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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2 - 남월국에 침공을 당해 합병된후 한나라에 망했으며 이후 쭝자매가 궐기하다!
*** 위 사진에 노랑색은 중국 광동성의 남월국이고 파랑색은 북베트남의 어우락국이며 붉은색은 중부 베트남 입니다 ***
진(秦) 나라가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진나라 장군으로 남해군 현령이었던 조타
(趙佗 찌에우다) 는 남해군을 장악했고 이후 진나라가 항우와 유방에 의해 멸망하자 계림군과
상군을 합병해 자립하니 나라 이름을 남비엣 (南越) 수도를 번우(광저우) 에 정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 중국 남부의 월 (越) 족인 백월이 북베트남으로 남하해 동선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유방의 한나(漢) 나라는 기원전 196년에 북쪽 흉노를 치러갔다가
대패해 큰 손실을 입고 힘이 빠지니 고조 유방은 대군을 내려보낼 여유가 없었던지라
신하인 육고에게 직인을 들려서 보내 조타를 왕으로 봉해 형식적인 군신관계로 묶어두게 됩니다.
통일 왕조 한(漢) 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자 남월국왕 조타는 대군을 몰아 남쪽 어우락을 침공해 꼬로아 성
(Thành Cổ Loa, 古螺城, 고라성) 을 함락하고는 거기에 쟈오찌(交趾) 와 끄우쩐(九眞) 2개 현을
설치하니 기존의 중국 남부 남해군과 계림군에 상군을 합쳐 5개 군을 다스리고 영토는 수천리에 달했습니다.
고조 유방이 죽고 실제로 나라를 다스린 태후인 여후는 남월국에 철 수출을 금지하자 조타(찌에우다) 는
이를 장사왕의 계략이라 보고 스스로 무제라고 칭하며 북침해 장사군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
하니.... 여후는 장군 주조를 내려보냈지만 흉노에 패해 전력이 떨어진데다가 더위와 전염병으로 실패합니다.
백등산 전투에서 유방을 포위해 기고만장해진 흉노 선우 묵특은 여태후에게 “우리 둘 다 배우자가 없으니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면 어떻겠는가?” 라고 성희롱에 가까운 서신을 보내와도 응징할 군대가 부족하니
참았던지라 남월국 정벌도 실패하니 조타는 북진해 민월, 서구, 낙월을 점령해서 그 영토는 이제 만리에 달했습니다.
몇년 전에 중국 광동성 광저우시에서 서한 남월왕묘 박물관 西汉南越王博物馆 (시한난웨왕보우관) 을
보았으니 월수공원 안에 서한시대 남월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83년에 세웠습니다.
건물은 붉은색 벽돌과 돌로 지은 탓에 장중한 맛을 느끼게 하였는데..... 청동기와 옥기 및 인장 같은
유물 외에 남월 2대 왕 조매 (趙眛) 의 미이라가 특이한 느낌을 주는데,
西漢 南越王(서한, 前漢 남월왕) 은 기원전 200년경에 중국의 광동과 광서 지역에 있던 왕국 입니다.
7대왕 한무제 武帝 는 BC 129년부터 북으로 흉노를 쳐서 멸하고 선우의 부하 혼야왕과 휴도왕의 항복을 받는데
그 왕자에게 김씨성 을 하사하니 투후 金日磾(김일제) 로... 훗날 그 후손이 왕망의 이종사촌으로
신(新) 나라가 망하고 후한(동한) 성립기에 바다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니 신라왕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라 합니다.
이 무렵 한무제는 서쪽으로 서역을 개척하고 남쪽으로 남월 南越(난웨) 을 치는데.... 원래 소주에 오나라,
항주에 월나라가 있었으니 월남은 그 월나라의 남쪽나라를 일컫는 말이며 한나라의
제후국이나 광주에서는 오래토록 “한 (漢, 汉)” 이 아닌 “월(粤)” 이라는 글자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越(월) 와 粤(월) 는 발음도 동일하고 같은 의미이며, 광동어를 粤语 (월어) 라 하고, 광동요리를
粤菜 (월채) 라고 하며, 광동성의 자동차 번호판도 粤(월) 이니 “월(粤)” 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월나라의 남쪽 (하노이) 이 "월남" 이니.... 바로 오늘날의 베트남 입니다!
남월왕의 무덤에서는 옥기와 토기, 청동기등 1000여점의 부장품이 출토돼 중국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루옥의라고 하는 옥으로 만든 옷이니 1191개의
옥 조각을 실크로 연결했는데...... 광둥의 독자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 무덤에서 문왕의 인장과 술잔, 옥으로 만든 화려한 문양의 베개가 나왔으며 주실에는
왕이, 전실에는 군사 2명이 동이실은 4명의 부인이 누워 있었고, 서이실은
요리사, 약사 등이 누워 있는등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 후실에는 다양한 보물들이 있습니다.
이후 한나라 문제는 남월과 화해하고는 전쟁을 하지 않고눈 내실을 다지니 세월이 흐르면서 경작지와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상태에서 그 뒤를 이어 7대 황제인 무제가 들어서니 이제 한나라는
오랜 평화로 국력이 충실해져 군마가 30만필에 이르는등 원정을 할수 있는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한무제가 군대를 남진시키자 조타가 죽은 남비엣(남월) 과 대립하던 민월(閔越) 은 동생이 형인 왕을
죽이고 항복하니 한나라는 남비엣에 사신을 보내 민월을 토벌해준 댓가로 입조를 요구하자 남비엣왕
문제는 태자를 보내면서 곧 따라 입조하겠다니 시간을 끄는 것인데, 이는 고려가 몽골에 한 것과 똑 같습니다.
한 (漢) 나라는 장안에 입조한 남월국 태자 영제에게 남월에 부인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녀 규씨를
접근시켜 결혼시켜 아들 흥(興)이 태어나니..... 드디어 남비엣(남월) 을 접수할 장기 계획을
세우는데, 문제가 죽고 귀국한 태자는 3대 명왕에 올라 한나라 여인의 아들 흥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명왕이 12년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4대 애왕으로 중국 여인 태후 규씨는 섭정이 되었는데 한나라는 규씨
의 옛 중국인 연인 소계를 남비엣에 보내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게 한후 간대부 종군과 용사 위신을
보내 태후를 호위케 한 후에 노박덕 장군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국경인 계약에 주둔시켜 남비엣을 압박합니다.
이후 옛 연인과 부정한 관계가 소문이 나자 태후는 더욱 한나라에 의존할수 박에 없는 궁지에 몰리니
그녀는 아들인 왕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의 속국이 되자고 조르는데.... 섭정의 자격으로
중원의 제후들 처럼 국왕이 3년에 한번씩 입조하고 국경 관문을 없애달라고 한나라에 청원합니다.
이에 한무제는 이를 허락하고는 남비엣(남월) 의 승상 르기아에게 은인(임명장) 을 보내면서 남비엣의 모든
법률을 폐지하고 한 (漢) 나라 법으로 대신하며 사신으로 간 한나라 관리들이 남비엣을 접수하도록
하자 이에 애왕과 태후는 한나라에 입조할 행장을 꾸리니, 구한말 일본이 조선에 행한 한일병합과 같습니다.
그러자 르기아를 비롯한 백월족 귀족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니 이제 남비엣 조정은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게 되자
태후는 연회를 열어 르기아등 대신들을 죽일려고 음모를 꾸며 태후가 르기아와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르기아의 동생이 군대를 왕실에 배치한지라 수하들이 어쩌지 못하자 태후가 직접 창을 들었으나 애왕이 만류합니다.
이에 한무제는 한천추에게 병사 2천명을 주어 르기아를 체포하게 하자 르기아는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가서 왕과 태후를 목베고는..... “왕과 태후가 우리 보물들을 모두
한나라에 바치고 남비엣 백성들을 장안으로 끌고가 노예로 팔고 있다” 라고 민족 감정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선왕인 명왕이 베트남 첫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장남 건덕을 왕으로 추대하고는 남비엣
수도 번우 40리 까지 내려온 한천추의 한나라 군대 2천명을 기습해 몰살시키니....
한무제는 대노해 죄인들과 강회(江淮) 이남의 수군 10만명에게 남비엣을 침략할 것을 명합니다.
한나라는 오랜 준비 끝에 기원전 133년에 시작한 북쪽 흉노와의 전쟁은 만리장성 너머 내몽골 지역까지
차지하는 대성과를 거두었지만 흉노를 전멸시키려는 한무제의 무리한 욕심에 나라 전체가 피폐해
지고 있었으니 가면 돌아오지 않는 북방 원정은 한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을 블랙홀처럼 고갈시켰습니다.
한 (漢) 무제는 흉노족과의 오랜 전쟁에 남비엣과의 전쟁, 고조선과의 전쟁에다가 대완국에
대한 침략 전쟁등으로 무제 치하 40년간은 전쟁으로 얼룩진 기간이니 오랫동안
소모전이 계속된지라..... 한나라 인구는 4천만에서 불과 2천만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남비엣(남월) 을 정벌하는 한 (漢) 나라 군대 10만은 다섯 갈래로 나뉘어 남진했으니 복파장군 노박덕은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누선장군 양복은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가며 치의후는 멀리 사천의
파와 촉에서 죄수들을 모은뒤 장가강으로 내려가 다섯 부대가 남비엣의 수도 번우에 집결하기로 합니다.
1군(軍) 복파장군 노박덕은 강서성의 포양호에서 수십척의 소형 선박을 거느리고 남하하다가
공주(贛州) 에서 공수(贡水) 를 경유해 도강(桃江) 으로 갈아타고 남하하다가
광둥성의 옹원현(翁源縣)에서 베이장강(北江)에 진입하여 남월 수도 번우(番寓) 로 향했습니다.
2군(軍)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포양호에서 수십척의 누선함대를 이끌고 장창(長江)을 타고 안휘성
(安徽省)의 안칭(安慶)을 지나고 장쑤성(江蘇省)의 난징(南京), 양저우(陽州)를 지나 상하이(上海) 로
빠져나와 남해안(南海岸) 을 끼고 해안가로 순항하다가 광동성 주강만(珠江灣)으로 진입하여 번우로 향했습니다.
한편 3군(軍) 치의후(馳義侯) 유(遺)는 귀주성(貴州省)을 지나 광서성의 홍수하(紅水河)를 타고 남진해 창오(蒼梧)
에서 광둥성의 서강(西江)으로 진입하였고, 귀순한 두 월후(越侯)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려장군(下厲將軍)이
별동대로써 영릉(零陵) 에서 출병하여 리강(灕江) 을 타고 계림을 거쳐 서강(西江) 으로 진입하여 번우로 향했습니다.
정규군인 양복의 수군은 출진이 계획대로 이루어졌지만 죄수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예상외로 시일이
지체된지라 일단 준비된 부대부터 남진을 시작했는데 누선장군 양복의 5만명은 삼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지만 약속 기일을 넘겨 도착한 노박덕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죄수들 대부분이 행군 도중에 달아난 것이며 치의후(馳義侯) 유(遺) 등 나머지 3개 부대는 감감 무소식이라...
더 이상 기달릴수 없었던 두 장군은 남비엣의 수도를 향해 진군했는데 르기아가 지휘한
남비엣(남월) 군은 번우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는데.... 양복이 우세한 군세로
적군을 강타했다면 노박덕은 뛰어난 전술로 적을 자멸시키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합니다.
노박덕은 저녁에 서북쪽 성문에 도착했는데 진을 치면서 한군의 병력이 마치 대군인 것처럼
위장했고 백전노장 노박덕의 명성에 위축이 된 남비엣 병사들이 항복하면 관직을
주겠다고 회유한 후에 다시 번우성으로 들여보내 다른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도록 합니다.
한밤중에 양복의 대군이 불화살로 번우성을 공격하자 남비엣 병사들은 힘껏 싸웠지만 점차 전세가 불리해지자
목숨을 구해 서북쪽 노박덕 장군의 진채로 찾아가 항복하니 승상 르기아와 남비엣 왕은 바닷가로 달아나
배를 탔지만 이후 체포됐으며 한군은 오늘날 광동성과 광서성 지역인 창오군과 구월, 낙월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한군은 계속해서 남진해서는 오늘날 베트남 영토로 진입해서 쟈오찌(교지)군과 끄우전(구진) 군에
이르자 두 군의 남비엣 군수들은 호작 장부를 들고와서 항복하니 한나라는 이들 두 사라을 다시
태수로 임명해 예전처럼 다스리게 하고.... 토착 지배계층인 락장과 락후들의 권한도 그대로
인정하니 쉽게 평정을 하니 남비엣(南越 남월) 은 93년만인 기원전 111년에 망하고 9개 군이 설치됩니다.
남월을 멸망시킨 두 장군 중에 노박덕은 광거병 등과 함께 흉노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고,
누선장군 양복은 3년 후인 기원전 108년에 좌장군 순체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발해만을
건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는데..... 이때 한나라 병력은 3만(5만?) 정도 였다고 합니다.
남비엣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지만 베트남의 백성들은 그후 천년 동안이나 중국의 지배 아래 모진
수탈을 당해야 했는데.... 왕건이 토착 호족들의 권한을 모두 인정한 것이나, 일본이 조선 지배층에게 은사금
을 주고 귀족 작위에 중추원 의원을 시켜주며 또 양반 지주들의 토지등 재산과 지위를 인정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베트남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와 풍습이 낯설어 한나라 관리들이 오기를 꺼려하니 관리
들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리를 얻고는 베트남인들을
착취해 그 몇배로 주머니를 채운 후에는 다시 중앙에 뇌물을 바쳐 근무지를 바꾸어 달라고 청탁합니다.
조선에서 정조 임금 사후 안동권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니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명단이 작성
되고 과거 급제자 중에 군수나 현령으로 가려면 뇌물을 바쳐야 했으니..... 이들은 현지에서
3가지를 긁어 모으는데, 먼저 빚을 내어 준 뇌물, 두 번째는 3년후 임기가 만료되어 해직되면
다시 벼슬 자리를 얻기위한 뇌물 그리고 자신과 가족이 평생 먹고살 재산 이렇게 긁어모은 것과 유사합니다.
중국인 관리들이 베트남에서 주로 뺏어간 물품은 금과 은, 동, 진주, 루비, 상아, 꼬뿔소 뿔,
거북 등껍질에 생강과 계피등이었는데 이것을 생산하는 주민들은 식량과
교환해야 할 특산물을 중국인 관리들에게 빼앗기자 자연히 여기 저기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조선에서 지방에 사또로 나간 관원 중에 가장 노련한 자는 백성들을 착취하지만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멈추는 절제력을 발휘하는 자들이니, 만약에 폭동이 일어나면 저들은 관아로 쳐들어와 사또를
등에 업어 군의 경계 밖에 가서 버리는데.... 그럼 사또는 파직되고 주동자들은 몇명 사형을
시키는 선에서 수습을 하면 다음에 오는 사또는 2~3년간 착취의 규모를 줄여야 하니 죽을상을 짓습니다.
쭝짝은 하노이 서북쪽 과거 반랑국의 수도였던 메링현 락장의 딸인데 여동생 쭝니와 함께 백성들의 기대를 받았
으니.... 이에 탐욕스럽고 포악했던 자오찌군 태수 소정은 무자비한 수탈로 민란이 일어날까 걱정이었으니
그녀가 이웃마을 락장의 아들 티싸익과 결혼하자 화근을 미리 제거한다는 생각으로 티싸익을 붙잡아 죽입니다.
이에 분노한 쭝짝은 쭝니와 함께 서기 33년(40년?)에 반란을 일으키니 10여년간 계속되는데.... 소정
태수는 한 (漢) 나라로 도망쳤고 반란군은 농민들과 토착 지배계급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65개성을 장악했고 왕으로 추대된 쭝짝은 자신의 고향 메링을 수도로 삼은후 2년간 세금을 면제합니다.
하지만 당시 정세가 베트남 반란군에게는 불리햇으니... 중국은 오랜 내전을 수습하고 새 왕조인 유수의 후한
(동한)이 들어서 국력이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후한의 광무제는 전한을 이은
왕망의 신(新)나라를 무느뜨리고 여러 반란군들이 벌인 내란에서 승리한 유능한 군사 천재 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후한의 광무제는 43년에 마윈 장군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진압을 명했으며 아울러 남부 각지의 관아에
마차와 배를 만들고 다리를 고치고 산길을 내며 군량을 준비했으니.... 한나라군은 합포로 이동한후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진입하는데, 마윈은 내란에서 외효르 토발하고 강족을 쳐부수는등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오랜 전란에서 다져진 정예 중에 정예인 한나라 군대의 진격에 외곽의 성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으며 수도 꼬롸(하노이)에 까지 수월하게 들어온 한군의 적은 오히려 낯설고
거친 자연환경이었는데, 길은 정글로 이어지니 한발자국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험하고 질었습니다.
한군은 꼬롸 외곽에서 반란군(독립군?) 과 일전을 치른후 동쪽 랑박으로 후퇴해 진을 차렸는데 반란군
의 규모가 예상외로 크고 사기도 높았던데다가 계절은 우기로 접어들었으니......
폭우와 이슬비에 축축한데다가 기온도 30도를 넘으니 전염병의 위험등으로 불편하기 그지 없엇습니다.
훗날 남한이나 송나라 그리고 원나라의 침략시 베트남의 장군들은 이런 악천후와 진흙뻘에 고립된
침략군을 게릴라 전술로 물리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전쟁 경험이라고는 없는 여자들인
쭝짝 자매는 이걸 활용할줄 몰랐으니.... 쭝짝은 매일 망루에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고 부하들을 격려하며 참모들과 숙의했지만 한나라군의 방어망을 뚫을 묘안을 찾지 못합니다.
개전초 국경에서부터 한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불의의 장소에서
기습하며 그래도 패하면 물러나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우기가 되면 분산된 적을 공격하고
이동을 강요하며 낯선 지형에 고립시켜 섬멸하는 전술을 창안해 내지는 못합니다. 전문적인 군인이 아닌터라?
결국 우기가 지나 쭝짝의 군대와 마윈의 군대가 평야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병력은 반란군이 8만으로 거진
3배 가까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훈련조차 받지 못한 농민들이었으니 오랜 내전에서 숙달된 정예병을
거느린 전쟁 천재인 장군의 한군은 또 제철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무기의 성능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한군은 원거리에서 노(弩) 로 화살을 날려 적을 살상하고 접전이 벌어지면 끝이 창과 낫을 합친 것 같은
2미터에서 3미터의 극(戟) 으로 공격했으며 혼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했ㄴ느데 특히
노(弩)는 앞 부분을 밟고 양손으로 시위를 당겨 발사장치에 걸기 때문에 활에 비해 사정거리와
파괴력이 압도적이었으니 최대 800미터에 유효 사정거리는 400미터에 달하는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또한 흉노와 싸우면서 단련된 기병들은 창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중기병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신립의 기병은 경기병으로 갑옷도 없이 그녕 적진 근처까지 가서 활을 쏘고는 적진에
뛰어드는게 아니라 반우너을 그리며 되돌아 오는 그런 경기병들과는 달랐으며 궁술도 뛰어났습니다.
소규모 충돌에서 전력 차이가 여실히 들어나자 락장들은 공포에 질려 병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니.... 한나라군은 진영에서 나와 쭝짝의 본진으로 돌격했고 수천명이 죽자 결국 크게 패한 자매는
메링으로 물러나 1년간 사투를 벌였지만 더 이상 버틸수 없게 되자 자매는 손을 잡고 홍강 강물에 투신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자 장수인 도즈엉은 남쪽 은예안으로 후퇴해 진지를 구축하고 끝까지 저항하니 마윈은
이들을 추격해 수천명을 참살했는데.... 도즈엉 욍에도 많은 여자들이 전투에 나섰으니
퐁티찡은 임신한 몸으로 랑박전투때 일군을 지휘했으며 출산후에는 한팔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들고 한나라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아기를 먼저 죽인후 자신은 강물에 투신합니다.
밧난 공주는 프엉러우 촌장의 딸로 미모가 뛰어났으니 소정태수가 39년에 쭝짝의 ㄴ마편을 죽일 때 그녀의 남편
역시 반역의 기질이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는데, 남편의 복수를 위해 참전했으니 큰 공을 세운후
장군에 봉해지는 것을 사양하고 적의 수급을 받아 남편 묘소앞에 놓고 제사를 지낸후 전투에서 패하자 자결합니다.
레전은 전투 마다 선봉을 자임했으니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군사 ㅇ야성의 책임을 맡아 무과시험을
치르고 무술대회를 주관했으며 한나라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 끝에 마이동 마을에서 전사했는데
베트남 여자들은 모계사회의 전통에다가 또 적에게 잡히면 성적으로 심한 수모를 받으니 저항한 것입니다.
마원은 반란 진압후 직접 통치하에 중국 제도와 문화를 이식했으니 지방자치제도인 락장과 락후를 폐지하고
군현 제도를 강화하니, 중국인 관리들이 상주하는 곳에는 성채를 쌓고 병사들을 주둔시켰으며
둔전을 만들었으며 제방을 쌓고 수로를 만들며 동물의 배설물을 이용한 퇴비 제조법을 베트남에 전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