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永川) 시내에서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지나 북쪽 좁은 계곡으로 들어서니 야트막한 산 밑에 기와집이 보인다. 가을이 한창인 11월 가까운 밭에서 복숭아를 따고 있던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고택에 들어섰다. 고택의 동쪽방인 간소(艮巢-隱種精舍)앞 산수유나무에 빨간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고택은 18세기 중엽 정재영 씨의 10대조 되는 매산 정중기(鄭重器 : 1685-1757)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 정일찬이 완성하였다. 정중기 선생은 벼슬이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시작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까지 이른 분이다. 3칸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약 1.5m 높이의 기단위에 본채가 서 있다. 본채는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ㅁ’ 자형 건물인데 여기에 사랑채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교(直交)되게 덧붙이고 있다. 사방이 방으로 둘러싸인 갑갑한 가옥 구조에서 ‘ㅁ’자형 하늘로 보이는 것이란 앞쪽 지붕위로 병풍처럼 멀리 보이는 산뿐이다. 양반가정의 새댁이 떠나온 친정을 생각하며 가끔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청의 뒷문을 열면 바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안채의 대청 오른쪽 방은 며느리 방으로 신랑이 안채를 통하지 않고 들어올 수 있게 바깥쪽에 문이 달려 있었다. 대청 왼쪽 방은 곳간 열쇠 주인인 마나님 방이고, 건너편 출입문 왼쪽에는 할머니 방이 있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인생의 거처가 이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택의 주인인 매산 선생은 3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천연두(天然痘)가 온 동네에 돌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다. 뿐만 아니라 아우와 두 사촌 아우까지 천연두로 희생되자, 그는 잇단 충격으로 사람을 멀리하고 만나지 않는 격색증(隔塞症)을 앓게 된다. 그런데 며느리 방 문 옆 벽면에는 다른데서 보지 못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 붓글씨로 무엇을 세로로 써 놓았으나 글자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250년이 지난 글자를 판독(判讀)하려고 목을 길게 빼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요모조모 보니 내용은 다 비슷하였다. 「검불 선생이 박을 숨거 고슈아비 뿌리 끈어 시들시들」 주술적인 내용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가래톳이 생기면 벽에 기대어 서서 자기 키에 맞게 머리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주문을 적었다. 동그라미가 벽면의 아랫면에서 윗부분까지 여러 개 있어 아이 어른 구분 없이 가래톳이 많이 생겼던 것 같다. 그 내용의 뜻은 “사악한 검불 선생이 내 몸에 박(가래톳)을 심었으니 좋은 사람인 고슈아비님이 빨리 오셔서 가래톳 뿌리를 끊어 시들시들하게 해 주소서”라는 주문이다. 가래톳은 주로 목, 겨드랑이, 허벅다리의 사타구니에 임파선이 부어 아프게 된 멍울을 말한다. 주요 질환은 시대에 따라 달라, 원시시대엔 골절상, 조선시대엔 종기, 지금은 암과 에이즈라고 한다. 매산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엔 종기, 가래톳이 많았던 것 같다. 의학이 발전한 요즘 같으면 대번 나을 가래톳이 그 당시는 뾰족한 처방이 없어 벽에 주문을 쓴 것이다.
경전통을 돌리며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을 도는 사람들을 본다. 지극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케 한다. 이것도 주문이다. 주문(呪文)이란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글이다. 우리 선인들은 대문에 ‘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입춘방(立春榜)이나 부적(符籍)을 붙이고, 절 입구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마을 입구에 장승을, 다리에 돌장승인 벅수를 세워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다. 음력 정월 보름날 아침 일찍 친구 집을 찾아가 친구를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네 더위 다 사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그해 여름은 더위 타지 않고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때는 친구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던 기억이 난다. 병이 낫는다는 절대적 믿음은 병자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 당시 가래톳으로 고생하며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동그라미를 그렸던 아이나 어른들은 다 어디 갔을까? 지난 날 대가족과 하인들이 득실거리던 매산 고택은 사람 하나 없어 스산하고 휑뎅그렁하다. 지금은 가래톳이 아닌 암, 에이즈가 무서운 병이다. 우리는 무슨 주문을 쓰고 경건하게 기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