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픔] 안동 임청각(臨淸閣)과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작년 12월 16일 오후 7시36분 중앙선 마지막 기차가 임청각 앞을 지나갔다.
“독립운동의 산실”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앞을 지나는 중앙선 철도가 80여년 만에 멈췄다.
그리고 지난 1월30일 이 철도를 철거했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 의지를 꺾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노선을 우회시켜 임청각 일부를 파괴하고
종택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했다.
불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동과 소음의 고통속에 80여년간 기차가 달렸다.
최근 다행히 중앙선은 KTX가 개통하면서 다른 길로 옮겨갔다.
임청각(臨淸閣)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선생을 비롯하여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2년 2월 일제가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을 일컫던 말)의 집안이라고 하여
본래 99칸의 고택 중 50여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헐고 그 앞에 철도를 건설했다.
임청각은 민족정기를 끊으려는 일제 만행으로 철로가 가로놓이며 본모습을 잃었다.
경술국치 이듬해 선생이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나서 서간도로 향한 날이 꼭 110년 전인 1911년 음력 1월이었다.
선생이야말로 겨울 한가운데를 걸어가야 했다.
그날의 바람이 얼마나 차가웠을지 오늘의 공기로 가늠해 본다.
나라를 잃어 독립운동을 하고자 평생 살던 집과 고향을 등지는 날의 추위와 감히 비교하겠느냐 마는,
쉰넷의 나이에 그 계절은 매서운 겨울이었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선생은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추풍령까지 일주일을 걷고, 기차로 신의주에서 내린 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덜컹대는 수레로 목적지 만주 유하현까지 34일간의 험난한 망명길이었다.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1932년 유하현에서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하늘이 무너졌을 시대에 상황을 원망하고 현실을 구실삼아 회피하는 대신 스스로 나아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되신 선생의 정신을 생각하며 임청각을 둘러 보았다.
선생의 후손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놀라운 것은, 3대에 걸쳐 독립은동에 헌신한 이들의 후손이 해방 이후
갈곳이 없어 고아원에서 자라고, 임청각의 소유권을 회복하는데 수십년이 걸렸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 .
대화도중 철길이 철거되고 임청각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어 기쁘시겠다고 했더니 의외로 담담하셨다.
임청각의 광복은 이제야 맞이하는 것이라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