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서산서원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데
1706년(숙종 32) 생육신인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1713년에 서산(西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4년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협력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문(外門), 육각정(六角亭), 3칸의 고사(庫舍)와 육각비(六角碑), 조려의 사적비 등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4,000평, 임야 100정보, 대지 1,000평 등이 있다.
함안 서산서원 홍살문
서원 출입문인 외삼문
함안 서산서원 강학당
서산서원은 숙종대왕이 서산(西山)이라는 사액을 제가하고 제문을 내렸다.
"국왕은 신하 예조좌랑 홍도달을 시켜 증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조려,
직제학 원호, 증 집의 김시습, 정언 이맹전, 진사 성담수, 증 집의 남효온의 영전에 제사하오니
덕을 숭상하고 표상함에 반드시 사당을 세워 향사함은 풍화를 바로세워 세교(世敎)를 도움이라,
생각컨데 우리 세조왕이 운기 응해주어 요순이 수선하듯 왕위를 물려받아
하늘이 도와주고 사람이 돌아왔네. 그러나 바른기운 높은 절의 이때에 융성해
여섯군자였으니, 잡은 지조 안 고쳤다.
낚시로 자취감춰 산수즐기는 시 읊으며 평생토록 자폐(自廢)해 윤리를 부식(扶植)했다.
송촌에서 문을 닫고 신지마저 물리치며 왕의 부름 사양하고 지조 더욱 견지했다.
화악에서 서적 살고 승복으로 가장하니, 중의 형색 선비마음 사람들이 몰랐더라.
초야에 몸을던져 밤이라도 불 안켜고 평생토록 맹인 가장 가난속에 즐거웠다.
파산에서 숨어살며 서울에는 가지않고 바다 밖의 맑은 꿈에 갈매기와 벗했다.
소릉 복위하기전에 과거를 단념하고 산에 올라 통곡하며 위험스런 격론을 폈다.
뛰어난 높은 풍도 늠름한 굳센 절의, 아름다운 그 이름을 다 함께 전했으니,
사당세워 향사함에 이 아니고 뉘를 하랴. 저 낙동강을 바라보니 산 이름이 백이라.
주의 곡식 마다함과 사적이 같았으며, 고사리를 캐던것과 그 이름 부합했네.
하물며 조려는 이곳에서 살았으니 끼친자취 그 땅에 남아있고,
어진 명성 선비들이 추앙해 한 서원에 향사하니 사당이 정숙하다.
선비들의 높은 보답 여기에 빛났도다. 선비들이 의논모아 유사에게 명령할새
과인이 지난날에 비로소 예절 갖춰,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을 일체로 향사하고 오늘 여기 합사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특별하게 내린 현판, 서원이 빛났도다. 수양산의 맑은 바람, 천만고에 전해가리.
제문으로 정을 펴고 술 한잔 드리니 혼령이여 내려와서 음향 할지어다."
숙종 39년(1713년)
동재
서재
강학당 측면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사당인 충의사
이 사당에는 생육신인 조려(趙旅)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위패가 봉안되어있으며,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전사청
생육신 육각비
앞면의 조려(趙旅)에서 시계방향으로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육각정
서원옆의 함안조씨 13충(忠) 비
채미정
서산서원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정자로 조려가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곳이다.
서원옆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각)
조종도선생 증정부인 전의이씨 쌍절각
고마암 절벽위의 백세청풍 글씨
채미정 처마밑에 걸려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를 고마암(叩馬巖)에 새겼다
인근에 있는 방어산 마애사의 자연석 부처손(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