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오후, 장소는 중국 광저우의 실내 체육관. 이날 이곳에선 아시안게임 바둑 경기의 남자단체전과 여자단체전 결승이 동시에 열리고 있다.
폐막을 하루 앞두고 각국의 메달 레이스는 개최국 중국이 홈그라운드의 이점 등을 앞세워 우승을 확정지은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숨막히는 2위 경쟁을 벌이는 상황. 만일 한국이 바둑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경우 일본을 따돌리고 2위를 결정짓는다. 한국바둑은 이미 나흘 전의 혼성페어전에서 중국과 일본을 제압하고 금메달을 수확했다.
후반으로 향하며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반상. 시간이 흐를수록 전 국민의 시선 또한 TV 수상기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이윽고 어둠이 어슴프레 내려앉는 저녁 6시 무렵, 마침내 태극남매들의 승전보가 황해를 건너 날아들고 국민들의 환호성이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메아리친다.
2위 수성의 목표를 내걸고 출정했던 한국이 다시 한번 일본을 제치고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드높인 감격적인 순간이다. 물론 가상 시나리오이긴 해도 가능성 높은 '현실적' 설정이다.
올해는 바둑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첫삽을 뜬다. 스포츠화의 결실을 뛰어넘는 쾌거다. 바둑 관련 소식들이 얼마나 자주 매스컴을 탈지 생각만 해도 설렌다. 한국바둑에 슬금슬금 드리우고 있는 위기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는 호기다. 단, 공 들여 차려놓은 밥상을 입 안으로 넣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명예는 물론 국가를 위한 영광의 무대에 오르게 되는 선수들의 각오도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병역 미필자들에겐 특례를 받을 수 있는 길도 된다. 최대의 화제를 몰고 올 대회가 될 듯싶다.
이 밖에도 올해 열리는 세계대회는 10개에 달한다. 예선이 따로 열리고 본선도 나뉘어 진행되므로 무대가 올라가는 횟수는 대략 30회쯤 된다. 일정의 틀이 잡힌 상반기의 국제기전 달력을 넘겨 보았다.
○●… 비씨카드배 = 2010년의 시작, 기선제압의 무대 2010년의 세계대회는 비씨카드배로부터 출발한다. 이미 온라인예선을 마쳤으며 9~13일 아마예선 및 통합예선을 거쳐 16일 세계 64강이 조선호텔에 모여 본선대회를 갖는다. 32강부터의 대국장은 바둑TV 스튜디오.
준결승까지 단판 토너먼트, 결승전은 5번기로써 최후의 주인공을 가려낸다. 속전속결의 진행도 비씨카드배의 특징으로 4월 말의 결승까지는 100일 남짓 소요된다. 우승자는 물론 이세돌의 출전 여부도 관심사. 국가시드 배정 및 통합예선 출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최측의 와일드카드로 출전할 공산이 높다. 우승 3억원, 준우승 1억원.
●○… LG배 = 이창호 vs 콩지에의 첫 타이틀전 새해의 첫 우승자는 결승전만을 남겨놓고 LG배를 통해 배출된다. 대진은 한국의 이창호와 중국의 콩지에. 통산 4회 우승을 비롯 전 대회 출전 기록을 이어오고 있는 터줏대감 이창호와 결승진출이 처음인 콩지에가 세계대회 패권을 놓고 다투기는 처음이다.
2005년 춘란배 우승 이후 메이저 대회 7연속 준우승에 머물고 있는 이창호의 우승 염원은 어느 때보다 절박하며, 지난해 2개의 세계타이틀을 접수한 콩지에로선 '바둑영웅'을 상대로 명실상부 최고를 향한 시험대에 오른다. 우승 상금 2억원의 결승전 날짜는 2월 하순, 장소는 미정이다.
○●… 후지쯔배 = 한국의 아성은 영원하리라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쯔배는 한국의 텃밭이다. 1988년 세계대회의 효시가 된 후 초창기엔 일본이 득세하는 흐름을 보였으나 6회 때 유창혁이 포문을 연 이래 한국바둑의 아성으로 군림했다. 특히 11회부터 20회까지 열도의 심장부에서 10연속 태극기를 휘날린 대회가 바로 후지쯔배다.
재작년 구리에 의해 연속 우승의 리듬이 끊기긴 했으나 지난해 약관 강동윤이 우승 항아리를 되찾아 통산 14차례나 금자탑을 세웠다. 예년과 달리 4월 일본기원에서 1회전부터 8강까지를 치른 뒤 7월에 준결승 및 결승전을 속행한다. 우승 상금 1500만엔(약 1억9000만원).
●○… 춘란배 = 이젠 '눈치' 볼 일도 없다 격년제로 시행되는 춘란배는 8회 대회의 개막을 알린다. 한국은 5회 대회까지 4차례 정상에 오르는 강세를 보여 오다 6~7회 대회의 패권을 중국에 넘겨준 상태이다. 전기엔 8강에 이창호 혼자만 오르는 부진을 나타냈다.
중국 주최의 유일한 세계대회. 한국 독주로 인해 기전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걱정거리는 종식된 셈이니 눈치(?) 볼 일 없이 마음 놓고 정상을 탈환해도 좋을 터. 한국의 국가시드가 일본의 그것보다 적게 배정되는 탓에 한국팬들의 원성 또한 높다. 우승 상금 15만달러(약 1억7000만원). 후지쯔배와 마찬가지로 3ㆍ4위결정전을 갖는다.
○●… 농심신라면배 = 한국 9번째 우승전선은 '맑음' 단체전인 농심신라면배는 1차전까지 진행된 현재 김지석이 맹활약한 한국이 3승으로 맨 앞에서 달리고 있다. 반면 중국은 1승, 일본은 무승. 1월 중순 부산에서 2차전 6판을 두고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최종 3차전을 벌인다. 지난 10회 대회 동안의 우승 횟수는 한국 8회, 중국과 일본 각 1회. 우승국에만 2억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2차전까지 치른 여자단체전 정관장배의 중간성적은 중국의 압도적 우세. 중국 6승, 한국과 일본 각 2승이다. 2월 1일부터 최종 3차전이 속행되는 중국의 광저우엔 박지은이 혈혈단신 날아가 역전 우승을 노린다. 한국 우승에 필요한 승수는 4연승이다. 우승국 상금은 7500만원.
●○… 이 밖에도 국제프로페어대회가 3월 하순 중국 항저우에서 개최되며, 한-중-일 TV속기전 우승자들의 경연장인 TV바둑아시아선수권전이 6월쯤 일본에서 22회째 닻을 올릴 예정이다. 한국의 출전선수는 KBS바둑왕전 우승ㆍ준우승자인 이창호ㆍ이세돌 투톱.
또 하반기엔 각 대회의 준결승 및 결승전으로 이어지며, 또 삼성화재배 등 새로운 회수를 맞이하는 대회가 줄줄이 점화된다. 지난해 거센 중국의 공세에 시달렸던 한국바둑이 다시 중심을 잡아 최정상의 위상을 지켜낼지 기대가 큰 경인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