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품 번호 121번 ‘1924년 월탄 박종화 시집 『흑방비곡(黑房秘曲)』 초간본’입니다. 20만원에서 시작합니다. 20만, 30만, 4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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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6층에서 ㈜코베이가 ‘삶의 흔적’ 경매전을 열었다. 이날 경매에 나올 각종 희귀품들이 탁자 위에 전시돼 있다. [김태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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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사가 호가를 외치자 여기저기서 입찰판이 올라갔다. 일제 때 시인이자 역사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박 시인의 첫 시집이어서 그런지 경쟁이 치열했다. 20만원에서 시작된 이 시집의 경매가는 몇 초가 지나지 않아 100만원을 넘어섰다. 가격이 치솟자 활발하던 입찰판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110만원, 110만원. 더 이상 없습니까. 네, 29번 회원님께 낙찰됐습니다.”
4명의 경쟁자가 나선 끝에 이 시집은 한 고서적 수집가에게로 돌아갔다. 10여 분 전에도 조선시대 때 혈서로 쓴 진정서인 ‘소지(所志)’를 두고 경합이 붙어 10만원에 시작된 경매가가 15차례의 호가를 거쳐 65만원에 낙찰됐다. 치열한 경합으로 예상보다 가격이 높게 나오자 참석자들 사이에선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18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운현궁 건너편의 수운회관 6층에서 열린 이 경매전에는 100여 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국내 최대 취미·예술 전문 경매사인 ㈜코베이(Kobay)가 마련한 ‘삶의 흔적’ 경매전이다. 이날 330여 건의 물품 중 가장 높은 몸값은 10세기 중엽 중국 오월국에서 만들어진 불경의 목판 두루마리로 1000만원에 낙찰됐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이 경매전은 1999년 시작돼 올해로 꼭 10년이 됐다. ‘삶의 흔적’이라는 이름답게 수억원짜리 그림이나 도자기가 거래되는 게 아니라 추억의 물건들이 주 거래품이다.
이날은 50년대 외화 팸플릿과 포스터, 떡살과 다식판, 70년대 성인만화의 르네상스를 연 강철수 화백의 만화 『사랑의 낙서』, 고우영 화백의 『임거정』 『 수호지』,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갓끈’과 ‘오동나무 책꽂이’, 일제시대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레코드판 초판본 등이 눈길을 끌었다.
경매장의 주 고객은 40대 중반부터 70대까지의 노장년층이다. 태극기 수집가로 유명한 박건호씨, 불경·고지도·와당(기와) 수집가로 잘 알려진 일산 원각사 정각 스님, 아리랑 박사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6·25 때 ‘삐라’와 근현대 표어·포스터·담화문 같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김영준 시간여행 대표 등은 경매장 단골 인사다. 특히 10만 권의 장서 소유가로 유명한 이상희(77) 전 내무부 장관은 매달 빼놓지 않고 이곳을 찾는 매니어다. 그는 “조선시대 선비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소품이나 식물 관련 자료를 구하기 위해 자주 찾는다”며 “각박한 현실 속에서 구수한 옛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경매가 과열되기도 한다. 평소 점잖은 대학교수나 스님도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집착을 보이고 흥분할 때가 있다는 것.
김민재(54) 코베이 대표는 “우리나라는 긴 역사에 비해 수집·보존 문화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보다 약하다”며 “사라져 가는 것들을 발굴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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