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内村鑑三語録 テーマ別 年代順 総索引 1924年 夏 東京柏木の自邸
(출처 : http://uchimurakorea.hp.infoseek.co.jp/)
무교회주의그룹 성서강당(이마이관, 今井館) 강연 일시 : 2008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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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演要旨> 2008.8.10
韓国教会史における無教会主義
徐 正 敏 (韓国延世大学敎授、日本明治学院大学招聘敎授)
序論
-肯定的イメージ: 民族, 聖書, 霊性, 敬虔, 倫理 -否定的イメージ: sectとしての認識, あるいは 敎会論の問題 -內村鑑三 -金敎臣 -崔泰瑢(=福音教会), 咸錫憲(=Quaker) -<聖書朝鮮> -聖書硏究 -閔庚培の韓国教会史硏究と無教会主義 -森山浩二の金敎臣硏究 -徐正敏の金敎臣, 內村鑑三硏究
韓国無教会運動の時期区分
-戦前: 金敎臣など -戦後: 盧平久など
內村鑑三と彼の弟子たち
-內村鑑三の韓国観: 韓国に対する理解, 3.1運動と関東大震災の時の問題 -金敎臣など弟子たち: 內村鑑三の 聖書硏究, 敎会論より彼の愛国観に注目
‘民族敎会論’の中で金敎臣
-內村鑑三の愛国を伝授: ‘日本’を’韓国’に -金敎臣は愛国信仰を持っているが、イデオロギー型のキリスト者ではない。 -金敎臣は信仰論理を強く持っているが、当時福音主義者とは異なる。 -金敎臣は ‘民族’と‘福音’を同一線上に: <聖書朝鮮>、 ‘聖書’と‘朝鮮’の間に関係助詞もない。 -結局金敎臣は民族をために韓国キリスト教信仰を利用するのも、信仰論理を優先して自分の民族を無視するのもない。(信仰=民族)
戦後の韓国無教会主義
-戦後韓国キリスト教は‘民族敎会’の特徵を喪失: 反共主義キリスト教 -sect運動活発, その中で一つとして無教会主義認識 -無教会運動リーダーシップの歴史意識弱化 -少数無教会主義者たちの道德性は高い評價 -咸錫憲以外には予言者としての活動はないと認識される。 -そのグループの活動に対して戦前金敎臣グループの継承というイメージがたりない。
結論
-韓国無教会主義は歴史的に肯定的伝統を持っている。 -教会內部的には敎会論的問題を持っている。 (金敎臣:崔泰瑢, 無教会主義の聖書硏究:一般キリスト教会の聖經学習) -‘民族敎会論’の流れの中で中心としての評價, すなわち民族との密接な関係という伝統的イメージを今は持っていない。 -今から積極的に民族, 社会, 文化, 環境などの問題に参与す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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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이마이관의 분위기를 언급한 송두용(宋斗用)의 글 "김교신과 한국의 무교회"
金敎臣과 한국의 무교회
나는 지금 김교신을 말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김교신을 본위(本位)로 하기보다는 내가 접하여 알게 된 범위 안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1925년 이른 봄에 병석에서 갑자기 믿고 싶은 즉 믿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를 찾아 불시에 동경에 건너간 것이다. 그 당시에도 한국에는(그 때는 조선이라고 불렀다) 기독교가 있었을 뿐더러 서울에는 교회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 때의 나는 그런 것은 아예 생각이 나지 않고 몇 해 전에 내가 처음으로 동경에 유학 갔을 때 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선배인 R의 인도로 몇 번인가 참석한 일이 있던 우치무라의 집회를 기억하고 있은 탓인지 그것이 회상되었기 때문인가 싶다.
나는 3월 초에 동경에 가서 4월부터는 동경농업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우치무라 간조 성서연구회에는 5월에야 겨우 다니게 되었다. 그 때의 우치무라는 시외인(지금은 물론 시내지만) 가시와키(柏木)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주택 안에 있는 이마이관(今井館) 강당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 강당은 이마이(今井)라는 사람의 별세 후 그의 유족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선생이 쓰시도록 지어 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집회는 일반 교회와는 달라 언제 누구든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선생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것도 이미 다니는 회원의 소개가 있어야 했다. 또 회원은 응분의 회비를 내게 했다. 아마 이런 일들을 교회 사람들이 안다면 놀라기보다는 도리어 흉보거나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집회는 항상 질서를 유지하고 분위기는 긴장되고 회원은 자주성과 독립정신과 책임감이 강한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는 또한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집회에 다니면서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누가 강요하거나 시비해서가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조심성이 생기고 매사에 진실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집회의 또 한 가지 특성은 먼저 간 사람은 앞줄에서부터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따라서 늦게 간 사람은 뒤에 앉거나 자리가 없으면 서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정각이 되면 더구나 개회기도를 할 때에는 반드시 출입문을 닫아 버렸다. 기도가 끝난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어떤 사람은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것은 남에게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지각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책임감에서인 것이 더 큰 이유인 것은 물론이다.
다음에 집회가 끝나면 역시 앞줄에서부터 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늦게 온 사람은 나중에 나가는 것이 상례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 교제 잡담은 할 기회도 없거니와 그런 것은 아예 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조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 모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지극하고 간절한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 조금도 이상하거나 신기할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의 맹목적인 양 아무 생각도 없이 같은 집에 하숙하는 R과 함께 꾸준히 다니는 동안에 일년이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꿈같기도 하였지만 실은 나에게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물론 상상도 못한 천국 생활을 한 것으로 지금도 이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무교회주의 신앙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는 그렇게 엄숙하고 진실하며 또 항상 정리되고 정돈되어 있어 일사불란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같은 초년병이요 외국인일 뿐더러 또한 연소자로서는 다만 따라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R의 제의로 우리 두 사람은 다음 일요일에 일부러 일찍 집회에 출석하여 앞자리에 앉았다가 빨리 문간에 나와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서 조선 사람(한국인)을 찾아냈다. 그것은 우리도 앞으로 조국에 전도하기 위하여 우리말 성서를 같이 배우며 연구하자는 뜻에서 한 일이었다.
집회장소인 이마이관은 300명 정도(무리하면 입석까지 50-60명 더 들어갈 수 있지만) 이상은 수용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주일 예배를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보았다. 대체로 노장(老壯)들은 오전에, 학생(남·여 대학생)과 청년들은 오후가 되었다. 집회에는 약간의 중국인과 소수의 조선인도 있었으나, 서로 모르고 지냈기 때문에 R과 나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몇인가를 알게 된 셈이다. 그 때에 비로소 김교신과 H, Y, C 등 4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6인은 전부가 학생들이었다. K, H는 동경고사(高師)에 적을 두었고, C는 신학생이며 R은 와세다(早稻田)대학에 다녔고 겨우 농대의 예과생인 나는 신앙은 물론 노력도, 나이도 심지어 체구까지 가장 뒤지고 작은 편이었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교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가장 앞서고 큰 편이었다. 다만 그의 나이가 H와 동갑이면서 생일이 한두 달 먼저일 뿐이었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그가 먼저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자기의 고향인 함흥에서 교편을 잡은 것이다. 그 후에 H, Y, C, R 등이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조국에 돌아왔으나,오직 나만은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고 김교신이 귀국한 그 가을에 동경을 떠나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약간 탈선되었으나 우리 6인은 주일마다 가시와키 집회에 나가기 전에 대체로 C가 다니는 신학교의 교실이나 기숙사에 모여서 우리말 성서를 공부하였다. 일어, 영어, 독일어, 희랍말, 히브리말 등 여러 가지의 성서를 참고하면서 서로 힘을 모아 얼마 동안 연구를 계속하였다. 잘 기억되지는 않으나 아마 일년 남짓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는 김교신이 귀국했던 1927년에 서울에서 7월 1일자로 전도지를 발간했다. 그것이 바로 『성서조선』인 것이다. 그 때에나는 입신(入信)한 지 만 2년쯤 되었었고 나이는 24세였다. 그러나 다른 다섯 사람은 신앙생활도 5, 6년 내지 7, 8년 정도였으며 나이는 R이 25세,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27세였다. 결국 나는 이미 말한 대로 맨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6인이 모두 귀국한 후는 H는 그의 모교인 평북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Y는 선천(宣川)의 모 여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므로 멀리 있었으나, 김교신은 서울로 이사하여 양정중학교에 근무하였고, R도 같은 학교의 교사였으며 C는 서울에서 주로 『성서조선』의 편집과 이의 발행을 맡아보았고, 나는 서울 근교 오류동에서 농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K, C, R, S 등 4인은 주일마다 모여서 시내에서 공개집회를 얼마 동안 계속하였다.
말씀은 윤번제로 하였다. 아마 이것이 서울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무교회 전도 집회의 효시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 때에 교회 목사로서 우리 모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주 참석하거나 동조하면서 크게 협조하고 격려하신 분은 성결교회의 배선표 선생과 장로교회의 김우현 선생이었다.
그 밖에도 평신도는 물론이고 목사, 장로, 집사 같은 이들 중에도 주목하여 알아보려고 힘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공개집회는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동인들의 생활 및 심경의 변화와 장소의 확보가 곤란하였고 또 모이는 사람도 별로 없게 되니 우리의 힘과 신앙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김교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계속하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하기에 나도 끝까지 힘써 보았으나 우리는 물심양면으로 기진맥진하여 그만 두었다.그 후로 김교신과 나는 당시의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학) 법학부 학생 K군(현재 변호사이며 국회의원도 한 일이 있다)과 같이 혹은 산에서 또는 들에서 때로는 하숙방에서 3인이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주일을 지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지는 못했다.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못하게 되니 부득이 내가 살고 있는 오류동 농가 안방에서, 그 후 내가 서울 명륜동에 살 때에는 그 이층에서 김교신이 예배를 인도하며 농민과 학생과 지식인들을 지도하였다. 그것은 모두 김교신의 성의와 열심의 결정이며 나는 겨우 방을 제공하고 사회를 본 정도로 공동책임을 완수하고자 한 것뿐이다.
한국의 무교회 신앙은 이렇게 도입되었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성서조선』지가 발행되기 전에도 즉 우리 6인보다 먼저 우치무라의 『성서지연구(聖書之硏究)』지의 독자가 되어 오랫동안 우치무라 간조를 사사(師事)하며 따라서 그의 무교회 신앙을 배운 사람이 결코 없지는 않았다.
그 중에는 김정식 선생 같은 구한국 말엽에 고관대작을 지낸 분도 있고 특히 해방 후에 나와 노평구 형 등 무교회 신자들과 매우 친밀한 영교(靈交)를 할 수 있었던 안학수 선생은 우치무라의 큰 사진을 방에 걸고 그 밑에 나의 선생이라고 써 붙였을 뿐더러 항상 틈만 있으면 의사였던 선생은 언제나 그의 진찰실에서 우치무라의 저서를 애독, 열독, 심독하였으며 따라서 그분이 철저한 무교회 신앙으로 생애를 사셨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밖에도 『성서지연구』의 독자가 소수이기는 하지만 각지에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위에 말한 두 분 외에는 별로 한국 무교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친 바가 없기에, 그들에 대한 자세한 것은 여기서 말하기를 피한다.
『성서조선』을 발간한 초기에는 6인의 동인이 다 같이 집필하였으며, 신학을 공부한 C가 주로 글도 쓰고 편집도 하면서 수년간 수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몇 해 후에 그의 고향인 부산으로 떠난 후부터는 김교신이 그 책임을 맡아 일제 말기의 기독교 탄압으로 소위 세칭 ‘성서조선사건’이 일어 조선총독부의 정간명령을 받고,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종지부를 찍은 때까지 모든 성의와 정력을 기울여 천신만고하여 계속한 것이다.
그의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은 오로지 『성서조선』에 기울여졌고 『성서조선』을 통해 발휘된 것이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대해 얼마나 열심이었고 또 어떻게 수고한 것은 『성서조선』지 자체는 물론 그의 자당(慈堂)님이 “우리 교신이는 『성서조선』밖에 몰라”라고 늘 하신 말씀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이하에서 좀더 그의 발자취를 살피기로 한다.
김교신은 낮에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그것도 담임까지 맡아보면서 지친 몸으로 밤이면 열심으로 성서를 연구하여 매월 빠짐없이 『성서조선』을 계속 발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가끔 철야한 것으로 안다.
그는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지금은 성북구지만)에 살면서 근 십 킬로나 떨어져 있는 양정중학교(지금은 중·고교)까지 자전거로 근무하였다. 그는 박물(博物) 교사인지라 그 관계로 박물 실험실을 자기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하여 교수시간 외에는 언제든지 그 방에 혼자 있으면서 『성서조선』의 원고를 쓰거나 아니면 교정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어찌 그 일뿐이랴?
김교신은 인쇄소와 총독부에 드나드는 일과 잡지가 나오면 몇 군데 서점에 배달하는 일에도 분주하였다. 그는 걷지 않으면 언제 어느 곳에 가든지 자전거를 사용했다.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는 뻔하다.
독자에게 보내는 잡지의 피봉(皮封)을 써야 하였고, 봉투에 넣고 난 뒤에 하나하나에 우표를 붙여서 발송 준비를 마치면 자전거에 싣고 우편국에 가서 발송한 것이다. 이렇게 사환에서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한 몸에 지고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부하 된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나는 뒤늦게나마 이제 겨우 그의 속사람을 본 것 같다.
주위의 사람들은 김교신을 정력가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우선 체구가 컸다. 항상 혈색이 좋았다. 물론 힘도 세었다. 그래서인지 무슨 운동이고 닥치는 대로 한 모양이다. 특히 정구선수였고 마라톤은 그의 특기였던 것이다. 김교신은 식사를 잘한 것은 물론이고 동료 사이에는 대식가로 알려진 정도이다. 그가 나보다 배(倍) 이상의 식사를 한 것은 사실이다(단 나는 젊었을 때에 위장이 약하여 식사를 아주 적게 한 탓도 있지만). 그러니만치 그의 건강이 얼마나 좋았을 것은 불문가지한 일이다. 누가 감히 그가 요절할 것을 꿈엔들 생각했을 것이냐? 아아!
김교신은 중학교 교사요, 『성서조선』의 주필이었을 뿐더러 일요일이면 성서 집회를 오랫동안 꾸준히 계속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가 여가에 주택 주변에 있는 수천 평의 밭에 갖가지의 채소농사를 하였으며 많지는 않았으나 과목(果木)도 재배하였다. 도대체 그는 무슨 힘으로 아니 그보다도 무슨 시간에 그 모든 일들을 하였는지 나는 이해조차 어려웠다.
『성서조선』을 시작한 초기에는 동인(同人) 6인이 모두 집필한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거니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한 사람, 한 사람 떨어져 버리고 단 H만은 거의 끝까지 가끔 글을 썼지만 어쨌든 점차로 K의 개인지처럼 되어 단독의 힘으로 특히 경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개인의 부담으로 이를 유지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 있어서는 무교회 잡지가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도리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거늘 하물며 30여 년 전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아닌가? 이제 생각하면 봉급생활하는 그가 자녀교육을 하면서 매월 잡지를 발간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김교신은 위에서 말한 것같이 초비상적인 생활을 했다. 아니, 그야말로 그가 그렇게 눈부실 정도의 비약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언가 그에게 비결이라도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 김교신은 남이 모르는 또 소위 동인이라는 다른 5인이 가지지 못한 지혜와 비상한 용기와 우수한 능력을 갖고 생활한 데는 분명히 어떤 놀라운 힘이 그에게 작용한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누가 감히 그의 정력이나 노력에만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냐?
물론 매사에 그는 정력을 기울이고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만치 그를 정력가나 노력가라 하여도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다만 정력가나 노력가로만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면 대체 김교신이 김교신 되는 그 특징은 무엇이며 특기는 무엇이냐 말이다. 어떤 이들은 김교신을 애국자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도 애국자요, 또 무엇보다도 애국 애족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끝내 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제 말기에 일인들의 단말마적인 최후 발악으로 잔인, 무도한 악정을 자행한 총독부의 탄압 밑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김교신은 용감하게도 물리쳐 이겨 나간 것이다. 아, 그것은 용감하다기보다 차라리 얼마나 비장한 일이었던가. 따라서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그러면 이제 나는 김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할 단계인가 싶다. 그렇다, 김교신의 애국 애족도, 정력과 노력도 모두 김교신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 그는 생래의 자기를 산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교신은 야곱과 요한의 형제와 다름없는 야심가였는지도 모른다. 사울과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를 짓밟은 반역자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는 그가 야곱이나 요한처럼 야망가이며, 예수보다는 이스라엘을 더 깊이 더 많이 사랑한 사울과 같이 예수보다도 그의 조국인 조선을 더 사랑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학생 시대에 어느 날 현해탄을 건너 귀국 도중 연락선 갑판을 구르면서 ‘죠센징(조선인)은 불쌍하다’고 외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그는 교육자가 되어서 후생을 기른 것도 정치적 의미는 없을지 몰라도 이 민족의 정신적 내지는 영혼의 독립을 목표하거나 지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김교신은 끝내 세속적인 야욕을 품었거나 또 생래의 인간적인 애국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요한과 같이 복음의 사도도 되었고 야곱처럼 한국 무교회 신자로서의 최초의 순교자가 아니냐? 그리고 그는 한국에 무교회적인 복음의 종자를 뿌리고 가꾸는 일에 개척자와 선구자로서 활동한 것은 물론, 규모는 적을지 모르나 아마도 그 정신에 있어서 또는 그 태도에 있어서 원시 기독교에 있어서 초대교회를 각처에 건설한 대사도(大使徒) 그리스도의 종 바울 선생에 비긴다면 지나친 과장이라고 비난할 사람이 있겠지만, 좌우간 김교신은 한국 무교회에 있어서만이 아니고 우리 기독교계에 있어서도 귀한 특유한 존재인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나는 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김교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김교신은 신앙의 사람이다’ 또는 ‘김교신은 믿음만으로 산 사람이다’ 혹은 ‘김교신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또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짧은 생애이지만 그의 일생은 특히 그의 후반생은 분명히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였으며 예수님만을 위해 생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틀림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교신! 그는 철두철미 육(肉)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한 무교회적인 순수한 신앙만의 신앙을 산 자였다. 그것도 어느 때 무슨 사건을 통해(물론 입신 후 실은 그것도 『성서조선』 발간 초기에) 그에게는 일생에 처음이며, 또 다시 있을 수 없는 무섭고 슬픈 체험이 있고 나서의 일인 것이다.
김교신과 나와의 사이는 가장 많이 접촉하였고 가장 친밀한 관계였건만 나도 그를 너무도 몰이해하였고 따라서 경제면은 물론이요, 집필로조차 돕지 못한 것을 이제 후회나 자책한들 도리어 거짓일까 두려운 심정을 불금(不禁)하면서 이 글을 감히 먼저 가신 그에게 바치는 바이다.
(외솔회 발간 『나라사랑』 17호[1974년]에서 재수록)
송두용(宋斗用) : <성서조선> 동인, <성서신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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