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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 유적지에서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라 다들 조금씩 들떠있는 기분들이다.
햇살 좋은 가을 강변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 민족과 가장 밀접한 역사를 간직하며 흐르고 있다는 한강!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며 장엄한 풍경을 연출하는 장소, 두물머리!
넓은 강 한복판으로 툭 튀어나온 반도지 끝머리에 연륜에 따른 고고한 품위를 지키고 서있는 느티나무!
일행들이 절경에 취해 있는 동안 나는 또 남다른 감회에 젖어든다.
뒤로 보이는 운길산 정상 바로 밑 절벽에 자리한 고찰 수종사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국 최초의 쿠데타 군주인 세조로 인해 창건되었다는 저 절에서, 어떤 인연에 의해 짧은 기간이었지만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팔당댐이 완공되고, 막 담수를 시작하면서 강변의 들판이 수몰되어가던 70년대 초반이었다.
산골짜기 다랭이 논 몇 마지기로 생계를 의지하며 자랐던 터라 넓직한 논들이 강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아깝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나 절 마당을 쓸면서 내려다보는 여명의 강풍경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탁, 숨이 멎을 지경이었었다.
다시 구 길을 따라 양수리 다리를 건너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다산 정약용선생 유적지로 차를 몰았다.
선생의 묘소 참배는 예전에도 여러 번 했었으나 성역화사업과 함께 새로 지어진 기념관 견학은 처음이다.
넓은 주차장과 잘 정돈된 주변공원이 한강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방문객이 많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서울 양평 간 국도가 터널과 고가를 만들어 준고속도로 수준으로 뚫리고 보니, 맘먹고 구 길로 들어서지 않는 한 그냥 지나치기 쉽상인 탓도 있을 것이다.
선생의 귀양처였던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모양이다.
잘 보존된 생가와 사당, 문화관, 기념관, 기념비, 동상, 동산 위 부인과 함께 안치된 묘소, 등으로 별도의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 있는 화성 축조 때 사용했던 거중기의 복원모델, 500여권에 달한다는 선생의 저서를 상징하는 조형물도 인상 깊다.
시대를 앞선 진보의 삶, 철저한 애국 애민의 철학과 사상, 기득권 수구세력들의 중상과 모략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고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에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어른!
200여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유품들에는 고매한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추석명절이 끝나고 국회도 개원되었다.
정치권 최대 쟁점은 여전히 4대강 개발에 관한 것이다.
정권 초 부터 대운하개발을 추진하다가 대국민 저항에 부딪치며 한발 빼더니, 이제는 4대강 살리기란 미명으로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
최고의 국립대학 총장 출신 신임 국무총리는 자신의 평소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다. 청문회를 거치는 동안 병역, 탈세, 위장전입, 기업으로부터 받은 이상한 거액의 돈, 편법으로 한 겸직, 거짓증언, 등, 비리와 의혹이 가히 종합세트 같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도대체 이런 정권 이런 정부에서 공직자의 윤리와 도덕은 어디 가서 찾을 것인가?
시대를 되돌아 오늘 또다시 다산선생께서 일갈하신 목민관의 자세를 어찌 다시 생각 치 않겠는가?
바로 이 주변 동리들, 진중리, 송촌리, 양수리, 등에 어지럽게 내걸린 농부들의 플랭카드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70년대에는 댐건설로 많은 농토를 수몰시켜야 했고, 이후에는 상수원지역으로 묶여서 수많은 제재와 불이익을 당했던 주민들이다.
유기농재배를 도입하면서 그나마 인지도를 높이고 겨우 살만해졌다는데, 이제 또 4대강 개발로 그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입버릇처럼 외고 있는 치산치수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가을바람에 어지럽게 나부끼는 플랭카드를 보면서 다산선생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방송만 장악하면 여론을 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권자들은 미디어법을 억지로 고치더니, 그 사이에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방송인들을 계속 몰아내고 있다.
시사평론가 정관용과 유창선, 가수 윤도현, 앵커 신경민, 방송진행인 김제동등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시키고, 100분 토론의 진행자 손석희 마져 교체시킬 것이란 소식이다.
참으로 한심한 작태를 보면서, 이 화창한 가을이 한없이 우울하게만 느껴진다.
교장선생 공모제를 추진하던 중 교육청의 간부가 보안사항을 언론사에 흘리고, 그를 핑계로 공모제를 원천무효 시키려드는 내 고향 모교의 작금사태에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공모제를 간절히 원하는 학부모들과 지역민들의 뜻을 무참히 짓밟는 교육공무원들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반면에 참교육을 위하여 일제고사를 반대하거나 양심선언을 하였다 해서 교권을 박탈당했던 선생님들도 있다.
그 분들 중, 어떤 선생님은 모교의 마을 숲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신다고 한다.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생활 중에도 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실지로 18명의 훌륭한 인물을 만들어 내신 선생의 일화와 겹쳐져 보인다.
민족의 큰 스승 다산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4대강 개발로 인해 더욱 피곤해질 한강은 말없이 그저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다.
전날밤 묵었던 양평 숙소앞에서....
위사진: 좌로부터 큰딸(대4), 아내, 둘째딸(대2). 아래사진: 본인과 막내아들(중2)
여담: "아빠는 왜 유독 다산선생을 그리 좋아하시나요?" 아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차를 좋아하셔서 호를 다산이라 정하셨던 선생과 평생 커피를 우려내는 나와 공통점이 있지 않니?"
아들과 딸들 " 후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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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흐름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 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매년 10월 다산유적지에서 펼쳐지는 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행사와 공연 등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축제의 한 마당으로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 우리 문화를 통해 다산 선생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이다.
위치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시설내용 :
다산 정약용선생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7호)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 문도사(사당)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전시물품 :
총58종 304점(동상, 영정, 목민심서등 저서, 거중기, 녹로, 디오드라마, 영상자료 및 조형물)
다산 유적지 입구에 다산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전시 및 동판에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새겨져 있다. 다산 기념관 내에 들어서면 다산선생의 일대기를 디오드라마로 연출하였으며, 생가에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 되어있다. 생가 뒤 나지막한 언덕위에 다산선생과 부인(풍산 홍씨)의 합장묘가 있다.
• 동절기(11월 ~ 2월) : 오전 9시 ~ 오후 6시(입장가능시간 : 오전 9시 ~ 오후 5시)
• 하절기(3월 ~ 10월) : 오전 9시 ~ 오후 7시(입장가능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입장료 무료
• 버스 : 다산유적지입구 하차(도보 20분)청량리에서 167번, 8번(배차간격 10~15분)(청량리 - 구리시 - 덕소 - 다산유적지 - 양수리)
• 강변역에서 2000-1번 (배차간격 20~30분)(강변역 - 구리시 - 덕소 - 다산유적지 - 양수리 - 양평)
• 철도(중앙선) : 팔당역에서 하차 → 양수리행 버스 승차 → 다산유적지입구 하차 (도보20분)(용산역 - 회기역 - 구리 - 덕소 - 팔당 - 국수)용산역에서 국수행 열차(배차간격 1시간 2대)
• 승용차교통안내
• 승용차교통안내
• 인천공항 - 올림픽대로(목동 - 여의도 - 강남 경유) - 미사리 - 팔당대교- 팔당댐 -다산유적지
• 강변대로 이용
• 김포공항 - 행주대교 - 강변대로(마포 - 한남동 - 워커힐 경유) - 덕소
• 팔당댐 - 다산유적지
• 시내도로 이용
• 서울시청 - 동대문 - 청량리 - 망우리 - 구리시 - 도농삼거리(검문소)
• 덕소 - 팔당댐 - 다산유적지
• 남양주시청 문화관광과 (전화 031) 590-2064, 2067)
• 다산유적지관리사무소 (전화 031) 590-2481, 2837)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 에 “육경(六經) 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 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 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 (治人)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 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았다. 관념화된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 은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는 결코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혁명적 사상은 당시의 지배이면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거를 고 대의 전통에서 찾곤 했다. 다산의 개혁론도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현재의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 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가 <논어고금주> 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 · 인(仁) · 도(道) · 덕(德) · 명(命) 등 대부분의 유교 중심적인 명제(命題)들을 다시 해석한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로 해석한 주자와 달리 실행과 실천이 가능한 실학적 사고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한 것이 다산의 경학이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하였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 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 있었다. 그리 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 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찌 옛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 가.”
경세학,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잔반적인 문제의 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 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말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다 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민(民)이 근본이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원목(原牧)이라는 글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생긴 것인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 다(牧爲民有也)”고 결말을 짓고 있다.
또한 탕론(湯論)에서는 “탕왕(湯王)이 걸(桀)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天子者 衆推之而成者也)“고 답한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아랫사람 이 윗사람을 추대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는 것이 순(順)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 :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율기(律己 :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 공을 받듦)”, “애민(愛民 : 백성을 사랑 함)” 세 가지를 벼리로 삼고 있다. 이 모두가 백성 한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다산의 마음이었다. 「흠흠신서」를 지은 것도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 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애민정신, 민본사상은 민생을 위한 각종 대책으로 연결된다. 경자유전(耕者有田), 균산병활 원칙 에 입각한 토지제도 조세제도의 개혁론을 전개했다. 나아가 제도개혁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증대의 방법을 모색한다. 기계와 기술의 도입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하고 넉넉하게
다산은 그의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더 넓은 세계의 기예를 배울 것과 새로운 기예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의 기예나 직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편리함을 도모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병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용맹을 돕고 그 위태로움을 보호할 수 있다고 했 다. 그 밖에도 의술과 백공의 기예가 정교해 지면, 나라가 부유해 지고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21세기에 다시 보는 다산사상
21세기 초입에 왜 다산 정약용인가. 다산을 한국 사상사의 한 고봉으로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지금 새 세기의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 고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그것은 개혁이라는 문맥이다. 한국은 지금 개혁도상국(Newly Restructuring Countries)이다. IT(Information Technology)혁명을 축으로 하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잘 타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세계 각국이 구조조정에 필사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 다.”고 하면 지금의 한국경제에 관한 말 같지만 실은 다산의 문구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다. 흔히 다산을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위대성자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개혁사상의 위대성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는 크고 작은 여러 개혁적 사 고의 개울물들을 자신의 물줄기 속으로 모아 체계화 했고 큰 강물의 출발점으로 이루어냈다. 그러므로 구한말 장지연, 박은식 같은 개혁사상가들은 정다산의 개혁의 강물 로 돌아가 그곳에서 재출발하려 했다. 오늘날 21세기 개혁의 흐름 속에서 다시 다산 이 이룬 강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순수와 정열 그리고 꿈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 남양주시 다산의사상편에서 발췌-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다산묘소이다.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있는 다산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 기념관 옆에 있는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舟橋)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顯隆園)을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 도와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분야별로 기록하여 놓았으며 조금 더 자세한 자료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 컴퓨터를 활용하여 검색할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을 소개하는 약25분 분량의 영상물이 자동으로 상영되고 있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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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잘하고 감다^*^^^^^^^^멋찐가족사진도 잘 보았슴다^*^^^^^선배님은 혹 정치에 뜻을 두고펼치실분 맞습니까?^*^^^^^^행복하셈
쿵~야! 감히 어찌 내가 정치를 하리오. 수신제가도 못한 사람입니다만, 밥을 지을줄은 몰라도 밥맛에 대한 비판은 할 수 있는것! 다산선생 생애 당시 심지환을 앞세운 노론 벽파 수구기득권 세력들의 만행이 요즘의 상황과 어찌그리 흡사하던지, 졸렬한 글을 써 본 것에 불과합니다. 언제 귀국하시면, 여행 삼아 다산 유적지 방문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정치하시면 행송님이 그곳에서 달려와 찍어 드릴려구요?....ㅎㅎㅎㅎㅎㅎ...☆밥을 지을줄도 밥맛을 음미하고 논하실 자격도 충분하신데 뭐 못할게 있으실라구요
귀한 시간 가족들과 오봇하게 다녀오신 시간 뜻깊었겠습니다....어쩜 큰딸은 아빠 작은딸은 엄마 글고 아들은 반반 아주 조화롭습니다..그 춘추에 청바지가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아코 아쉽따~ 요즘은 세자녀 가정에 혜택도 많던데~~~~헤헤~☆갈수 있는 차편까지 소상하게 올려 주셧으니 그분의 얼을 느끼려 가실분이 많지 싶어 집니다..물론 저를 포함하여서요.
요즘 세상에 셋이라면 적은 것은 아니지요. 아직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한심한 녀석들입니다. 투볼 다음에 제대로 스트라이크 하나 건졌다고 하면 여성 비하 발언이래나 어쨌대나...../나이가 들수록 폼이 나야 하는데 원래 생긴것이 까정이니..... 그냥 좋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요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청년 맨치로 아주 멋지십니다.
"민이 근본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다산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민의는 안중에도 없고 지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칼을 휘두르는 현 정치권과는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것 같습니다, "대운하 사업" " 4대강 살리기", 서민들은 밥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예전에 몸담았던 건설쪽을 봐주기 위한 의도? 혹은 대역사를 통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발상? 과연 진실은 무었일까요?
백지로 돌리면 대운하 프로젝트 때 부터 컨소시엄을 구성한 건설사들이 망하고, 하자니 나라 살림이 거덜날 판이고..... 수십조원에 달한다는 비용이 결국은 국민의 혈세와 빚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기 정권에 넘기게 될 부채가 무려 500조에 달한다니....... //그 언젠가... 북상 개천에 산천어를 풀었다는 무지한 행동과 다를바가 없는 돈낭비에 자연훼손인 것을.... 시멘트로 치장하는 것이 무슨 녹색사업입니까? 보를 막지 말고 자연은 그대로! 수승대 보트장인가 하는 곳도 냇물의 돌들을 치우고 보를 막아서 다 버려 놓았더군요. 에~혀!!