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발 회우의 명복을 빕니다>
-김경발을 말하다...그의 삶의 일대기-
故 김경발 회장.
대구신문을 창간하고 지역 언론문화 창달에 힘써온 동산 김경발 대구신문 회장이 2013년 5월 19일 밤 11시 48분 별세했다. 향년 71세.
故 김 회장은 1942년 경북 경주시 덕동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동초등학교 6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천재로 이름이 난 김 회장은 가난 때문에 학문의 길을 걷지는 못했다. 명문 경주중을 포기하고 계림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가정형편에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경주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집안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밤에는 집 부근 산에 올라 나무를 캐다가 10km를 걸어서 경주시내에 내다 팔고, 낮에는 학교에서 엎드려 자야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학업에 대한 갈증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시간을 쪼개 영남대 대학원까지 다니는 열정으로 이어졌다.
고인의 언론계와의 인연은 1968년에서야 닿았고 평생 직업이 됐다.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경주 주재기자를 시작으로 45년 동안 언론 외길을 걸어오면서 지역 언론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면에는 학창시절의 말 못할 고생이 밑거름이 됐다.
고인은 경주 주재기자 시절, 탁월한 신문판매능력과 기사 발굴 능력이 인정을 받아, 선배들을 제치고 4년만에 경북취재본부장으로 발탁돼 대구생활을 시작했다. 대구에서도 다른 사람을 앞서가는 능력은 마찬가지였다. 현대경제일보와 자매지 일요신문을 대구․경북에 뿌려지는 어떤 신문보다 가장 많이 판매한 것은 대구․경북 언론계의 신화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연히 수당을 많이 받았고, 당시 기자 접대에 바빴던 출입처 공무원들에게 유일하게 '밥 사주는 기자'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
굴곡도 많았다.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해직되면서 고난이 찾아왔다. 그러나 탁월한 신문판매, 광고실적을 눈여겨 본 경향신문에서 1981년 경북지사장으로 영입, 급격하게 사세를 확장했다. 경향신문 창간 이래 이때만큼 대구․경북에 경향신문이 많이 깔린 적이 없다.
언론자유화 바람이 분 1987년, 본업인 기자로 돌아갔다. 전국의 경향신문 지사장 중 유일하게 기자로 채용됐다. 그러다 지역신문 창달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47세의 나이인 1989년 가을에 대구일보(현 대구일보는 2000년 폐간됐던 것을 2002년 지역의 한 사업가가 제호를 사들여 창간한 신문으로 1989년 창간된 대구일보와는 전혀 다른 신문)를 창간해 편집국장, 상무이사로 활동했다.
고인은 대구일보의 사주로서 편집국장의 위치에서 경영을 하면서 지역 언론은 지역소식이 우선돼야 한다는 소신을 시종일관 관철했다. 아무리 큰 중앙뉴스가 있어도, 1면 톱기사는 항상 지역소식을 반영한 것은 대구․경북 지역 언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출입기관장으로부터 "우리기관 출입기자 참 좋은 분이다. 회사에서 잘 봐 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 기자는 "제발 출입기자 좀 바꿔달라는 소리가 나와야지.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사람 좋다는 소리가 나오느냐"는 호된 질책을 받아야 할 정도로 철저한 기자정신을 요구했다.
이후 사세확장을 위해 서광건설에 대구일보를 넘긴 뒤 상무로 재직하며 알뜰경영, 정도경영을 하다 1993년 경쟁신문사의 모함에 몰려 퇴직을 해야 했다.
잠시 언론계를 떠나 사업에 몰두했으나 언론에 대한 집념은 1996년 광역일보 창간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광역일보는 언론출신의 전문경영인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다음해인 1997년 IMF사태로 경영난에 처하고 회복을 하지 못했다. 2001년 사업을 마무리한 고인은 광역일보를 대구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사장으로 취임해 직접 경영을 시작했다.
IMF사태 이후 전국의 언론들이 적자경영에 허덕이고, 지역언론들도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거액의 부채에 허덕이는 침체기에도 원칙과 정도에 기반한 내실경영으로 12년째 흑자를 유지하는 기적 같은 일을 일궈내면서 대구신문을 대구․경북 기간 언론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고인은 훗날 경향신문 경북지사를 운영하면서 쌓은 판매, 광고 노하우가 일간지 창간이라는 도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
했다. 비록 짧은 근무기간이었지만 고인의 경향신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유족들은 입을 모았다.
평생을 권력을 비판하는 강한 신문을 추구했던 고인은 자유당 시절 독재항거에 앞장선 경향신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강력한 야당지로 재부상한 경항신문을 애독하고, 격려하며 기자정신을 되새겼다. 생전에 실현은 못했지만 경향신문과 업무협약을 맺을 구상을 하고 경영진과 의견도 나눴다.
고인은 경영에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생활 속에서 검소함을 유지하는 데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일평생 5만원 이상의 구두를 사 신은 적이 없었으며, 한여름 시원한 콩국수가 먹고 싶었지만 "뱃속에 들어가면 똑 같은 데"라며 500원이 싼 잔치국수를 주문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선물 받은 것 외에 스스로 1만원이 넘는 넥타이를 구입한 적이 없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이다.
이러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상당한 재산을 출연해 대구․경북의 효자효부와 우애가 두터운 형제를 발굴해 시상하는 ‘참사랑회’를 운영하는 본보기를 남기기도 했다.
고인은 생전에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활이 너무 사치스러워졌다. 새마을 운동으로 끼니 걱정을 덜었지만, 이제는 새생활 운동으로 검약하는 생활을 해야 할 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고인의 또 다른 모습은 인간애가 넘치는 발자취다. 고인과 인연을 맺은 많은 이들이 "참 각별하게 대해주셨는데..." "정말 배려심 깊고, 자상하셨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영태 여사와 장남 김상섭(대구신문 정치부 부국장), 차남 김상균(대구신문 상무이사), 딸 김인숙이 있다.
김 부국장은 고인이 남긴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만약 메이저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면 이정도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이너에 있었기에 생존에 발버둥치면서 많이 배웠고, 그것이 도전할 용기와 기회를 줬다"는 말이다.
고인은 경주시 건천읍의 서라벌공원묘원(하늘마루)에 안치돼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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