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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십일조 와 고르반 (수필)
누구나 한평생을 살면서 어려운 역경을 경험 해 보지 않겠는가. 만은
세상에는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사례들을 허다히 본다. “헬렌 켈러”는 삼중 불구자로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이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인문학 법학박사 칭호를 받았으며
한평생 맹인복지 사업에 헌신했고 그의 숭고한 사랑의 정신은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들 말고도 우리의 주변에는 선천적 장애 및 교통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어린 자식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는 것을 뉴스를 통하여 듣게 된다.
그들이 고통 중에서 고난을 당할 때 무관심 했던 사람들이 ‘어린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나
어린것들은 살려야 되지 않은가‘ 라고 한다. 부모 없이 남겨진 어린아이들이 당할
고난과 역경 불행을 대물림 하리라는 부모들의 잘못된 사랑이 빚어 낸 결과라고만 한다.
나는 "십일조와 고르반" 을 이야기 하려 이글을 쓴다.
나는 가끔 지난날을 회상 해본다. 흔히들 돈잘 벌면 능력 있다 하고 못버는 사람은 무능하다 한다. 나는 진실로 무능한 사람이 였다.
결혼 후 기술하나 없이 무작정 부산으로 와 문방구 를 하다 경험 부족으로 실패하고 부곡동으로 옮겨 장사가 조금 잘 되니까 집주인이 나서.....다시는 남의 점포 빌려 장사하지 않는다 하고
나와 태창기업 이라는 청바지 골덴 만드는 회사에 경비에게 부탁하여 들어갔다. 기술이 없다보니 기계 놓을 자리. 25센치 뚜께의 세면 공글 바닥 을 오함마. 곡괭이. 삽으로 파는데 아무리 부지런히 해도 체격 좋은 사람들을 따라 할수가 없었다 한달만에 경비에게 다시 부탁 하여 청소와 배를 짜서 말아놓은 것을 검사실에 옮기는 작업인데 그것은 주야맞교대 하는 일이 였다 야간 일 하고 오면 단칸 빙에서 시끄럽고 밝아 다락에 올라가서 신문지로 창문을 가리고
잠을 잤다.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고 저녁에 회사로 출근 할 때면 머리가 띵하고 맑은 정신이 아니었다. 퇴직 금 받기위하여 13개월 만에 갈 데도 없는데
무작정 퇴직하여 일주일을 방에 누워 걱정만하고 하나님께 짧고 간절한 기도만 하다. 문득 부곡중앙교회 공 종표 집사가 회사 공장장 이라는 것이 생각나 찾아가서 부탁하여 시계반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염산과 물을 섞어 전기로 분해하여 광을 내는 “전해작업” 이였는데 김이 올라와 기관지에는 치명적인 악조건 이였다. 아니면 빠우로 광을 죽인다고
질긴 베조각 둥글게 돌아가는데서 시계 반도를 문질러서 광을 부분적으로 죽이는 작업이었는데 이것역시 먼지투성이 어였다. 그런 일을 3년정도 하니까 공장이 부도가나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기술도 없고 아는 연줄도 없어 빠우 광 지울 줄 아는 것을 밑천으로 들어간 곳이 모라에 있었던 “세신정밀”로 스텐으로 수저. 과일칼. 부엌칼 만드는 곳에 들어가 앞치마를 두르고 앉아서 광 죽이는 작업을 했으나 잔업이며 야간일 까지 해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박봉에다 고된 작업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노동자들은 잔업 시간에 일을 하다가도 옆의 동료들과 치고 박고 싸우기 일수였다. 오래있지 못하고 4 개월 만에 동네사람의 소개로
조선소 선박기자재 만드는 곳에 들어가 처음에는 기술이 없으니 숏트 라고 쇠에 녹 벗기는 일을 하였다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소방서 물 쏘듯이 숏트 볼을 쏘아 녹을 제거 하는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런닝 빤스 속까지 녹 먼지로 가득하니 날마다 목욕을 해야 했다. 그 일을 1년6개월 하면서 틈틈이 용접기술을 익혔다 내 나이 또래 되는 용접사 옆에가 면을 쓰고 용접 하는 것을 바라보니 뒤늦게 이것 배워 뭣 하려느냐? 고 반문 하였으나 이것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먹고 살지를 못하니 배울 수 밖에 없다고 말 했다. 그때 내 나이 38세였고 용접. 제관사로 일했다. 그러나 박봉은 여전 하였다.
그러다. 옛 직장 동료의 소개로 거제 대우조선소로 가게 되었고 지상에서는 용접하기 편하게
크레인으로 물건을 뒤집어 가면서 용접 하는데 대형 배를 만드는 도크장 에서는 배를 뒤집을 수는 없고 선박에 붙어 있는 그 상태에서 용접을 하니 아래보기와 수직과 위보기 등 온갖 자세로 용접을 하게 되니 특히 위로 처다 보고 용접 할 때는 가죽 앞치마를 입었으나
벌건 쇳물이 떨어져 옷을 태우고 몸속까지 타고 들어와 여러 곳에 새까맣게 대인 자국이
남아 있고 안전화를 신은 신발 안에 까지 들어오면 언제 신발 끈을 풀 시간도 없이 신발을 벗지 못하고 다 타서 식을 때까지 발을 탈탈 틀기만하다 끝난다.
나중에는 조금 더 낳은 임금을 받기위해 제관 책을 사서 공부하고 묻기도 하여 제관사가
되었다.
어머님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집이라도 사주자 하여 막내아들, 진우 4살 때 전액 부모님의 지원으로 3호 연립을 그 당시 9백만 원짜리를 6백만 원 주고 3백만 원은 김 완호 장로님께 부탁하여 새마을금고에서 대출받아 샀다. 그러나 내 집을 갖였다. 는 기쁨도 잠시 장사꾼이 지은 날림집이라 부엌방에는 빗물이 줄줄 새어 벽지에 얼룩이지고 재래식 화장실은 비가 오면 가득차고 비가 안 오면 깊이 내려갔다. 똥물이 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수도 배관도 탈이나 회사 쉬는 날 온 마당을 파 뒤집어 내가 손수 수리했다. 연탄 때던 시절이라 연탄아궁이가 탈이 나거나 호스가 샐 때에는 토요일 오후에 기술자를 불러 옆에
앉아서 학교에서 배운 찬물이나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고 뜨거운 물이나 공기는 위로 올라간다. 는 이론을 떠올리며 일하는 방법을 세심히 보고 배워 그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수리하였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껴야 살 수 있으니까? 이제는 집이 실증이 날정도로 형편없는 집이였다. 그 집산지 3년 만에 차 권사(나의 아내) 한테 집을 팔자하니 차권사도 동의하여 집을 팔았다. 그 집사면서 대출받은 3백만 원은 한 푼도 갚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집을 팔고 나는 회사 나가고 차 권사는 아이들 대리고 북구 일대를 누비며 마땅한 집을 알아보고 괜찮다 싶은 매물 이 있으면 연락이 와 일을 마치고 가보면 마음에 들지 안커나 집값이 비샀다. 일일이 차를 타지 못 하고 걸어 다니며 알아보았으나 허사였다 화명동 까지 갔다 오다 차 권사 길에 털썩 주저앉으며 “우리 판 집 도로 물리자”
했고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촌에서 논 2400평이면 촌에서는 큰 돈 이였다. 물리면 계약금도 떼이고 마땅한 집은 없고 부모님께서 피땀 흘려 사주신
집도 이렇게 놓치는구나 싶어 걱정만 되고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짤막한 그야말로 간절하고 짤막한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했다. 집을 판 후 15일 쯤 후 우리 집을 팔아준 소개소 할아버지가 찾아와 집터 하나 앞의 단독주택을 사란다. 그 집은 지을 때부터 보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대지27평에 건평16 평짜리고 그 집은 도로 쪽으로 두 집 앞이고 대지43 평에 건평32 평정도 되는 집이였다 "할아버지 우리는 아직 대출받은 빛도 3백이나 되고 이작은 집으로 저렇게 큰집을 어떻게 삽니까?" 하니 할아버지 말씀이 “아무 소리 말고 내말만 들어라 집을 사되 주인이라고 큰방에 들어갈 생각 말고 작은방 한 칸만 쓰고 부인은 뭣 하느냐?" 집에 있다 하니 부인도 무엇을 하든지 하여 돈을 벌어라 했다.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 권사(그때는 집사) 도 뭐든 하겠다고했다. 그때 마침 같은 만덕중앙교회 다니는 젊은 여 집사님이 화장품 외판을 하라는데 자기는 젖먹이아이들이 있어 못하니 해보라고 하여 차 권사가 화장품 외판을 하게 되었고 회사에 다니는 나와 같은 수입이 되었다. 또 때 맞혀 우리 집을 산 총각(구청서기) 이 밥 해주고 더 살라고 하였다. 이렇게 순조롭게 집을 샀으나 빚은5백로 늘어났다. 차권사도 마침 우리가 살고 있는 동을 맡게 되어 외판하다 집으로 들려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되어 편리 했다.우리는 외식을 몰랐고 큰 식당 엔 값이 비싼가 하여들어 갈 엄두도 못 냈다. 지금도 나는 큰 식당에 들어가면 음식 주문 할 줄도 모른다.
부모님이 집에 놀러 와도 외식한번 시켜드리지 못했다. 부모님은 몹시 서운해 했었다.
아니 지금까지 생각나지 않은 게 있다. 아버지께는 딱 한번 대접해 드린게 있다.
아버지 생신을 김해서 횟집을 하는 둘째 남동생 네 집에서 한다고 할 때 마침 보너스 받은
30~40만원의 돈으로 상차림 값을 해드린 일이 있고 어머니는 진우 가 대학 졸업하고 보건소에 있을 때 진우 덕분에 몇 번 대접도 하고 목욕도 하고 어머니 틀 이도 해드리고 했다.
또 큰딸 주연이가 첫 월급 70만원 받아 50만원을 제 엄마 (차 권사)에게 주었을 때 그 돈으로
어머니 금시계를 해드렸습니다. 만은 내 힘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없이 아쉬운 것은 부모님들이 한 15년만 더 살 사셨다면 싶다.
그런 와중에도 십일조 많은 빠지지 않고 했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께 많이 못해 드린 게 한으로 남아 있다.
꼭 돈이 없으면 십일조 한번 내지 안 터라도 부모님께 대접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화장품 외판5년 만에 은행 빚 다 갚게 되고 첫 집 9백에 사서1천3백에 팔았고 앞의 단독 주택 1년만 에 5백을 더 붙이고 팔았고 집을 한 채 지어팔고 두 번째 지은집이 지금살고 있는 집이다.
우리는 다섯 사람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첫째는 복덕방 차 씨 영감이고. 둘째는 은행 돈을 빌려준 김 완호 장로님. 셋째는 삼백만원의
거금을 빌려준 처형 내외, 넷째는 화장품 외판을 하게 해준 젊은 여 집사님 다섯째는 나는 직장 다니고 연산동서 만덕 까지 오가며 집 두체 짓는 일을 맡아주신 처삼촌. 특히 두 번째 집을 지을 때는
“야! 너희들은 너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 환히 보인다”고 하셨다.
아이들옷은 문방구 할 때 팔다 남은 자투리 실로 차권사가 뜨서 입히고 외유 는 커녕 맛있는 음식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주연이가 중학교 다닐 때 고종사촌 과외지도하려 갔다가 자매간에 치즈를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는 치즈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침만 삼켰다고 했다. 나는 일하다 손가락 끝을3번 짤려 보상금 받아 그 돈도 애들 학비며 빚 갚는데 썼다. 주연이, 주현이 는 연년생 이고 현아와 진우는 2살터울이라 주연이 주현 이는 유치원도 몰랐고 진우만 아들이라고 유치원을 졸업했다. 우리 아이들은 아무도 학원에를 가지 않았고 진우는 고3때 학원가라니까 집안 형편을 알고 그러는지 갈 필요 없다고 했고 주연이 는
장학금을 몇 번 받고 과외를 하여 진우 학비에 보탬을 주었다.
﹕그 와중에도 십일조는 철저하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축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을 불쌍히 보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한없이 감사드린다.
× × ×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으니
부모에게 안 해 드려도 된다.
물론 목사님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십일조와 효도"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는가?
"말라기3장9절 :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3장10절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보라“
성경 말씀의 어느 것은 중하고 어느 것은 경한 것 이 아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다 보니까. 십일조 안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알면서 왜 다른 말씀은 경 히 여기는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아비에게 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 마태15: 4~6)
바리새인 들이 부모를 공경해온 태도는 장로의 유전 을 표면적 이유로 삼아 실상인적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있는 자녀라도 그가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릴 것 이라고 의사 표시를 하면 부모님의 봉양책임이
면제되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고르반" 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제물 이란 뜻입니다 제물은 이미 하나님 의 소유가 된 것이니 그것으로 부모를 섬 길수 없다고 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신계명을 스스로 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5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하시면서 다른 계명에 없는 푸짐한 상급을 약속 하셨읍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 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명기5: 16절)
"그 부모를 경홀 이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것이요." (신명기27: 16)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자니라"(딤전5: 8)
과거 목회자들이 얼마나 십일조를 강조하며 쇠뇌교육을 시켰는지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십일조는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내면서 부모에게 등한시 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십일조 바로하고 각종 헌금 하고 자녀 교육 시키고 빚도 갚고 하면 부모나 친족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정 그렇다면 한번쯤 십일조를 하지 않더라도 부모를 공양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 × ×
아이 셋이 나란히 서있는 것은1979 년도. 찍은 것이고 이웃아이들과 찍은 사진은 1980년2월 이 사진들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찍어준 것이다.
이 아이들이 지금은 의사가 되고 교사가 되었다.
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여러분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된 줄로 압니다.
정말 감사 합니다.
송죽 : 박외도,
2025년 2월10일. 수정
송죽 : 박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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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고, 감사합니다.
금년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올려주신 精誠이 깃든 作品 拜覽하고 갑니다.
恒常 즐거운 生活 속에 健康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