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수왕 때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연(北燕)은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위키백과의 장수왕 때 북연이 고구려에 항복한 내용 발췌
(위키백과 우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C%97%B0
(위키백과 내용에 일부 참고자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때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고운(모용운)이 후연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국가이다.
건국과 멸망
선비족들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은 고구려인인 모용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참고: 고구려 왕족 고운)은 선비족의 북조에서 황제라는 칭호로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운(高雲)이 황위를 찬탈하고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을 세웠다. 연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대치하거나 고구려에게 공격을 받았고 침략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08년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사실상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고운은 친한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이 ... 군주가 되려고 409년에 고운을 공격해 암살하였다. 풍발은 고운이 암살된 뒤 ... 고운의 뒤를 이어 천왕(복조의 황제 호칭)으로 즉위하였다. 풍발이 즉위하고도 강대했던 고구려의 입김이 속국인 북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풍발은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와 대립하였다. 이 북위와의 대립은 풍발이 살아 있을 때만해도 서로 대등한 양상이었으나 풍발이 죽자 북위가 점차 우세해지게 된다. 풍발의 황태자와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다투다...,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내전 이후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에 종주국?(宗主國)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기를 요청하였다.
결국 풍홍이 예측한 대로 4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하였으며 이에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수많은 후연 귀족들과 여성들과 백성들을 북위군으로부터 피난시켰다.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다가 장수왕에 반역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제와 자식을 인질로 잡고 풍홍은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요청을 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시킬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438년에 중국인 풍흥의 처와 모(母)만 남기고 풍흥을 사형시켰다.“
***참고: 북위와 함께 중국 대륙의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북연은 고구려, 장수왕 때인 AD 436년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는 고구려 땅 요동성(遼東城)에 머물게 한 풍홍이 반역을 일으켰고, AD 438년 장수왕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게 된다.
수양제가 말하는 ”아름다운 땅 낙랑 현도 및 요동이 고구려 오랑케의 영톹가 되었다“고 조서에서 밝힌 내용과 같이 장수왕 때는 낙랑군과 이에 속한 모든 군현 및 대방군과 이에 속한 모든 군현이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연이 고구려에 항복한 역사적 사실이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다. 현재 한국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영토를 극히 왜소하게 그려놓고 있다. 어찌하여 고구려 영토를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축소하고 있을까?
◉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 요서 영토
일본인과 식민사하자들은 고구려가 압록강 중류 집안시에서 건국하고 초기에 압록강 주변 땅만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초기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 북부 지방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왕조를 보면, 당태종이 고구려의 요도성을 공격하였는데,
”요동성 안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사당 안에는 쇠사슬로 된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고구려인들은 이 갑옷과 창이 전연(前燕: 진시황 이전의 연나라) 시대 고주몽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시조 고주이 수도로 삼은 졸본(卒本)은 당시 요동성이거나 또는 요동성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다. 연남생 묘비명에도 연남생은 요동군 평양성인(平壤城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요동성이 평양성이고, 졸본성일 가능성이 있다.
<수경주: 水經註>에서는
”현도현은 옛날 고구려 오랑케(胡)의 땅이며, 한무제가 원봉 2년(BC 108년) 위만조선의 우거를 평정하고 그곳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한 것이다. 전한 말기 고구려 유리왕 때 고구려를 침략했던 왕망이 고루려를 비하아여 하구려(下句麗)라고 칭했던 지역이며, 현도는 소요수가 발원하는 지역이다. 서남쪽으로 를러서 요양현을 지난다
([註] (縣故髙句麗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2대 유리왕 31년(AD 50년) 전한 말기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의 목을 베고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비하하였고, 이 사실이 중국의 한서(漢書)와 남북서(南北書)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에도 표시된 만리장성의 밖 요수(遼水)의 발원지 부근 현도 고구려현에 고구려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 고구려 5댇 모본왕은(AD49년)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경계를 회복하였다(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 위의 삼국사기와 후한서에 분명히 고구려가 ”후한(後漢)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는 당시 만리장성의 안쪽 상곡, 어양, 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금의 북경보다 훨씬 서쪽의 지역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는 압골강 주변에서 싸운 것이 아니고, 만리장성 안쪽 요서지방에서 한나라와 싸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6대 태조왕(AD 53-146년)은 재위 3년(AD 55년)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의 병사들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三年 春三月 築 遼西 十城 以備漢兵)“ 이라고 하였다. 또
고구려의 6대 티조왕은 94년(AD 146년)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를 습경하고요동군 서안평현을 점령하고,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와 그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王이 遣將하여 襲漢하고 遼東의 西쪽 安平縣하여 殺 帶方令하고, 掠得 樂浪太守와 妻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태조왕이 요서(遼西)에 10개의 성을 쌓고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하였지만,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태조대왕의 요서 십성 축조 사실을 전혀 무시하고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인터넷에도 요서 10성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요서 10성의 위치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서 환단고기에 기록된 요서 10성의 위치에 대한 역사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후에 동천왕 16년(AD 242년)에는 고구려 11대 동천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였다(十六年 王 遣將 襲破 遼東 西 安平) “아고 하였다.
***참고: 위의 6대 태조왕과 11대 동천왕이 빼앗은요동군 서안평현을 일본인이나 한국 학자들은 ”압록강 하류의 단동시 구련성(九連城) 동북 안평하(安平河)유역이 요동 서안평 위치다“라고 비정하고 있다. 일본인들이나 한국학자들의 끈질긴 단동군 안평현설은 현재 너무 단단하여 깨뜨릴 수조차 없는 지경이다. 또 한서(漢書)의 요동군에는 서안평현(西安平縣)과 안시현(安市縣)이 전혀 다른 지역이다. 안시하(安市河)가 압록강에 있어서 안시현이 아닌 안평현이 이곳에 있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요동성(遼東城)의 위치는 압록강 서쪽에 삐쭉이 튀어나온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위치한 대련(大連: 심양)에 위치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라면 이 요동반도에 있는 대련 보다 서쪽에 안평현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 대련보다 동쪽 단동에 안평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요동(遼東)은 수앙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조서에 명확히 기록되 바와 같이 수양제의 침략경로 우12군 11번째에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요수(遼水)인 조백하 부근에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울러 수양제 조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낙랑은 평안도에 존재한 사실이 전혀 없고, 대방도 황해도에 존재한 사실이 전혀 없으며, 낙랑과 대방군 및 그 속현이 모두 요서 조백하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 영토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11년((AD 401년) 광개토대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숙군을 공격하니 연나라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다라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븍얀(北燕) 공격하여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점령하자, 평주의 통치자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평주 숙군이 고구려 영토로 된 것이다.
20대 장수왕 23년(AD 435년) “위(魏: 北魏)나라가 자주 연(燕: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은 고구려에 항복하여 북연의 영토 중 평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이며, 이후 고구려 보장왕 때까지 이 유주 지역의 절반이 낙랑군(대방 포함), 현도군, 요동군, 발해군 및 후에 요서군까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이 땅이 고구려 영토이었음은 수양제의 조서가 명백히 증명한다.
중국의 북부에서 처음에는 북위(北緯)와 대등하게 경쟁을 하던 북연(北燕)이 처음에는 고구려와 대립하였으나, 고구려 귀족 고운(모용운)이 와이 된 후 고구려와 화친을 하게 되었다. 이후 점점 쇠약해 진 북연은 AD 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하였으며 이에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수많은 후연 귀족들과 여성들과 백성들을 북위군으로부터 피난시켰다.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다가 반란을 도무하였으며 결국 장수왕에게 처형당했다.
이때 풍홍이 머물던 요동성(遼東城)은 어디인가? 요동은 수양제가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을 고구려 오랑케가 점령하고 있다“고 조서에서 밝히면서 그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침략경로의 우12군 11번째에 요동이 있었다.
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 현도를 점령하고 다음에 공격한 성이 요동성이었다. 그러므로 요동성은 조백하인 요수(遼水) 부근에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한 대련(大連: 심약)에 위치했다거나 요동군 서안평현이 지금의 단동이라는 역사 날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평주 숙군(宿郡)은 평주의 치소일 것이며, 광개토대왕 때 평주 숙군을 점령하였다. 20대 장수왕 때는 북연(北燕)이 항복하였으며, 그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 속현이 모두 포함된 평주(平州) 전 지역과 탁군(涿郡)과 대군(代郡)을 제외한 유주의 발해군(渤海郡), 현도균(玄菟郡) 및 요동군(遼東郡)이 모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고, 이후 고구려가 멸망한 보자왕 때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https://cafe.daum.net/hangaram-forum/FPWg/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