 지났는데도 기다리던 합격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며칠 후 답답함도 풀고 조건이 좋은 다른 대학이라도 알아볼 겸해서 학교에 들러 담임이었던 조인행 선생님을 찾았다.
원종아!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다니, 축하한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에게 들었다며 악수를 청하고는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그렇다면 우체국에도 합격을 알리는 전보가 도착했을 것 아닌가.
나는 내 눈으로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제천 읍내에서 10km나 떨어진 봉양우체국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는 눈길에 막혀 주인에게 전달하지 못한 체신대학 합격 전보와 대학에서 보내준 우편물 봉투가 거짓말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매불망 그리던 합격통지서였던가!
절망과 좌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염원했던 서울 행 티켓(Ticket)이 마침내 내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우리 집에도 대학생이 나왔어. 하시며 엷은 미소를 지으시던 당시 아버님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넘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새 출발의
시점으로 삼아라.
체신대학에 입학하던 날 나는 입학생 모두를 대표해 선서를 했다. 운 좋게도 수석 입학생이 된 까닭에 제일모직에서 주는 양복 한 벌을 받고, 과대표도 맡았다.
입학 후 한 달이 지나자 나는 20명분의 장학금을 학교에서 수령해 일일이 도장을 받고 대상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한 명이 가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훗날 나와 함께 고시공부를 한 최병호라는 친구였는데 내게 한턱을 내겠노라고 제의했다. 이유를 묻자 먼저 학교 앞 구멍가게로 데려가더니 장학금 받은 돈으로 오리 알을 사주는 것이었다.
그 날 얘기를 들은 즉, 입학식 날 까만 운동화에 군복을 물들여 입은 새카만 촌뜨기가 전 학년을 대표하여 입학선서를 하자 기분이 나빠진 서울지역 명문고교를 나온 학생들이 식이 끝난 뒤 나를 혼내 주려 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달 여를 두고 눈여겨보니 괜찮은 친구다 싶어 사귈 겸 사과를 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면 오리 알 사줘. 하면서 웃곤 하는데 때로는 지나간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내가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했던 시기는 체신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체신대학 학생들은 대부분 시골출신이어서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은 너나없이 가난해 학교에 다니면서도 자학(自虐)을 많이 했다.
"이래서 되겠나, 졸업해 보았자 말단 공무원 되는 것 아니냐. 내 인생의 꿈은 어떻게 이루어 간단 말인가."
대체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자학들이었지만 이런 것들이 자극제가 되어 발전의 기폭제로 승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입학 후 첫 해가 거의 지날 무렵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나는 초등학생 남매의 가정교사를 맡았는데 아이들 성적도 크게 향상되었고 보수 또한 괜찮은 편이었다.
그때 받은 돈으로 난생 처음 일본제 세이코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찼는데 번쩍거리는 광채가 너무나 좋았다.
다음 달에는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코끝이 뾰족한 구두를 사서 신었고, 그 다음에는 작업복 대신 입학식 때 받은 천으로 양복도 맞추어 입었고, 얼마간의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국비장학생으로 2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친 나는 전화국에 취업했다. 어릴 적 꿈꾸던 우체국장 자리에 올라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희망과 서울시민이 되어 사회에 진출했다는 자부심도 느꼈다.
그러나 전화국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공중전화의 동전을 수거하는 일이었고, 이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 보다 더한 중노동이었다.
또다시 좌절감이 엄습해 왔다. 게다가 "우리 아들 출세했다며 좋아하시던 부모님이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상심하실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동안 고민의 나날을 보내던 나는 체신대학 동기생 3명과 함께 새로운 결심을 했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행정고시에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 무렵 행정과와 사법과로 되어 있던 고시제도는 5.16혁명 이후 고등고시라는 명칭을 없애고 사법시험과 행정시험으로 편제가 바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전화국이나 우체국에 근무 중이었으므로 성균관대학교 야간부 3학년으로 편입 후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모할 정도의 도전이었다.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깨어진 꿈을 다시 이루자는 결의는 좋으나 직업과 학업,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뛴다는 것은 오기에 속할 만큼 과도한 욕심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그 때 고시공부에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그리고 국경일밖에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지고 두 번째도 실패하고, 세 번째도 점수가 모자랐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새 출발의 시발점으로 삼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또다시 도전에 나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고시공부를 하던 때에는 야간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화국 9급 공무원 봉급을 받아 충당하였기에 경제적인 형편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직장일과 더불어 무리한 고시공부 등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영양실조에 걸리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부족한 영어실력을 보충한다며 아침 일찍 영어학원에 가서 다이제스트나 타임 반 수업을 한 시간씩 수강하고 출근을 했다.
일과를 마치면 전차를 타고 명륜동 성대에 가서 강의를 듣고 숙소에 돌아오면 밤 11시 정도가 됐다. 서둘러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잠들었다가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는 생활을 몇 년씩 반복하자 몸이 바짝 마르고 피로도 누적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화국에서 내가 한 일은 전화요금 고지서에 묵사지를 넣고 볼펜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었는데 한눈을 팔다보면 작업량을 맞출 수 없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주소 성명 전화번호 요금 등을 써넣다 보니 지루하고 고달팠다.
단정했던 글씨도 조금씩 흐트러졌다. 그때의 반복되던 고된 작업으로 내 손끝자락에는 움푹 팬 볼펜자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점심은 사무실 앞 아관루 라는 중국집에서 한 달 내내 정(正)자를 그리며 자장면을 먹었고, 봉급날이 되면 중국집 주인이 외상을 받으러 왔다.
매일 매일의 생활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대학시절에 흔히 누릴 수 있는 취미활동이나 미팅, 축제 등에 참여할 생각은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주말이 되면 예외 없이 도서관에 처박히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래도 졸음을 참아가며 어려움을 딛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모자라던 터라 공부에 몰두하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도서관을 나서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때 쌍쌍이 되어 등산을 갔다 오던 사람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면 그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외쳤다.
"너희들은 오늘 하루를 소비했지만 나는 내일을 위한 성(城)을 쌓았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 나한테 지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희망이 달성되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리면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나약한 지라 때로는 굳은 의지가 흔들리기도 하고 좌절감에 빠질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네 사람의 친구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어떤 때에는 경쟁하기도 하면서 길고도 긴 어두운 터널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결국 행운의 여신은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었고, 드디어 66년 제 4회 행정고시에서 4번에 걸친 도전 끝에 4명 모두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함께 합격한 친구들은 모두가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역경 극복의 능력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중 최병호는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데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를 가지 못하자 쌀자루를 훔쳐 메고 무작정 상경한 케이스였다.
그는 갈 때가 마땅치 않자 어느 회사의 급사로 취업해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야간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다. 추운 겨울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손에는 지금도 시퍼런 동상 자국이 남아 있는데 최병호는 경기도 의정부 북부출장소장, 이천도자기엑스포 사무총장을 성공적으로 역임했다.
울산출신의 이채권은 홀아버니 밑에서 자랐는데 공무원 생활을 하다 실업계로 진출했고, 부산이 고향인 강영수는 반대로 편모(偏母) 밑에서 컸는데, 부산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후 관세사가 되었다. 지금도 이들과는 이따금 옛이야기를 나누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
또 하나의 고갯길, 폐결핵과의 싸움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나는 지구력도 부족한 편이었다. 배앓이를 자주 했으며, 추위를 참지 못해 감기에도 잘 걸렸다.
여기에 낯선 서울생활과 함께 고시공부에 몰두하던 5년 동안은 내 몸을 돌보지 않고 가혹하게 다루었다. 새벽에 학원 강의를 듣고 출근하여 직장 일을 보았으며,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고, 주말엔 주말대로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보니 원래 병을 달고 살았던 허약한 체질에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치고 체중감소와 더불어 몸도 수척해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피곤하고 신열이 지속되면서 항상 기침도 달고 살았는데, 그 저 그러려니 하고 미련하게 버티다가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화(禍)를 자초하게 되었다.
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에서 경제학 강의를 하던 어느 날 각혈을 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응급 후송되었다.
그땐 이미 오랜 시간을 두고 폐결핵이 진행되어 오른쪽 가슴에 계란만한 공동(空洞)이 생긴 중증(重症)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폐결핵은 전염되는 경우도 있지만 잠복해 있던 균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고 저항력이 약해지면 활동성으로 되어 발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몇 년 동안 지속된 고행과도 같은 생활이 결국 폐병 환자를 만든 것이고, 그것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선 폐결핵 3기의 상태였다.
체중은 50kg으로 줄어들어 허리를 감싸 잡으면 양손가락이 서로 맞닿을 정도였다.
고갯마루를 넘어섰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또 하나의 가파른 절벽이 나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지, 어떻게 헤쳐 온 길인데...
고시보다도 더 처절한 폐결핵과의 싸움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나, 파스, 스트렙토마이신... 1회에 복용해야 하는 약만도 한 움큼씩 되었다.
증세가 호전되어 각혈이 멎으면 다소 용기가 생기고, 그러다가도 다시 미열이 지속되며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면 좌절하는 길고 긴 투병의 터널은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길이 없었다.
월급을 타면 약값도 부족하여 아내는 끼고 있던 반지까지 팔아 봉지쌀과 낱개 연탄을 사서 가계를 꾸려 나갔으니 집안 살림도 말이 아니었다.
워낙 병소(病巢)가 깊어 강한 처방의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1차 약에 내성이 생기고 그래서 이후 다시 2차, 3차 약으로 옮겨갈 때에는 죽음의 사신이 엄습해 오는 듯한 느낌에 감당키 어려운 심리적 공황을 경험했다.
아내는 심신이 비정상적인 환자가 쏟아내는 날카로운 신경질과 투정을 말없이 소화해 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냄비에 주사기를 삶아가며 주사를 놓아주는 등 모든 것을 꾹 참고 간호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색 실 모양의 핏발은 계속해서 가래에 섞여 나왔고, 3개월마다 찍어보는 X-ray에서도 개선되고 있다는 희망적 소견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제 차라리 절망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맘 편하게 살았더라면 병은 들지 않았을 터인데, 이토록 각박한 경쟁의 마당인 서울로 온 것부터가 과한 욕심이었던가?
이때부터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혼자 조용히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때로는 강물 위에 뼈 가루를 뿌리는 비극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아궁이 위에 시루를 걸어놓고 무엇을 하는지 제법 신이 난 듯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궁금해서 묻자 이틀 밤을 새우며 소위 개소주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별의 별 노력 끝에 지쳐있던 아내였지만 이번 개소주'에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내의 정성을 하나님이 아셨음인가, 개소주를 몇 달 동안 복용하자 체력도 향상되었고, X-ray 소견도 뜻밖에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앞을 가로막았던 어둠이 조금씩 걷히면서 하늘이 밝아오는 듯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결국 아내의 정성으로 나는 5년이 넘는 폐결핵과의 사투(死鬪)라는 긴 터널 속에서도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병마(病魔)와 싸우는 동안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지만 얻은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본래 내게는 편협하고 저항적인 면도 많이 있었는데 건강을 회복하자 새로 얻은 생명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들을 다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근무지를 서울로 택할 때에는 잘난 서울 사람들 두고 보자.' 는 일종의 분풀이 식 저항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니, 서울에는 잘 사는 사람들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아 나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쏟아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내가 공직생활을 시작한 1960년대는 우리가 개발연대로 기억하고 있는 시기이며, 국가행정에 종사했던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활기차고 보람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또한 잠자고 있던 국민의 침체된 의식을 일깨우면서, 공직자 스스로도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을 주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업무에 매진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시기에 공무원이 되어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서기보로 전화국을 다니던 나는 67년 4계급이 수직 상승한 사무관이 되어 서울시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서울시는 대단히 폐쇄적이어서 고시합격자들을 꺼려하는 분위기였지만, 고시선배들의 도움으로 시정연구 계장을 맡게 되었다. 그 자리는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는 시정개혁이 주된 업무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업무의 내용조차도 몰라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야 했고, 함께 일하는 부하직원들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이들을 통솔하는 것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배우는 자세로 임하자고 마음을 먹고 직급이 높다고 윗사람 티를 내지 않은 채 직원들에게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었고, 6개월여가 지나면서 업무도 어느 정도 파악되기 시작했다.
5.16 혁명 이후 불도자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당시의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를 대대적으로 바꾸려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그에게 굉장한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도시계획이나 토목사업 등은 내 소관은 아니었지만 제도개선을 통해 시민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분야였다.
실무경험이 많았더라면 오히려 과감하게 바꾸지 못했을 제도개선으로부터 서식 바꾸기와 결재단계의 축소, 금품수수 관행의 차단 등 많은 일들을 추진했는데 주위에서 이를 높게 평가해 주었다.
일이 진행되면서 상급 과장과 국장 등 윗분들에게도 빠른 속도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시청 내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굳히며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 후 지방정부의 핵심인 예산과 기획, 행정 등을 거쳐 실무능력을 키웠고, 내무, 교통, 주택, 보건사회국장을 역임하며 도시 관리의 경험도 쌓았다.
또 용산구와, 성동, 강동, 성북, 동대문구 등 5개 구청장을 하면서 국제도시 서울을 가꾸고 달동네 도시영세민을 돌보는 일까지 모든 것을 고루 경험할 수 있었다.
27년이라는 오랜 동안 서울시에서 일하면서 참으로 나는 서울을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 상경했을 때 서울시는 근접하기조차 두려운 곳이었다.
가난하고 왜소한 나로서는 남산자락에 올라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저 수많은 집들 가운데 발 벗고 누울 수 있는 방 한 칸의 허락을 절규하던 저항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곳곳마다 나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과 정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6백년 도읍지인 서울이 소중해졌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졌다.
서울 정도 6백년, BESETO 선언, 20년이 걸린 서울 6백년 사 편찬, 교통기본계획, 고지대 영세민촌, 와우 아파트 붕괴, 대연각 화재, 성수대교 붕괴 등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서울은 영광과 고통, 보람이 함께 어우러져 오늘도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는 한강의 물처럼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물이 받혀 주어야 배도 뜬다
91년 대통령비서실 내무행정 비서관을 거쳐 92년 충북 도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지역 언론은 금의환향을 한 도백(道伯)이라며 무척 반겼지만 과연 내 능력으로 잘해 갈 수 있을까, 처음에는 심적 부담도 컸다.
관선지사로서의 재임기간은 정확히 11개월이었는데 역시 고향은 따뜻한 곳임을 절감했다. 실제로 서울시 행정은 웬만큼 잘해도 반응이 없는 곳인데 고향에서는 작은 일을 해도 값있게 받아들여 주었다.
예를 들어 관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가까운 거리를 걷거나, 야근하는 직원들과 소주에 삼겹살을 먹어도 이를 신선한 충격으로 평가했고, 농민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셔도 <서민적인 지사>라며 반색을 했다.
관선 시절 나는 구상했던 청주권 광역계획과 오창단지를 포함해 몇 가지 사업을 상당히 구체화시켰으나 충북도의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기본골격을 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YS정부가 출범한 뒤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시 도지사가 모두 물러나면서 나 또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에 도청 직원과 도민, 그리고 지역 언론들의 아쉬워하던 모습을 보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런 감정들이 시나브로 축적되면서 나 또한 도민들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훗날 민선에 출마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첫 서울시장으로 김상철 변호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김 시장은 그린벨트 내에 집을 지은 것이 문제가 되어 일주일 만에 사임한 상태였다.
서울에 올라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전화로 연결된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시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대통령과는 특별한 연고가 없었기에 나는 이 같은 제의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훗날 알고 보니 김 시장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김 대통령은 충북에 사람을 보내 나에 대한 정보를 다각도로 수집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서울시장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결국 내가 서울시장이 된 것은 고향 충북의 우호적 여론이 뒷받침된 덕분이니 도민들이 나를 서울시장에 임명해 준 것과 다를 바 없다.
순종(順從)으로 받은 은혜
나는 애당초 기관장은 종교를 가져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정 종교를 가질 경우 다른 종교에서는 반대편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어서였다.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시장을 맡아 달라는 통보를 받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든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시장을 한성판윤(漢城判尹) 이라 불렀는데 영의정보다 한성판윤을 하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 있었다. 한성판윤은 또한 정승으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기에 당파 간 경쟁도 심했다.
때문에 임금이 판윤을 선택하려면 외가로 3대(代)까지 지체를 살폈으며, 당파에도 크게 치우치지 않는 집안의 인물만 골라 임명했다.
서울시 행정은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도 복잡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겉돌다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장은 대통령을 비롯하여 3부 요인을 자주 모셔야 하는 것 외에 273명의 국회의원과, 130여 명이나 되는 시의회의원, 1천1백만 서울시민의 엄청난 욕구를 기본적으로 소화해 내야 한다.
국장급 간부들만 해도 70여명이나 된다. 학벌도 대부분 국내 명문대에서 하버드대 출신 등 유학파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포진해 있는데, 이들이 나를 과연 시장으로 인정해 줄까도 걱정거리였다.
일요일 아침에 고민하는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집사람의 권유로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날 곽선희 목사님의 말씀은 마치 나를 위한 설교인 것 같았다.
내용인 즉, 선택받은 자는 그에 순종(順從)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서울시장에 취임하자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나와 관련된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칡뿌리를 캐던 소년이 서울시장이 됐다. 첫 공직은 전화동전 수거원, 주경야독으로 행시합격, 눈물의 우동 한 그릇으로 청운의 꿈 키웠다. 등등.
여기에 동생은 시장인데 형은 순사라는 흥미 위주의 글과,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의 일화 등이 여기저기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 하위 직급으로 근무하시던 형님이 사표를 내고 돌연 잠적을 해 버렸다.
나중에 만나 이유를 묻자 방송국과 잡지사, 월간지에서 수도 없이 몰려오는데 말 한마디 잘못하면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견딜 수 없었다. 는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형님이 직장까지 잃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장, 구청장 급 간부들이 모여 우리와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온 이원종 시장을 모시고 서울시의 자존심을 살릴 때다. 이 시장을 중심으로 서울시의 긍지를 되찾자. 는 결의대회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 같았다.
1395년 성석린(成石璘)이 지금의 서울시장 자리에 최초로 임명되었다. 그 후 6백 년 동안 서울의 살림을 맡았던 시장은 연임. 중임을 포함, 나까지 모두 1419명이나 된다.
서울시장의 평균 재임기간은 5개월여에 불과했으나 나는 이후 1년8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서울시 살림을 차분하게 꾸려갈 수 있었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1394년이었다. 따라서 1994년은 서울을 수도로 정한지 6백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서울, 새로운 탄생]을 주제로 서울 정도(定都) 6백년 사업을 펼쳤다. 나라마다 수도가 있지만 6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수도는 많지 않다.
나는 이를 기념하고,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다시 보는 서울(뿌리 찾기), 새로 나는 서울(도시발전), 신명나는 서울(문화), 열려있는 서울(세계화) 등 4대 분야 2백28개 사업으로 구성된 방대한 사업들을 연중 추진해 갔다.
또한 서울을 오래된 역사도시(古都)로, 경쟁력 있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와 기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110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국제화 종합대책을 수립, 발표하였다.
그것은 도시구조의 개편과 전략지역 개발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한강의 재등장이라는 주제아래 한강변을 따라 마곡, 상암, 여의도, 용산, 뚝섬 등 5개 거점지역을 개발하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또한 세계가 글로벌화 되면서도 EU, NAFTA, APEC 등으로 블록화 되어 가는 추세에 착안, 94년에는 리치엔 북경시장과 스즈끼 준이찌 동경도지사를 방문하여 베세토(BESETO) 협력선언을 이끌어 냈다.
베세토는 베이징(Beijing)-서울(Seoul)-도쿄(Tokyo)의 알파벳 머리 두 글자씩을 따서 합성한 말로 3개 수도가 협력하여 21세기 아시아 태평양 시대를 주도해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 외에 서울의 최대 과제인 교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지하철 5~8호선 145km를 동시에 건설하는 등 기초시설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94년 10월 21일 뜻하지 않은 성수대교의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사태수습을 위한 응급조치를 취한 뒤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후임시장을 물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를 만류하는 그에게 지금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서울시민들이 믿지 않으니 내가 물러나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 뒤 총리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시장을 사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생했던 대형사고와 맞물려 정부행정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가라앉지 않자 나는 결국 검찰에 출두하여 밤샘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는 토목학회에 의뢰하여 한강다리를 일제 점검한 적이 있는데 성수대교는 건설된 지 15년밖에 안됐고 철골로 만들었다 해서 점검 대상에서 조차 제외된 상태에서 붕괴사고가 난 것이었다.
서울 정도(定都) 6백년 기념일을 1주일을 남겨놓고 다리가 무너져 나로서는 아쉬움 또한 컸다.
그 무렵 나는 북경시장과 동경시장을 서울에 초청, 베세토 선언을 준비 중에 있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수동적인 입장에 있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역사의 진 빚을 갚자는 생각을 하고 이를 실천하려 했는데 성수대교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겸허해야겠구나, 내가 교만하니까 하늘이 징벌을 내리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어린 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고귀한 생명들을 앗아간, 가슴 아프고도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건설만큼 중요한 것이 유지관리(maintenance)라는 사실을 절감케 됐고, 이후 각종 건설공사는 더욱 견고히 진행되면서 유지관리도 철저히 점검하는 건설행정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였다.
서원대학교 총장 시절
고교시절 내가 꿈꾸었던 직업은 교수였다.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나는 외나무다리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체신대학의 합격은 내가 서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징검다리였다. 그 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최선의 길을 찾은 것이 고시(考試)에 대한 도전이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나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서원대학교 총장을 맡아 달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다. 나 역시 대학을 선망하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선거를 거쳐 총장으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
대학 구성원들도 내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서원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던 기간은 낯선 교육행정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부담도 있었으나 행정경험을 대학의 발전과 위상제고에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보람도 있었다.
총장에 취임한 이후 나는 우선 구성원들 간의 화합에 노력하면서 학생들의 긍지를 높이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학생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는 물론 학교의 위상 제고와 이미지 개선을 위한 사업에도 신경을 썼다.
데모에 앞장서던 학생들의 손에 낫과 삽을 쥐게 하고 무심천 정화 등 지역봉사 활동에도 함께 나섰다.
그렇게 3학기가 지났음에도 불구, 재단에서는 당초 약속대로 부채를 상환하지 않자 학교운영에 대한 기본인식의 차이를 좁힐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총장직에서 물러나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그 공백은 민선 2기 도지사 선거 출마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갔다.
도민들에게 진 빚
선거는 주민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주민자치의 역사가 짧다 보니 아직도 유권자와 후보자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이제는 이긴 51%가 진 49%를 포용하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을 인정해 주며, 깨끗이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정책대결은 도외시한 채 상대방에게 흠집이나 내려고 골몰하는 선거는 피차에게 괴로운 일이다.
다행히 근자에 들어서 높아진 시민의식으로 비방과, 음해, 마타도어 등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이 호응을 받지 못하는 풍토가 정착되어가고 있음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98년 6월 4일 치러진 민선 제 2기 충북도지사 선거에서 도민들은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현직 지사와의 대결에서 74%가 넘는 표를 몰아준 도민들에게 나는 큰 부담을 느꼈고, 이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일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4년여를 달려왔다. 그 덕분인지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도 150만 충북 도민들은 다시 나를 선택해 주었다.
충북은 인구도 적고 경제구조도 취약한데다 재원이 부족해 크건 작건 새로운 사업을 펼치려면 우선 예산부터 걱정해야 했다. 때문에 지역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고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하려면 중앙으로부터 보다 많은 재원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도청 간부들을 독려하는 한편, 나 역시 공직생활 과정에서 맺은 인맥을 풀 가동시켰다. 서울시와 청와대 재직 시 인맥, 각 부처의 장 차관을 비롯하여 고위직에 있던 행정고시 동기생은 물론 예산과 관련된 중앙부처 실 국장 및 과장급에서부터 사무관에 이르기까지 직접 찾아가 일일이 사업을 설명하고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가능성과 희망을 안고 돌아오는 차창 밖 어둠 속 너머로 나를 밀어 주었던 도민들의 성원을 떠올리면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결과 민선 2기 지사로 취임할 당시 98년도 도내 국책사업 예산은 7168억 원에 불과했지만, 99년에는 1조 2138억 원을 넘어섰고, 2000년도엔 1조 3696억 원, 2001년 1조 3906억 원, 2002년 1조 4110억 원, 그리고 2003년에는 1조 3219억 원으로 취임 당시보다 두 배 가까운 1조 원 이상의 예산을 5년 연속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변화의 속도에 살아남으려면
민선지사로서의 보람은 도민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느낀다.
벼농사가 잘 되었을 때, 기업이 성공을 해서 인정을 받을 때, 그리고 나름대로 성취를 통해 기뻐하는 도민들을 볼 때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공무원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다. 도민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그들이 불행하면 아픔을 같이 해야 하며, 그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행복해 할 때 공무원도 행복해 질 수 있다.
도정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뢰해 주고, 설정한 방향을 따라 줄 때 용기가 나고, 새로운 힘도 솟는다.
지금 내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역점 사업은 바이오토피아(Biotopia) 충북 건설이다.
서울시장을 그만둔 이후 성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서원대 총장을 거치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바이오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우리도 이에 걸맞게 변해야 한다. 그래서 민선 2기 취임 직후 세운 기본계획이 <충북 체인지 21> 이었다. 제도도 바꾸고, 생각도 바꾸고 일하는 방법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정을 맡은 이후 나는 바이오 엑스포와, 오송생명과학단지, 오창과학단지 등 한국의 미래를 선도할 바이오토피아 충북 건설의 꿈을 그리며 보람을 키워 왔다.
현대 사회의 기본적 경쟁력의 하나가 정보화다.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사용 등 정보 활용 능력을 두루 갖추지 못한다면 생활의 불편은 물론 경쟁력도 처지게 마련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자동차로 누가 더 빨리 달리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결정됐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정보 인프라와 정신(mental) 인프라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2000년 당시 충북의 정보역량은 국내 16개 시 도중 12위로 최하위 수준이었다. 정보역량을 높이지 못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2000년 4월 정보화 선포식 행사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인터넷 가장 잘 쓰는 道 이었다.
충청북도가 IT라는 기반 위에 BT라는 주춧돌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정보화 노력 덕분이었다.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윌슨이 영국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 가진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10살 되던 해부터 이 집을 내 집으로 생각해 왔다. 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10살 때 자신을 수상관저 앞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주시면서 앞으로 이 집이 네 집이 될 것이야. 라고 한 그 말 한마디가 자기의 일생동안 꿈이 되어 왔고, 오늘 비로소 실현이 된 것이라고 술회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도내 학생들을 상대로 이따금 특강을 해왔다.
인간이라면 청소년 시절부터 자기가 달성코자 하는 목표점, 꿈과 야망 등이 있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고, 전인교육 보다 지식 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니 인성이 메말라 다른 사람과의 조화(harmony)도 문제이거니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신자세도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지난해 수능시험 기간 중에 자살한 학생 역시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이를 뚫고 헤쳐 나가는 강인한 정신력과 돌파의 힘을 길러주지 못해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자살이 멋지게 생각되기도 하고 한때 이의 유혹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클수록 자살은 하나의 돌파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인생을 살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중 자살은 가장 보잘 것 없고 점수를 줄 수 없는 선택중의 하나다.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반드시 열고 나가야 할 문으로 생각하고 돌파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생에서는 가장 멋진 선택이다.
나는 경제적 문제로 벽에 부딪쳤다고 절망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갖으라 하고싶다. 내가 어릴 때의 경제적 어려움은 한마디로 한계 상황이었다. 자기 자신이나 이웃 친척이 도와주지 않는 한 해결의 길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래도 자선단체가 있고, 복지시설 등 각종 구휼기관과, 장학혜택도 곳곳에 널려 있다.
이런 여건에서 특히 청소년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좌절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흔히들 자수성가라는 말들을 많이 쓴다. 그러나 자수실패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성가도 실패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체신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급은 비록 9급이었지만 나로서는 농사꾼에서 벗어나 신분탈출에 성공한 셈이었다.
시골 사람이 서울시민이 된 것도 신분탈출이었고, 공무원의 신분으로 40년 간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축복이었다. 이제 와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정말 넘치는 은혜 속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나는 서울시청의 과장, 국장 시절 하루 평균 15시간씩 일을 했다. 새벽 별을 보며 집을 나서면 밤 10시경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피곤보다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이었다고 포장할 입장은 못 된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하다. 한 평생 공직의 길을 걸어온 나로서는 이제 고향에서 보람을 키워가는 행운의 날들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년 하위권에 머물렀던 충북, 움츠러들었던 충북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전국 선두권으로 나서는 바이오토피아 충북의 꿈을 꾸며 자긍심을 키워 나가는 밝은 얼굴의 도민들이 있음에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머지않아 때가 되면 개인으로 돌아가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다. 소홀했던 친척과 친구들도 만나면서 젊었던 날 실종됐던 나를 찾고도 싶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하기에 앞서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에 주어진 숙제는 열심히 풀어갈 생각이다.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말이다.
첫댓글 대선배님 화이팅입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또한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해 보심이 어떨지?
잘읽어보았습니다 저에 어린시절이생각나 눈시울이뜨겁네요^^ 선배님 건강하세요~~~
이원종선배님께서 찬찬히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글에서 표현했던것처럼 선배님들께 후배들에게 들려주시던 말씀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