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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7일 (눅18 바리새의 감사).hwp
2019년 11월 17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추수감사주일 * 홍지훈 목사
누가복음 18:9-14
어느 바리새의 감사기도
오늘은 2019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매년 11월 셋째주일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교회마다 다른 날짜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 이유는 미국식의 추수감사절인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맞춘 것이 우리의 추수절기인 추석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미국에서의 추수감사절은 마치 우리나라의 민속명절과 같습니다.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가족의 정을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느끼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 보면 추수감사절이 자리 잡은 때가 매우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월 첫째 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되고, 그 전주인 11월 24일이 교회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주일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가 벌어들인 소득에 대한 감사이기 이전에, 지난 한 해 동안 살아온 나의 인생을 돌아보는 절기라는 점에서 더 중요한 절기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해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가 매년 3번 돌아옵니다. 양력으로 하는 새해와, 음력으로 계산하는 설날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만이 생각하는 교회력의 새로운 시작인 대림절을 맞으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2019년 한 해 동안 우리를 보살펴주신 하나님께 어떤 감사를 드려야할 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주일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도 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목록을 다 적고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 줄 아십니까? 평소에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고, 또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 안 일어난 것을 우리는 감사의 목록 안에 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감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배고플 때에 누가 내게서 떡을 주고 갔는데, 다 쉬어버려서 못 먹을 떡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내가 받았을 때에 내게 지금 간절하게 바라던 “바로 그것”을 준다면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갑자기 용돈이 떨어져서 용돈 SOS 신호를 보냈는데, 엄마가 “더 이상은 네가 스스로 벌어서 쓰라”고 답하면 “좋은 가르침을 고맙다.”고 생각할 자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기도를 가르치는 대목이 11장에 나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친 후에 주님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눅11:10)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이런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면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내밀거나,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내어주지는 않는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나쁜 것 일리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런 결론이 납니다. 사람끼리 주고받을 때가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내 맘에 전혀 들지 않는 것이라도 반드시 쓸데가 있는 것이니 고마워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8장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은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것은 당시의 유명한 종교지도자들 단체인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인데, 이들은 우선 구약성경과 율법을 매우 소중히 지키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율법학자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때에는 마치 자기 집에 가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뻤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니 들어가서 기도할 맛이 날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동네에서 세금을 걷는 사람인줄 다 아는데, 의무적으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마다 손가락질 받는 것 같아서 매우 불편한 사람입니다. 당시의 세리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지배자인 로마 총독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따지고 보면 외국인의 지배를 당하는 민족에게는 그 백성 중에 누구 하나는 감당해야할 비난을 받는 자리가 세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리는 재산이 많았습니다. 걷어서 로마에 바쳐야하는 세금에 자신이 가질 수수료를 넉넉히 붙여서 징수하면 쉽게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세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금을 걷었는지, 또는 동족을 착취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비난 받는 세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부터 보겠습니다. 주님은 세리를 칭찬합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리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판단기준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비나받는 이유는 자신이 흠잡을 데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또 민족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일 뿐, 이제는 낮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 주님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들은 좀 극단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내용은 없고, 바리새와 세리를 대비시키니, 오늘 보통의 사람들인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바리새가 아니니 다행이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나는 세리처럼 그렇게 나쁘지도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아니면 높이면 낮아지고, 낮아지면 높아진다는 말 때문에, 무조건 세리처럼 나는 죄인이라고 “죄인시늉”만 하면 될까요?
저는 오늘의 본무의 주인공을 “이 바리새인”으로 정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성경을 좀 읽어보자는 의미이고, “한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등장하는 어떤 바리새인은 이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 할 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보다는 덕을 베풀면서 살았으며, 동시에 존경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세리”에 해당한다면 떳떳하게 교회 안으로 못 들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상담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에서 열심히 전도해서 교인 한 사람이 새로 나왔는데, 그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에 그 문제를 언급하자니, 새 교인이 상처받을까봐 걱정되고, 언급 안하고 피해가자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 걱정되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비도덕적인 삶을 청산할 의지도 없고, 청산할 상황도 아닌 그런 경우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상담요청이었습니다.
이 현실처럼, 드문 경우이지만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저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목사는 매우 불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주님은 일단 “문제 있는 사람”의 편을 듭니다. 오늘 본문처럼 남 앞에 당당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는 세리의 편을 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목사는 목회하기 참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문제 있는 사람”을 용납하면, “문제없는” 교인이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을 용납하면, 그가 빨리 회개하지 않는 동안에 교회 전체가 문제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 중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 간음하는 자와도 다르고, 저 세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기도드리러 성전으로 올라간 세리가 지금 바리새인의 기도에 등장합니다. 비교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저 사람의 생활상이나 저 사람의 도덕심에 비교한 “나의 수준”은 무척이나 높다는 자부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물론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주님이 언급한 것은 아예 작정하고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 설마 모든 바리새인이 다 이 사람처럼 기도하겠습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감사절에 감사하는 목록 내용을 보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감사목록을 보면, 나와 내 가족이 큰일을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는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그 일을 잘 해결하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감사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산 것도 감사목록에 있습니다. 재물을 손해 본 것이 좀 있어도 다행인 것은 몸이 건강하니 감사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면 너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남들보다 큰 문제 만들지 않고 살아줘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큰 욕심 없이 작은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이 감사들은 요약하면 “어쨌든 무탈하게 비교적 잘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 바리새의 기도와 마찬가지의 기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감사의 기도는 반드시 반성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이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의 세부항목을 말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금욕과 희생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세리는 일단 기도의 기본자세도 갖추지 못합니다. 성전 앞자리로 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시작해야하는데, 우선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탄식하는 모습으로 자기의 가슴을 칩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합니다.
“무탈하게 비교적 잘 지냈다.”는 감사기도는 바리새인처럼 매우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더 심오한 감사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소망대로 이루어져서 감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관계없는 것이지요. 다음 단계가 비록 내 소망대로 되지 않아도, 내게 정말로 힘든 일이 있었어도, 그것이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이어서 감사한다는 것이 그 다음 단계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더 높은 감사의 단계로 건너가려면, 내가 무엇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직시하는 것,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아는 것,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한 것,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나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들, 내가 한 것은 당연하고 남이 한 것은 비난받아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들에 대한 반성이 감사의 목록 맨 앞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못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며 나를 붙들어 주신 것이 정말 고맙다는 감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 바리새인에게 비교당하는 그 세리는 그것을 압니다. 성경에 쓰여 있지는 않지만, “세리”라는 직업을 내려놓겠다는 결심을 당장은 못할 것입니다. 세라는 자신과 가족의 호구지책이니까요. 그나마 세금에 붙이는 이득을 최소한 적게 받겠다고 결심은 조금 했을지 모르지만, 먹고 살다보면 내년에 기도를 드리러 올라왔을 때에도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모르거나, 또는 이 세리처럼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바꾸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바리새인의 문제는 자신의 옳음과 자신의 의를 강하게 내세웠다는 문제와 자기보다 못한 세리를 마음으로 정죄하였다는 문제보다, 이런 문제를 만들게 된 근본적인 마음자세에서 나옵니다. 즉,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세리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 세리처럼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뒤집으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리새인처럼 살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단 저 바리새인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속에서 존경을 받는 삶을 사는 모습은 주님도 좋아할 모습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과 실책과 자비 없음을 알지 못하면, 세리만도 못하다는 평가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일 년에 한 번 감사드리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이 담긴 감사를 드려보십시오. 나는 비록 실수투성이고 나태하며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힘이 더욱더 고맙게 느껴질 것입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