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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효림 스님, 사회: 혜안, 인례: 현수, 헌향: 자명행, 헌다: 명조, 묘행주, 발원문: 송파 14구 명등 법진성, 촬영 및 방송: 방송담당 대원3구 법회팀, 음악: 마하보디 합창단, 지휘자, 반주자, 취재: 미디어팀 , 법회 방역 및 안내: 대원 3구, 법회팀, 보광당 좌석 배치: 청정팀, 법회 후 뒷정리: 송파 7구, 광진 2구, 대원 2구, 법회보 제작 : 법회보 제작팀, 법회보 배부: 송파 17구 법회, 데스크 안내: 법당 안내팀, 새법우 안내: 새법우 교육팀, 엘리베이터 안내 : 송파 27구, 재일법회 재 공양물 준비 : 보문부떡 및 생수 보시 : 송파 22, 23, 24, 25구 보현행자의 서원 : 공양분
법회 전 날인 토요일, 청정팀의 일요 법회를 위한 이 장엄한 일들을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관, 엘리베이터 안내, 떡, 생수 나누는 명등님들, 사무국, 방송실에도 모두 법회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법당에선 천수경이 시작되고 각자 곳곳마다 봉사자들의 모습. 마지막 시식 끝내고 법당 나서는 분들까지 안내를 하는 빈틈없는 불광 법회의 모습입니다.
타종, 헌향, 헌다에 이어 혜안 거사님께서 일요법회 시작을 알리시며 지오스님 49재 및 백중 5재를 동반한 법회가 시작합니다.
일요 법회 모인 불광 형제들이 가득한 보광당 및 보광당 입구. 이 현실을 주지 스님께서는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광덕 스님이 이어오신 불광 법회를 없애고자. 스님들께서는 지난 5년동안 겪지 않아도 되는 많은 괴로움을 불광 형제들에게 주시더니 법회를 없애겠다던 스님들께서는 생뚱맞게 왜 토요 법회를 만드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지 스님께서도 그동안은 모르셨다고 하더라도 불광법회 현장을 보시면 현 상황들을 아실텐데 묵묵부답으로 화합의 기도가 맞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금주의 법문 : 효림 스님(경원사 주지)
금주의 법어 : 불도수행의 구경(究竟)에 경지는 무아(無我)입니다.
저는 늘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참선을 하는 스님이고 더불어 詩를 쓰는 스님입니다. 제가 시를 쓰는 것은, 젊어서부터 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된 것은 제게 시를 쓰도록 권하신 노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시를 쓰겠다면 써 보되 세상 사람들로부터 시인으로 훌륭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 순간부터 너는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 없는 시인으로 시를 쓰되, 정말 훌륭한 시인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금강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야기 하자면 시를 쓰면 상이 생기고 거기에 더 ‘나만 시를 잘 쓰는 사람이다‘ 라는 상(相)이 붙는다면 그 때부터 훌륭한 시를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수행자로서도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런 취지로 노스님께서 나한테 일러주신 것으로 봅니다.
오늘도 법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시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고려 일연스님이 쓰신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역사책으로 봐야하는지, 아니면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훌륭한 교과서로 봐야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한 삼국유사 끝부분에 한문으로 ‘정수사 구빙여(正秀師 救氷女)‘ 얼어 죽는 여인을 구한다는 그 정수 스님에 대한 시를 쓴 것입니다.
효림 스님 詩 (삼국유사 정수 스님이 얼어 죽는 여인을 구한 이야기를 찬함)
有悲之事哀淚下 (유비지사애누하)
新羅國在哀莊王 (신라국재애장왕)
夜半聞唱聲天云 (야반문창성천운)
皇龍寺老僧正秀 (황용사노승정수)
宣封王師備搣義 (선봉왕사비멸의)
乞女産兒救氷死 (걸여산아구빙사)
走皇城街赤裸身 (주황성가적나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신라국의 애장왕.
밤이 깊은데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정수 노승을 마땅히 의를 갖추어서 왕사로 봉해라.
정수스님은 어떤 스님이길래 국사로 정해졌는가.
거리의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얼어 죽게 되었을 때
신라의 서라벌(다른 이름은 황성) 길을 발가벗은 채로 뛰어갔다.
아상(我相) 없는 행(行)을 하신 정수(正秀) 스님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입니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얼어 죽어 가는 산모와 아기를 품에 안고 구한 것에 대해서도 다른 스님들은 손가락질을 했다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스님이야말로 상(相)이 끊어진 진정한 스님이었다는 것이 정말 위대한 일이었다는 것으로 제 17分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서두에 꺼냈습니다.(노래 : 아상을 버리고)
제 17分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입니다. 이제 금강경(金剛經)이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여기서부터 경전의 내용상으로도 절반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오니, 어떻게 해서 응당히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리까?” 하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이는 금강경 설법이 시작되는 시점(선현기청분(善賢起請分)에서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처음 한 질문과 같습니다. “불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을 항복 받고, 어디에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합니까?” 하는 이 질문은 금강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 계셔서 이렇게 말씀드리기 조금 어색하지만 한국불교에서 반야부(般若部)에 관계되는 경전을 혜담 스님만큼 깊이 있게 연구하신 분도 없습니다.
금강경 뿐 아니라 반야부(般若部)에 소속된 경전이 많습니다만, 거기서 딱 떼어낸 '금강경'과 '반야심경'만 많이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본격적 대중 경전으로 넘어가는 것이 반야부 경전인데 그 중에서 금강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제 7分까지만 내용이 다이나믹하고 뛰어나다, 혹 어떤 사람은 13分까지만 금강경을 읽어도 되고 그 뒤에는 앞에 나온 내용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읽어보면 거기에 중송(重頌)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한 번 설법을 하고 중간에 게송으로 앞의 설법을 반복하는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경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거니와 뒤에 경전 암송하는 사람들이 그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런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요한 내용을 더 음미하고 깊이 있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한 번 중복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도 앞에 충분히 설명한 내용을 뒤에 다시 한 번 중복해서 설명하는 것은, 금강경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더 깊이 있게 내용으로 들어가 보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아(無我)는 무엇이며, 무아상 (無我相) 은 무엇인가?
불교를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들도 이것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혼선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선종(禪宗)에서 견성(見性) 이라고 할 때 ‘성품을 본다’ 라고 하는데 불교는 무아인데 무슨 성품을 보느냐며 살아서도 실체가 없는데 죽어서 무슨 실체가 있어 윤회인가? 이런 것을 부정하는데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해탈했기 때문에 윤회를 안 하지요. 그래서 죽으면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무아사상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과, 우리가 불도를 수행해서 무아의 경지에서 도달을 해야된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아(無我)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공(空)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 (空) 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선종에서 이야기하는 무심(無心)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아 (無我) 나 무심 (無心) 이라는 말이 차별이 있는 말이 아니고 똑같은 말입니다. 무심 (無心) 을 이해하지 못하면 네가 가진 아상(我相)은 ‘토끼의 뿔’ ‘거북의 털’과 같다는 표현을 하는데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여론에 떠도는 내 아이는 왕의 DNA를 가졌다는 학부형이 담임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처럼 내 아이만 특별하게 대하라는 것, 나만 잘났다는 그것이 바로 아상 (我相) 입니다.
불도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만 특별하다’는 그러한 아상 (我相) 만 없애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더 나아가 모든 생명가진 것은 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아기를 낳는 여인도 평등하기 때문에 생명을 구한 정수스님은 아상 (我相) 이 없는 행(行)을 했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아집(我執), 아상 (我相) 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그것이 자유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노래 : 엄마생각)
이 노래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내가 지금 엄마를 그리워하듯이 엄마도 또한 그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우리 부모도 누군가의 아들, 딸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미 떠나가신 어머니가 그립고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모든 사람은 정말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14分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이나 17分구경무아분( 究竟無我分) 의 말 뜻은 같은 뜻입니다. 제가 길어서 한 번에 다 못하고 중간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불자(佛子)로서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생각할 때, 이 질문은 인류 역사에 더할 수 없는 위대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머물게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을 것인가?”
인류의 철학이나 종교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고도 가장 정확한 해답을 못 내놓고 있습니다. 못 내놓고 있을 뿐 아니라, 엉터리 답변과 엉터리 주장을 합니다. 절대 신에게 우리의 마음을 머물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돈이나 권력에 우리의 마음을 머물게 하면 될까요? 위대한 철학이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까요. 모두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조복받지 못하면 이런 것들은 또 다른 갈등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다시 금강경의 본문을 한번 살펴봅시다. “만약 보살이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역시 처음 대승정종(大乘正宗)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아주 짧게 말하면, 무아(無我)이고 또 무아상(無我相)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마음의 경지, 우리가 궁극에 우리의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할 곳은 무아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차별의 세계이고, 중생과 부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이미 다 제도했습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중생이 없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고도 중생을 제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마음이 도달해야 할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어디에다가 둘 것인가? 하는 것과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을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을 “아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하는 한마디 말로 대답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하면 “유아상즉비보살(有我相卽非菩薩)입니다. 이 말 하나만 이해하면 금강경의 도리를 다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천고에 둘도 없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동서고금의 종교의 진리, 철학의 주장을 다 갖다 놓아도 이런 진리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금강경 절반을 읽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앞에서 읽은 금강경을 새롭게 더욱 깊이 있고,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읽게 될 것입니다. 후반부의 내용은 금강경을 더욱 깊고 높게 읽어보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더욱 깊고 높게 경전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노래한곡 듣고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노래 : 광덕 스님)
1. 아상을 버리고 2. 엄마 생각. 3. 광덕 스님. 효림 스님 법문 사이사이 노래를 들려주시는 가수분들.
♬ 찬탄곡 : 참회 ( 혼자있을때 / 광덕 스님 글, 정부기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혼자 있을 때 슬픔과 함께 하지 마라. 성냄과 욕심 시기와 질투 하지 마라
모든 것 잊고 부처님과 함께 있으라. 진리 광명은 그 모든 것을 소멸하리라
슬프다고 남에게 말하지 마라. 노엽다고 남에게 말하지 마라.
혼자 있을 때 슬픔의 물결 더욱 높아지리. 혼자 있을 때 노여운 불길 더욱 솟으리
자신을 속이지 말고 모든 것 버리고 부처님과 함께하면 극락을 이루리라
자비의 손길로서 모든 것 버리고 평화 희망 그 모든 것 안겨주리.
백중 축원문 및 수능 백일 기도 축원 : 혜담 스님
발원문 낭독 : 송파 14구 명등 법진성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백중 5재, 혜담 스님의 집전으로 연화부 거사님들 더불어 영단을 향하여 2배를 올리고 시식을 시작합니다.
지오 스님 49재 영단에 먼저 속가 가족들이 절 올리고. 혜담 스님께서 향을 사르어 올리시며 회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지오 스님 49재, 백중 5재를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보문부장님을 비롯한 봉사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찬탄 올립니다.
덕분에 불광 형제들이 지오 스님과 영가님들께 질서를 지키며 여법하게 시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불광의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 전처럼 점점 법등 가족들도 정상적인 신행활동을 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법회 후 대웅전에서 금강경 기도를 이어가고 있는 불광 바라밀 형제들의 모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 같은 거룩한 行입니더,
토요법회 외부 스님들께서 방문하실 때 정확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 정진을 하고 계신 불광 형제들.
지난주, 봉은사, 동명사에서도 끊임없는 시위 정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강사 조은수 교수님의 불교교리(연기설, 사성제, 팔정도) 불광 기본교육 4회가 오후 2시 보광당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어렵게 여겨지던 금강경을 매번 쉽게 풀어주시는 효림스님 감사합니다 어느 스님도 쉽게 오지 못하는 불광법회에 거리낌 없이 오실 수 있는 스님 감사합니다 _()()()_
한국전쟁 때 이념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을 위해 소천스님과 큰스님께서 금강경 독송 구국법회를 하신 것처럼 그분들의 상좌스님께서 불광법회를 지켜주심은 필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님 어려운 한자법문 옮기시느라 애써주심에 늘 감사합니다
오늘은 송지보살님과 지일심보살님께서 빠뜨리지 않고 영상을 찍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