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인데 이 러시아의 수학자는 증명과 근거없이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성미로 서양역사를 해부하고 있습니다. 이 포멘코의 저술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중세사의 허위와 위서논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포멘코가 이야기하는 위작과 사기, 조작의 범위는 그 영역과 급수차원이 다릅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서양사의 고대사와 중세사의 근거들은 거의 전적으로 16세기르네상스시기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암흑기가 존재했지요. 이 암흑기가 진짜로 암흑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포멘코의 역사의 의문은 시작합니다.
아나톨리 포멘코 Анатоли Фоменко '새 연대기' НОВАЯ ХРОНОЛОГИЯ
1. 유럽역사의 기초로서의 로마연대기
준비로써, 고대와 중세의 연대기를 간략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역사과학에 있어 연대기의 중요성은 극단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건간의 기간이나 (물론 현대의 연대기, 즉 A.D/B.C.로 쓰여지는 것) 앞으로 살펴볼 연대기에 우리가 접하는 모든 기본적인 역사적인 결론들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건의 날짜가 바뀌면 전체의 재해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 현대의 전역적인 연대기모델은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몇 세대의 연대기저술가들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들의 모든 주요 사건들은 율리우스력으로 쓰여져 있다.
새로 발견되는 문서들에서도 언급된 사건날짜는 압도적으로 로마연대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날짜들이 로마의 날짜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Bickerman] 다른 말로, 로마연대기는 세계적으로 동의를 이룬 '등뼈'이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역사는 우리의 특별한 관심대상이 된다.
2. 스칼리거, 페타비우스와 기타 목회연대기술자들 (16-17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현대연대기)
고대와 중세역사가 현대의 모습을 갖춘 것은 대부분 16-17세기에 이루어진 일로써 Bickerman이 "과학으로서의 현대연대기의 창시자"라고 부른 요세푸스 유스투스 스칼리거(1540-1609)의 저작이 그 시작이다.
중세의 스칼리거의 초상화는 Athena Batavia(요하네스 메르시우스)의 책에 실린 엣칭판화이다. [그림]

스칼리커의 연대기작업은 다음과 같다.
1) 스칼리거 1. Opus novum de emendatione temporum. Lutetiac. Paris, 1583 2) 스칼리거 Thesaurum temporum. 1606
대부분의 스칼리거의 저작물은 페타비우스(Dionysius Petavius 1583-1652)가 결론짓고 있는데 페타비우스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은 De doctrina temporum, Paris, 1627이다.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 밀러(1705-1783)은 러시아의 역사를 스칼리거의 윤곽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그의 다른 독일 저자들의 저술은 4권에 기술한다.
18-19세기의 저작물을 언급하겠다. 여기에는 상당한 분량의 연대기기록이 존재한다. (예생략) 이것들을 우리에게 중요한 단면을 제공한다. 스칼리거와 페타비우스당시의 연대기가 어떠했는지를 가장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자료는 후세에 '화장'되지 않은 모습으로 좀더 보존된 모습을 갖고 있다. 현대의 연대기술가 Bickerman의 말을 빌면, "지금까지 이만큼 현대적인 수준에 부응하는 밀집된 조사가 실행된 적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 클래시컬시기와 중세시기를 다룬 현대의 연대기를 '스칼리거-페타비우스'의 것이라고 해도 무리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연대기를 이제부터 단순히 '스칼리거 연대기'라고 부르기로 한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이것이 17-18세기에 존재하던 유일한 연대기는 아니다. 그 진실성은 저명한 과학자로부터 의심되어 왔다.
16-17세기의 스칼리거와 페타비우스의 초석작업은 고대사를 아무런 근거가 전혀 없이 날짜들의 테이블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적 전통에 기초한다고 선언되어 있다.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역사는 대부분 기간동안 성서에 근원하여, 성직자들에 의해 기술되어 왔기"[Gourevich]때문이다.
오늘날 연대기의 기초를 만든 사람은 유세비우스 팜피루스Eusebius Pamphilus와 성 히에로니무스(4세기에 존재했다고 하는)이다. 케사리아의 유세비우스의 초상은 다음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전형적인 르네상스시기의 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가장 근접한 설명은 그가 그 전시대가 아니라, 이 시기에 산 인물이라는 것이다. 스칼리거의 역사는 유세비우스가 4세기(260-340)에 존재하였다고 쓰고 있지만, 그의 유명한 저서 '창세기에서 니케아공회까지의 시간의 역사'-일명 '연대기'-나 히에로니무스의 산문이 중세에 오기까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역사가들은 "(유세비우스의) 그리이스어로 된 원전은 중세최근까지 오직 파편으로서만 존재하였는데 성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번역본을 기초로 보완해 넣은 것이다." [Eysebius Pamphilus, 성경적 역사,] 14세기에 Nicephorus Callistus는 첫 3세기의 역사를 쓰거나 유세비우스의 역사를 '수정'하려고 했으나 '유세비우스의 저작을 베껴쓰는 것에 그쳤다'고 쓴다. 하지만 유세비우스의 역사는 1544년에야 유일하게 출판되었고 이 일은 Nicephorus보다 '훨씬' 나중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물음이 제기된다: 혹시 "고대"[라 주장하는]의 유세비우스가 니체포루스의 글에 기초한 것은 아닐까?

위 그림은 Cesare Nebbia와 Giovanni Guerra가 1585-1590년에 그렸다고 주장하는 그림이다. 이것은 역사가에 의하면 성 제롬과 그의 애완 사자가 캐사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도서관을 방문하고 있는 장면이다(제롬은 유세비우스의 역사를 번역하였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그림이고 아마도 16-17세기의 그림일지도 모른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본방식은 두꺼운 매듭으로 묶고 하드커버를 쓰는 18-19세기에 쓰인 방식과 유사하다. 가장 그럴법한 해석은 16-17세기의 화가들이 당시의 중세의 일들을 옮겼고 17-18세기의 스칼리거파의 연대기록자들에 의해 인물들이 집어넣어진 것이다.
스칼리거의 연대기는 성경에서 나온 여러가지 숫자들을 해석한 것이 기초하고 있다. 어떠한 '기초날짜'가 학술적 연구를 도출하기 위해 쓰여졌다. 예를 들어 저명한 연대기술자, J.Usher(유세리우스)는 세상이 만들어진 날을 4004.B.C. 10월 23일 일요일아침으로 잡는다. 독자들이 염두에 둘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속세의' 연대기들은 중세의 성경번역에 의한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역사가 E. Bickerman은 "기독교 역사가들은 성경적역사를 위하여 속세의 연대기를 창출해냈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비커만은 이렇게 쓴다, "스칼리거는 과학으로서의 연대기의 창시자로서 유세비우스의 전체의 저작을 재구성하려고 했지만 ...유세비우스의 날짜조차 그 번역본에서 잘못 번역되어 있어서 오늘날 어떤 소용도 없다"
이 모든 '창세기의 날짜들'은 중세의 계산의 혼돈과 논쟁으로 인해 기록들마다 모두 상당히 틀리다. 주요한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5969.B.C - 안티오크인들의 역법(씨오필루스theophilus가 전함) 5508.B.C - 비잔틴의 역법 (콘스탄티노플 방식이라고 하기도 한다) 5493 B.C. - 알렉산드리아의 역법 4004 B.C. - User에 의함 - 히브리 역법 5872 B.C. - 70인의 성경번역자 본 (나중에 설명) 4700 (사마리안), 3761 (유태) 3491 (히에로니무스) 5199 (유세비우스), 5500 (히포리투스와 섹스터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5515,5507 씨오필루스, 5551 아구스틴 황제 (나중설명)
이렇게 고대사에서 기준점이 되는 시점이 약 2천1백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예들은 그중 가장 중요한 관점들만을 열거한 것이며, 약 200가지 이상의 창세기 기원 날짜가 존재한다. 성경을 베끼는 작업을 수행한 70번역가들은 오늘날 70인역자로 알려져 있다.
이 정확히 창세기의 연대를 산출하는 문제는 전혀 학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17-18세기에 들어 집중적인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많은 문서들은 '아담때부터...' 혹은 '창세기부터...'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사건들간에 어떤 것이 먼저인지 상당한 혼선이 있게 된다.
스칼리거와 페타비우스는 천문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중세 후반을 증명하려 하였는데, 현대의 비평은 스칼리거가 이를 근거로 사용하여 당시인들에게 '과학'으로 만들었다고 여긴다. 이 '과학적인' 껍질은 그 당시 17-18세기의 연대기학자들이 주어진 이 상세한 연대기가 참이라고 의심없이 믿게되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은 스칼리거의 연대기는 상당기간동안 굳게 권력을 쥐고 있던 서유럽의 카톨릭교회의 위상 내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A.Oleinikov가 쓰길, "중세신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성서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자료를 가지고 해석하려 했다"고 하였다. 성경을 연구한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는 현대연대기보다 3,941년 앞서 세계가 탄생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의 동료 씨오필루스Theophilus는 안티오크의 대주교로 이 기간을 5,515년으로 늘려잡는다. 성 아구스틴은 여기에 30년을 덧붙인다. 반면 아일랜드 대주교인 James Usher는 구체적인 숫자가 더 믿을만하고 느꼈는지, 4004.B.C 10월 23일 아침에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서구 유럽의 연대기술자들은 대부분 성직에 속해 있었다. 스칼리거(1540-1609)의 예를 들면, 신학자였고 구석기역사를 창출한 티셴도르프Tischendorf(1815-1874)는 신학박사였다. 페타비우스Petavius(1583-1652)는 예수회 교도이자 많은 신학저술을 낸 저자였다.
그들은 이 성경에서 온 연대기가 불변의 진리라고 절대적으로 믿었고 이것을 벨탄쇼웅(Weltanschauung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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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분에서 포멘코는 스칼리거의 완고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소개합니다. 수학에 있어서 어떤 정리를 틀리게 증명하고서도 다른 학자들이 비판하자 인정하지 못하고 탄압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논지와 별 상관 없어서 생략합니다. 포멘코는 이후에도 아이작 뉴튼같은 18세기사람이 역사를 수정하여 이 스칼리거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려했다고 합니다.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London)
아무튼 이후의 포멘코가 이 엄청난 분량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정말 과격합니다. 일단 우리가 아는 그리이스니 트로이니 하는 것이 전혀 다 가짜며, 십자군전쟁은 예수가 1086년경 죽자 바로 일어났으며 로마도 이 시기정도의 일(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가 11세기 인물)이며 구약도 중세시기의 기록이며, 묵시록은 15세기에 와서야 쓰여졌으며 대부분의 우리가 아는 역사는 대부분 기껏 1000년간에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역시 5세기존재 즉, 모든 역사는 4차십자군이 끝나고 르네상스시기까지 고대사와 로마사등이 전부 '각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물들은 누구의 것이냐? 하면 그건 오스만투르크니 하는 다른 제국의 것들을 점령후에 파괴와 서류조작으로 윤색시킨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서양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얼핏 들으면 일고의 재고의 가치도 없는 설일지 모르지만 한번 이 책을 읽어보면 기존의 orthodoxy에 짙은 의심을 드리울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예를 들어, 중세이전의 지도는 위아래가 뒤집혀 있어서 동-서가 바뀌었는데 서쪽을 '왼쪽'이라고 지칭한다든가 (즉, 위서라는 것!), 라틴으로 그런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다르게 발음되고 있었다거나, 천문학상의 사건이 일어난 당시를 기술한 천체의 모습은 수백년후의 천체모습이라든가, 역사물의 발견 자체가 시간상으로 매우 밀집되어 확률적으로도 밀집된 저작물들로 서로 상호간에 베껴쓰는 등으로, 교회가 써준 '정통사'에 도전하는 문제가 생기면 그를 보완하기 위해 위서들이 가공의 인물들을 동원해 쓰여진 혐의등, 현대에 알려진 역사들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점입니다. 그 외에도 좀더 최근의 근거-그래봐야 200년동안-로서 파르테논의 신전의 경우 투르크양식이 붙어 있었던 것을 1860년대의 기록과 사진들로서 밝혀내고 나중에 '수정주의자'들이 이들을 철폐한 것이 됩니다. 그럼 여기의 그리이스 부조들은 17-18세기때 새로 해 넣은 것이랍니다. 즉, 반달이나 투르크인들이 와서 그리이스 신전을 때려 부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투르크인들이 세운 신전을 투르크의 유물이 아닌것처럼 만들기 위해 때려 부수고 교묘히 그리이스의 조각을 해 넣었다는 것이죠. 즉, 유럽의 문물은 후세에 가공된 위서들을 기초로 역사로 만들기 위해 가공된 것이라는 설입니다. (물론 포멘코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방대한 저작물이 중요한 중세의 저작물과 기록, 그림들등 하나하나 제시하는 의문들은 독자가 그런 답에 도출하게 만듭니다.)
이런 역사가 조작된 동기는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정복지를 순응시키기 위해서는 정복지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고 찬란하다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를 조작해 내야 할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그리이스 문명의 유물들을 보면 기원전의 것이라고 믿기 매우 힘듭니다. 그리이스것들은 매끈매끈하고 너무나 현대적이니까요. 이게 최근 300년동안 조직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설, 어떻습니까? 이렇게 요약해 놓고 보면 무슨 선정적인 음모론적글쓰기라고 여기기 쉽지만, 포멘코의 논증방식은 그야말로 천체수학과 고고학적 면에서 다차원적이며 매우 깊이 연구된 결과입니다. 여러 분야에 있어 불일치를 거침없이 쏟아놓고 있습니다. 분량이 무척 많고 (전 7권에 각권 더블컬럼으로 600p) 1권에서 인용하는 참고문헌만 해도 15세기의 저작부터 무려 1천5백권에 달합니다. 포멘코의 이야기에 다 동의를 하지 못하더라도 서양사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매우 근거박약하다는 점에는 동의할수밖에 없는 저작입니다.
http://chronolog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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