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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크림반도를 거쳐 영국을 강타한'흑사병'
인구의 반을 앗아간『흑사병 (Black Death)』
사람들은 왕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왕과 귀족들의 야망과 사랑, 배신과 질투의 희비극은 어느 드라마나 연예인 소식보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한나라가 존재하려면 서민들이 있어야하고, 왕과 귀족도 서민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중세기 서민들의 대부분은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었고, 역사기록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교육받은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을 알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분을차별하지않고누구에게나찾아왔던블랙데스 (Black Death, 흑사병)이나1381 농민봉기 (Peasants’ Revolt)같이서민들이무대중심에서스포트라이트를받았던사건들과그전후를살펴보면그들의삶이어떠했는지짐작할수있습니다.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던 서민들의 삶은 짧고 힘들었습니다. 평생을 쟁기질하며 살았던 그들은 35세 정도부터 부스러진 뼈들에 염증이생기고, 여러 질병들을 앓기 시작했고, 40세를 넘기면 고령자였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보다 죽음을 훨씬 더 자주, 가까이에서 접했던 이들에게 죽음은 먼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뒤에 일어날 일도 당장 지금부터 걱정해야 하는 일이였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리얼했던 이때, 사람들의 주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삶의 모든 면모에 스며들어있었고, 천국은 교황과 목사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했던 중세기 런던인구의 대부분은 빈곤하여 제대로 먹지 못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유난히 춥고 비가 많이 왔던 1315 년에서 1322 년 사이에 닥친 대기근 (Great Famine) 때는 곡식과 빵 가격이두 배 이상으로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동물과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잡아먹고, 남의 음식을 빼앗기 위해 살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1322년 7월 3일 새벽에는 구호품을 나누어준다기에 블랙프라이어스 (Blackfriars) 수도원 앞에 모인 사람들이 문이 열렸을 때 먼저 들어가려는 통에 50명 이상이 깔려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크리스챤의의무라 생각되었던 이때, 부유한 사람들이 병원과 구빈원 (almshouse) 들을 짓고, 유산을 나누어주기도 했지만, 대를 물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일이였습니다.
재앙은 연달아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기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실크로드를 지나 크림반도를 거쳐 들어 온 '흑사병'
부유한 이들은 의사의 도움을 청하였고, 가난한자들은 기도에 의존하며 성자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의사도 성자도 막을 수 없었던‘흑사병’은14세기 중국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 (Silk Road)를 지나 크림반도 (Crimea)를 거쳐 지중해와 유럽으로 퍼져, 유럽인구의 반정도를 앗아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중 하나입니다.
지오바니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의 단편소설집, 데카메론 (Decameron) 도이탈리아에서‘흑사병’을 피해 지방으로 이주한 피렌체의신사 숙녀들이 평소에 즐기던 오페라 등 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게 되자 대신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을 편집한 것입니다.
보카치오는 흑사병에 대해 이렇게 한탄 했습니다.
–‘하늘의 잔인함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얼마나 많은 씩씩한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자들이, 아침에는 가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밤에는 저세상에서 조상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지…이 비극을 생각하는 내안에서 슬픔이 자란다. 감염된 사람들의 상태가 가련하여 차마 볼 수가 없으며, 하루에도 천 여명 씩 도움 받지 못 한채 죽어가는 것을 길에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집안에서 나오는 시신 썩는 냄새로 알 수 있다. 이많은 사람들을 묻기에 교회묘지는 턱없이 부족하여, 시신들을 높이 쌓아 올려 흙으로 덮어 둔다…’
1315–1322년 사이의‘대기근’과 1337 년에 시작된‘백년전쟁’과 시기가 겹친‘흑사병’으로 인한 사상자의 정확한 측정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흑사병 절정기에는 전세계적으로 하루에 7,500여명씩 죽었습니다. 영국은 흑사병이 가장 맹렬했던1348–1350년 사이에 인구의 반인 200만 여명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그래도 백년전쟁 때문에 계속오르는 세금과 흉년으로 국민들에게 힘든 시기였습니다. 왜 괴로운 인생 뒤에 천국이 있다고 믿고싶지 않았겠습니까?
내출혈로 표피 밑이 검어지고, 사지가 부패하여 피부색이 어두워지는 증상과이병에 대한 무섭고 두려운 감정을 담아 이름 지어진 흑사병은 쥐들에 서식하는 벼룩에 감염되어 림프절이 민감해지고 커지는 뷰보닉질병의 일종으로, 당시 바다를 다니던 무역선들에 가득했던 쥐들에 의해 여러나라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흑사병에 감염되면, 가슴이 아파오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피를 토하는 기침을 하기 시작합니다. 곧 몸에 열이 나고, 내출혈로 인해 보기 흉한 부스럼들이 몸전체로 퍼지며,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또는 귀 뒤의 림프점들이 부어오르면서 거뭇한 반점들이 생기고, 안절부절 못하며 의식이 혼미해지다가보통 2–4일 안에 죽게 됩니다.
좁은 골목길들이 많았던 런던은 쥐들의 천국
도시의 밀집된 환경은 쥐들이 번식하기에 좋은 조건이라, 흑사병은 시골보다 도시에서 더 심했으며,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탈리아의 귀족들처럼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주했습니다.
흑사병이 런던에 이른 것은1348년 봄이 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런던에서는 인구과잉으로 보통 한 가족이상이 한방에서 생활했고, 볏짚으로 덮은 진흙바닥에서 여럿이 동물들과 함께자기도 했으며,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공기와 빛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먹다 남은 고기, 썩은 생선, 장인들의 폐물,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을 길가 아무데나 버리거나(창문 밖으로 던져 길가던 사람들이 맞기도 했지요) 템즈강으로 흘려보내어 온 도시에 악취가 가득했고, 목욕은 평생에 두번 (태어나서 세례 받을 때 한번, 죽어 묻히기 전에 한번) 했습니다. 이 비위생적인 환경은 쥐들의 천국이였고, 또 런던에서 흑사병은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는 재채기만으로도 옮겨지는 병으로 돌변하였습니다. 하루에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갔던 런던의 인구는 18개월 만애 8만 명에서 4만명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록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몇백 명씩 죽어간다. 시체들을 구덩이로 던지고 흙으로 덮는다. 한구덩이가 차면, 다른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내손으로 직접 나의다섯 명의 아이들을 묻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니 모두들 세상의 종말이 온 것 이라 생각한다.’
시신들을 묻었던 성벽 밖의 스피털필즈 (Spitalfields)에서 발굴된 대형 공동묘소는 관들에 넣지 못했던 시체들을 5명 높이로 차곡차곡 쌓아 묻었음을 보여줍니다.
직위와 계급을 가리지 않았던 흑사병에 웨스트민스터사원 (Westminster Abbey)의 대수도원장과 수도사들도 힘없이 쓰러지고, 의회도 폐지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가 가장 사랑했던 딸도 스페인의왕과 결혼하러가는 도중, 프랑스에서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는 흑사병이 영국에 들어오기도 전이였으니, 에드워드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엽기적인 "처방전"들
14세기는 전염병과 감염에 대한 의학적인 지식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누구도 흑사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지 못했지만, 다급한 사람들이 여러“해결책”들을 제시했습니다.
1) 몸속에 안 좋은 피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내출혈이 생기는 것이니, 동맥을 베어 피를 짜내고, 상처는 진흙과 제비꽃으로 덮어야한다.
2) 공기가 안좋아서 그렇다, 공기 중에 뭐가 있나 보다. 포마드향유와 공기청정제를 사용하여 공기를 맑게 해보자.
3)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징벌임이 분명하다. 기도와 금식으로 회계하자. (자신을 매질하는 사람 (flagellant) 또는 채찍질하는 소년 (whipping boy) 이라 불렸던 극단적인 고행자들은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고,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돈을 받고자 신을 때리며 남의 죄까지 사하여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모습은 회개하는 분위기라기보다는 광란에 가까웠습니다.)
4) 먹는 것이 문제일까? 고기, 치즈, 생선 등 냄새나고 빨리 상하는 것 말고, 빵과 과일과 채소만 먹어보자.
5) 환자를 식초와 물로 씻고, 감염되어 부어 오른곳을 째서 병균이 나가게 한 다음, 나무송진, 백합꽃뿌리, 사람배설물 말린 것으로 덮는다.
6) 길거리의 쓰레기와 배설물을 치워 보면 어떨까?
7) 시신들을 장갑도끼지 않고 만지니 전염이되고, 또 쌓아둔 시신들이 썩어 감염되는 것같 기도하다. 이제부터 시신은 땅을 파서 마을밖에 다 묻고, 죽은 사람들의 옷은 태워서 없애자.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는 방문객을 40일 동안 격리시켜놓았는데, ‘격리시키다’라는 뜻의단어‘to quarantine (쿼런틴)’은 이탈리아어로 40을 뜻하는‘quaranta (쿼런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8) 마술을 써봐야겠다. 살아있는 암탉을 부은 자리 옆에 두어 병균이나 가게 한다. 회복을 돕기 위해, 본인의 오줌을 하루에 두 번 마신다.
9) 왜다 안되지? 대체 원인이 뭘까? 아…유대인들 때문이구나.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어서그 렇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밧줄을 들고 (그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할 수 있게) 유대인들을 찾으러 다녔고, 독일에서는 전염병의복수로 유대인의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외에도, 외국인, 거지, 문둥병환자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어 무기력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에 동정하지만, seriously?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마그나카르타’를 쓰고, 의회를 소집하고, 배를 만들어 외국과 무역하며 살았을까요?
결국 사람들은 전염병이 사그러 들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흑사병은 14세기 이후에도 남아있는 병균들에 의해 재발되어 17세기까지 수차례 다시 돌아와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인구가 흑사병이전의 수준으로 다시 올라가는 데는 15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상자수면에서 그 어느 전쟁보다 큰 피해를 야기한 흑사병은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격변을 초래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의 하나님, 정말 계시나요?’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원인
종교가 삶의 중심이었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던 중세사람들에게는 죽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죽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성직자의 수가 부족해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황이 흑사병으로 죽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한꺼번에 사하여 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재앙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며 사람들은 카톨릭교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질병에 대한 망연자실 함이 극단적인 행동들로 이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순간을 위해 살자’며 방탕과 환락의 세계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삶의 낙을 잃고 더욱더 종교에전념하며 세속적인 재산들을 다 교회에 바쳤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로 인해 방대한 영토와 부를 소유하게 된 교회의 타락은 후세기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것 역시 헨리 8세가 종교개혁과 수도원 해산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헨리 8세의종교개혁이야기는px에나옵니다.)
‘인생 별것 없어, 죽음 앞에는 모두 동일하다’ –음산해진예술
부유한 영주/가난한 농민, 왕의 딸/구걸하는 거지, 대주교/평신도, 남자/여자, 차별하지 않고 찾아왔던‘흑사병’은 죽음 앞에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왕의 신성한 권리와 계급사회에 대한 의문을 가져왔습니다. 흑사병 이후로 전에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천한계급의 사람들의 삶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흑사병의 공포와 충격은 문학에도 반영되어, 셰익스피어의 극들에 죽음의문제와 삶의 어두운 면모들이 자주 나옵니다. ‘햄릿’에서처럼 무덤 파는 사람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중요한 장면들에 등장하는 것도 흑사병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극들의 소재로도 여러 번 쓰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후많은 르네상스 작품들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고통 받는 영혼, 죽음, 지옥, 저승사자, 해골들이 등장하면서 미술에도 음산한 어두움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스홀베인 (Hans Holbein) 의 죽음의춤 (Dance of Death)목판화 시리즈에는, 죽은 영혼 또는 저승사자를 의미하는 해골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갓 결혼한 부부, 식사하고 있는 왕, 설교하고 있는 목사, 정욕과 지조 사이에서 갈망하는 여인, 우아한 행차를 하는 여왕, 구걸하고 있는 거지, 밭을 갈고있는 농부, 요리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 모두가 죽음 앞에 무기력합니다. 죽음이 인격화되어, 해골들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습니다.
옆의 그림은‘죽음의 춤’ 중 정욕과 지조사이에서 갈망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여인 뒤에서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곧닥칠징벌을예언이라도하듯 해골이 촛불을 끄고 있습니다. [한스홀베인의‘죽음의 춤’ - 정욕과 지조사이에서 갈망하는 여인]
‘귀족들, 우리 없이 농사지어보라고 해’ –흔들리는 봉건주의
노동력 부족으로 파워가 생긴 농민들
흑사병으로 건강한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으니,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둘 사람이 없어져, 음식 값이 하늘높이 치솟아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더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봉건제도 아래 소작농은 영주의 허락없이 소속된 땅을 떠날 수 없었는데, 많은 농민들이 죽어 땅을 경작할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다급해진 영주들이 다른 땅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들을 유혹하여 자기 땅으로 오게 하려하면서, 농민들에게‘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할 수 있는 파워가 생겼고, 귀족과 농민들이 임금을 놓고 흥정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농민들은 그들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고, 그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영주와 농노, 귀족과 평민을 차별하지 않았던 전염병이 초래한 노동력부족 상황으로 상승한 농민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인생을 바꿔보자는 생각에 농민들이 더높은 임금과 좋은조건을 찾아 다른 영주들에게로 가기 시작하면서 봉건제도의 핵심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막으려는 정부가‘1351 노동법 (Statute of Labours)’을 공포해‘소작농은 흑사병 이전에 받던 임금이상 요구할 수 없고, 그들이 속한 토지를 떠날 수 없으며, 영주도 임금을 인상시켜 주어서는 안된다’고 법으로 정했지만, 임금인상과 농민들의 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농장’에서‘목장’에서‘공업’으로…–산업화와 근대화를 촉진시킨 흑사병
12~13 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봉건주의는 곡물을 경작하는 농업에 바탕을 두었는데,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줄어들게 되자 많은‘농장’들이 일손이 덜드는‘목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백년전쟁으로 시작된 모직산업의 발달을 도왔습니다.
한편, 토지가 농장에서 목장으로 바뀌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농민들은 백년전쟁 싸움터에서 돌아온 군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길드’ 라는 동업조합들을 결성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영국이 서서히 농업중심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산업과 공업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되었으니, 흑사병이 영국의 근대화를 촉진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Last but not least, 흑사병은 유럽의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아무런 처방전도 소용이 없었으니, 의사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요?
파워가 향상된 농민들은 자존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관료들은 옛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고, 가진자들의 횡포는 계속되었으니, 대립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쉿, 숨 죽이고 들어보면, 성난 농민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