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고마비(秋高馬肥)의 새벽
추고마비(秋高馬肥)의 계절이다.
참으로 일찍 기상한 것은 친구 자당께서 돌아가 발인인 간밤에 못갔기에, 새벽 여명이 밝을 때니 꼭두새벽에
부리나케 조문을 갔다. 어제가 백로(白露)라서인지 더욱 냉함을 느낀 새벽이다. 수아르처럼 어둠이 한껍질씩 벗겨지면서 한국 가을의 전형적인 정취가 완연하다. 피부로 느껴서인지 몸서리치게 상큼해 좋다.
이왕 서리서리 입고 나온터라 애마를 칠전동과 김유정마을 그리고 한들도 째찍질 한다. 점점 4차선으로 발을 뻗는 김유정마을의 세력권을 확연히 피부로 느낀다. 대추가 익어가는 한들마을 다리건너 차를 세우고 수필사냥, 그림사냥을 위해 산지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발길을 옮긴다. 딱히 가야 할 곳도 없이 걷는 새벽 인적은 없으니 일허일영(一虛一盈)이요 일허일실(一虛一實)임도 짬짬히 느껴본다.
첫 소설 산골나그네를 주모와의 대화로 잉태했다는 한들(大坪)이다. 작품을 되새김질하면 정이간다. 여기저기 그림같은 집들이 낭만을 샘솟게 한다. 뒤는 청산이요, 앞은 여울물에 발을 담근 감색 지붕에 정감이 가 한참 시선을 던진다. 모든 이들의 로망이리라.
악마구리 끓듯한 도심에서 벗어나 모두의 소원인 나만의 자연속의 세계를 저마다의 필력으로 꿈을 실천한다는 게 용하다. 꿈을 이루기나 한 듯, 보는 이들 마음도 여유가 넘쳐 운치있고 아름다운 맛을 더한다.
몇해 전, 장사가 안된다고 코다리집을 하다 셔터 문을 내린 시루 간판-. 문학촌 바로 위 그곳에 다시 개업을 해 반긴다. 먼저 주인한테 선물한 시화 한편이 다시 천으로 변신해 풍상우로에 빛이 발했어도 반갑다.
고향 정족리를 내려다 보며 애마를 몬다. 당도한 곳은 언제나 새벽이면 서는 애막골 새벽 장으로 향한다.
주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장마당을 기웃거린다. 장은 머슴의 생일이라고 했다. 제법 상쾌한 가을의 날씨에 합세라도 하듯 푸성귀처럼 저마다 생동감이 넘친다.
생전 돌려다 보지도 않던 짱아찌를 사는 젊은 부부를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 3천원짜리 두공기-. 무쳐놓은 짱아찌를 군말없이 산다. 낚싯꾼도 아니란다. 일상 단골이라 늘 이어 짱아찌를 즐긴단다.
절대빈곤시절-. 도시락 반찬의 단골인 무짱아찌에 오랜만에 눈길을 주니 와락 반긴다. 도시락 얘길하니 파는 아줌마는 자기는 무말랭이가 단골이었다고 치를 떤다. 짱아찌-. 대저 짜다고 난리지만 실상 그리 짜지도 않다. 추억이 입속을 한올 녹아 들어간다. 옛친구를 만난 듯, 나도 한 종발 샀다. 비만오면 개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뽀얗게 돋은 버들치 등같던 미루나무 버섯과 흡사한 느타리 버섯도 사고, 청년 오이보다 영양가가 훨 높은 황금 노각도 한 개에 천원을 주고 모셔왔다.
언제나 내 발목을 거머잡는 떡집에서 콩가루에 딩굴고 있는 인절미와 푸른 고추를 듬성듬성 넣은 장떡도 사왔다. 만물사 같은 곳에서 손녀 꿈을 키워주려고 지구본도 닁큼 사왔다. 고구마로 튀긴 뻥튀기도 새롭다.
오늘 새벽의 선물은 뭐니뭐니해도 눈밖에 나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짱아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다.
성당 간 아내가 올린 아침상에 녹각, 짱아찌 등 추억을 차린 조반이 제법 쏠쏠하다. 쌀 한 톨 없던 꽁보리밥이 식어 떡덩어리같을 때, 물에 말아 뚝뚝 꺼서 한숟갈 짱아찌를 올려 먹던 60년대가 내게 달려든다 기분좋게-.
김치독 아래에서 눌려살다 봄을 맞은 무쪽도 늘 내 도시락 단골 반찬이었다. 그것마저 동이 났을 때는 고추장-. 시내 애들하고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빨갛지 않다. 막장이 고추장이던 우리 집-.다져진 도시락 위에 비빈다. 옆 친구 콩장도 넣고 뒷친구 멸치도 넣어 흔들던 도시락-. 가을철의 상쾌함에 금상첨화이다.
소찬(素饌)이 제법 뿌듯함을 안겨준다. 추억을 마셨기 때문이리라. 가을이 문밖에서 유혹한다. 어디로 갈까?
신나는 일탈이다. 애일지성(愛日之誠)으로 맞으리-.
가마솥 폭염으로 얼마나 우리 심신이 소진되었던가?
그 보상을 흠뻑 받아내기위해서라도 구월 중순으로 치닫는 오늘 하루 모두 충실히 보내야 한다.
계절답게 원고청탁 받은 것도 정성껏 써 보내리라. 원고는 내 분신이 아니던가!
꼭두새벽에 일어나니 영혼이 추억을 마셔 편하다.엊그제 처음으로 줏은 알밤 두개, 오늘 아침은 푸른 대추,
오후는 어느 산속을 걸으면서 더덕향도 맛보고 더 깊은 곳에서 송이 내음 한 올도 맛보고 싶은 욕심이리라.
작품 하다가 중단된 시화도 다시 마무리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