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혁 박사]
부처님이 웃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세상에는 가소로운 자들이 많아서이다. (慈顔常笑 何? 笑 可笑之人)
지금부터 10 수년전의 일이다. 나는 약 10년간 우리나라 3대 불교 종단 중의 하나인 천태종의 전국 신도회 중앙회장을 맡아본 일이 있다. 석학교리<釋學敎理>에 대하여 한 때는 심취되어 불경과 승시(僧詩:萬首名詩集)와 각 종파의 교리 등을 나름대로 가까이 했었다. 그리고 각국에 산재해있는 사찰과 불상을 순람할 수 있는 기회를 비교적 많이 지녔다. 북한 땅의 사찰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순답(巡踏)과정에서 잊지 못할 유명한 사찰 주련(柱聯)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반추해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소로운 자들이 세상을 웃기고 있다는 내용의 주련 구절이다.
중국에 있어서 불교를 들여온 연혁을 이야기해주는 전설이 백마사(白馬寺)에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호국무도(護國武道)의 전통이 현실적으로 승계돼가고 있는 곳은 소림사(少林寺)이며, 송나라 황제와 방장(方丈)이 나누었다는 불담선어(佛談禪語) 문답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서는 절강성에 있는 영은사(靈隱寺)를 빼놓을 수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특히 유가(儒家)의 현인과 불가(佛家)의 시인들이 남긴 풍류가 짙게 남아있으면서 충혼(忠魂)과 효혼(孝魂)을 상징하는 불교 문화적 유흔(遺痕)을 많이 남겨두고 있는 곳은 아마도 낙양(洛陽) 일대가 아닌가 싶다. 그 곳에는 각국의 승려와 문인들이 찾아드는 매력을 풍기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어느 때에는 일행과 별도로 혼자만의 동선(動線)과 일정(日程)을 가지고 여정의 취향을 좀 더 깊이 음미하는 시간을 즐겨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관광객들의 경향은 안내자의 깃발 따라다니기에 바쁜 것 같이 보였다. 풍물관광은 외현적인 표상만을 봐도 그런대로 의미 있다. 그러나 문화관광은 사진촬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문화적 내면은 관찰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낙양읍 어느 사찰에서 느꼈던 일이다. 그 거대한 사찰의 기둥마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주련구가 붙어있었다. 주련구는 일반적인 경우 명승(名僧)의 글귀다. 명승이란 역사적으로 선승(禪僧)이나 도승(道僧)과 학승(學僧)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살기 아니면 죽기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뜻을, 이판사판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이판은 이판승(理判僧)을 말하는 것이며, 사판은 사판승(事判僧)을 말한다. 이판승은 선승 도승 학승을 뜻하며 사판승은 염불승 관재승(管財僧) 불사승 (佛事僧)등을 말한다. 승려는 크게 나누면 이판 아니면 사판이라는 뜻을 이판 사판이라 한다. 사찰의 주련은 예부터 이판승의 명훈일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주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만 이해하기 쉬운 것도 적지 않다. “자안상소 소 가소지인(慈顔常笑 笑 可笑之人)이라는 주련이 그 예의 하나다. 이판승의 눈은 심안(心眼)으로 통한다고 한다. 심안의 관찰력은 육안(肉眼)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심안으로 보았을 때에는 육안의 세상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속고 하면서도, 이쪽 편에서는 속이면서 재미를 누리는가하면, 저쪽 편에서는 속으면서 흥정하는 상호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는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거래질서가 강익강 약익약(强益强 弱益弱)이라는 이른바, 적약난반(積弱難反)의 폐해가 쌓이게 되고, 다른 편에서는 사회적 정의가 도리어 굴절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정치와 민생의 양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 못하고 아울러 사회적 동력전달기능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민생의 현장은 마치 고목(枯木)처럼 쇠락하고 건천(乾川)처럼 메말라 강바닥이 균열현상을 들어내게 된다. 적약난반(積弱難反)이란 취약한 폐해사실이 누적되어 원상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의 정서적 바탕인 도덕감정이 흙벽돌이 침수되어 와해(瓦解)되고, 넓은 들판 잔디밭에 굳건히 박혀 서 있어야할 쇠말뚝이 뽑혀버리면 소와 말들이 전답 불문하고 마구 침범 유린하게 되는 것처럼 난장판 현상이 들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4.15총선이라는 국가대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등록된 총선 도전 정당수가 무려 47개에 달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투표용지가 너무 길어서 개표기를 사용할 수 없어, 수개표가 불가피할 것이라 우려하는 이도 있는 듯 하다. 이런 것이 세상을 웃기는 가소로운 일이다. 언제인가는 멍청스런 일부의 의원들이 동란 당시 전쟁포로로 납북되어 아작도 억류중인 그 분들을 실종자로 처리하자는 법안 제기를 한다는 뉴스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 법안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비인도적 발상을 했다는 것 등은 당시 피납된 그 분들과 함께 참전 중이었던 필자로서는 천인공노의 분심(忿心)을 영원히 떨칠 수 없다. 개도 비웃을 가소인의 괴태(怪鬼)가 아닐 수 없다. 태극기의 깊은 철학적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경례를 거부하고, 애국가를 거부하면서 애국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에 함몰되어있는 부류는 부처님의 심안 앞에서는 모두가 가소로운 군상들이다. 6.25가 북의 남침이냐 아니냐 묻는 공식석상 질문에 답변을 회피하거나, 천안함을 기습 격침시키고, 47명의 영령을 산화케 한 이유가 누구의 탓이냐는 유가족의 애절한 물음에 답변 못하는 자들의 엉거주춤하는 자세 등은 부처님의 심안으로 보았을 때에는, 흉물처럼 나타나는 가소로운 흉영(凶影)이 아닐까 한다. 옛 분들 말씀에 “한번 웃김을 당하면 평생 가소지인(可笑之人)이 된다”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웃음거리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3가지의 덕목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첫째는 저성자각(自省自覺)이요, 둘째는 자지자족(自知自足)이요, 셋째는 자성자실(自誠自實)이다. 이는 곧 스스로 반성할 줄 알아야 자신의 성실도 지수(指數)를 측정할 수 있다는 성지성(省知誠)아요, 그리고 자신의 식견과 능력과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만족함을 깨달을 줄 안다는 각족실(覺足實)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적역량을 살필 줄 알면 그만큼 성실해지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만큼 허실(虛實)을 범하지 않는다. 이는 언제나 남의 이야기일 수는 없다. 내 자신을 비추어보는 이른바, 상시 휴대품이라는 신후물(身後物)중의 하나인 반사경이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지신을 때로는 최상, 최귀, 최려(最上 最貴 最麗)의 수준급 영상에 대위(代位)하려는 충동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몽상(夢想)이든 환상(幻想)이든 관계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착상과 허상(錯想 虛像)속에서나마 자기만족을 느끼는 행복의 자족감을 순간적으로나마 누려 보고픈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자재대비하신 부처님을 자기 영상 속으로 전위(轉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부터 고승대덕들께서는 중생교유의 법어를 통해서 인인개유불심(人人皆有佛心)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당액호불(當厄呼佛)이라는 경우는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즉 “액운을 당하면 부처님! 하고 부지부식 간에 튀어나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왜서 일까? 그것은 ”부처님! 자비를 베프소서“ 하는 잠재의식이 사람들 가슴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심이 곧 부처님의 자안상소(慈顔常笑)인 것이다.
자(慈)는 자애로운 시혜(施惠)를 뜻하며, 비(悲)는 슬픔의 비애(悲哀)로부터 벗어난다는 발고(拔苦)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자비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원천적으로 기인 기불(欺人.欺彿)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속이는 자는 스스로 양심을 포기하는 자이기 때문에 잘활심(自活心)이 없는 로버트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을 속이는 자는 발고(拔苦)를 포기한 지옥행 군상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의 웃음꺼리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