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천공항 근처 인스파이어 리조트에 갔다가 내가 직접 찍은 것 중 하나,
세상이 이렇게 바뀌도록 나만 몰랐네
썰매와 고글
이 썰매는 뼈와 나무로 만들어졌고 바다코끼리 가죽으로 묶었다.
러너( 썰매 몸체를 말하는 것 같다)는 일각고래 상아이다.
이누구이트족이 만들었고 1818년 존로스가 수집했다.
200명의 이 그룹이 외부 세계와 처음 접촉한 때였다.
역사적으로 나무 뼈 또는 상아로 만든 눈 고글은 착용자를 눈얼음으로 부터 보호하느데 사용되었다.
호아 하카나나이아(hoa Hakananaia)로 알려진 모아이.
서기 1000~1200년경에 제작된 현무암 조상상.
칠레 라파누이/이스터 섬
라파 누이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이 섬에 유명한 특별한 석상(모아이)을 만들었다.
서기 1000년경 부터 섬 주민들은 돌을 채석하고 조각상을 조각하는데 막대한 자원과 노력을 투자했다.
많은 모아이가 섬 전역으로 운반되어 아후라고 알려진 플랫폼에 세워졌다.
모아이는 땅과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폴리네시아 전지역에서 섬 주민들은 혈통을 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을 숭배했다.
모아이는 중요한 신격화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그들의 영혼을 구현할 수 있었다
호아 하카나나이아(hoa Hakananaia)는 다른 대부분의 모아이와는 다르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든 부드러운 화산암이 아닌 단단한 현무암으로 조각되었다.\
그의 등에는 군함, 새 머리와 사람 / 새 형상을 묘사한 여러개으 조각된 상징이 있다.
이는 다산과 자원에 대한 접근과 관련된 섬의 조류인 의식과 관련이 있다.
1600년대부터 섬 주민들은 조각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호아 하카나나이아(hoa Hakananaia)는 아마도 의식의 초점이 된 마지막 모아이중 하나였을 것이다
1868년 11월 이스터섬에서 처음 발견되어 영국 함선으로 이송되었으며 1869년 8월 영국으로 도착하였다.
1869년 빅토리아 여왕폐하가 대영박물관에 기증이라고 박물관 측에서 기재해 놨다
이스터섬 원주민들이 제작한 모든 조각품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이자 가장 훌륭한 완성도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다른 모아이상과 비교했을 때에는 다소 작은 크기지만 모아이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뒷쪽 면에는 이스터섬의 조인전설과 관련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석상을 영국인들이 옮겨올 당시 이스터섬 주민들은 라파누이어로,
'호아 하카나나이아' (Hoa Hakananai'a)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전해들은 영국 선원들은 '호아-하카-나마-이아' (Hoa-haka-nama-ia)로 기록하였다.
이름의 해석에 대해서는 '파도를 헤치다', '파도타기' '파도 타는 친구' '파도 헤치는 주인'이라는 뜻에서부터,
잃어버린 (도난당한) 친구' '숨겨진 친구', '훔치는 친구'라는 뜻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호아 하카나나이아의 후면 하부. '마로'라 불리는 벨트와 엉덩이를 묘사해 놓았다.
이스터섬의 전형적인 모아이석상으로,
두터운 눈썹과 각진 얼굴에 두툼한 코, 튀어나온 턱과 젖꼭지,
살짝 구부러진 채 아래로 뻗은 얇은 두 팔과 배쪽을 향한 손이 특징이다.
턱 중앙은 Y자로 솟아 있고, 눈은 움푹 들어가 있으며 귀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인데,
이는 이스터섬의 의식용 제단 (아후, ahu)에 세워진 석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목 아래쪽의 선은 쇄골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며,
쇄골 위쪽에는 반원형의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다.
크기의 경우 높이는 2.42m, 둘레는 96cm, 무게는 4.2톤에 달한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은 붉은으로 만들어졌으나,
호아 하카나나이아의 경우에는 짙은 회갈색 덩어리를 깎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석상이 발견된 곳 인근에서 현무암을 채석해 만들었다는 식으로 설명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암석학적 근거는 전무하다.
석상의 바닥 부분은 현재는 받침대에 가려져 잘 볼 수는 없지만 거칠고 가늘어져 있는 상태인데,
원래는 평평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뒷면의 경우에도 윗쪽에 비죽 튀어나온 선 세 개와 아래쪽에 M자로 그려진 벨트를 빼면 평평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닥면에는 엉덩이가 살짝 묘사되어 있다.
머리 꼭대기는 부드럽고 평평하게 갈려 있으며 이 위로 푸카오 (pukao)라 부르는 원통형 모자 조각을 씌웠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석상 근처에서 발견된 납작한 둥근 돌이 사실은 푸카오였을 수 있다는 시각,
바닥이 평평했다면 동상을 세워둔 받침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 모자 부분을 받치려면 그 면이 평평해야 하므로 꼭대기가 수평이 되도록 기울여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아 하카나나이아의 후면에 새겨진 부조
1868년 발견 당시 콜린 던다스 중위 (Lt. Colin Dundas)가 스케치 했다
1868년 11월 영국 해군 군함 HMS 토파즈호 (HMS Topaze)의 장교와 선원들이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에는 하반신 내지는 그보다 좀 더 윗쪽까지 땅 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
영국인 선원들은 석상을 파낸 뒤 썰매에 태워 라노카우에서 내려와 군함에 실었다
석상 반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레오나르도 파카라티 (Leonardo Pakarati)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상의 정신> (Te Kuhane o te tupuna)이 있다. 이 다큐에서 감독은 호아 하카나나이는 라파누이섬의 상징이었는데 도난당하고 말았다며, 섬의 풍요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석상에 깃든 (정신)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로제타는 이집트 베헤이라 주에 위치한 항구도시, 고대이집트어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큰 도움을 준 로제타(Rosetta Stone)가 발견된 곳이다. 이탈리아어 로제타와 로제트는 본래 작은 장미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발음이 비슷하여 지명으로 채택되었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 또는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멤피스에 세워진 화강섬록함 석비이다.
고대이집트어로 된 법령이 위에서부터 신성문자, 민중문자,고대그리스어의 세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에 쓰여진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1822년에 장프랑스와 상폴리옹과 토머스 영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헬레리즘시대에 조각되어 사이스 부근의 신전에 전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고대 말기나 맘루크 술탄국 시기에 옮겨져 나일강 삼각주의 로제타마을 근처에 줄리엔 요새를 건설할 때 재료로 사용되었다.
1799년 7월, 이집트-시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의 장교였던 피에르 프랑수아 피사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석은 고대 이집트어를 다른 언어와 병기한 기록 중 최초로 발견된 자료로,
미번역 문자이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점에서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로제타석의 탁본은 곧 유럽의 박물관과 학자들 사이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이 오스만제국과 함께 프랑스군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물리쳤을 때 로제타석은 런던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1802년부터 대영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로제타석에 새겨진 법령에 대한 연구는 1803년 그리스어 본문의 첫 완전한 번역이 출판되었을 때에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799년에는 각기 다른 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모두 동일한 내용임이 밝혀졌다.
1802년에는 민중문자가 외래어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독음을 적었음이 밝혀졌고,
1814년에는 신성문자도 외래어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독음을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1822년에서 1824년 사이에는 이집트 고유 단어를 적을 때에도 음소문자가로 쓰여졌음이 알려졌다.장프랑스와 상폴리옹은 1822년 파리에서 이집트 문자의 번역을 발표했는데, 학자들이 이를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이후 같은 내용을 담은 석비가 발견되었고, 로제타석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작성된 다른 비문들도 발견되면서 로제타석은 더 이상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문학과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다뤄지던 역사성으로 인해, '로제타 스톤'이라는 용어는 이제 새로운 지식 분야의 핵심 단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현재 영국박물관에서 로제타석을 비롯한 유물들을 3D 모델링했으며,
로제타석은 프롤레마이오스5세 에피파네스 때에 만들어진 검은색 비석이다.1799년 7월 15일 베헤이라 주 로제타에서 나플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발견하였다.
이 돌은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가 114.4 cm (45.04 인치)이며, 너비는 72.3 cm (28.5 인치), 두께는 27.3 cm (10.9 인치)이다. 무게는 대략 760 kg (1,676 파운드)으로, 원래는 화강암혹은 현무암일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현재는 화강섬록암으로 여겨진다.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이다.
1802년부터 영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세 가지 언어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